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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진의 휴머니즘 아카이브 인생(3): 가시밭길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꿈

심현섭

가시밭길에서도 포기하지 않은 꿈

 

결혼 이후, 김달진과 최현희의 삶은 아이가 태어나고 수집의 양이 늘어남과 비례하여 깊어가는 험난함의 연속이었다. 턱없이 모자란 수입은 자료를 모아 둘 공간을 허락하지 않았다. 자료를 쌓아둘 곳을 찾아 셋방을 옮겨 다녔지만 늘어나는 자료를 놓아둘 곳은 언제나 녹록치 않았다. 좁은 공간에서 자료를 채운 박스를 방바닥에 쌓고 그 위에 매트를 깔고 자야했던 김달진의 가족은 피난민과 같았지만, 끈질기게 삶의 희망을 부여잡은 부부의 책임감과 사랑으로 인해 김환기의 피난열차에 올라탄 이들에게 보이는 정겨움을 잃지 않았다. 그러나 등에 배기는 울퉁불퉁한 바닥의 느낌은 아이들에게는 현실적인 고통이었기에 좋지 않은 기억으로 오랫동안 남았다.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을 다니면서 내가 살았던 데가 남현동이예요. 사당역에서 서울대 쪽으로 가다보면 좌측 편에 남현동 예술인마을이라고, 거기에서 살았는데 우리가 2층집에서 살았어요. 그 당시 199410월 성수대교가 19956월 삼풍백화점이 무너지고 그러던 시절이에요. 이런 가운데 집 마루가 휘고 그러니까 집주인이 이사해달라고 그랬어요. 워낙 자료가 많으니까 그거를 사과박스, 라면박스, 이런데다가 많이 넣었었어요. 그래가지고 방바닥에 막 쌓아놓고 그 위에 다시 매트리스를 깔았지만 그게 높낮이가 다르니까 울퉁불퉁하지요. 거기서 자야 되는 그런 정도가 되니까 이게 너무 불편하고 지금은 애들이 성인이 됐지만 약간 그런, 좋지 않았던 기억들도 가지고 있었더라고요. 박스 위에서 잠을 잤었던 그런 생각까지. 나도 상당히 불편했었고, 높낮이가 다르니까. 그런 상황에서 주인이 방을 빼달라고 그러니까 앞집에 지하를 얻어서 그리로 옮겼어요. 지내다 보니 습기가 차가지고 자료를 많이 버리게 되는 그런 여러 가지 굉장히 안타까운 일을 많이 겪었고, 지금도 내가 몇 십 년이 흘렀지만 가장 부딪히는 문제가 어떤 공간에 대한 문제, 무수하게 자료는 우송되어 오고, 열심히 수집해서 들어오는데 그걸 저장할 수장고. 아니 창고가 없는 거죠.

 

아이의 병, 곰팡이가 스미는 자료들, 울퉁불퉁한 잠자리, 김달진의 미래는 불확실했고 인생의 짐은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내 수집의 길을 고수했다.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일과 국립현대미술관 자료실에서 근무하던 김달진의 자료 수집은 상응하는 일이 아니었다. 생계유지와 수집 취미의 괴리에서 오는 중압감과 불안, 그는 무엇으로 그것들을 이겨냈는가. 당장은 힘들어도 이렇게 모은 자료들이 언젠가는 가치를 인정받고 어떤 형태로든 경제적 부를 가져다줄지 모른다는 희망으로 버티었을 것이라는 세속적인 추측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추측을 가지고 던진, 수집한 자료들이 장차 재원이 될 거라는 기대나 어렴풋이나마 아카이브 박물관 같은 것들을 염두에 두지 않았냐는 질문에 대한 그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그런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부분은 전혀 생각을 못했죠. 자료들을 모으는 거에 재미가 있었지 그것이 어느 때 가 되면 재원화, 자원화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은 전혀 못했지. 그거는(아카이브 박물관) 뭐 나중에 가나화랑에서 독립하고 2007년에 김달진미술연구소에서 처음으로 자료실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일반인들한테 가지고 있는 자료를 개방했었어요. 그러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박물관계의 어른인 한국박물관협회 김종규 명예회장 그런 분들을 만나고. 또 옆에서 어떤 분들이 애기를 하드라고. 박물관을 하게 되면 이런 이런 혜택이 있고 박물관을 만들어야지 공공 기관이 되서 발전할 수 있겠다는 조언을 줬죠.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일을 하다가 난관에 부딪힐 때 사람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엇갈린다. 포기하거나 더 몰입하거나. 김달진의 경우 집착에 가까운 몰입으로 나타났다. 1978년 고등학교 졸업 후, 그의 첫 직장은 <월간 전시계>으로 월급 없이 교통비 정도를 받는 수습사원이었다. 그마저 1980년 전두환 정권의 언론 통폐합 정책으로 인해 회사가 문을 닫았다. 1981년 초까지 사장 등 남은 몇 몇 사람과 함께 미술연감을 만드는 일을 더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청주로 내려가 누님 일을 돕는다. 그러나 그의 촉수는 미술자료수집에 곤두서있었다.

