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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6): 김달진과 함께 쓰인 한국아카이브역사

심현섭

김달진과 함께 쓰인 한국아카이브 역사

 

인간의 불멸을 향한 욕망은 크고 뿌리 깊다. 불로초를 구하고 미라를 만들어 죽음 이후 부활을 꿈꾸고, 거대한 무덤과 비석으로 삶의 흔적이 사라지는 것에 저항한다. 앙드레 바쟁은 문화예술의 동기를 시간의 흐름, 죽음, 소멸 등을 극복하고자하는 인간의 영원성 추구에서 찾기도 했다. 아카이빙 또한 모든 것을 축적하여 개인적, 사회적 망각에 저항하여 인간의 시간을 연장하려는 욕망의 표출인지 모른다. 국가나 종교 등 지배 권력은 이러한 인간의 욕망을 일반적으로 학문연구나 지적평등의 이름으로 조정하는 일을 권력유지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인간의 실존을 확인하는 행위인 기록이 지배층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거대한 무덤은 지배층의 불멸을 과시하며 피지배자의 복종을 강요하는 상징물로 작용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미술 기록에 대한 표준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이를 다른 기관들과 공유하지 않으려한다거나 미술에 관한 정보나 수집, 교육 등을 정부 산하 협력기관들이 독과점하는 형태로 드러나는 이면에는 이러한 권력의 속성이 잠재해있다. 김달진은 최근 인터뷰에서 ‘AMS(Archive Management System)’같은 프로그램을 국가에서 사립미술관 등에 공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추상미술의 역사>전 개최, 미술세계(2016.08), p.2) 이는 정보의 독과점 상황의 개선을 촉구한 것이다.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의 도서자료실은 1981년 설치되었다. 1986년부터 1998년까지 도서실과 자료실로 분리하여 운영되었으나, 1998년 이후 도서자료실로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 전부터 한국의 미술기록자료를 수집보관해 왔다. 삼성미술관 <리움>의 한국미술기록보존소는 한국근대미술연구소 이구열 소장의 기증 자료를 기반으로 1998년말 설립되었으며, 4만여 건의 근현대 미술기록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현재 한국 근현대미술기록자료의 보존처리와 분류를 통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있다. 아직 빈약한 소장 자료와 인력 및 시설의 부족으로 본격적인 예술아카이브로서의 기능을 담당하기에 역부족이라 할지라도 짧은 역사에 비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 또한 사실이다.


이러한 한국 미술자료수집사에서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다아카이브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순전히 개인의 취미욕망에 의해 시작한 수집활동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국가기관과 연결되면서 한국의 미술 아카이브 역사를 개시한 점은 세계적으로 그 사례가 또 있는지 모르지만한국 미술 아카이브가 한국 땅에서 자생한 증거로서 그 의미는 매우 클 것이다이것은 한국 미술 아카이브가 온갖 시련을 딛고 수집활동을 이어온 김달진개인에게 적지 않은 빚을 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한국 미술자료보존의 역사는 국립현대미술관의 자료실에서 시작했고 미술계에 자료보존의 필요성을 상기시켰다고 볼 수 있다. 그러한 측면에서 초창기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 근무하면서 수집과 보존의 영역에서 창조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김달진이 한국 미술자료 아카이브 역사의 전후와 표리에 적잖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경성의 표현대로 선천적인 운명과 같은 김달진의 수집활동은 한국 아카이브사의 주춧돌이자 전제였다.

 

김달진이 1981, <국립현대미술관>에 일당 4,500원을 받는 일용 잡급에 해당하는 임시직으로 들어갈 당시 국현의 자료실은 전문위원실 가운데 점찍고 자료실이라고 적힌 명패를 달고 있는, 아직 전문 인력이나 수집체계가 채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 당시 국립현대미술관 같은 경우도 69년에 경복궁에서 출발했고, 73년에 덕수궁으로 왔다가 86년에 과천으로 갔잖아요. 그 당시에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 직제가 정원이 30명이었죠. 관장이 있었고, 큐레이터라는 학예직은 전혀 없었을 때였죠. 서무과하고 전시과만 있었는데 오광수 선생님이 유일하게 전문위원이라고 해가지고 전시과에서 하는 전시에 대한 자문, 큐레이터 역할을 하던 시절이었죠. 제가 근무를 하면서 동관의 큰 전시장 하나를 자료실로 사용했죠. 관장님이 명패를 달아서 붙였는데, 전문위원실 가운데 점찍고 자료실이라고 적혀있었죠. 거기에 오광수 선생님 전문위원 자리가 마련되고. 자료실이 마련되면서, 자료수집도 하고. 그렇게 시작이 된 거죠. 81년도에.

