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고연희의 옛 그림 속 인물에 말을 걸다(10) 이징 ‘방학도’

고연희

학 같은 마음을 바라노라


그가 학을 풀어 주었다. 

학은 날아오르더니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왔다. 

학과 교감을 나누었던 

옛이야기의 주인공이 한둘이 아니며, 

그 이야기를 그린 옛 그림이 많이 전한다. 

세상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보다 

자연 속 한 마리 학과 마음을 나눈 

인격이 더욱 고상하다고, 존경했던 전통이다.



교감의 표현


작은 비단 그림에 학과 선비가 그려져 있다. 선비는 바위에 앉아 학을 바라보고, 학은 공중에서 선비를 바라본다. 두 생명체가 눈을 맞추는 순간이 화면의 공간에 절묘하게 배치됐다. 선비의 하얀 도포가 검은 바위로 부각되고, 학의 하얀 몸이 어스름한 선염을 배경으로 선명하다. 그 사이로 흰빛 강이 흐른다. 선비와 학을 잇는 시선(視線)은 이 강물과 교차하면서 화면을 가로지른다.


그림 속 붓질은 조선중기 스타일이다. 힘주어 내리친 터치로 시커멓게 그린 바위가 그러하고, 힘주어 찍어 그은 옷 주름선이 그러하다. 그런데 선염이 섬세하고 화면 구성이 단순하다. 거친 붓질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평온이 느껴진다. 이 그림은 고려대박물관에 소장돼 있으며, 조선중기 뛰어난 화원화가 이징(1581∼약 1645)의 작품으로 전해지고 있다. 제목은 ‘방학도’. ‘방학’(放鶴·학을 놓아 주다)의 주제로 그려진 그림들 가운데 학과 인물의 교감이 가장 잘 표현된 작품이 아닐까 싶다. 


방학(放鶴)의 주인공


학을 놓아 준다는 ‘방학’은 학에게 자유를 준다는 뜻이다. 학을 사랑하여 소유를 포기하는 자비다. 옛 문헌을 보면 방학정, 방학지, 방학봉, 방학파 등 이름이 많은데 모두 기르던 학을 놓아 주었다는 역사적 인물과 관련된 명소들이다. 이른 예는 진(晉)의 고승 지둔의 방학정이다. 지둔 스님이 학을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 키우던 학을 풀어 주었다. 지둔의 방학이 후대 시인들에게 거듭 읊어졌다. 다음으로 송나라 학자 장천기가 있다. 장천기가 은일하며 키우던 학 두 마리를 풀어 주면 학들이 어김없이 되돌아왔다. 그의 벗 소동파가 ‘방학정기’를 지어 장천기가 은둔의 즐거움을 알고 그의 학들이 군자와 현인의 품성을 지녔노라 칭송했다. 


방학으로 가장 이름이 높은 인물은 송나라 임포(林逋·967∼1028)이다. 그는 독학으로 학문을 이룬 뒤 항주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들어 20년간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임포를 일러 ‘서호처사’ ‘고산처사’라 한다. 임포는 동자만 데리고 살았다. 그의 집에 매화나무가 많고 학이 있었기에, 사람들은 일러 ‘매처학자(梅妻鶴子)’라 했다. 임포가 매화에게 장가들어 학을 낳았다는 뜻으로, 임포의 고상한 생활을 말해 주는 재밌는 표현이다. 임포는 이른바 ‘매학처사’로 살며 시를 지었다. 임포의 은일 행적과 함께 그의 시는 그 시절 최고 미감으로 추구되던 평담(平淡·평이하고 담백함)과 청한(淸閒·맑고 한가로움)의 좋은 예로, 송나라 학자들에게 높이 칭송됐다. 황제 인종은 임포에게 ‘화정(和靖) 선생’이란 시호를 내려, 임포의 평온함을 기렸다. 중국과 조선에서 수백 년에 걸쳐 임포는 존경과 사랑을 받았기에, 임포를 모른다면 매화 혹은 학을 읊은 옛 한시와 옛 그림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이야기가 널리 인용됐다. 군말을 더하자면 임포는 처사(處士)의 대표였다. 아직 시집 안 간 여자를 ‘처녀’라 하고 아직 벼슬 안 한 선비를 ‘처사’라 이를 때, ‘처사’ 칭호의 대표 인물로 임포가 거론되곤 했다. 


임포의 처사 생활에서 방학 이야기는 상징적인 포인트다. 그가 키운 학은 한 마리였다고도 하고 두 마리였다고도 하는데, 그림에는 주로 한 마리가 그려진다. 임포가 학을 날려 보내면 학이 되돌아왔기에, 임포가 배 타러 나갔을 때 손님이 찾아오면 동자가 학을 풀었다. 임포는 학이 나는 것을 보고 손님이 온 줄 알고 집으로 돌아와 손님을 맞았다. 이만 한 운치를 누가 누릴 수 있겠는가. 훗날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감복해 ‘방학’이란 글을 직접 써서 임포의 처소에 걸게 했다. 임포의 방학정은 항주 서호의 명소 중 하나였다. 


