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영
어느 철학자는 시간을 발견한 것이야말로 인류의 최대 업적이라 한다. 시간의 발견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존재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그동안 잊고 지내다가도 새해가 되면 시간의 존재, 시간의 매듭에 대해 생각해본다.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가는 시간을 막고 나눌 수는 없지만 분명 어제와는 다른 새날을 맞이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새해 새날이 밝았다. 올해는 계사년 뱀의 해. 뱀에 관한 문화적 상징이 다양한 만큼 문학이나 미술에서 뱀의 이미지는 여러 얼굴로 읽힌다. 천경자(千鏡子·1924∼ )화백은 모두가 꺼려하는 뱀을 소재로 그림을 그려 ‘구원의 돌파구’로 삼은 작가로 유명하다.
고흥출신으로 동경여자미술대학을 나와 전남여고, 홍익대교수로 활동했던 천경자는 52년 부산 개인전에서 뱀 35마리를 그린 ‘생태(生態)’라는 작품으로 한국화단에 파문을 일으킨다. 당시는 초혼 실패 후 두 아이를 키워야했던 화가가 뱀띠 연인과의 새로운 사랑으로 가슴을 태우던 시기였다.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화사한 빛깔의 환생을 꿈꾸었던 화가는 꿈틀거리는 뱀에서 삶의 희망을 찾았다. 치밀한 구도와 묘사력, 새로운 리얼리티의 뱀그림으로 화가는 이름을 널리 알렸고 그 후 뱀은 오래도록 그의 아이콘이 된다.
작품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1977년작)는 자신의 22세 때를 회상한 화가의 초상이다. 화가에게 삶은 드라마틱했으나 장밋빛은 아니었다. 우울한 날들의 허무함, 슬픔만이 화면에 가득하다. 역시 뱀이 압권이다. 머리에 화관처럼 쓰고 있는 네 마리의 뱀은 힘이면서 동시에 짐이기도 한 화가의 자식들을 상징한다.
현재 큰딸이 사는 뉴욕에서 와병중인 노화가는 “언제고 뱀을 또 그려 보겠다”는 희망을 놓지 않았다. 계사년을 맞아 뱀이 허물 벗듯 병마의 고통을 벗어던지고 캔버스 위에 뱀을 다시 풀어놓을 노화가의 한 해를 소망해 본다.
-광주일보 2013.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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