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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의 타락과 미술: 한국미술의 탈역사화와 장소의 관념화

심현섭

장소의 타락과 미술: 한국미술의 탈역사화와 장소의 관념화  

I.
미술은 한 번도 장소를 떠나본 적이 없다. 삶의 터전은 미술의 처음 장소였다. 거기는 동굴이었고 식기였으며 의복이었다. 무기와 몸에도 미술은 터를 잡았으며 수호의 상징인 솟대가 마을을 장식하였다. 미술이 그 시원에서부터 장소와 밀접한 관계에 있다할지라도, ‘장소’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논의된 시기는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이다. 화이트 큐브(white cube)에서 은은한 조명 아래 아우라를 풍기며 대중의 경외를 기다리던 미술은 20세기 후반 들어 다시 삶의 터전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해프닝, 퍼포먼스, 공동체 미술 등 다양한 형태로 공공장소에 펼쳐지는 미술은 원시의 그것처럼 인간의 삶에 밀착하려는 시도로 회귀함을 의미한다. 미니멀리즘의 교훈으로부터 출현한 장소-특정적 미술은 처음에는 장소에 대한 현상학적이고 경험적인 이해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현상학에 기초한 미니멀리즘은 작품이 장소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품을 보여주는 장소에 함의된 제도적 틀에 저항한 미니멀리즘은 전시장소의 물리적 매개변수에 점점 더 의존하지 않는 방향으로 변화했다. 이는 자연스럽게 미술이 삶의 생활권에 밀착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술의 장소가 생활공간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러나 장소의 제도, 전통 등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미술의 장소는 물리적 현전 대신 이슈와 담론 자체가 장소가 되는 쪽으로 나아갔다. 장소의 영토적·물리적 성격은 소외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탈역사화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명명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에서 장소는 실제적이고 물리적인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회적 이슈와 담론이 핵심적인 장소의 조건이다. 장소는 어느 지정된 정착지가 아닌 이슈를 따라 유목하는 형태로 전환하였다. 물리적인 장소 대신 시대적 이슈를 매개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며 유목하는 장소는 더 이상 어느 일정한 장소에 매이지 않았다. 레이시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 공동체를 구현하는데 실패했다고 보는 권미원은 한 발 더 나아가 “장소 미지정”, “장소해제(unsiting)”를 주장하기에 이른다. 현실적으로 공동체의 실현이 불가능하다면 구체적인 장소의 지정을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보는 견해이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장소’의 중요성을 인식하였지만 점차 물리적 공동체의 실현이라는 목표(유토피아)를 상실하고 ‘탈장소화’ 혹은 ‘탈영토화’의 늪에 빠지고 만다. 이렇듯 현상학적, 사회제도적, 담론적 장소의 계보를 거치면서 미술의 장소는 다양하게 분화하기 시작했고 이 과정에서 물리적인 장소는 필수요소에서 가변요소(물리적 장소가 아니어도 된다)로 축소되었다. 동시대 미술 담론에서 물리적 장소의 해제는 팽배한 현상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미술의 장소가 인간의 역사, 즉 정치, 사회, 경제적 토대로부터 이탈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리적 장소의 약화는 장소에 대한 깊은 천착과 장소의 역사성에 기반을 둔 미술, 즉 사회구성원들에게 정치적 안정과 사회경제적 전망을 제공하는 미술의 중요한 가치를 포기하는 것일 수 있다. 하이데거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인정하든 안하든– 창공에 꽃 피우고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우리의 뿌리를 땅으로부터 일궈내야 하는 식물”이라고 했다. 하비(D. Harvey)는 이처럼 창조적인 예술작품의 번성이 자연 토양에 달려있음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뿌리를 잃어버리면, 예술은 이전의 자신의 모습이었던 의미 없는 풍자(caricature)로 전락한다. 따라서 문제는 의미 있는 뿌리가 정착할 수 있는 생명력 있는 고향을 회복하는 일이다. 장소 건설은 뿌리를 회복하고 거주의 예술을 회복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 근현대미술도 장소가 관념화하면서 탈역사화 하는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에서 사회 현실을 반영하는 미술은 위축하였다. 그 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한국미술사를 서구미술 사조에 대입하는 분석과 달리 한국의 시대상황, 현실과 연동하면서 변화해온 미술의 궤적 속에 내재하는 미술과 역사의 상관관계를 탐색할 필요가 있다. 본고는 그 시도의 일부이다. 미술은 개인적인 내면의 진술을 우선하는 경우가 있고 동시대의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역사적 태도를 우선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태도는 사회·정치에 대한 참여와 비참여 혹은 무관심 등과 같이 개인의 삶의 양태를 구분하기도 하고, 구상과 추상 등과 같이 개인이 취하는 미술의 기법, 양식에도 영향을 끼친다. 이러한 삶의 양태와 미술의 형태들은 개인에게는 불가피한 선택의 문제일 수 있지만 동시대 전체를 봐서는 함께 어울려 공존하며 균형을 이룰 때 훨씬 더 창조적이고 발전적일 수 있다. 오늘날 한국미술이 개인적인 내면의 진술을 바탕으로 한 관념적이고 개인적인 성향으로 기울어 있다고 보는 나는 미술과 역사, 리얼리즘의 약화와 탈역사/사회적 무관심이 투사적 상관관계에 있다는 관점으로 한국 근현대미술의 탈역사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한국미술의 균형을 도모하고자 한다. 

