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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8): 한국 아카이브와 미술 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심현섭

한국 아카이브와 미술 평론의 새로운 지평을 열다


「관람객을 속고 있다」 이후 한국 아카이브와 미술 평론은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 김달진은 아카이비스트로서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선구자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다면 시대정신에 입각한 문제의식과 확실한 목표의식, 그리고 이를 실천해나가는 강인한 의지일터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측은지심이다. 미술자료 수집가로서 김달진은 잘못된 자료가 범람하는 미술계에 측은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미술품과 미술인에 대한 기록이 정확하지 않은데서 오는 오류를 어떻게든 바로잡아보려는 안타까운 마음이 그의 발을 동동거리게 했고 맘을 설레게 했다. 그것은 비수와 같은 비판의 정신도 아니었고, 상대를 낮추려는 오만과 편견의 마음도 아니었다. 오직 자신이 사랑하는 미술의 발전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바치겠다는 측은한 심정만이 그를 지배했다. 이를 어떤 이는 ‘외곬’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광(狂)’이라고 하였다. 무엇이라 하든지 그의 이러한 ‘광적인 외곬’이 한국 아카이브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심: 그때 문제제기를 하신 게 뭐 작품연도. 뭐 이런…


김: 작품연도 잘못되고, 작가들이 경력이 잘못되고, 전시의 명칭이 잘못되고, 어떤 것은 왜곡시키고 어떤 것은 부풀려서 얘기하고 그런 거에 대한 문제점을 제기했는데. 이런 것들이 막 코리아 타임 영자지까지 나오니까 그때 이제 속으로는 아니 이런 좋은 것들을 얘기하는데 영자지까지 나오면 외국 사람들이 한국의 이런걸 보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한국의 수치라는 생각이 들었죠. 


심: 하나의 전시가 그럼 이렇게 많은 이름으로 돼 있던 겁니까?


김: 그렇죠. 작가들이 자기의 영역에서 이렇게 다르게 싣고 있다. 화력에서 이렇게 잘못 싣고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 있잖아. 1958년 ~ 63년 현대작가초대전하면 언뜻 보면 6년간 연이어 초대된 거 같이 보이는데, 사실을 보면 58년과 63년 두 번 뿐이라는 거죠. 이런 식으로 표기해놓으면 혼돈이 되잖아요. 이런 실례를 들어서 조목조목 근거를 가지고 얘기를 한 거죠. 왜 그러냐면 근거 없이 얘기하면 내가 또 다칠 수 있으니까, 내가 혼나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한 거고.


심: 그럼 이것이 보도된 이후에 좀 어떻게 기록에 대해서 조금 더…


김: 사람들이 아무래도 굉장히 더 주의를 하게 되고 그렇게 한 거죠. 왜냐하면 언론에 많이 보도되니까 누구든지 그런 게 보도되면 내가 쓰는 그 전시회 경력이라든지 제목 같은 거에 대해서 주의를 할 수 밖에 없는 거죠.


심: 「관람객은 속고 있다」는 언제 쓰신 거죠? 


김: 1985년도. 국립현대미술관에 근무할 때죠. 그것이 이제 그 뭐라 그럴까. 선 미술에 발표를 했을 때 재밌는 것이 그때 유홍준 선생님이 거기 주간으로 있었어요. 나한테 그러면 경험을 가지고 글을 한번 쓰라 해가지고 썼었던 건데 이제 데이터를 가지고서. 그러면 아까 얘기했던 이런 작가들의 화력. 전시회 경력에서 잘못된 거, 어떤 팸플릿에서 잘못된 사례, 뭐 이런 거. 이거는 한 작가의 연표. 연표 같은 건데, 박생광 선생님 연표를 가지고 한 거고, 연보는 호암갤러리에서 했었던 ‘한국현대판화-어제와 오늘전’을 가지고 거기에 대해서 잘못된 것에 대한 이런 예를 들은 거구요, 연보는 한 작가에 대한 건데 박생광 선생님이 그 무렵에 타계를 했는데 공간지의 어느 미술평론가가, 내가 이름을 밝힐 수가 없는데, 너무 많이 틀리고 누락된 게 많은 거예요. 그래서 그걸 내가 다시 정리를 한 거죠. 박생광 선생님에 대한 연보. 한 개인에 대한. 뭐 이런 것들이 오기되고. 이런 중요한 것들이 빠졌다. 이런 내용들 하나하나 예를 들어서 사례를 가지고 지목을 했었던 거죠.


