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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2):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심현섭

인생의 동반자를 만나다


김달진의 수집 취미는 고등학교 3학년인 1972, 경복궁에서 열린 <한국근대미술60년전>을 보면서 일대전환을 맞는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이상범 등 한국을 대표하는 근현대 작가들의 작품이 한꺼번에 나온 전시였다. 몇몇 작가를 빼면 동시대를 살아온 수많은 한국 작가에 대한 자료가 미비한 사실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그는 사라져가고 있는 미술자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마음먹는다. 이로써 김달진의 수집은 한국 미술자료 쪽으로 그 방향을 선회한다. 돌이켜보면 이 선회야말로 한국 미술자료수집사를 풍성하게 하는 중요한 역사의 한 획이었다


수집의 방향이 정해졌지만 김달진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즈음 먹고사는 문제에 직면한다. 형 밑에서 어렵게 공부한 그에게 경제적 독립과 생계의 문제가 심각했으리라는 건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수집의 동기 중 하나인 잉여의 재산을 증식할 목적으로 한 투자까지는 언감생심이더라도 생계를 위한 기본적인 돈이 필요한 상황에서 김달진은 수입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갈등가운데 있었던 그 무렵, 김달진은 자신의 취미인 미술자료 수집활동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 오늘날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활동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다면 가장 행복한 삶이라고 교과서적으로 말하지만 산업화가 이루어진 이후 먹고 살만한 시절부터나 생겨난 말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김달진의 고민은 당시로서는 꽤나 심각한 갈등이었다. 그는 그림들이 담긴 모음집을 가지고 익히 알려진 사람들을 찾아가 자신의 진로를 묻는다


          고등학교 때죠. 이런 걸 가지고 이제 이경성 관장님을 홍익대학교 박물관에 가서 만난 거죠. 그게 인연이 돼서 또 사람이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인생진로가 바뀌는 거고 이런 걸 모으면서 이제 그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런 거 굉장히 좋고 그런데 이런 걸 가지구 계속 평생 이런 걸 하면서 살순 없을까?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런 거 많이 모은다고 해가지고 그 당시 이제 잡지라든지 뭐 그런걸 보면 나름대로 파악이 되잖아요.

           미술평론가 이경성, 이구열, 이일, 오광수.... 그 당시 조선일보의 미술 담당 정중헌 기자, 현대화랑의 박명자 사장, 뭐 이런 사람들한테 이런 자료 수집을 많이 하고 있으니까 이런 일을 계속 하고 싶다.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일자리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식으로 편지 같은 걸 내보기도 하고. 옛날에는 그 등사판이라고 해가지고 철필로 이렇게 써가지고 이렇게 등사를 밀었었거든요. 실지 그렇게 해가지고 많이 보내고. 그래서 지금은 없어졌는데 뿌리 깊은 나무라고 옛날에 유명한 잡지 있었어요. 거기에 편집장이 김형윤이란 분인데, 그분한테 보냈더니 답장이 왔더라구요, 취미가 굉장히 좋은 취민데, 취미가 어떤 직업으로 연결되기는 어렵지 않겠느냐 다른 사람들은 다 그런 거에 대한 회신도 없는데 한번 왔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제 김형윤이란 분을 지금도 안 잊어버리고 지금은 연세도 많고, 김형윤 편집사무실을, 얼마 전까지도 운영하고 계시더라고요.


당장 원하는 성과를 얻지는 못했으나 그때 만난 이경성과의 인연은 훗날 김달진의 수집인

에서 가장 의미 있는 시기의 하나로 꼽히는 국립현대미술관 근무로 이어졌다.


           그렇게 해서 이제 그런 거 받아본 적이 있고, 이경성 관장님은 직접적인 홍익대학교   제자도 아니고 전혀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그분한테 몇 번 편지를 냈을 거예요. 그러니까 어느 날 한번 와 봐라, 오너라하셔서 가 모아 만든 스크랩북을 큰 보자기에다가 10권을 싸가지고 홍익대학 교 박물관 관장 시절엔가 찾아갔죠. 홍대박물관 첨에 가니까 많이 떨리. 그분은 워낙 유명한 분이고, 박물관에서 만났는데 보자기에다 싸가지고 가서 큰절을 하고 이걸 보여드렸어요. 보여드렸는데 고등학생 치고는 뭐 르네상스, 바로크, 로코코, 19세기 인상파, 20 세기. 이런 유파별로 해가지고 굉장히 잘 정리해가고 붙여서 가니까 그 열성, 정성이 보통이 아니구나. 그런 생각을 해서, 좋아하는 거니까 열심히 해라. 그렇게 해가지고 이경성 관장님이 나를 기억해 주는 단초가 됐고, 난 또 유명한 미술 평론가한테 좋은 소리 들으니까 아 이거 좋은 일인가 보다 용기를 얻어 열심히 매달리고 그게 큰 인연이 되었죠.