방학이 그림으로 그려질 때 주인공은 대개 임포였다. 중국 역대에 걸쳐 그려진 방학도가 기록에 전한다. 조선에서도 계속 제작돼 15세기 서거정이 ‘임처사방학도(林處士放鶴圖)’를 감상했고, 17세기의 박태보와 18세기의 김창흡이 모두 ‘고산방학(孤山放鶴)’을 보고 시를 남겼다. 조선후기 진경산수화가 정선(1676∼1759)도 ‘고산방학’을 그렸다. 이 그림 속 임포는 동자와 더불어 매화나무에 기대어 학의 비상을 한가롭게 바라본다. 임포의 학은 산을 맴돌아 돌아올 터이다. 


학을 키운 유래 


오늘날 주변을 돌아보면 개, 고양이, 새 혹은 파충류까지 집안에서 키우는 동물의 종류가 다양하다. 하지만 덩치가 몹시 큰 야생조류 학이나 두루미를 가정에서 키우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이 집에서 키우고 싶은 제일 순위 동물은 학이었다. 아니, 선비의 정원이라면 학 한 마리가 유유히 거닐고 있어야 마땅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크고 하얀 모습으로 신선다운 품위가 좋고 은일자의 방학 이야기가 있었으니, 고상한 운치로는 학이 으뜸이었다. 


사실상, 축학(畜鶴) 혹은 양학(養鶴)의 기원이 그리 곱지만은 않다. 중국 위나라 의공의 이야기가 유명한 이른 예다. 의공이 학을 심하게 좋아해 그의 뜰에 100여 마리 학이 들끓게 되었다. 대부의 수레에 의공이 아끼는 학이 올라앉으니 관료들은 걸어 나가야 했다. 사람들은 의공의 학사랑을 원망했다. 당나라 황실에서 학을 키운 것은 그림으로 그려져 더욱 유명하다. 황실의 정원에서 다양한 포즈를 취한 학의 그림이 세상의 칭송을 얻으면서 당나라 장안의 권세가들 사이에 학 키우는 문화가 크게 번졌다. 학의 가격은 매우 비쌌고 양육 방법도 만만치 않았다. 학을 키운다는 것은 중국 황실이나 귀족의 호사스러운 취미였다. 


그러나 학 특유의 우아한 자태와 학에게 부여된 좋은 의미들 때문에, 정성들여 학을 키우는 것이 고상한 취미로 여겨졌던 것 같다. 도가에서는 신선의 상징으로, 유가에서는 현인의 비유로, 오래전부터 학은 특별대우를 받고 있었다. 송나라에 들어 스님과 은일자들이 굳이 학을 키우다 날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 만들어졌다. 방학의 이미지로 상징되는 선비와 학의 교감이 아름다운 장면으로 정착됐다. 


학을 키운 조선의 선비들


“한 쌍의 학을 키웠는데 그 처지를 가엾게 생각하여 올가을에 깃을 잘라 주지 않았더니 여섯 깃털이 모두 장대하게 자랐다. 한번은 날아올랐는데 곧 되돌아왔다. 내가 이에 감동하여 노래를 짓노라.” 


박순(1523∼1589)이 학을 키우며 쓴 시의 제목이다. 날개가 자랐으니 날아가야 마땅할 상황인데 되돌아왔기에, 감격이고 자랑이다. 전설적인 임포의 방학 이야기가 떠올라 좋다. 박순의 자랑 속에는 여러 가지 정보가 담겨 있다. 학을 키울 때 학이 날아 도망가지 못하도록 깃털을 잘랐다는 것. 이것은 학이 자신의 뜰에서만 걷도록 한 비인간적인 조치였다. 박순은 성리학자였고 고위직을 두루 거쳐 영의정으로 15년을 재직한 인물이다. 그렇다면 그의 학은 한양의 저택에서 키워졌을 것이다. 아마도 학의 깃을 잘라 주는 전문직도 있었을 법하다. 


“성급이란 이는 우계 선생 성혼의 종제인데, 학을 키우는 일로 생계를 삼았다. 스스로 칭하기를 ‘훈학옹’(訓鶴翁·학을 훈계하는 늙은이)이라 하였다”라고 이정구(1564∼1635)가 기록했다. 훈학이란 말은 멋지지만, 학을 관리하는 전문적인 허드렛일이었다. 이정구는 대제학을 지낸 학자였다. 한양 관료들 사이에 학 양육 문화가 어지간했던 모양이다. 


