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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익의 태평로] 김달진씨가 잠 못 이루는 사연

김태익

'지금까지 국내에서 가장 많이 작품전이 열린 외국 화가는?' '피카소. 회화·판화·도예 합해 모두 스물아홉 번. 2위는 샤갈 열일곱 번.'

'2000년대 들어 국내에 새로 생긴 화랑은 얼마나 되나?' '2003년 38개, 2004년 49개, 2005년 51개….'

대한민국 미술의 현황과 발자취에 대해 이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다. 그것도 팸플릿·도록·초청장 같은 구체적 물증(物證)을 들이대면서. 홍익대 앞 한국미술정보센터 김달진 소장이다.

김달진씨를 알게 된 것은 20년도 더 전이었다. 어느 날 편집국에 자그마한 키에 선한 얼굴을 한 남자가 찾아왔다. 신문사에 온 전시회 도록과 팸플릿 중 기사를 쓰고 난 것들을 모아 가게 해달라고 했다. 그는 사람들이 오가는 책상 옆에 앉아 한참 도록들을 뒤적이더니 필요한 것들을 쇼핑백에 담아 갔다.

다음 주에도, 그다음 주에도, 1년 후 2년 후에도 그는 변함없이 찾아왔다. 올 때마다 음료수 캔 하나를 선물로 들고서. 그러곤 다른 신문사, 인사동·사간동·동숭동 화랑가로 새로운 자료를 찾으러 떠났다.

고졸(高卒)인 김씨는 1981년 일당 4500원의 임시직 '일용 잡급' 직원으로 국립현대미술관에 들어갔다. 잡지에 실린 세계 명화를 오려 스크랩하는 게 취미였던 그는 이경성 현대미술관장을 찾아가 '청소부라도 좋으니 미술관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1996년 15년 만에 미술관을 그만둘 때도 그의 직급은 경비원과 같은 '기능직 10급'이었다.

김달진씨는 하도 오랜 세월 팸플릿·도록이 담긴 무거운 가방을 메고 다녀 오른쪽 어깨가 처졌다. 그러나 30년가량 모으다 보니 자료가 18t, 수십만 점에 이르렀다. 미술계에선 그를 '걸어다니는 미술사전'이라고 불렀다.

미술 전시회의 주인은 말할 것도 없이 작품이다. 그러나 전시회가 끝나면 작품은 제 갈 길을 가고 결국은 전시를 했다는 기억만 남게 된다. 도록이나 팸플릿은 전시회를 후세에 전하는 물증이자 현장인 셈이다. 김달진씨는 화가들조차 소모품으로 여겨온 전시 팸플릿에서 문화재적 가치를 발견한 첫 번째 미술인이다.

6·25 전쟁이 한창인 1952년 덕수궁에서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한 가운데 '벨기에 미술전'이 열렸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런 것도 김씨가 발굴한 '白耳義(벨기에)現代美術展' 팸플릿이 있기에 알 수 있는 일이다. 이 전시는 해방 후 국내에서 최초로 열린 해외 미술전이기도 하다.

김씨는 2008년 '김달진 미술자료박물관'을 열어 그간 모은 자료들을 누구에게나 무료로 공개하고 있다. 그는 2001년 미술정보지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 어느 정도 성공도 거뒀다.

그런 김씨가 요즘 밤에 잠이 잘 안 온다고 한다. 2010년 문화예술위원회로부터 전세 자금 지원을 받아 그간 모은 자료를 보관하는 한국미술정보센터 문을 열었는데 그 지원 기간이 곧 끝나기 때문이다. 전세 자금을 문화예술위에 돌려주고 새로운 공간을 얻지 못하면 그가 평생 발로 뛰며 모아온 자료들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 그는 '모든 걸 공공기관에 기증해도 좋다. 나는 자료를 보관·정리하는 일만 해도 된다. 그런데 그것도 쉽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한국은 미술비엔날레가 12개, 한 해 아트페어가 38개씩이나 열리는 나라다. 김씨가 그간 해온 일은 국가나 공공기관이 못했던 것들이다. 이제 사회와 미술계가 김씨의 짐을 덜어줘야 할 때가 됐다.

- 조선일보 2013.05.07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5/06/201305060251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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