 

김달진은 자료실을 만들고 그 체계를 갖추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그가 국현을 그만 둔 해가 1996년이니까 15년이라는 세월을 근무한 셈인데, 놀라운 것은 그가 퇴직할 때에도 기능직 10등급이었다는 점이다. 공적인 조직에서 일자리 하나를 만드는 일이 힘들어서였을 거라고 그는 말하지만, 그건 국립현대미술관이라는 국립기관에서조차 자료수집, 아카이브 등의 사업이 그리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기본적인 수집활동조차 이해받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우스갯소리로 얘기를 하면 이제 처음에 가니까 나 말고 어느 나이 드신 한 분이 자료실 업무를 했었어요. 옛날에는 이게 별정직이라는 게 있었거든요. 행정직은 말하자면 공무원 시험을 봐서 하는 것이 행정직이고, 별정직은 그 자리에 그 사람이 필요하다고 해가지고 임명하는 건데, 그분도 뭐 별정직인지 임시직인지 하여튼 그런 일을 하는 나이 많이 드신 분이고 그분이 철도 공무원 출신이었었어요. 근데 어쨌든 거기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에 팸플릿 같은 것이 도착은 하는데 굉장히 소극적이었죠. 그래서 내가, 아니 자료 수집을 열심히 해서 다 모아놓고 부쳐오는 건 다 수집해야지 하고 생각하기도 했어요. 내가 출장 나가서 자료 수집을 하려고 인사동 같은 데를 간다고 하니까 출장 나가면 놀러나가는 걸로 생각하고 처음에 주위 직원들도 달가워하지 않고, 출장 나가는 걸 놀러 나가는 거 아니냐 그런 일반적인 생각들이 있어서 좀 반대를 했어요. 아니 자료를 모아서 정리를 하고, 상대 쪽에서 부쳐주면 우리가 모아서 분류를 하고 해야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맞지 않다고 여겨서 관장님한테 얘기를 하고 그랬죠. 그러다 어느 어간에 하나의 업무로 채택이 된 거죠.

           그래서 매주 이제 금요일 날은 그 당시는 출근카드가 있었으니까 덕수궁 미술관에 출근해가지고 출근카드 찍고, 그리고나서 출장부에다 싸인을 받고 상급자한테 자료수집 나간다고 미리 전날이나 싸인 받아놓고. 그래놓고 나면 이제 쇼핑백 메고 사간동, 인사동, 쭉 따라서 저기 창경궁 길, 서울대학교 가로질러서 동숭동, 그 당시 강남은 지금처럼 활성화 돼 있지가 않았었으니까. 그렇게 전시장 가서 수집을 해가지고 쇼핑백에다 가지고 출근하기도 하고, 양이 많으면 화랑에다 맡겨놨다가 다음날 가서 찾아온다든지 그런 식으로 이제 본격적으로 자료 수집을 1주일에 한번 씩은 나가는 걸로 해서. 그렇게 더 많이 전시를 더 보게 되고 그러니까 더 많은 작가들도 알게 되고, 또 사람들이 내가 가서 전시를 봐주면 좋고, 자료가 수집이 되니까. 첨에 이제 자료를 수집을 하러 가니까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선화랑의 김창실 사장님 이런 분들도 그러는 거야. 그 자료를 뭐하는데 그렇게 무겁게 수집하러 다니느냐고. 미술관에 알아서 부쳐오고 할 텐데. 그래도 저는 수집활동을 해나간 거죠.

 

금요일마다 자그마한 체구에 가방을 메고 나타나는 그를 보고 사람들은 금요일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금요일의 사나이'는 수집한 자료를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분류했다.

 

한 전시에 팸플릿이라든지 이런걸 보통 2부 이상을 수집을 했어요. 먼저 개인전이냐 단체전이냐로 나누었죠. 개인전은 이두식이면 이두식이 파일이라는 게 있거든요. 이두식 선생님에 대한 미술인카드 양식에다 그 선생님에 대한 약력사항을 추가해 적어나가고 그 옆에 파일에는 목록화해서 개인전 제목, 기간, 장소, 이렇게 해서 파일에다 팸플릿을 꽂아 주는 거죠.

단체전이면 구상전, 목우회, 에콜드 서울, 한국조각가협회...등 단체파일에 넣어주고 목록에 추가기록을 남기는 거죠. 연례전이 아닌 전시는 80년대 같으면 송수남 선생님이 주동했었던 수묵화 운동, 또는 민중 미술... 어떤 기획전, 시리즈별로 분류를 했죠.

나머지 한 부는 옛날에 우리 그 스크랩북 있잖아요. 거기다 호치케스로 찍어가지고 거기다 모아놓는 거죠. 그리고 그 스크랩북 앞에 86-1, 86-2 해서 적어놓는 거죠. 목록을 작성해서 스크랩북 표지 2면에 붙여놨죠. 그렇게 하다가 어느 어간이 되니까 이 양들이 너무 많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한 전시에 2부 수집을 원칙으로 했던 것을 한 부만 수 집을 해서 개인전, 단체전으로 구분하여 보존시켰죠. 그런 식으 2부 모으던 것을 한 부 모으는 걸로 바꾸었습니다.

 

그걸 지속적으로 해서 나온 결과물로 1년 동안 전시회 통계의 기초자료가 나온다든지 새로운 기록이 나오고 그런 거지요. 런 식으로 모아나갔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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