상위층의 고급 문화는 저변화되고 확산되기 마련이다. 17세기 충청도 단양으로 고을 살러 갔던 오도일(1645∼1703)에 따르면 “민가에서 학을 기르는 집이 많았다”고 한다. 지방의 선비들까지 정원에서 학을 키웠다면, 전국 도처에서 두루미를 잡아 판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림 속 학, 실제의 학


선비의 뜨락에 학이 서성이는 옛 그림은 흔히 만나볼 수 있다. 학이 그려지면 선비의 정원에 운치가 배가된다. 그런데 그 학이 사실은 날개 깃이 잘려 어정대는 학이라니! 궁금해진다. 무얼 먹여 키웠나, 병에는 걸리지 않았나, 새끼는 낳게 했나. 


학을 키우는 데 관련된 글이 적지 않았다. ‘신은지’에서는, 학을 고를 때 목과 다리가 미끈하고 우는 소리가 맑은 것이 우량 품종이라 했다. 학이 비실대면 뱀이나 쥐, 혹은 보리를 삶아 먹이라 비법을 소개했다. 그런가 하면 학이 전복을 먹으면 죽는다는 주의를 전하는 책도 있으니, 우습다. 


학춤 훈련의 글도 전했는데,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도록 만드는 방법이 서커스단의 동물 훈련과 다를 바 없다. 


학과 나눈 교감, 그 경지를 바라노라


임포의 학은 날개를 자르지 않았고 전문인의 훈련도 받지 않은 자연 상태였다. 자연의 학이라 언제든지 어디론가 날아갈 수 있다. 야생의 학이 돌아온다는 것은 신기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림을 다시 보자. 훌쩍 날아오른 학의 비상이 시원스럽다. 새는 날아야 새 아닌가. 하물며 학이랴. 하늘에서 빙빙 돌고 긴 목을 돌려 내려보는 학의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여 무궁한 의미를 전달하기에, 천 년 동안 갖은 물건을 장식하는 도안이 됐다. 


옛 선비들은 하늘의 학과 벗이 되었던 임포의 정신적 경지를 추구했다. 그러한 임포였기에 그 시의 성정이 맑고 깨끗했다고 보았다. 이징 전칭작에서는 학과 마음을 나누는 선비의 시선이 볼 만하다. 정선의 그림도 그러한데, 그 위에 글이 있어 의미를 보태준다. 




울음이 들리는 듯하고


향기가 퍼지는 듯하지만…


어찌 ‘무성무취’ 같겠는가.


鳴似聞之, 香似播之, 


(명사문지, 향사파지)


曷若無聲無臭. 


(갈약무성무취) 




학은 꾸르르르 멀리서 운다. ‘시경’에서 학의 울음은 현자의 말에 비유된다. 매화향은 은근하다. 성글게 핀 고결함이다. 그러나 그 울음과 그 향기가 아득해도 ‘무성무취’(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다)만은 못하리라. ‘무성무취’란 고요하고 순박함이며, 하늘의 뜻이고 성인의 모습이다. 이는 가장 형이상학적 유가 경전 ‘중용’의 마지막 장에서 중시한 개념이다. 학 울음과 매화향 은근한 가운데 무성무취의 경지를 바라보는 지고함이 임포의 바람이요, 학이 돌아보는 경지다. 세상의 시비 소리와 익힌 음식 비린 냄새로 오감이 시든 것을 옛 선비들도 스스로 염려했을 터이다. 그러나 학의 깃을 잘라 뜨락에 두고 매화 화분을 공들여 키워본들, 임포가 홀로 초가 짓고 추구했던 경지를 누릴 수는 없다. 그 염려와 간절함으로 그들은 ‘방학도’를 펼쳐 보며, 임포의 시구를 다시 읊조렸을 것이다. 


끝으로 임포의 시 가운데 높이 칭송되었던 ‘산촌의 겨울저녁(山村冬暮)’을 소개한다. 요즘처럼 눈 쌓인 겨울날, 시인은 다가오는 봄기운을 음미하고 있다. “산기슭 초가로도 봄기운이 가늘게 오는구나/ 눈 덮인 대나무에 차가운 푸른 싹이 아래서 움트고, 매화에 바람 불어 늦은 향기 떨어지네/ 나무할 때 혼자 가고, 차 끓일 때 바삐 하지 않노라 / 백로 한 쌍이 가끔 들못을 비껴 날아간다.” 衡茅林麓下 春色已微茫(형모림록하 춘색이미망) / 雪竹低寒翠 風梅落晩香(설죽저한취 풍매락만향) / 樵期多獨往 茶事不全忙(초기다독왕 다사불전망) / 雙鷺有時起 橫飛過野塘(쌍로유시기 횡비과야당)”



문화일보 2013.01.11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3011101033130025002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