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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자연과 교감하는 삶이 예술이 되어 _대산미술관 김철수 관장

윤태석

김철수 관장은 예술가의 DNA를 타고 태어났다. 대대로 서책과 지필묵을 함께하던 선비 집안이었던 터라 조부는 생계유지를 위해 붓을 만드는 필방을 운영했다. 명필로도 잘 알려졌던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아버지 역시 젊은 시절 상주와 고향 마산에서 먹을 갈며 가업을 물려받아 4남 3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갔다. 예술가의 기질을 이어받은 것은 김철수와 17년 터울인 맏형 김홍이었다.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서 수학한 형님은 타고난 예술의 끼를 주체하지 못하고 불꽃같이 작업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돌아가시게 되자 졸지에 가장이 된 형님은 작품만을 할 수 없는 현실을 직시하고 방황하기 시작했고, 그러다 병을 얻어 마흔넷에 요절했습니다. 당신의 운명을 직감했던지 이미 예술가의 길로 접어든 제게 시계 하나를 주신 후 쓸쓸히 눈을 감으셨지요. 한 살 어린 동생을 먼저 떠나보내는 큰 슬픔 앞에서 네가 형의 몫까지 살며 큰 꿈을 펼쳐야 한다던 큰 누이의 말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창원대 교정에 설치된 본인의 작품 앞에 선 김철수(1994)


김철수는 대구경북예술고등학교를 나와 국립창원대학교 미술학과에 진학했다. 학과 개설 후 첫 신입생이었기에 경쟁률이 대단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가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놓치지 않았다. 그의 나이 15세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어머니를 여의는 바람에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의 진학은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지만, 대학원만은 꼭 서울로 가고 싶었다. 절치부심, 홍익대 미대 석사과정에 과감히 도전장을 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섬유전공은 여성들만 뽑는 금남의 공간처럼 남학생들에게는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다섯 명밖에 뽑지 않았음에도 그해 유일한 남학생으로 당당하게 합격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학원을 마친 김철수는 고향으로 내려와 창원문성대학교 산업디자인과 교수로 임용된다. 큰형의 임종 앞에서 다짐했던 교수의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후 창원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총 35년을 봉직한 후 정년퇴임했다.

교수로 있던 1999년에 창원시 의창구 대산면 낙동강 변유등리에 있던 옛 라면 수프 공장을 매입해 미술관을 조성하기에 이른다. 50평 아파트를 처분하고 부족분은 융자를 내 건립비를 마련했다. 그것이 지금의 대산미술관이다.



대산미술관 개관기념 한일교류전 개막식(1999.6.26)


“자연은 제게 스승입니다. 우리 미술관은 25번 국도를 빠져나와 낙동강을 따라 3.3km나 들어가야 하는 곳에 있습니다. 강가에 펼쳐진 풍경은 단 한시도 같은 모습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미술관을 오가는 과정이 제겐 여행입니다. 그리고 여행은 제게 철학입니다. 걷고 생각하는 게 여행이고요. 미술관을 만들 때 심은 메타세쿼이아에 천으로 옷을 입히며 교감을 해갔지요. 지금은 아름드리나무가 되어 제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스승이 되었습니다. 낙동강과 미술관에서 자연과 교감하는 삶이 예술이 된 셈이지요.” 김철수 관장의 얘기다.

처음, 창고 두 동에 미술관 간판을 걸었을 때는 조롱도 많이 받았다. 한해 한해 확장을 하고 운영을 위해 월급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최소한의 살림은 교편을 잡고 있던 아내가 책임졌다. 그런데도 두 아이는 잘 자라 주었다. 부모의 사정을 잘 알던 터라 아르바이트를 두세 개씩이나 하며 대학도 잘 마쳤고 우리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이 되어주었다.

개관 26년을 맞은 대산미술관은 개관전인 한일교류전을 필두로 한중교류전을 비롯해 170여 회의 특별전을 열었고, 여기에 3,000여 명의 작가가 참여했으며, 누적 1,000여 회의 교육 프로그램도 운영해 왔다. 지역 미술관에서는 쉽지 않은 성과가 아닐 수 없다. 그 중 대표적인 전시로는 역대 베네치아비엔날레 참여작가 17명을 포함해 국내외 41명의 작가가 4박 5일 미술관에 머물며 ‘Jump into the Unknown(미지의 세계로 뛰어들기)’을 주제로 진행했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원, 《창원국제환경미술제》를 꼽을 수 있다.



