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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흔적과 욕망_≪퇴적된 유령들≫,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심현섭

노동의 흔적과 욕망_≪퇴적된 유령들≫(2019. 3.22-6.9), 청주시립대청호미술관 전관 


살아 있는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그 흔적을 살피면 그들이 어디에서 왔는지, 무엇을 했는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지를 가늠할 수 있다. 흔적을 남기는 일은 타종으로부터 자신의 종을 보호하는 구실을 하는데 이는 장소라는 구체적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본능의 결과로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싸움이다. 인간이 문화,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온갖 이전투구와 사건들 역시 자신의 영역을 확보하기 위해 흔적을 남기려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현장이다. 작가의 작품제작 행위 역시,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자 하는 과정이다. 작품으로 미술사에 자신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기 위한 작가의 욕망이 새로운 예술 양식과 독특한 재료의 사용을 이끈다. 

흔적을 남기기 위한 작가의 욕망은 제작 행위라는 노동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시대에 따라 그 양상이 변한다. 추상미술의 도래와 함께 작품에 개인의 노동의 흔적은 단순한 형태로 남게 되고, 레디메이드와 미니멀리즘은 개인의 노동을 사회적 노동으로 대체했다. 레디메이드와 추상을 극한으로 밀고나간 20세기 미술사에서 약화된 작가 개인의 노동이 70년대 한국미술에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박서보, 정상화와 같은 한국의 단색화 작가는 그리지 않고 행위를 최소화하고 정신성을 지향하면서도 집착에 가까우리만치 육체노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뜯고 덧입히고 긋는 과정의 반복 등이 드러내는 화면에는 육체의 노동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있다. 미술이 새로운 개념을 향하여 레디메이드와 추상을 극한으로 밀고나간 세계미술사의 끄트머리에서 도외시되었던 노동·노동성이 한국미술에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원죄의 결과로 짊어진 노동에 대한 종교적 몸부림인가.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산업사회의 노동역군의 반영인가. 유교의 현세주의가 이생의 번영을 약속하는 노동에 집착하게 했던 것일까.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에 채 휩쓸리지 않은 변방 국가의 모더니즘 미술에 대한 환상 혹은 이상적 태도 때문인가. 독재 사회에 대한 무저항에 대한 반성 혹은 반동의 행위인가. 이도 저도 아니면 당시 민중으로 불렸던 이들의 노동의 현장에서 벗어난 예술가의 자성적 혹은 자위적 태도 때문인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 적어도 1970년대를 기점으로 한국미술의 한 축을 형성한 단색화에서 작가의 ‘노동’과 그 흔적인 ‘노동성’은 한국미술의 독특성임이 자명하다. 근래에 들어 한국미술에서 노동·노동성은 어느 사이 사라져간 듯 무관심 속으로 들어갔다. 1970년 전태일의 분신으로 드러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고조된 시대적 상황에서 단색화의 탈정치성과 그로 인한 대중의 외면은 한국미술의 중요한 축이었던 단색화를 위축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술을 위한 예술로서 작가의 행위 즉 노동은 주목받지 못했다. 2000년대 들어 단색화가 미술시장을 뜨겁게 달구지만 이는 초기 몇 몇 단색화 화가들의 재발견이었지 후세대의 그림은 아니었다.

이렇게 한국미술에서 희미해졌던 작가의 노동성이 2019년 봄 청주 대청호미술관에서 평면회화, 설치, 영상 등 작품을 통해 부활하였다. 여기서 부활은 지난 날 단색화 자체의 부활이나 회귀가 아니라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끈덕진 노동행위가 하나의 증후로 나타났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세대에 다시 일어난 노동성을 보자면 한국 미술의 끈질긴 노동에 대한 집착과 집요함이 떠오른다. 미술관 온 벽을 문자 드로잉으로 채운 이규식의 <대청호미술관 로비에 글쓰기 드로잉으로 채움>(2019)은 그 반복의 인내와 끈기가 우선 놀랍다. 문자를 채워나가는 과정을 기록한 영상은 기계적이라고 할 만큼 무심해보이지만, 그 반복행위는 어떤 열망을 담고 있다, 이규식은 미술관 거의 전 벽면에 마치 행위만이 남은 극단의 노동자의 자세로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이 흔적의 의미는 무엇일까. 왜 그는 버거운 노동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미술관 벽면에 남기려 했는가. 동물의 경우라면 생존을 위한 영역의 표시겠으나 이규식의 작업은 무수한 반복으로 채운 인간행위, 미술가의 근성과 반복에 대한 본능적 집착이 더해있다. 그 질긴 집착과 욕망이 관람자에게는 경이로울 뿐이다. 경이의 경험은 형태의 모사의 치밀함에 대한 경탄과는 다른, 문자 그대로 그 끈질긴 노동에 대한 놀라움이다. 세밀하게 관찰하고 정밀하게 그려내는 노동의 범례를 이규식의 벽은 다른 형식으로 밀도 있게 전달한다. 이는 미술에서 노동으로 어느 영역을 차지하려는 예술적 욕망에 대한 찬사이다. 노동이든 뭐든 작가의 흔적을 남기려는 원초적 욕망 없이 어떻게 이러한 노동집약적 작업이 가능하겠는가. 이규식의 작업은 집요한 반복의 노동을 통해 자신의 욕망과 흔적을 벽면 구석구석까지 증식하며 영역을 확장한다. 