 

           결국 잡지도 없어지고 이러니까 지속적으로 일을 못하게 되고 그러면서 나는 잠깐 청주에 누님이 나드리에 레스토랑을 하는데 카운터를 보러갔고 그러는 사이 817월인가 8월 그때 대통령령에 의해서 이경성 관장님이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왔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청주에서 편지를 했죠. 관장님이 오셨으니까 저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근무를 하고 싶다. 시쳇말로 나는 청소부여도 좋으니까 미술관에서 근무하고 싶다. 그곳이 일종의 공식기관이니까 사람을 맘대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죠. 뭐 일종의 임시직. 108이라고. 일용 잡급이라고 해가지고 하루에 잡일을 하고 4,500원 일당을 받는 임시직으로 근무를 시작한 거죠.

 

일당 4500원의 수입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기는 버거웠다. 특히 큰아이 정현이 앓은 선천적 왜소증을 고치기 위한 월 45만원에 이르는 치료비는 감당하기 힘들었다. 정현의 치료비를 감당하기 위해 아내는 새벽에 신문배달, 낮에 우유배달을 했다. 그러는 사이, 작은 집안에 쌓인 자료들에서는 곰팡이가 서렸다. 김달진은 그런 상황에서 더욱 자신의 일에 몰두하며 가족의 안정을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정규직원이 되고자 노력했다.


           1986년에 직제 상에서 30명이었던 인원이 과천으로 옮기면서 100명으로 늘어났어요. 그때 규모가 덕수궁 미술관의 여섯 배. 직제도 굉장히 늘어났는데, 그 당시에 100명 속에 자료실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두 명의 티오라고 그러죠. 인원배당이 그렇게 됐는데, 거기서 사서 별정직이 자료실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거였는데, 그 자리가 두 자리가 있었는데, 나보다 나이가 많고 그 당시에 철도공무원 출신이었어요. 그분이 자료실에서 일을 할 수 있는 별정직을 차지했고, 과천으로 이전하면서 사람들을 임시직으로 많이 썼었거든요, 유순남 씨라고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나와서, 근데 이 사람도 사서라는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사람도 그 티오에 자기의 직급을 못 받았어요. 나도 자격증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과천으로 이전하기 전에 성균관 대학교에서 한국사서교육원 1년 과정을 수료했어요. 그러면 준사서라는 자격증을 줬어요. 그렇게 나도 준사서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 자리를 차지하지 못한 거고. 그러면서 그 자리는 일종의 바터제라고 할까, 국립현대미술관이 경제기획원이라는, 그런 데를 통해서 직제를 따와야 되니까, 나중에 알고 보니까 경제기획원 쪽에서 어떤 사람이 힘을 써 가지고, 그 자리를 경제기획원에서 추천한 다른 직원이 자리를 차지한 거죠. 그러면서 이제 유순남 씨는 통역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그걸 받고. 이화여대 도서관학과 출신으로 아버지가 영문학과 교수이고, 영어를 참 잘했거든요. 다른 직원 발령 다받고 나는 별정직 7, 지금으로 하면 계약직 3년이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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