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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혁신으로 패션계 정상에 오른 프라다 부부, 예술은 취미가 아니라 ‘제2의 직업’

이영란

1994년 어느 날 당시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수석큐레이터이자 패션브랜드 프라다(PRADA)의 예술 분야를 담당하던 제르마노 첼란트는 영국 작가 아니쉬 카푸어와 함께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Miuccia PRADA,1949- )의 밀라노 사무실을 찾았다. 테이트브리튼의 터너 상을 막 수상한 카푸어는 프라다로부터 개인전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 의욕 넘치는 작가, 고급스러운 원목으로 새로 꾸민 갤러리 바닥에 커다란 구멍을 내겠다고 했다. 작품 컨셉이 지구의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라 꼭 구멍을 파야한다는 것이었다. 기왕이면 벽도 허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다.



파트리지오 베르텔리와 미우치아 프라다



첼란트는 난감했다. 멀쩡한 새 원목 바닥을 뜯어내고 구멍을 파겠다니 오너가 허락할까? 일단 부딪혀 보기로 하고 말을 꺼냈다. 그랬더니 미우치아는 흔쾌히 “바닥을 파든, 벽을 깨든 얼마든지 하세요. 지금껏 봐왔던 작업이 아니라 벌써 궁금해지네요”라고 답했다. 그렇게 해서 1995년 11월, 아니쉬 카푸어는 마루를 둥글게 파내고, <Turning the world inside out>이라는 신작을 발표했다. 오늘날 카푸어를 스타덤에 오르게 한 스테인리스스틸 곡면작업의 출발이었다.

카푸어 사례를 보고 미우치아를 호락호락한 사람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디자인에 있어선 이루 말할 수 없이 철저하고, 손톱만큼의 양보도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끌리면 이리저리 재지않고 진격한다. 남들이 ‘무모한 일’이라며 혀를 차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아니, 무모할수록 더 끌린다. 무목적성이야말로 예술의 가치라 믿기 때문이다.

당시 카푸어의 도전적이면서도 심오한 작업에 매료된 미우치아는 짙푸른 안료를 입힌 반구(半球) 형태의 보이드(Void) 시리즈 등을 매입했다. 워낙 규모가 크고, 보관도 어려운 작품이라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던 연작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각국에서 ‘카푸어 회고전’이 열리면 프라다의 반구 연작 <무제>는 늘 1순위로 리스트에 오른다. 2012년 삼성미술관리움의 ‘카푸어 전’에도 포함됐다. ‘탄생의 공간’을 은유하는 반구의 오목한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심연으로 빨려드는 듯하다.



아니쉬 카푸어, Turning the world inside out, 1995, 사진ⓒ 프라다재단



미우치아 프라다는 패션계에서 ‘혁신과 도발’의 주역으로 정평이 나있다. 엄격한 가풍의 상류층 출신이지만 밀라노대 정치학과를 다니면서 좌파 운동권이 된 미우치아는 사회운동과 연극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거리 시위에도 이브생 로랑 원피스를 입고 나가 논란이 되기도 했다. 패션 또한 포기할 수 없었던 것. 이후 프라다 가문의 사업을 떠맡으면서 명품브랜드가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것들을 과감히 무시해버렸다. 그 결과, 외려 각광을 받았다. 가죽가방을 포장하는 데 쓰이는 포코노 나일론으로 백을 만들고, 기존의 미에 반하는 전위적 패션을 선보였다. ‘반듯한 것은 지루하다. 나는 나쁜 취향을 추구한다’고 주창하면서.

타고난 비즈니스맨인 남편 파트리지오 베르텔리(Patrizio BERTELLI, 1946- ) 또한 엉뚱하긴 마찬가지다. 다혈질에 고집불통이지만 배짱과 통찰력을 타고났다. 디자인 복제를 항의하러 온 미우치아를 설복시켜 결국 프라다의 CEO가 됐으니 말이다. 가방 메이커였던 프라다를 구두, 의류를 아우르는 럭셔리 왕국으로 확장시킨 것도 그다. 두 사람은 예술에 대한 열정 또한 남달랐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읽어낼 수 있는 미술의 가능성에 주목했다. 부부는 1993년 ‘프라다 밀라노아르테(Prada MilanoArte)’를 만들고 야심 찬 프로그램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1995년에는 프라다재단(Fondazione Prada)을 설립하고 데이비드 스미스, 마이클 하이저, 루이즈 부르주아, 샘 테일러-우드, 월터 드 마리아, 스티브 맥퀸 등의 작품전을 개최했다. 모두 의미심장한 작업을 하는 아티스트들이다. 심지어 미국의 전위예술가이자 뮤지션인 로리 앤더슨은 교도소 연계 디지털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재단 설립이래 미우치아는 뜻맞는 예술가들과 의기투합해 신선한 프로젝트를 이어갔다. 제르마노 첼란트와 렘 쿨하스를 위시해 프란체스코 베졸리, 존 발데사리, 카스텐 휠러 등은 누구도 생각 못 했던 실험을 전개했다. ‘컬트집단’이란 별칭도 생겨났다. 댄 플래빈의 밀라노 안눈치아타성당의 조명프로젝트(1998), 엘름그린&드라그셋의 텍사스 마파(Marfa) 설치미술도 이색적이었다. 서울 경희궁에서 렘 쿨하스가 2009년에 선보인 <프라다 트랜스포머>는 20m의 건축물을 네 차례나 들어 올리며 영화제와 미술전을 담아내 큰 화제를 뿌렸다. 젊은 시절 ‘좌파와 럭셔리’를 오갔던 미우치아의 이율배반적이고도 불가사의한 성향을 살필 수 있는 프로젝트였다.