이규식, <대청호미술관 로비에 글쓰기 드로잉으로 채움>(2019), 사진: 심현섭. 


이규식의 작업이 경쾌한 리듬과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영토 확장의 욕망의 흔적이라면 편대식은 더 어둡고 진한 욕망을 종이에 새겨 넣는다. 그는 과거 한국미술이 추구했던 수행으로서 그리는 행위를 회복하려고 작심한 듯 보인다. 편대식은 단색화가들이 그랬듯이 욕망과 욕망을 제어하려는 수행이 혼합된 치열한 인간 실존의 팽팽한 현장을 선보인다. 이러한 치열한 실존에 대한 감상은 전시 디스플레이로 극대화한다. 이규식의 작업이 인내의 반복에서 오는 끈질김이 있다고 하더라도 열린 공간에 펼쳐져 있어 아무래도 개방적이고 활달하여 재미있다는 느낌마저 주는 반면 편대식의 작업은 콘크리트 벽을 드러낸 어둡고 닫힌 공간에 걸려있어 폐쇄적이다 못해 질식할 것 같은 긴장감을 제공한다. 이 느낌의 차이는 가볍게 흘려 쓴 글씨와 연필심이 부러지도록 꾹꾹 눌러쓴 글씨의 차이 같으나 노동의 질긴 느낌은 공유한다. 퇴적한 시간을 드러내고 작은 공간에 시간에 깃든 노동과 열정을 붙들어 맨 것처럼 팽팽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짓눌림의 검은색은 숨이 차다. 큰 스케일과 장지의 질긴 무게감은 확연히 무겁다. 그 무게와 짓누름의 원인은 편대식이 연필을 가지고 1년 동안 채운 사방으로 둘린 검은색을 보면서 일어나는 왜? 무엇 때문에? 이런 광기를? 이라는 존재론적 질문들이 보는 내내 머리와 가슴을 압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검은 색은 우선 작품 자체 혹은 작품에 담긴 작가, 이 둘은 결국 작품이다, 를 보게 한다. 이것이야말로 미술작업이 주는 매력이자 아직 미술이 종말에 이르지 않은 증거이다. 미술은 자아성찰, 혼돈과 불쾌감 등 여러 가지 감상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미술은 다른 무엇보다 보이는 것 그 자체에 몰입하게하고 환상을 일으키는데 목적이 있으며 작가는 그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바치는 매개자이다. 편대식의 <Moments(순간)>(2019)은 꽉 채워진 검은색의 종이 앞에 관람자를 멈춰 세우고 무수한 반복과 질긴 노동의 순간에 몰입하게 한다. 관람자는 거기에 감탄함으로써 순간, 우선 세상과 나를 잊는다. 이로서 그 어두운 방은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된다. 이것이 없다면 혼란한 세상을 사는 우리가 어디에서 안식을 찾을 것인가. 안식 후의 자기, 세상의 모순 등을 발견하는 것은 작품의 몫이 아니라 관람자의 몫이고 선택이다. 나의 경우 몰입과 경탄의 감상이 지난 며칠 후 복기의 시간에야 흔적을 남기기 위한 동물적 혹은 본능적 집착에 대한 내 안의 결핍, 노동의 진정성을 느꼈다. 


편대식, <Moments(순간)>(2019) 전시장면, 사진: 심현섭. 