당시 글을 써보라고 종용했던 유홍준의 기억은 이렇다. “나는 그가 개인적으로 이 자료의 수집·정리를 어떻게 해가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그래서 1985년 그의 큰 아이 백일 때 주안의 한 서민아파트에 있던 그의 거처를 방문할 적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김달진 스스로가 선택한 이 지루한 과제를 보람찬 평생의 업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신나는 일감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당시 내가 주간 일을 맡고 있던 계간 『선미술』(85년 가울호)에 ‘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을 글로 써 줄 것을 정식으로 원고 청탁하였다.”(김달진,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발언, 1995) p.6.) 이런 사연을 담고 세상에 나온 은 작가들의 전시회 팸플릿에 적혀있는 잘못된(의도된) 수상경력, 학력 등을 지적하고 고발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헛된 신화적 토대를 허무는 공헌을 했다.


심: 그래서 다음번에 박생광 선생의 연보들이 발표될 때는 이게 더 인용이 되는.


김: 그랬겠죠. 이건 제가 정확한 근거에 의해서 제가 발표를 했었던 거니까. 그런 사례로 이런 걸 예로 들었던 거고. 또 전시에 대한 기록이 그 당시에 1년 동안의 역사의 기록인데, 한국예술지는 1272건. 여기는 통계는 안냈지만 이렇고, 문예진흥원에서 나온 문예연감은 1695건, 한국미술연감 1775건, 열화당미술연감은 내가 이제 관여했었던 자료죠. 2005건. 이게 이제 말이 안 되잖아요. 1년 동안의 전시 통계숫자가 이렇게 다르다는 거죠. 그러나 그거에 대해서 내가 짚은 거잖아요. 이런 거에 대한 어떤 전시의 기록이다. 연감에 대한 어떤 잘못된 거가 이런 거라든지. 이런 거를 실제를 가지고 다 얘기 하면서 이때 내가 얘기한‘오늘의 정확한 기록이 내일 정확한 역사로 남는다’ 이잖아요. 이번에 홍진기 창조인상 수상할 때도 이 말이 약간 어록처럼 인용되기도 했었는데 그때 내가 했던  말이 바로 이런 말이었어요. 그래서 오늘 기록을 충실히 하자. 벌써 내일이 되면 그건 또 과거가 되는 거니까. 그런 사례를 가지고,  1986년 ‘한국화 100년전’ 이 전시는 호암갤러리 중앙일보사에서 했었던 건데요, 이런 거에 들어가는 작가 연보도 나한테 의뢰가 온 거예요. 실질적으로는. 내가 그런 거를 누구보다 정확하게 하니까. 그런 게 어떤 경우에는 내 이름이 들어가서 밝혀진 것도 있지만 이름이 못 들어간 게 있죠. 이런 자료에 대한 정리는 벌써 그런 신뢰도가 있기 때문에 나한테 많이 의뢰가 왔죠. 이런 거는 우리나라 전시의 어떤 카달로그에 대한 변천사. 이런 식으로 해서 저는 굉장히 다른 평론가나 미술사가들이 안했던 이런 자료를 가지고 문제제기, 현상파악, 그런 거를 굉장히 많이 하면서 계속 이제 제 글쓰기 작업이 일간지, 미술 담당기자들에게 어필이 된 거죠.


심: 네, 중요한 소스가 되겠네요.


김: 엄청난 소스죠. 우리나라 미술상이  쏟아져 나온 거를 도표로 해서 밝히기도 하고, 미술전문 잡지는 뿌리내리기가 힘겹다는 내용도 발표하고… 옛날에는 연합통신 같은데서 종이 뉴스를 만들어 신문사에 뿌렸잖아요. 이게 이제 막 본격적으로 일간지에 이제 제 개인 프로필이, 인터뷰가 막 나오기 시작한 것이 90년도. 조선일보라든지. 이런 식으로 또 제가 해왔던 일은 이게 개인 인터뷰가 언론에 굉장히 많이 기사화가 됐어요. 얘깃거리가 됐었던 거죠.