스웨덴 출신 작가 나탈리 뒤버그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힘들고, 신랄한 클레이애니메이션을 만드느라 위축돼 있자 미우치아는 “실수도 자양분이다. 잘 실패하면 된다”며 독려했다. 뒤버그는 “잠시 쪼그라들었는데 더 과감하게 하라고 해서 놀랐다”고 토로했다.

프라다는 2013베네치아비엔날레 기간에 하랄드 제만의 ‘태도가 형식이 될 때’(1969, 베른)를 오마주한 전시로 “비엔날레 본 전시보다 훌륭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당시 베네치아 프라다재단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어 2015년에는 밀라노 남동쪽 라르고 이사르코에 거대한 문화단지 프라다재단을 오픈했다. 1만9,000㎡에 달하는 옛 증류주공장은 ‘아트’가 꿈틀대는 예술캠퍼스가 됐고, 후기산업시대의 흔적이 남아있던 공장지대에도 활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범상찮은 부부의 집적물을 보기 위해 카타르왕국의 알 마야사 공주, 악동작가 데미언 허스트, 오쿠이 엔위저 등 전 세계에서 900여 명이 몰려들었다.



루이즈 부르주아, Cell, 1996, 프라다재단 컬렉션



1910년대에 지어진 술 공장의 실험실, 창고, 술 탱크 등 7개 건물이 리노베이션됐고, 3개의 새 건물이 들어섰다. 렘 쿨하스는 건립연대가 다르고, 높낮이와 형태가 제각각인 건물이 미묘하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그 공간에 ‘프라다 부부의 25년 컬렉션’과 참신한 기획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컬렉션은 1970년대 예술영역에서 시작해, 뉴다다이즘을 거쳐 미니멀아트, 개념미술까지 스펙트럼이 넓고도 깊었다. 이브 클라인, 피에르 만초니, 도널드 저드, 바넷 뉴먼, 루치오 폰타나, 피노 파스칼리, 만 레이의 작품이 내걸렸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로버트 라우센버그, 리처드 세라, 브루스 나우먼, 데이비드 호크니도 포함됐다.

그러나 프라다캠퍼스에서 가장 매혹적인 곳은 ‘유령의 집(Haunted House)’이다. 옛 건물 전체에 순금(gold leaf)을 입혀 시선을 끌기도 하지만(쿨하스는 ‘의외로 돈이 많이 안 들었다’고 귀뜸했다), 4개 건물이 미로처럼 연결된 갤러리에는 깊은 성찰의 결과물이 들어찼다. ‘유령의 집’이라는 이름도 미우치아가 지었고, 로버트 고버와 루이스 브루즈아의 작품을 선별해 영구설치한 것도 그다. 인간의 몸과 섹슈얼리티, 종교와 개인을 다룬 작업은 더없이 예리하다.

미술과 영화, 공연과 도서관이 어우러진 프라다의 예술캠퍼스는 근래 들어 명품 패션하우스들이 너나없이 아트센터를 설립 중이어서 별반 새로울 건 없다. ‘이미지 제고를 위한 마케팅 전략’이라는 시선도 있다. 그러나 프라다재단은 출범 초부터 ‘브랜드(비즈니스)와 아트는 완전히 별개’임을 천명해왔다. 미우치아는 “루이비통이 리처드 프린스 등과 협업해 제품을 내놓는 등 콜라보레이션이 대유행인데 내 생각은 다르다. ‘프라다를 위한 예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예술은 예술 자체일 때 의미가 있다”고 못을 박았다. 프라다가 강박에 가까울정도로 사업과 예술 사이에 분명한 선을 긋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에게 예술은 단순한 취미나 호사가 아니라 ‘필수과목’이라는 점이다. 미우치아는 『뉴욕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예술은 내게 두 번째 직업”이라고 단언했다. 교양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력을 다해 임하는 ‘또 다른 일’이라는 것이다. 마이클 하이저와 월터 드 마리아가 광활한 사막에 깊은 도랑을 만들고, 금속기둥을 세워 인공번개를 치게 하는 것을 측면에서 돕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게 가장 신명 난다는 것이다. 미국의 디아아트센터, 메닐컬렉션과 교류하며 후원하는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결국 프라다 부부는 슈퍼컬렉터이기보다 문화예술운동가에 가깝다. 특히 미우치아는 잠재적 예술가이자 반골예술가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밀라노에 거대한 복합아트센터가 설립되면서 예전의 ‘날 선 프로젝트’가 주춤해졌다는 점이다. 미우치아는 “나는 작품을 사서 쌓아놓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체질에 안 맞는다. 펄떡이는 현재진행형 예술이 좋다”며 새롭고 전복적인 프로젝트를 독려했는데 요즘엔 다소 뜸해졌다. 이 부부가 전처럼 ‘뜻밖의 행보’를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다. 지구촌에 아트컬렉터는 흔하디 흔하지만 예술행동가는 너무도 귀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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