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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수문화재의 수난

최영창

2011년 프랑스에서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 외규장각 의궤 297책의 일부가 올해 국민의 호응 속에 광주와 대구에 이어 국립전주박물관을 순회전시 중이다. 지난 4월24일부터 두달 간 국립광주박물관에서 열린 ‘외규장각 의궤’ 특별전에는 이례적으로 12만 명이 넘는 관람객이 찾을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2006년 일본 도쿄(東京)대가 기증 형식으로 서울대에 반환한 ‘조선왕조실록 오대산사고본’ 47책을 놓고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강원 평창 오대산 월정사,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등이 서로 관리권을 다투기도 했다.

그런데 이처럼 모든 해외 환수문화재들이 국민이나 각종 기관의 관심을 받는 것은 아니다. 80여 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뒤 방치돼 있는 유물도 있다. 1995년 12월 말 국내에 반환된 경복궁 자선당(資善堂)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흔적)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왕세자 부부가 함께 거처하는 공간으로 근정전의 동편에 위치해 동궁(東宮)이라고도 불렀던 자선당은 일제가 시정(始政·조선통치) 5년(1915)을 기념하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며 경복궁의 전각을 헐고 민간에 건자재를 팔아넘기는 과정에서 일본으로 반출됐다.

자선당의 부재를 인수해 도쿄로 가져가 조립해 1917년 사설미술관인 ‘오쿠라슈코칸(大倉集古館) 조선관’으로 개관한 이는 일본의 사업가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 ~ 1928)였다. 그는 1918년 이천 오층석탑을 일본으로 옮겨 간 장본인이기도 하다. 흥선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때 재건됐다 1876년 경복궁 대화재 때 불탄 뒤 12년 만에 다시 지어진 자선당의 운명도 기구했다. 1923년 간토(關東)대지진 때 다시 소실됐으며 기단석(基壇石)과 초석(礎石·주춧돌) 등 110t 분량의 유구석 288개만 고국 땅을 다시 밟았다.

당초 자선당 유구를 반환받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은 동궁권역 복원공사를 앞두고 재활용 방침을 밝혔으나 조사결과 화재로 불 먹은 돌들의 손상이 심해 사용하지 못했다. 결국 자선당 유구는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에게 시해된 경복궁 북쪽 건청궁 터와 녹산 사이에 기단부만 정비된 채 자리를 잡았다. 

경복궁에서 가장 후미진 장소인데다 비공개 권역에 위치해 있었지만 2004년 시작된 건청궁 복원공사를 앞두고 출입이 통제되기 이전까지는 자선당 유구를 보는 게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건청궁의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2007년 10월 완공돼 일반에 공개된 이후에도 자선당 유구는 특별 행사 때나 일반 관람이 허용됐을 뿐, 비공개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현재 건청궁에서 자선당 유구와 통하는 쪽문은 항상 잠겨 있다.

경복궁 관리사무소 측은 녹산의 경비 초소 등 청와대 경호문제를 거론하지만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자선당 유구처럼 일제에 의한 경복궁 수난사를 대표하는 유물도 없다는 점에서 문화재청의 무신경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크다. 차라리 일본에 그대로 놔둬 식민통치를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함만 못하지 않았느냐는 자조 섞인 얘기도 들린다.

문화재청이 해외 소재 우리나라 문화재에 대한 조사·연구와 환수를 목적으로 최근 설립한 특수법인인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연내에 조직과 인력 정비를 마치고 내년부터 본격 활동에 들어간다. 앞으로 해외 문화재 환수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더 힘든 작업이 될 것으로 전망하는 전문가들은 문화재 환수 정책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런 가운데 자선당 유구의 사례는 우리 문화재의 무조건적인 환수만이 능사가 아니며 보존과 관리, 나아가 제대로 된 활용이 더 중요한 과제임을 말해주고 있다.


- 문화일보 2012.10.10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210100103383007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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