대산미술관 개최, 창원국제환경미술제(2015) 참여 외국작가


미술관은 김철수의 창작활동에도 큰 동기를 유발해 주었다. 관장과 작가라는 두 가지 역할에 충실할 수 있는 계기가 그것이다. 전체 소장품 중 김철수의 작품이 2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이 분야 작가들에게는 최고 권위인 「세계디자인공예대사전」에 등재된 것도 이의 결과다. 대산미술관은 이러한 까닭에 김철수의 전공을 살려 섬유 미술 전문 미술관으로 특성화했다. 그렇다고 소장품 540여 점이 다 섬유작품만은 아니다. 회화와 조각 등 보편적인 종합 미술관이면 갖춰야 할 포괄적인 장르를 아우르고 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운영한다는 것은 참으로 숭고하고 헌신적인 과업입니다. 본인이 좋아서 하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봉사와 희생, 타인에 대한 배려가 수반되는 가치 있는 일이지요. 말이 관장이지 매일 청소부가 되어야 하고 정원사, 자금 조달, 홍보와 마케팅, 인쇄물 기획과 배송 등 열거할 수조차 없는 많은 일을 해야만 합니다. 혼자 할 수 없는 일은 가족들의 헌신이 강요되어야 하고요. 따라서 관장은 모르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틈만 나면 배우려고 노력합니다. 관장님들의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학술행사나 재교육프로그램에도 빠지지 않고 참여하고 있습니다. 관장은 끝이 없는 길을 가야만 하는 사람입니다.” 김철수 관장이 말하는 관장 상(像)이다.

그는 해군사관학교박물관과 창원대박물관, 오늘날 창원문화원 박물관대학을 만든 은사 박동백 전 창원대 석좌교수에게서 관장이 갖춰야 할 소양을 습득했다. 역사문화자원 발굴과 연구방법, 향토유산연구회를 통한 답사, 탁본, 큐레이팅과 도슨팅 기법 등이 그것이다.

“우리 미술관은 오지에 있어 운영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연금은 모두 운영비로 쓰고 아내의 연금으로 생활비에 충당하고 있습니다. 부관장으로 있는 아내의 헌신이 지금의 대산미술관과 저를 있게 했지요. 이 자리를 빌려 아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미술관과 같은 문화인프라는 단시간에 명성을 얻기 힘듭니다. 캐나다 부차드가든(Butchart Garden)에서 보듯 100년은 가봐야 합니다. 아내와 제가 30년하고 우리 애들이 30년, 나머진 손자 손녀가 채우다 보면 미술관이 자리 잡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인터뷰 말미에 던진 김철수의 말에는 가족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이 묻어있었다.

미술관을 운영하면서 보람 있는 일이 참 많았다. 그중에서도 개관 초기 부산시립미술관장 겸 서양화가였던 김종근 부산교대 교수가 김철수의 농촌 미술 운동을 보며 본인의 100호 작품 1점을 선물해 주었다. 또 소장품의 20%는 미술관을 거쳐 간 작가들이 기증한 것이다. 얼마 전에는 모란미술관 이연수 관장이 이경성 교수의 작품 1점을 조건 없이 보내주며 큰 격려를 해주었다. 결혼해 가정을 꾸린 딸과 아일랜드의 미국계 반도체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이 작년에는 유럽여행 일등석 항공권 두 매를 선물해 주어 부부가 모처럼 오붓한 여행을 다녀올 수 있었다. 미술관이 가져다준 참 행복, 이것이 형님과 했던 약속의 작은 실천이기를 그는 바라본다.



- 김철수(金哲秀, 1953- )
국립창원대 미술학과와 홍익대 대학원 섬유 미술전공 석사 졸업. 창원문성대 및 창원대 교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장 역임. 미술관 유공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 자랑스러운 창원대인상, 경남도지사 표창(3회) 수상. 현재 경남박물관협의회장, 한국사립미술관협회 부회장, 한국박물관협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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