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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5): 신은 그에게 사람을 주었다.

심현섭

신은 그에게 사람을 주었다

 

김달진에게는 신()이 있었다. 신의 존재여부는 개인마다 다르고, 그 신을 인식하는 일 역시 신 앞에 단독자로 선 개인의 선택이며 믿음의 영역에 속한다. 김달진은 경제적 궁핍, 아들의 병, 직장에서 겪는 고충 등 온갖 어려움을 절대적 신을, 그에게는 기독교의 하나님이었다, 의지하고 믿음으로써 견뎌냈다. 인간의 한계를 절감한 모든 이가 절대자를 찾는 건 아니지만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지 않고 절대자를 만날 수는 없다. 김달진의 삶의 고단한 과정을 돌이켜볼 때 그가 신을 찾고 의지한 건 당연해 보인다. 그가 좋아하는 성경귀귀절,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에는 창대하리라는 욥에게 내린 신의 축복이었다. 오랜 시간 지극히 미약한 존재로 살아야 했던 김달진에게 이 축복은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꿈과 희망의 언약이었고 구원의 약속이었다. 여기서 창대는 세속에서 성공하는 걸 의미하지 않는다. ‘나중은 죽는 날까지 오지 않을 수도 있는, 어쩌면 죽어서 찾아올 새 세상이다. 이처럼 창대'는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의 세상에서 이루어질 가능성을 더 많이 담고 있는 환상 속 희망의 언어이다. 손에 잡히지 않아도 그날을 향해 나아가겠다는 김달진의 순간순간의 결단은 그 자체가 하나님 나라였다. 믿음으로 쌓은 속세의 명예와 출세를 넘어선 정신적 해방터이자 지성소에서 그는 세상이 알지 못하는 힘을 공급받았다. 그 믿음에 하나님을 어떻게 응답했는가. 김달진은 신의 손길을 언제 느꼈을까. 김달진에게 하나님의 은혜의 강은 사람들의 돕는 손길로 인해 물살을 일으켰다. 좌절과 갈등, 번뇌의 나날이 더 많았던 곤고했던 시절에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사람을 붙여 그를 도왔다. 아들이 아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때에도 김달진의 신은 사람을 통해 도움의 손길을 던졌다.

 

           하나의 간증인데요 어쨌든 아들 정현이가 성장호르몬 부족으로 몸이 아팠을 때, 경제적으로 굉장히 어렵고 그랬는데, 기도를 많이 했어요. 지금은 이제 그만뒀는데 오지철, 그분이 문화체육부차관까지 했어요. 차관님인데 그분이 서울대학교 법대를 나왔던 엘리트 공무원이죠. 그 당시 올림픽 무렵에, 그 분이 문화체육부에 임용되었던 거 같아요. 그분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사무국장으로 있었는데 관장 밑에 직급이니까 꽤 높았죠. 그런 분들도 어쨌든 내가 직급은 낮지만 포지션이라든지 그런 건 뭐 굉장히 인정을 했었죠. 그리고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거, 또 얘기했던 대로 그 당시 36만원이 들어가는 약값을 충당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계셨지요. 그분이 문화체육부 본부로 들어가셨어요. 그런 인연이 끊어지지 않고 차관 밑에 차관보라는 직급이 있었어요. 이분이 체육 쪽 사람이죠. 그분한테 그런 나의 어려운 경제사정 이라든지 정현이 문제 이런 걸 예기를 했던 거 같아요. 아마 이름도 정확할거예요, 최창신 차관보가 엘지 의약사업부에 어떤 식으로 얘기를 했었나 봐요. 그래서 엘지 의약사업부에서 얼마간 몇 년간 지원을 해준 거야. 36만원을 안 받고 주사약을 우리한테 공급을 해줬죠. 그런 거는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힘이라고 할까, 하나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렇게 인연이 되가지고 그런 지원을 받을 수 없었겠죠. 그래서 그 몇 년간은 그걸 통해서 큰 은혜를 받은 거고,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힘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지금 이야기한 그런 연결을 시켜주지 않았으면 그분을 통해서 이렇게까지 우리가 지원을 받을 수 없었겠지요.