II.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서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했던 해방 공간에서부터 80년대까지 한국 미술은 사회정치적 변혁의 꿈을 잃어버리지 않았다. 이념의 분단 상황에서 사회적 리얼리즘을 추구했던 일단의 화가들은 현실세계의 변혁을 꿈꾸며 미술의 관념성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김환기, 유영국 등 일본 유학파들이 20세기 초 서구 아방가르드 미술의 동향을 실험하고 추구했다면 이쾌대와 같은 사회적 리얼리스트들은 양식적으로 낭만주의, 역사화 성향 등이 혼재하는 리얼리즘을 취했다. 당시 리얼리즘은 미술이 현실에 대한 이상을 포기하지 않은 흔적이었다. 1970-80년대 이러한 역할은 민중미술이 담당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강한 바람을 타고 한국 미술에 유입될 때 사회 참여적 시선을 견지한 민중미술은 한국 미술의 탈역사화를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가 주지하다시피 한국 미술의 균형의 추는 80년대 말 포스트모더니즘으로 기울었고, 미술의 탈역사화는 가속하였다. 구체적인 장소 대신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장소로 넘어간 한국미술의 역사는, 정치적 배경과 미술 권력의 역학 관계, 이에 따른 미술 사조의 변화가 장소의 상실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해방 이후 한국 미술의 중심은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었다. 하지만 1950년대 후반, 서구 모더니즘의 물결을 타고 추상주의가 급부상하면서 한국 화단의 세력 지형에 변화가 이루어졌다. 추상미술의 확산은 당대의 유럽 앵포르멜, 미국 추상표현주의 등을 수용하면서 이루어졌으나 무엇보다 60년대 한국 사회의 혁명적 상황에서 강력한 현실적 추동력을 얻었다. 미술계는 “4·19혁명, 5·16쿠데타 세력과 일종의 과거 단절이라는 점에서 혁신성을 공유하며 미지의 유토피즘을 추상미술로 구현하고자 했다.” 친일 화가 파동 또한 추상의 세 확장과 관련 있다. 광복 이후 가장 큰 사건으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친일 화가 파동은 대부분 구상계열에 속했던 선전(조선미술전람회) 출신의 입지를 위축시켰다. 이경성 등은 비슷한 시기에 선전 참여 작가들과 친일파를 동일시하면서 그들에 대한 강한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 1980년대부터 근래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제기된 친일 청산 문제는 구상화에 대한 관심이 친일로부터 자유로운 월북출신 작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하였고, 이 점 또한 남쪽 사실주의 구상화가가 소외된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이인범에 의하면 “해방 후 우리 미술계는 강력한 국제주의의 영향력과 지배권역에 편입되고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배태하고 있다. 그는 그 전개 현상으로 앵포르멜과 추상화의 국전 진입, 군사정부의 개입 등과 함께 리얼리즘 미술의 북한 이전을 듦으로써 리얼리즘의 상실 혹은 위축이 한국 미술의 손실이었음을 밝힌다. 전후 앵포르멜은 기존의 미술권력에 도전장을 던지는 반제도적 성향을 보였지만, 김미정의 지적대로 “4월 혁명을 고비로 군사정부(권력)의 반민주주의적인 균열을 인식하지 못함으로써 급속히 산화”하였고, 그 원인은 “군사정부의 후원과 넓어진 발표 공간, 세계무대로의 진출을 통해 해소되고 완화된 이후의 장식화한 양상”이었다. 이인범은 “1970년대 미술이 유신정권이라는 혹독한 정치 사회적 현실로부터 눈을 돌려 ‘한국적 미니멀리즘’이라는 국제주의와 민족주의의 관념적 제휴로 치닫게 된 것도 이러한 시대 인식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 이라고 하면서 추상미술의 현실도피를 지적한다. 현실을 바라보는 시선이 약했던 추상미술의 세력화는 한국 미술이 개인적 관념화로 가는 길을 재촉했다.   

