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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 강세황과 변영섭

노형석

원숭이 같은 하찮은 용모였지만, 200여년 전 조선 예술계를 봉황처럼 날아다녔던 예인이 있었다.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1745~1806?)의 멘토였던 표암 강세황(1713~1791). 글씨, 그림, 비평 등에서 일가를 이루었던 그의 인생은 노년에 더욱 화려하게 꽃핀 ‘인생역전’의 본보기였다. 명문가 후손이었지만, 가세가 기울어 30~50대 시절 배를 곯는데도 시서화만 짓는 백수로 살았다. 환갑에 얻은 벼슬은 고작 능참봉. 절치부심 끝에 60대 중반 과거급제했고, 서울시장 격인 한성판윤을 지냈다. 70살 이상, 정3품 이상만 들어가는 명문클럽 기로소에도 입성했다. 76살에 금강산을 유람하고 시문을 남겼다. 청장년기 시서화 창작으로 갈고닦은 인문교양과 여행·견문을 쉬지 않은 현실 감각이 늘그막 전성기를 만든 힘이었다.
표암의 또다른 미덕은 자의식과 개방성이었다. 직접 그린 노년의 자화상에 ‘가슴에는 두 산의 동굴을 가득 메울 고서들을 간직하고 필력은 다섯 곳의 큰 산을 흔들 수 있구나’라고 썼다. 76살에도 청에 사신단으로 나가 앞선 문화 유행을 탐색했다. 청에서 들어온 서양화법을 소화해 개성 부근 계곡 바위의 명암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영통동구>는 미술사의 걸작으로 남았다.
표암 그림 연구 권위자였던 변영섭 신임 문화재청장의 취임사가 화제다. 취수댐 탓에 물에 잠겨 훼손되고 있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 보존운동에 진력해왔던 그는 18일 취임사에서 반구대를 “긴 세월 물고문에 시달리며 무너져 내리는 국보문화재”라고 한탄했다. 티에프팀을 두고 적극 보존에 나서겠다고 했다. 그의 책 <표암 강세황 연구>는 표암을 “평생 습기, 속기가 없는 글씨와 문인화 경지를 지향했다”고 평한 바 있다. 표암의 당당했던 노년처럼 변 청장이 소신을 끝까지 관철할지 지켜볼 일이다.

- 한겨레신문 2013.03.20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786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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