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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세 살 무릎제자 山

강우방

고려청자 강연회에 한 어린이가 앉아 있었다.
지난 열두 달 매주 빠짐없이 내 강의를 들었다.
사찰·궁궐 답사에도 늘 따라다녔다…
산이와 함께 다니면 모두가 손자인 줄 안다.
산이는깊은 山이 되었으면 한다.
꼭 한 해 전, 다음과 같은 인사말을 나의 연구원 홈페이지를 통하여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방학을 맞아 행복하게 '미의 순례'를 하고 있는 김산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영기(靈氣·우주에 충만한 신령스러운 기운)와 보주(寶珠·여래나 보살이 받들고 있는 신비한 구슬)를 알게 되었어요. 그리고 용과 연꽃을 아주 많이 사랑하게 되었지요. 친하다고 해야겠지요. 그 생명의 기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꿈까지 용꿈을 꾸고요. 아, 정말 기찬 일이에요. 저는 용입니다. 하하! 매일 해 뜨는 아침부터 달 뜨는 저녁까지 저는 영기무늬(불꽃·구름·풀 등의 형태로 신령스러운 기운을 표현한 무늬)를 찾아 열심히 백묘(白描·동양화에서 선만으로 그리는 화법)를 뜨고, 또 채색을 하고 있어요. 장인의 숨결을 고스란히 느끼면서요. 어떨 때 흥이 솟구치면 직접 디자인하기도 해요. 히히….'

의정부시 용현초등학교 13살 5학년생, 이름은 김산(金山)이라고 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답장을 보냈다.

'뜻밖의 편지를 받아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먼 동네 초등학생인데 나의 세계 깊숙이 들어와 '채색분석법'을 계속 시도해 오고 있다니 놀라울 뿐이다. 한 번도 만난 적도 없고 내 강의를 직접 들은 적도 없고, 더구나 초등학교 학생이 최근 다지고 있는 나의 새 학문세계를 체험하고 있다니 믿기지 않아요.'

그 이후 홈페이지에서 산이와 함께 장난치며 신나게 놀았다. 산이는 집에서 연구원 강의 숙제를 하고는 그 답을 보내왔다. 옛날 무늬를 알기 쉽게 채색하는 것인데 그 솜씨가 비범했다. 일단 그려본 그림을 바탕으로 새로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려서 그 창작품을 홈페이지를 통하여 보내왔다.

얼마 후 2월 6일, '고려청자의 화려한 탄생'이란 주제로 기획전 기념 학술강연회가 국립박물관 강당에서 열리게 되었다. 청중이 강당 가득했는데, 맨 앞줄 어른들 사이에 앳된 어린이가 단정히 앉아 있었다. 한눈에 그가 산이임을 알았다. 그 강연은 통념을 깬 내용이었고 도자기가 어떻게 해서 탄생하는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를 다룬 것이었는데 산이는 끝까지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경청했다.

그다음 달부터 그는 이모님의 손을 잡고 이곳 연구원까지 매주 수요일과 목요일 두 번씩 와서 두 시간 동안 강의를 들었다. 의정부에서 여기까지 오려면 지하철을 바꾸어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와야 한다. 왕복 네다섯 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이고 저녁 7시에 시작하니 집에 돌아가면 밤 12시가 되는 날이 많았다. 지난 열두 달 동안 매주 한 번도 빠트리지 않고 경청하였는데 강의 요점을 적으며 때때로 강의 내용을 그림으로 그리기도 했다.

대학교수, 화가, 조각가, 섬유미술가, 미술사 전공 석사와 박사 과정 학생들 틈에 끼어서 듣는 산이의 눈동자는 초롱초롱 빛났다. 책상이 너무 높아서 그를 위한 낮은 책상을 따로 사서 놓아주었다. 장난꾸러기인데도 강의시간만큼은 꼿꼿이 앉아 귀를 기울였다. 건축을 비롯하여 복식·금속공예·회화·조각 등 모든 장르를 강의하는데 그는 모든 것을 소화했다.

그 뒤에는 이모님이 있었다. 산이는 대단한 독서가인 이모님을 따라 함께 다니며 가르침을 충실히 받았으므로 독서량이 상당했다.

산이는 내가 하는 학술 강연들은 물론, 화엄사·선암사·통도사·내소사 등 사찰건축과 창덕궁과 경복궁 등 궁궐건축 답사를 항상 따라다녔다. 지난 여름 경주에서 사천왕사 출토의 작품으로 강연할 때에도 혼자 경주까지 와서 들었다. 지난달 새해를 화엄사에서 맞이하며 지내려고 아내와 함께 갔는데 내심은 건축을 조사하려고 간 것이었다. 산이는 혼자서 광주를 거쳐 화엄사까지 8시간 걸려 찾아왔다. 언덕 위 석탑에서 조각을 살피는데 문득 저 아래 적막한 대웅전 앞에 어린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산아! 빨리 올라와, 지금 해가 지는 광선이 좋아서 음악을 연주하는 서쪽의 비천(飛天·하늘을 인격화한 것으로 법당을 장엄하게 표현하는 형상) 모습들이 분명하지? 지금 빨리 찍지 않으면 금방 해가 지나간단다.' 우리는 함께 설경의 석탑과 석등을 사진 찍었다. 산이는 내가 바라보지 않는 각도에서 찍기도 했다. 하긴 산이가 채색 분석한 숙제를 보고 내 실수를 여러 번 고치기도 했었다.

싯다르타 태자는 참된 깨달음에 이르러 악마의 방해를 받는다. 대지의 신을 불러내어 참된 깨달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물러나겠다고 악마는 말한다. 그때 신이 땅에서 솟구쳐 나와 태자의 깨달음이 올바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산이와 그 이모님이 나에게는 마치 대지의 신과 같다.

산이와 함께 다니면 모두가 손자인 줄 안다. 그러나 70세 노학자에게는 13세의 초등학생 산이는 나의 사숙(私塾) 공간을 넘어서서 이루어진 무릎제자이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여 항상 깊은 산을 마음에 품어왔다. 산이 높다고 말하기보다 깊다고 해야 한다. 산이는 그런 깊은 산이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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