추상미술이 뿌리를 내리는 과정에서 한국미술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위축과 함께 그 안에 함축하고 있던 사회정치적 시선을 잃어버린다. 이는 곧 미술에서 사회정치적 함의가 이탈해가는 탈영토화, 탈역사화의 과정이었다. 추상미술은 7-80년대에 이르러 주류를 형성하며 구상계열의 민중미술과 더불어 한국 화단의 두 축을 이뤘다. 정권과 대립한 민중미술이 대중, 특히 젊은이들과 재야의 인기를 끌고 대중화되었던 반면 추상미술은 상대적으로 정권과 유착하여 정치·문화적 실리를 취했다. 그러나 민중미술이 가지고 있는 폐쇄적이고 정파적인 성향은 한국의 리얼리즘을 포괄하고 대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그런 이유로 추상미술에 비해 그 세력은 점차 위축했다. 민중미술의 정치성은 미술이 가지고 있어야 할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람시(Antonio Gramsci)가 말하는 문화헤게모니와 같은 패권주의적인 성격을 제어했을 때의 일이다. 예술은 언제나 기득권과 부정에 저항하는 일을 사명으로 하는 숙명적인 정체성을 가진다. 따라서 권력을 의미하는 헤게모니와 예술은 양립할 수 없다. 이 둘이 동시에 성립하거나, 이를 시도하는 일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경우에서 보듯 예술이 정치에 예속될 경우에만 해당한다. 이런 의미에서 민중미술의 일부 작가 및 이론가의 권력지향적 태도는 민중미술의 지속적인 성장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훗날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미술계의 주요 요직을 장악하면서 그들이 보여준 패권주의적 태도에서 이를 추인할 수 있다. 그것은 행정 권력의 장악이었지 미술사조로서 그 정신과 양식의 부활은 아니었다. 후에 나타난 포스트민중미술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개인의 열망과 자의식이 강조된 나머지 민중미술이 가졌던 절실한 사회참여의식과 저항정신이 약화된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미술, 특히 그들이 가졌던 희생적인 참여 정신과 독특한 표현 양식은 한국의 사회적 리얼리즘의 정수로서 발전·계승할 필요가 있다.

지금 와 생각하면 민중미술이 가졌던 절실했던 사회변혁의 시선과 내면적 탐구와 형식미를 추구한 추상미술의 상호조합이 아쉽지만, 당시 양 쪽의 대립은 매우 심각한 상태였다. 단색화를 중심으로 추상미술이 미술의 주류로 자리 잡아가면서, 초기에 앵포르멜이 보였던 사회에 대한 관심과 혁신의 열정은 점차 약화되었다. 이우환 등은 근래에 당시의 단색화가 시대상황에 대한 저항정신이 깃든 미술운동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한국의 단색화가들의 시대정신의 결여는 부인할 수없는 약점이다. 6-70년대 실험미술이 일상적 오브제를 사용하고 관객의 참여를 유도하는 등 사회 비판적 요소가 있었으나, 미술내부의 전위와 전복에 치중한 나머지 현실 인식과 사회 참여의 역할에서는 한계를 보였다. 이런 현상은 80년대 주류미술계의 소장파에 의해 전개되었던 소그룹운동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메타 복스, 난지도 등이 다양한 소재를 통해 현실 비판적인 전시를 시도했지만 담론의 은폐, 모호함, 개인의식의 분출 등 당시 밀물 듯이 들어온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같은 시기 민중미술의 소집단 운동에 비해 소극적이고 관념적인 저항에 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요원할망정 꿈꾸고 흥분했던 유토피아를 향한 열정, 순수와 참여 사이의 예술적 갈등이 치열한 시대정신으로 수렴되었던 미술의 절실함은 전반적으로 옅어졌다. 사회적 관계 속의 존재 대신 개인의 시각언어와 형식, 행위 자체에 의미를 두는 방향으로 미술은 전개되었다. 이렇게 한국미술에서 관념화와 탈역사화는 그 영역을 넓혀갔고 그것은 미술에서 사회 현실에 대한 비판, 시대정신이 사라져가는 발자취이기도 했다. 