심: 혹시 비난은 없었나요? 


김: 이제, 그런 거를 많이 하고 그러니까 그 어떤 기자가 인터뷰 하는데 너무 편집광적인 게 아니냐, 뭐 잘못된 것만 자꾸 파헤치느냐 그런 식으로 얘길 하는데. 그건 워낙 이쪽에 전문가니까 남들이 못 보는 거지만 내 눈에는 잘 띄니까 그거를 지적할 수밖에 없고 난 또 얘기하고 싶었던 거가 그게 뭐, 남의 석사논문 잘못된 거 인용보도해서 확장시키고. 전시이름도 국전 폐지 후 현대미술초대전이란 명칭이 있는데 이것을 자기들 나름대로 이렇게 다르게 막 쓰고 하는 거야. 예를 들어 대한미술대전초대작가, 대한민국미술대전이 분리되면서 초대작가 제도가 없어졌는데도 사용하여 본인을 높이는 거죠.


 「관람객은 속고 있다」 발표 후, 김달진이 받은 항의는 자못 심각했다. 당시 김달진을 취재한 신문기사는 그 상황을 짐작케 한다. 


미술연감이나 전시 팜플릿에 실려 있는 작가 경력, 작가연보, 미술사연보들의 부정확성을 꼬집은 이 글이 나가자 “공무원이면 설사 잘못됐더라도 감싸주어야지 오히려 까발리다니, 그게 말이 되느냐”는 등의 항의를 받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잘못된 기록들을 들춰내는 일을 그만 둘 생각은 없다. 예를 들어 ‘88 문예연감’에는 생존해 있는 공예가 백태호씨(이대교수)를 작고로 썼는가하면 한국미술연감사의 ‘미술사전’인명편에 일본에서 활동하는 조각가 이우환씨를 작고로 표시하기도 한 오류가 계속되고 있는 한 미술자료를 정리하고 오류를 지적해 바로잡게 하는데 신명을 바치겠다는 것이다.(「‘흩어진 한국미술사’ 바로 잡는다」, 스포츠서울(1989.12.6.), 12면) 


김달진의 글쓰기는 미술계에 만연했던 사실관계가 부정확한 서술, 데이터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의 결여 등에 대해 경종을 울렸다. 김달진의 「관람객은 속고 있다-정확한 기록과 자료보존을 위한 제언」은 한국 아카이브와 미술 평론의 미답의 영역에 첫 발을 내딛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통계로 본 역사와 현황’(월간미술, 89.7)이나 ‘80년대 한일교류전 일지’(월간미술 89.9) 등은 아키비스트의 활동영역을 수집과 관리뿐 아니라 자료를 문서화하여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으로까지 확대하였고, 미술평론이 주관적 해석에 근거한 관념과 수사에 그치지 않고 정확한 데이터를 근거로 한 객관적, 과학적 서술로 나아간 계기였다. 이로써 한국 미술은 감정적, 인문학적 미술평 뿐 아니라 검증 체계를 갖춘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미술평을 얻을 수 있었다. 오늘날 천경자, 이우환의 위작 사건에서 보듯 아직 우리 미술계가 납득할 만한 수준의 객관적 합리성에 다다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카달로그 레조네, 디지털 아카이브 등의 세미나가 성행하는 현상으로 봐서 데이터와 기록의 정확성에 대한 인식의 폭이 훨씬 넓어진 것은 사실이다. 비평은 뜨거운 감정과 감상의 결과이지만 그와 함께 차가운 객관성과 과학적 검증의 산물이 아니면 사상누각과 같다. 이런 면에서 김달진이 시도한 미술 비평과 해석방법, 구체적으로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이성적인 접근방식이 한국 미술계에 끼친 영향은 파격에 가까운 깊고 넓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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