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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희귀음반 구하러 미국땅 밟았던 마에자와, 이제는 바스키아에 매료된 괴짜 사업가

이영란

그 일은 2017년 5월 18일 뉴욕에서 일어났다. 미국의 낙서 화가 장-미셸 바스키아(1960-88)의 푸른색 자화상(<무제>)이 소더비 이브닝세일에서 열띤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추정가는 6,000만 달러였다. 바스키아 작품은 10년 전까지만 해도 500만 달러를 넘기는 예가 없었기에 소더비는 추정가를 충분히 올려 매긴 셈이었다. 한데 엄청난 이변이 벌어졌다. 여러 응찰자가 경매에 뛰어들었고, 카지노거물 페르티타 형제와 미지의 응찰자가 막판까지 피말리는 접전을 벌이며 값을 올린 끝에 1억1,050만 달러(약 1,248억 원)라는 놀라운 금액에 낙찰됐다. 최후 승자는 전화 응찰자였다. 이로써 바스키아 작품의 경매 기록이 단숨에 경신됐고, 미국 작가 작품 중 최고가도 경신됐다. 이는 역대 미술품 경매 사상 6번째로 높은 낙찰가이기도 하다.



2007년 구입한 리히텐슈타인 유화 <Figures> 앞에서 포즈를 취한 마에자와 유사쿠


그러자 경매장에는 박수와 함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세일룸을 메운 딜러들은 “피카소, 워홀도 아닌데 1억 달러를 돌파한다니 놀랍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바스키아를 무지막지하게 올리는 거냐?”며 수군댔다. 한데 바로 그 순간, 모두의 궁금증에 화답이라도 하듯 태평양 건너 일본의 억만장자 마에자와 유사쿠(Yusaku MAEZAWA, 1975- )가 인스타그램에 문제의 바스키아 그림 앞에서 찍은 인증샷을 올렸다. 그리곤 ‘걸작을 손에 넣게 돼 행복하다’는 캡션을 곁들였다. 바스키아 작품값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린 주인공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게다가 그는 2016년에도 뉴욕 크리스티에서 바스키아의 뿔 달린 악마 자화상(<무제>)을 5,730만 달러에 사들이며 이미 한차례 바스키아의 낙찰가를 경신한 바 있다. 1년 만에 또다시 같은 작가의 그림값을 2배로 치솟게 했으니 세계의 시선이 쏠릴 수밖에 없었고, 뉴욕타임스와 월스트리트저널 등 여러 매체가 인터뷰를 제안했다. 이에 마에자와는 “나는 바스키아의 그림은 물론이고, 그의 정체성과 라이프스타일, 패션, 어록에도 매혹을 느낀다”며 “재능과 행운, 타이밍을 통해 극적으로 주류에 진입한 스토리가 나와 비슷하다”고 했다. 바스키아가 10대 시절 ‘GRAY’라는 펑크밴드의 일원으로 활동한 것처럼, 마에자와도 고교 시절‘스위치 스타일’이라는 인디밴드에서 드럼을 쳤다. 바스키아가 마돈나와 염문을 뿌렸듯 마에자와는 사에코라는 배우와 염문을 뿌렸다. 패션을 밥 먹는 것보다 훨씬 좋아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일본의 신흥부자가 바스키아의 낙찰가를 1억 달러대로 끌어올리자 바스키아 회화를 보유 중인 수집가들은 자신들의 컬렉션이 밤새 수백만 달러의 가치를 더하게 됐음을 확인하게 됐다. 반면에 바스키아 작품이 단 한 점도 없는 뉴욕 MoMA 등 미술관들은 표정이 어두워졌다. MoMA의 수석큐레이터 앤 테미킨은 “바스키아는 우리가 놓친 작가 중 하나다. 생전에는 물론 사후에도 못 챙겼다. 이제 더 어렵게 됐다”고 말했다.

반면에 미국의 유명 기획자이자 딜러인 제프리 다이치는 “바스키아 작품값이 그토록 무섭게 뛰는 것은 그의 작품을 전 세계 사람들이 알아본다는 데 있다. 이유는 그뿐이다”라며 예술적 평가에 대해서는 여지를 남겼다.



장 미셸 바스키아, 무제, 1982


바스키아 그림 덕에 유명인사가 됐고, ‘일본 컬렉터의 귀환’을 알린 마에자와는 어린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엉뚱한 곳에 마음을 주던 소년이었다. 1975년 일본 지바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밴드 활동에 여념이 없었다. 또 무엇이든 사고 모으는 것을 광적으로 좋아해 목수일을 거들며 번 돈으로 LP 음반과 포스터를 사들였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여자친구와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일본서는 구할 수 없는 희귀음반과 CD를 수집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곤 3년 만에 음반을 잔뜩 들고 귀국해, CD와 책자를 파는 온라인 사이트를 개설했다. 부엌 식탁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반향이 뜨거웠다. 여세를 몰아 하라주쿠의 재즈광들이 좋아하는 펑키한 옷을 모아다가 팔았고, 2000년에는 스타트 투데이라는 회사를 창립했다. 그리곤 2004년 ‘조조타운(ZOZOTOWN)’이라는 온라인 패션 쇼핑몰을 만들어 일본 1위의 소셜커머스로 키웠다. 스타트 투데이는 2012년 도쿄 증시에 상장됐는데 매년 놀라운 성장세를 기록 중이다.