80년대 한국에 유입된 포스트모더니즘은 미술의 구체적인 역사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심을 더욱 약화시켰다. 서성록에 의하면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탈(脫)모던의 성격을 띤다. 이로써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사회실천력을 중시하는 반(反)모던의 입장에 있는 민중미술과 구별되면서 사회실천력의 한계를 드러낸다. 서구미술사에서도 모더니즘은 한 개인이 스스로의 힘으로 생성할 수 있다는 주관성으로 인해 감상주의, 초월적 보편성이라는 신비주의 등으로 함몰하는데 이로써 모더니즘은 합리적이고 유토피아적인 야망들을 잃어버리고 사회에 대한 비판과 공격을 하지 못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이행한다. 이러한 과정은 서구미술사 또한 서성록이 말한 탈(脫)모던의 성격이 있음을 보여준다. 이 견해는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뿌리를 1968년 이후의 사회에 대한 환멸과, 자본주의를 발판으로 ’과소비적인‘ 생활양식을 누리는 상부 계층의 기회의 조합으로 파악하고, 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가지고 있는 사회실천력의 한계의 원인을 찾는 캘리니코스(A. T. Callinicos)의 의견과 일맥상통한다. 리오타르(Jean-Francois Lyotard)에 따르면,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거대 담론’(마르크시즘, 리얼리즘, 전제정치)이 붕괴되고 대신 ‘작은 담론’(탈이데올로기, 다원주의, 미세정치)이 그 공백을 메우게 된다. ‘작은 담론’은 통일성, 전체성, 형이상학을 인정하지 않는다. 거기에는 비폭력적 화해와 상대성이 있을 따름이다. 비폭력적 화해와 상대성은 차이와 다양성을 수용하는 수단은 되지만 무차별적인 다원주의를 낳아 사회실천력과 의지를 약화시킨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인 ‘모사(simulation)’ 역시 사회실천력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모사는 “어떠한 현실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다. 더 이상 주체도, 초점도, 중심도, 주변도 없고 단지 순수한 굴곡과 순환적인 굴절만이 있을 뿐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실의 결여와 시대상황에 대한 부적절한 대처로 사라질 것이라는 혹독한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러시아 구축주의, 독일의 신즉물주의 등 모더니즘 시대의 예술과 삶의 일치 혹은 포섭을 꿈꾸었던 아방가르드의 사회실천력과 비판정신이 결핍한 상태의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이 80년대 한국 미술에 유입된 것이다. 

그러나 80년대 한국미술은 사회 참여의 민중미술이 포스트모더니즘의 정치적 무관심과 무저항성을 일정정도 보완하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을 유지해나갔다. 1979년, <현실과 발언>은 미술이 “유한층의 속물적인 취향에 아첨하고 있거나 또한 밖으로부터의 예술 공간을 차단하여 고답적인 유희를 고집함으로써 진정한 자기와 이웃의 현실을 소외, 격리시켜 왔고 심지어는 고립된 개인의 내면적 진실조차 제대로 발견하지 못했다”면서, 현실의 모순을 직시하고 발언하는 미술을 선언하였다. 이들과 함께 두렁, 임술년 등이 독재정권의 핍박 속에서도 소집단으로 활동하며 사회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펼쳤다. 이후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를 결성하지만 이는 오히려 소그룹 운동이 해체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민중미술은 모더니즘/포스트모더니즘 계열과 치열한 논쟁을 벌이는 등 대립관계에 있었지만, 한국 미술 전체를 봤을 때는 두 축이 공존함으로 미술의 역할, 즉 사회참여와 미적양식의 역할을 분담하여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민중미술은 급격히 왜소해진다. 김영삼 정부의 출현으로 사회 참여의 동력이었던 독재정권이 사라진데다, ‘주체’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동시대 미술담론을 수용하지 못하고 이론의 단편성을 벗어나지 못한 점, 시대적 흐름에 대한 대응의 실패, 예술성의 한계, 노선에 대한 내부의 축적된 갈등이 그 이유일 것이다. 이로써 포스트모더니즘은 별다른 견제 없이 한국 미술계에 확장되면서 당시 서성록이 우려한 상황을 심화시키지 않았나싶다. 서성록은 “다양성은 민주사회의 문화풍토의 조성이라는 측면에서 더없이 중요한 계기지만, 그것이 작가의식의 빈곤과 맹목적인 탐미의식의 조장, 상업주의와의 결탁, 특히 젊은 세대에서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키치(kitsch) 성향 쪽으로 기울면서 한국미술의 시계(視界)를 한층 불투명하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바르트, 들뢰즈, 푸코, 데리다 이후 상대성을 근거로 펼쳐지는 동시대 이론가들의 별 차이 없는 형이상학적 논리의 세례 속에서 한국 미술은 관념화와 탈역사화의 길을 걸었던 것이다.  