조소희의 설치작업 <Daecheongho Museum of Art where …>(2019)은 가늘고 연약한 실로 그물망을 만들어 일견 가볍게 흔들리는 듯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세밀하고 촘촘한 망의 씨·날줄을 보면 가벼웠던 실은 천근의 무게로 다가온다. 가벼움이 무거워지는 순간의 놀라움과 당혹스러움은, 그 순간의 찰나에 떠오르는 정밀한 손길로 한 땀 한 땀 실을 떠갔을 작가의 반복적인 노동과, 노동에 집중하는 동안 망처럼 복잡하게 얽혔을 작가의 신경세포 때문이다. 조소희의 실은 촘촘한 얽힘으로 수없이 많은 관계를 암시하는 동시에 현대 사회의 가벼운 관계를 지시한다. 가벼운 실이 무거운 사색의 오브제로 탄생하는 역할 또한 작가가 온 정신을 집중한 반복적인 노동이 감당한다. 오랜 시간 땀과 정성을 들인 작업이 가볍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작가는 어떤 생각이 들까. 자신이 밝히듯 “바스러질 듯이 가벼운데 반복이 만들어낸 결들의 무게에 압도”되어 만족할까. 이정도의 노동은 별 것 아니라는 듯 미세하게 살랑거리는 작품은 작가가 지시하는 주제를 오히려 더 무겁게 하고 “공간의 특유한 가벼움과 시간의 육중한 무게가 등가로 공존하는 시공(時空)의 이미지”의 구현에 대한 욕망의 심원을 드러낸다. 바람처럼 가벼운 듯 색으로 위장하고 영역을 차지하지 않은 것처럼 듬성듬성 공간을 관통하지만 가벼움과 반복의 노동을 통해 차이를 구현하려는 작가의 욕망은 어느 사이 관람자의 감상을 지배한다.


조소희, <Daecheongho Museum of Art where …>(2019) 전시장면,  사진: 심현섭.  


자연과 인간의 만남의 시간을 축적한 김윤수의 <바람이 밤새도록 꽃밭을 지나간다>(2016), 반복적 행위로 개인과 사회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김윤경숙의 단채널비디오 <망상의 침몰>(2012), 이수진이 도시의 사물들을 통해 흘러온 도시화의 시간에 대한 기억을 소환하는  <Glass Landscape ver.3: 함께함을 위한 앙상블>(2019) 역시 시간과 공간, 노동의 축적을 보여준다. 이들의 작업에서 보이는 욕망과 반복적인 노동의 흔적이 한국미술의 과거를 함의한 현재의 현상일 때 이들에게서 한국미술의 미래를 엿볼 수 있을 것인가. 이들 작업은 향후 한국미술의 특성으로 더욱 자리 잡을 수 있을까. 70년대 단색화는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 세계미술계에 한국미술의 특성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새로운 세대의 반복과 노동이 과거 한국미술의 맥을 이으면서도 차별화한 노동성을 제공한다면 한국의 특성은 좀 더 명료해질 것이다. 이의 성사여부는 노동의 흔적을 남기기 위한 행위를 얼마나 오래 지속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고, 그 지속가능성은 영역을 확보하기 위한 미술가로서 욕망의 양이 결정하지 않을까. 대중의 의식과 시장 시스템 등 토대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말은 가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작가의 재능과 헌신에 제작, 감상 등 미술의 많은 부분을 맡길 수밖에 없다. 대중의 관심과 시스템 구축이 충족할 때 그만큼 작가의 자유는 손상한다. 어차피 자본주의 사회에 자리 잡은 미술 영역에 공짜 점심은 없다. 작가에게는 자신의 육체, 정신의 힘으로 흔적을 남기려는 동물적 감각 혹은 본능적 야수성을 견지해야 하는 보루의 역할이 있다. 작가의 운명이니 십자가라는 말은 이 지점에서 의미 있는 언설이 된다. 작가가 자신의 감각과 본능, 무엇보다 육체적 노동 외 다른 것에 자신과 작품을 맡길 때 창조의 자유, 질은 그만큼 하락할 개연성이 크다. 그러나 이 또한 선택의 문제로 자유이니 시비할 수는 없다.  

≪퇴적된 유령들≫(2019) 전을 통해 새로운 세대가 펼쳐 보인 한국미술의 노동성을 발견한 감상과 작가의 근성을 발견한 쾌감은 대청호나 주위를 둘러싼 신록의 검푸름보다 더 짙은 흔적을 관람자에게 남긴다. (20190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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