 

오늘날의 김달진은 주변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당연히 자신의 고군분투와 고통스런 노력이 전제하지만, 거기에 사람들의 도움이 합해져 지금의 김달진을 만든 것이다. 그 대표적인 조력자가 이경성이다. 이경성이 김달진을 처음 만난 건 1972년 홍익대 미술관장 시절이었다. 이경성은 김달진에게서 미술자료수집가로서 선천적인 운명 같은 것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나와 김 군과의 관계는 19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가 고등학교 시절에 홍대 나의 연구실로 찾아온 것이 첫 대면이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닌 자기가 좋아서 전시회를 두루 다니며 팜플렛을 비롯하여 온갖 미술자료를 수집하는 그의 태도는 선천적인 운명 같은 것을 느끼게 해주었다. 더구나 놀란 것은 미술자료를 수집할 뿐만 아니라 수집한 미술자료를 일일이 머리에 기억시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인간 컴퓨터였던 것이다.(김달진, 바로 보는 한국의 현대미술, P.4.)

 

, 글쎄 어떤 쬐그만 녀석이 내 방으로 들어오더니 땅바닥에 엎드려 넙죽 절부터 하더라구. 허허(김희경, 아름다운 만남 / 눈 먼 사랑, 미술세계, 2002.06.)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제 겨우 고등학교 2학년생이 스크랩북을 싸들고 당시 미술 평론가로서 이름을 떨치던 이경성을 찾아가는 일 자체가 보통 용기 있는 행동이 아니었다. 인상 깊은 이 만남은 훗날 이경성이 국립현대미술관장으로 취임하면서 다시 이어지는데, 이경성의 배려로 김달진이 국현 자료실에 근무하게 된다. 김달진은 이후 이경성을 아버지처럼 섬긴다. 이경성 또한 김달진을 달진이라 부르며 미술자료 수집가로 성장하도록 돕는다.

 

생각해보면 정말 큰 은혜를 입었지요. 제가 미술을 계속 좋아할 수 있도록, 자료를 수집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분이니까요. 중대 대학원을 마친 것도 관장님이 이사장으로 있는 석남미술재단 덕이었습니다. 아침마다 병실에서 관장님을 뵈면, 내가 은혜를 입었던 만큼은 잘해드려야 할 텐데, 정말 잘해드려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의 인연은 이경성이 세상을 떠난 2009년까지 이어진다. 이경성이 요양원에 있을 때 이틀이 멀다하고 찾아가 마지막 벗이 되어준 사람들도 바로 김달진 부부였다.

 

           매주 목요일이면 안 사람은 병원에 들러 청소하고 세탁물을 가지고 집으로 옵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면 부부가 병원에 들러 관장님과 저녁을 함께 하죠. 일주일에 서너 번쯤은 출근길에 찾아뵙곤 합니다. 곤하게 아침 늦게까지 주무시고 계실 때는 계속 관장님 옆에 있고 싶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김희경 기자는 이들의 사랑을 정확한 자료를 바탕으로 가끔은 미술계에 따끔한 한마디를 던지는 김달진의 이성적인 사랑과 좋은 작품과 평론으로 관객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이경성 관장의 감성적인 사랑이라 묘사하고 우리 미술계를 키운 아름다운 만남으로 기록하였다.

 

1985년 김달진이 수집가로서 명성을 얻게 해준 <관람객은 속고 있다>라는 글을 쓰도록 추천하고 <선미술>지에 게재한 유홍준, 국현을 그만두고 근무한 가나화랑에서 독립해 나올 때 사무실을 내주는 등 자료를 수집하는 일을 도와준 이호재, 박물관 운영에 어려움 겪을 때 후훤회 조직을 앞장서 이끌어준 오광수와 후원회장을 선뜻 맡아준 박래경 등 김달진은 중요한 고비마다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다. 어느 곳, 어떤 상황에서든 최선을 다한 자신의 정성과 진실함이 사람들에게 인정받은 것이겠으나 그는 이를 신앙적으로 해석하여 신이 도왔다고 믿는다. 지금, 그의 과거를 듣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야 모든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직장을 그만두고 새 직장을 찾고, 개인 사업을 하게 되는 과정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생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순간순간이 살얼음판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때, 신을 향한 믿음이 확신을 주고 용기를 부여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앙은 그에게 수집활동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어갈 수 있게 하는 실제적인 힘이었고 신은 그 믿음의 대가로 시의 적절하게 좋은 사람들을 붙여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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