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2장. 성숙기_홍지동 이전까지(1): 김달진의 시대를 열다

심현섭

2. 성숙기_홍지동 이전까지

 

김달진의 시대를 열다

 

1996, 김달진은 15년 동안의 국현 자료실 생활을 접고 가나화랑 부설 <가나미술문화연구소> 자료실장으로 직장을 옮긴다. 국현에 속한 공무원으로서 전시장을 출입하고 자료를 수집하는 일에는 큰 도움을 얻었으나, 경제적인 현실은 또 다른 문제였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져야 할 부분이 커져감에 따라 국현에서 수령하는 기능직 10등급의 박봉은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다가왔다. 그는 안정된 직장을 찾아 나섰다. 그러던 중에 가나아트의 이호재 회장을 만난다.

 

         기능직이건 그건 별 외의 문제고, 사람들이 국립현대미술관이 신분이 보장되고 공무원이고. 그런 거는 좋은데, 내면을 들여다봤을 때는 거기서 받는 그거(월급) 가지고는 감당을 못하니까 목사님하고도 상의하고 그랬죠. 좋은 직장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가나화랑, 현대화랑, 선재아트센터 등 사립미술관이나 화랑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다가 이호재 회장님을 만났고, 그 당시 이호재 회장이 지금 인사동 SK 허브 지하에 가나화랑이 있을 때, 그 건너편 하나로 빌딩에다가 가나미술문화연구소를 만들었었어요. 가나미술문화연구소를 만드는데 거기에 자료실장으로 와 달라, 그러면 좋겠다하신 거죠.

 

이호재 회장으로서는 김달진이 그동안 월간미술이나 가나아트를 통해 발표한 사실에 근거한 취재 능력과 자료의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고, 김달진 또한 안정적인 직장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김달진은 19961, 국현을 그만두고, 그해 2월 곧장 가나로 출근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가나미술문화연구소>에서 활동은 생각했던 만큼 원활하지 못했다. 여기에는 그 즈음 가나화랑이 미술연구 쪽보다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 가나아트센터와 미술 시장 진입을 위한 서울 옥션 등의 설립 쪽으로 설정한 사업의 방향이 영향을 미쳤으리라 본다. 김달진은 510개월만인 200111, 가나연구소 자료실 근무를 마친다.

 

             2001년에 가나 회장님이 말하자면은 유럽 여행을 보내준다고 그렇게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때에는 시떼라고 있었어요. 지금도, 가나가 지금도 가지고 있나? 프랑스 정부에서 시떼라는 공간을 10년인가 20년인가 각 나라별로 배정을 해줬어요. 큰 건물에 방을. 그래서 그것이 삼성문화재단에 있었고, 가나에 있었고, 동아대학교에 있었고, 한국에 네 개가 있어요. 그러면 거기에 일종의 지금 이야기로 하면 레지던시 프로그램으로 작가를 선정해서 6개월씩 보내주었어요. 그곳에서 작가는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장이 있고, 그 프로그램이 가나가 없어지고 지금도 삼성문화재단이 시테라고 운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서 그것을 운영을 하면서 사람이 6개월 아니면 1년간 나가서 공부를 하고 들어오고 그런 게 약간 공백이 생겨 비어있었나 봐요. 그때 처음으로 비행기를...그전에 일본이나 갔었나? 처음으로 유럽을 간 거예요. 2001년인가 굉장히 나이 들어서 프랑스라는 데를 처음 간 거지. 그때 한 달간을 일종의 위로, 포상, 그런 거로서 여행을 보내준 거예요.

 

가나화랑의 입장에서 보면 연구소를 폐쇄하는 구조조정을 하면서 일종의 위로 휴가를 보내준 셈이었다. 가나화랑을 제2의 평생직장으로 여기고 일한 김달진으로서는 여간 섭섭한 일이 아니었으나, 그는 유럽여행을 통하여 미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는 동시에 전화위복의 계기를 마련한다. 가나화랑 이호재 회장의 배려로 가나아트센터 한 쪽 방에 <김달진미술연구소>를 개소함으로써 오늘날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의 기틀을 닦은 것이다.

 

         어느 정도 독립될 때까지 도와주겠다. 그래서 그 가나의 자료실을 내가 쓰면서 2001년 12월1일이름을 <김달진미술연구소>라고 붙인 거죠. 지금 서울옥션 뒷 건물 거기 한 방을 사용하면서 2002년 1월호로 <서울아트가이드>를 창간했어요. 그걸 가지고 영업을 해야 되는데. 남자 직원이 하나 와서 둘이 서울 아트가이드를 만들어가면서, 광고를 수주해서 해야 되는데 그게 잘 안되잖아요. 가나에서 무조건 여기에 광고를 해주는 식으로 도움을 준거죠. 그렇게 하다가 어느 정도 돼서, 2005년 가나에서 독립을 해서 몇 건물 떨어진 상원미술관 근처건물 2층집으로 우리가 세를 들어서 갔어요. 그때 이사가 가능했던 것은그곳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그 큰 집 건물을 샀는데, 그 공간이 너무 많이 남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쪽에 공간을 제공하는 좋은 일을 하고 싶다 해서 어떻게 인연이 되가지고 그 사람을 만났어요. 그래서 거기다가 우리가 자료실을 만들겠다고 얘기를 하고 그리로 이사를 나가게 된 거죠.


국현과 가나화랑을 들어가고 나올 때 김달진의 상황은 안정이나 안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이 오직 신의 명령에 따라 갈 길을 알지 못한 채 가나안을 향해 첫 걸음을 뗀 것과 같은 도전의 선택이었으며, 모세가 출애굽에 나선 히브리민족을 이끌며 두려움 가운데 홍해에 첫 발을 내딛는 믿음의 결단이었다. 어릴 적 어머니를 여의고 껌 봉지, 딱지를 모으며 외로움을 달래던 까까머리 철부지 시절부터 스크랩북에 낡은 잡지의 명화를 오려 붙이며 미술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청소년기를 거쳐 지금까지 미술자료 수집이라는 한 우물을 파온 자신에 대한 믿음과, 한계에 다다랐을 때 시시때때로 도움의 손길을 건네며 장애를 넘게 했던 신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추상적 의지의 결집이었으며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하는 생존과 관련한 간절한 현실적 집념의 압축이었다


그의 믿음과 집념의 선택은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여정을 선택한 이후 땅과 자손과 복을 얻고, 모세가 자기 민족의 길고 험한 출애굽의 여정을 성공시켰듯이 오늘날 김달진이 이룩한 모든 성과의 단초였다. 한국 미술의 수집과 기록자로서 자기만의 독자적인 개척의 길을 걷고 그 과정을 한국미술사의 한 편에 깊이 각인한 김달진의 활동은 오늘날 소장(수집자료)과 출판(디지털 포함), 아트 아카이브 교육이라는 세 가지 측면으로 압축되며,  <서울아트가이드><달진닷컴>을 비롯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단행본 및 외부 프로젝트 수주 자료집 발행, <라키비움프로젝트>가 그의 가시적 성과물이다. 이는 박물관의 기본적인 기능과 맥을 같이 하는데 소장 및 자료수집과 교육이 박물관의 전통적인 고유기능이라면 출판은 대중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정보제공의 기능과 기록 보존의 수단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분류는 형식적 분류일 뿐 이 모든 일들은 김달진의 삶의 톱니바퀴와 엇물리면서 각기 서로를 투사하며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들이었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