4조 원대의 자산을 일구며 일본 내 14위 부자가 된 마에자와에게 언론은 ‘갑자기 획득한 막강한 지위(벼락부자)가 수집욕을 자극하는 건 아니냐?’고 묻는다. 이에 그는 “예나 지금이나 나는 수집광이다. 그리고 내 열정을 쫓을 뿐이다. 직감에 따라 작품을 고르고, 혼자 구입한다. 그런데 이번 바스키아는 스태프들과 집에서 생중계를 보며 비딩을 했다. 막판에 방망이가 너무도 안 내리쳐지자 직원들이 더 맘을 졸이더라. 나는 짜릿했는데. 물론 그건 비싸긴 했다”고 토로했다.

그가 매입한 바스키아의 작품은 부동산 개발업자였던 제리&에밀리 스피겔 부부가 1984년 1만9,000달러에 사들인 이래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유족들도 그림을 보질 못했다. 소더비는 경매에 앞서 바스키아의 여동생들과 몇몇 슈퍼컬렉터를 뉴욕에 초대해 프리뷰를 가졌다. 마에자와도 물론 초대받았다. 그는 “나는 회화에 있어 강한 선을 좋아하는데 이 작품이 특히 그랬다. 그래서 바로 결정해버렸다”고 밝혔다.

이처럼 대단한 야망과 배짱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컬렉터가 된 마에자와가 가장 먼저 산 작품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Figures>다. 마에자와는 2007년 어느 날, 리히텐슈타인의 대형 작품 앞에서 발을 뗄 수가 없었다. 녹색과 노란색을 절묘하게 쓴 유화였는데 ‘이건 꼭 사야 해’라는 외침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문제는 200만 달러라는 가격이었다. 당시로선 엄청나게 부담스러운 금액이었지만 그는 기어이 돈을 조달해 집으로 가져왔고 요즘도 아침저녁으로 조우하고 있다. 이 작품을 시발로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그림은 어떻게든 손에 넣게 됐다.



리처드 프린스, 런웨이 간호사


미국의 유명화랑인 블룸&포의 팀 블룸은 “몇 년 전 일본 고객의 소개로 마에자와를 만났는데 판단이 무척 빠르고, 곧바로 실행하는 적극성에 놀랐다. 일본인 중엔 유례가 없는 경우”라고 했다. 신중하고 조심스런 여타 일본 고객과 천양지차라는 것. 블룸&포를 비롯해 여러 화랑 및 경매사와 거래하며 그는 수백 점의 작품을 수집했다. 특히 2016년 뉴욕의 메이저경매 기간에는 1억 달러 이상을 썼다. 크리스토퍼 울의 회화를 1,390만 달러에, 리처드 프린스의 <런웨이 간호사>를 970만 달러에 사들였다. 제프 쿤스의 조각 <랍스터>(690만 달러)와 피카소의 여인초상(도라마르)(2,260만 달러)도 수집했다. 그는 자코메티, 드 쿠닝, 칼더의 조각도 보유 중이다.

또 근래 들어 급부상한 조지 콘도, 마크 그로찬의 회화와 브루스 나우먼, 존 챔벌린, 도날드 저드의 작품도 컬렉션했다. 일본 작가 중에는 쿠사마 야요이의 그물(Net) 추상화와 온 카와라의 Data 페인팅을 사들였다. 또 프랑스 디자이너 장 프루베, 장 로이에의 1950-60년대 가구와 일본의 전통찻잔 등 골동품까지 장르와 연대를 가리지 않고 있지만 전체적으론 글로벌 아트마켓에서 명성이 높은 스타작가의 안전(?)한 작품에 집중돼 있다. 일본 최대의 패션몰을 운영하며 ‘럭셔리(명품)와 브랜드’를 지향해왔듯 아트컬렉션도 맥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12년 마에자와는 현대미술재단을 설립했다, 자신의 컬렉션을 공공과 향유하고, 미래 예술가를 지원하기 위해서다. 8년 내 고향인 지바에 현대미술관을 지을 계획으로, 건축은 히로시 나카무라가 맡았다.

소년 시절 귀청이 얼얼할 정도의 헤비메탈에 심취하며 음반을 수집했던 소년은 이제 내로라하는 미술품을 사들이며 톱 아트컬렉터가 됐다. 그뿐이 아니다. 한 대에 수십억 원이 넘는 슈퍼카와 럭셔리 시계도 모으고 있다. 음악이 어린 그를 키웠다면 이제 미술과 디자인이 마흔 줄의 남자를 키우고 있는 셈이다. 어느 한 곳에 매이길 거부(연애는 하지만 결혼은 사양)하며 자유와 파격을 꿈꾸는 마에자와가 앞으로 또 어떤 작품에 깊이 빠져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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