한국 미술이 사회참여의 시선을 유실한 데는 사회·정치적 배경도 한몫했다. 1961년 5.16정변 후 군사정권은 계엄선포로 국민을 억압했다. 박정희 정권의 경제개발 정책, 제1, 2차 5개년 계획 기간(1962-71년)동안 농민층의 분해가 일어나고, 늘어난 이농민의 저임금노동력화로 도시의 노동인구가 급증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수출 주도형 고도성장정책에서 소외된 기층의 미조직 노동자에 의한 밑으로부터 저항과 운동이 활발해졌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시장 봉제노동자 전태일이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했다. 전태일의 분신은 당대 지식인에게 충격을 주면서 개발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되었던 농민과 노동자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증폭시켰다. 이러한 시대배경 아래 민주화운동의 현실적 실현과 민중의 정치경제적 해방은 동일시되었다. 지식인들이 추상적인 저항에서 벗어나 민중문학, 민중신학 등으로 현실참여를 구체화하였고 미술도 민중을 위해 붓을 들었다. 민족미술, 현실참여의 기치를 든 <현실과 발언> 등이 결성되었다. 90년대 초까지 군사 정권의 독재가 이어지면서 민주화운동은 농민, 노동자, 여성, 환경, 대중문화 등 다양한 영역으로 분화하면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그러나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면서 상황은 바뀌었다. 민주화가 정착단계에 이르고 가난하고 핍박받던 민중이었던 노동자가 중산층 계급으로 진입하는 등 사회는 점차 안정기에 들어섰다.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우루과이라운드(UR) 협상 체결 등으로 세계화, 신자유주의, 농촌과 농민, 식량안보 등의 문제가 부상하면서 환경과 농촌운동이 지역단위 중심으로 확산되었지만 전반적인 사회분위기는 국가나 공동체, 이웃보다는 개인과 가족이 사고와 행동의 중심이 되는 개인주의로 이행해가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과 함께 미술 또한 80년대까지 유지되어온 사회 참여적 시선과 저항성이 약화되면서 개인주의를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III.
지금까지 나는 1960년대에서 1990년대에 이르는 한국미술의 탈역사화 과정과 원인을 밝혀보고자 추상미술의 득세가운데 약화된 사회적 리얼리즘, 포스트모더니즘의 유입, 사회·정치적 배경 등을 살펴보았다. 탈역사화와 장소의 관념화, 추상과 포스트모더니즘의 과잉은 리얼리즘의 사회적 시선과 모더니즘의 저항성을 상실한 채 자기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폐쇄적 사유를 기본으로 한 미술의 출현을 예고한다. 이러한 미술은 거주하고 뿌리내려야 할 우리의 역사적 장소에 사회·문화적 데카당스를 낳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비민주적이고 획일적인 권력, 물질만능주의, 환경파괴, 생명경시, 경쟁적이고 폭력적인 먹이사슬, 절제를 잃어버린 이기주의 등은 문화적 방기의 소산물일 수 있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미술은 무엇을 표현하고 말해야 하는가? 

예술의 사회적 기능을 부정하는 유미주의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 기반을 둔 초현실주의나 뉴미디어 아트의 기술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등 모든 미술은 가치가 있다. 단지 나는 한국미술의 탈역사화 과정을 되짚어 봄으로써 한국미술이 근현대사의 과정에서 ‘탈(脫)’한 역사적 관심을 회복하여, 정치사회적으로 안정된 토대를 만드는 미술이 공존하는 미술환경의 중요성을 환기하고자 한다. 미술 자체로서 사회를 변혁시킬 수는 없다. 사회변혁은 정치, 법, 기술, 문화 등 당대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술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의 안정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사회구성체로서 중요한 문화영역이다. 구체적인 삶의 장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현실참여적인 미술의 회복은 오늘날 한국미술 현장의 균형과 역사적 삶의 토대의 안정화에 기여할 것이다. 

미술평단 2018 가을호(제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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