           이경성 관장님이 국립현대미술관에 1981년도에 대통령령으로 법이 바뀌어가지고, 그동안에 국립현대미술관, 국립극악원, 국립극장에 문화기관의 기관장들을 행정직이 맡았는데 문화기관의 기관장이 전문인이 맡아야 된다고 바뀌었죠. 그래서 이제 국립현대미술관은 전문인인 미술평론가 이경성 관장님이 전문인 1호 관장으로 온 거고. 국립극장, 국립국악원, 3개 기관의 수장이 문화계 인사로 바뀌었을 때 홍익대학교에 계시던 이경성 관장님이 온 거죠.          


끝내 미술자료수집을 하는 직업을 얻지 못한 김달진은 1978년 고교졸업 후, 당시 중구 양동, 지금의 남대문 경찰서 옆 역을 끼고 있던 음침한 곳에 위치한 <월간 전시계>라는 조그만 잡지사에 취직한다. 전시계 최학천 사장과 초원다방에서 만난 김달진은 월급은 못주고 교통비 정도와 광고 등을 수주하면 인센티브를 줄 수 있다는 제의를 자신이 원하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 만족하고 받아들인다.

 

           나는 고등학교만 졸업을 하고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사에 근무를 했었어요. 78년부터지금은 없어졌는데 지금 남대문 경찰서 옆에 있던 <월간 전시계>라는 잡지를 어떻게 알게 됐냐면 동대문 도서관이라든지뭐 그 당시 남대문 도서관저기 그 남산에도서관에 다니면서 미술 잡지 같은걸 열심히 봤는데 동대문 도서관 가서 보니까 월간 전시계라는 게 있고 거기 사장님한테 전화하고 편지를 냈죠그게 그 분하고 인연이 돼서 이제 잡지사에 취직이 됐죠.그러다가 근무를 하기 시작했고 거기서 월간 전시계에서 일종의 사환 겸 취재 기자 겸 심부름꾼해서 왔다 갔다 하면서 미술현장에 많이 다녔죠. 가서 명함주고 팸플릿도 받아오고. 그 당시에 한참 얘기했었던 박서보 사단이라고까지 했었는데, 박서보 선생이 미협 이사장으로 나가가지고 김영중 조각가하고 미협 이사장 선출하는데 그 현장에서 봤죠. 현장에서 취재죠, 취재해서 그거 쓰고, 그 당시에 신문에 나온 기사를 우리가 다시 재인용해서 잡지에도 쓰고


김달진은 <월간 전시계>에서 처음엔 전시에 관련된 자료들을 모으러 다니다가 나중에는 편집 일까지 하며 잡지 운영에 대한 전반적인 기초지식을 쌓는다. 이는 훗날(2002) 김달진이 <서울아트가이드>이라는 잡지를 발행할 때 중요한 경험으로 작용한다. 열악한 환경에다 본인이 원했던 최적의 직장은 아니었지만 김달진은 그 상황을 활용하여 미술계 소식을 취재하고 잡지 편집 등의 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월간 전시계> 근무가 그에게 베푼 가장 큰 선물은 당시 19살의, 나중에 아내가 된 최현희를 만난 일이었다.


~ 그러니까 뭐야, 워낙 난 이 일에 대해 결혼이라든지 이런 거 이성교제, 소위 얘기하면 연애 같은 거를 못했는데 나이 서른의 막내인데다 어머니 일찍 돌아가시고 했느니까 아버지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라고요. 어른들은 뭐 다 자식들이 결혼들을 다해야 뭐나도 이제 장가는 가야지하는 그런 생각이 어느 날 갑자기 들고 그러는데 어느 날 같은 직장에 여직원인데 그냥 장점이 보이더라고요. 그 장점이라는 것이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하는데 열심인거 같고 또 서예학원 다니면서 붓글씨를 쓴다고 그러고 독서를 책을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독서를 많이 하고. 그래 그런 장점이 보이니까 그리고 또 나는 그때 내 스스로 생각할 때 뭐라고 해야 될까 삶에 대한 자신이라고 해야 될까? 이런 생활력. 내 스스로 미약하다고 생각이 들었어요. 어른들도 맨날 뭐 신문쪼가리 오려서 붙여가지고 밥 먹고 살겠느냐 그런 얘기도 했고, 그리고 뭐 내가 또 잘하는 것도 없고, 또 내가 뭐 월간전시계라는 데서 근무를 했었지만 그런 데가 뭐 월급을 많이 주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그냥 우스갯소리로 얘기하면 그래도 나보다 생활력이 더 있어 보이네? 하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연애편지라고 해야 될까? 편지 몇 번 주고받다가 연애라고 해야 되나? 만남으로 이어졌어요. 오빠가 나하고 동갑이었었어요. 그러니까 어른들은 또 왜 여자동생이 먼저 결혼하고 그러는 거 싫어하고, 별로 나도 뭐 처갓집에 장인어른한테도 환영도 못 받는 그런 상황이었어요. 그래도 어쨌든 결혼을 했는데 아내는 내가 해왔던 일이 뭐라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런 거에 대해서 이해도 많이 했어요. 이 자료라는 게 항상 수집하고 있다 보니까 어려움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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