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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병신년, 새해가 가장 먼저 드는 대왕조개의 뜰 울산해양박물관 박한호

윤태석

 제주칼호텔에 관광상품 납품 후, 1979


박한호의 아버지는 고향인 울산 강동 산하마을에서 살다가 오사카 군수공장으로 징집되면서 일본으로 이주했다. 한호는 1938년 10월 6일 9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호탕한 성격에 학구적이고 가정적이어서 자녀들의 교육을 직접 하셨으며, 어머니는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마을 출신의 평범한 가정주부였다. 

한호가 9살 때 부모님은 비로소 일본생활을 접고, 외갓집이 있던 서생으로 돌아왔다. 그 후 한호는 지금의 성동초(당시 소학교)에 편입했지만, 우리말이 서툴러 아이들과는 잘 어울리지 못했고, 진하(鎭下) 앞바다에서 혼자 놀기를 좋아했다. 

그나마 다행스럽다고 해야 할까? 한호는 운동을 아주 좋아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서도 달리기를 잘하던 한호에게 축구는 가장 자신 있는 운동이었다. 중학교 때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한 한호는 축구영재 소리를 들으며 대구영남고에 진학했다. 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중도에 포기해야 했고, 따라서 축구도 더는 할 수 없게 되었다. 한호에게 미안한 마음이 컸던 부모님은 아들의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일찍이 입산해 경북 청송 어느 암자에 머물던 큰형에게 그를 보내게 된다. 그간 부모님은 서생에서 남창으로 이사했다. 한편, 한호는 형이 얼마 되지 않아 주왕산 대전사(大典寺) 주지가 되자 다시 그곳에 머물게 되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고향 안동을 떠나 사찰 근처에서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던 지금의 아내를 만난 것은 이때였다. 그리고는 얼마쯤 지나 부모님이 계신 울산 남창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부모님이 결혼을 반대하시는 바람에 외할머니가 계시던 서생에서 살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오갈 데 없던 외손자를 받아준 외갓집에서 큰아들을 낳았지만 먹고 살길은 막막해졌다. 궁여지책으로 아내는 젖먹이를 놓아둔 채 작은 쌀집을 열었다. 한호도 일거리를 찾아 부산으로 내려와 작은 자개 무역회사를 다니며 돈을 벌었다. 당시 나전(螺鈿)을 위한 자개 산업은 노동집약업종이었기에 우리나라의 저렴한 노동력에 기대어 제법 활황을 누리고 있었다. 1965년 봄 둘째인 큰딸을 얻으면서 2년 후에는 가족 전부가 부산 해운대에 보금자리를 틀게 되었다. 살림을 보태기 위해 아내는 다시 쌀장사를 시작했다. 그 무렵 한호는 자개 화판공장에 들어가는 원료를 구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등지에 출장을 다니게 되었는데, 이때, 현 박물관의 부관장으로 일하고 있는 셋째 충훈을 낳았다.


해양생물기념품판매소, 1990



당시 좋은 조개류는 섬 중의 섬에서만 만날 수 있었다. 자주 찾던 인도네시아의 어느 작은 섬은 당시만 해도 풍토병이 만연해있었고 식인(食人)문화까지 살아 있어서 한호에겐 극심한 공포와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만나게 되는 희귀조개류는 그에게 말로다 설명할 수 없을 정도의 극적인 희열을 주었으며, 고향에 있는 아내와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극복해야만 했던 고된 현실 그 이상의 짜릿함을 갖게 했다.

“80년 중반쯤으로 기억합니다. 역시 인도네시아 벽지 도서 원주민과 가까워지기 위해 자주 한국의 생필품, 약품, 의류 등을 가져다주었는데 어느 날 그들과 동행한 깊지 않은 바다에서 엄청난 크기의 산호를 발견했습니다. 너무나도 예쁘고 아름다웠기에 눈에 밟혀 잠조차도 이룰 수가 없었지요. 그렇게 3-4일이 지났을까. 아침부터 원주민 한 명이 허겁지겁 달려와서는 내 손을 잡고 해변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갔더니 갓 건진 그 산호가 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 며칠 동안 산호를 캐냈다면서 상처투성이가 된 투박한 손으로 내 손을 잡아 그 산호 위에 얹어주더군요. 지금도 힘들고 지칠 때면 간절곶에 나가 그들이 살고 있을법한 바다 쪽을 바라보곤 합니다. 그날의 감동이 밀물처럼 밀려와 따스한 위안을 주곤 하지요.” 박한호 관장의 술회다.


필리핀 패류사업관련 미팅기념사진, 1992


산호가 크다고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그 섬에는 그만한 산호를 실을 만한 배가 다니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애써 준비한 선물을 두고 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갖은 방법을 다 써본 끝에 산호를 배 밑에다 매달고서야 가까스로 섬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음, 한국으로 가져오는 과정은 더 난해했다. 고심 끝에 엄청난 양의 신문지를 구해 종이죽을 만들어 산호 표면에 붙이고 다시 바르고 말리는 작업을 일주일동안 반복한 후에야 컨테이너로 옮겨졌고, 어떠한 손상도 없이 울산으로 가져오게 되었다. 지름 2.5m. 울산해양박물관에서 가장 큰 소장품은 그렇게 입수되었다. 

원주민들과 친해지게 되면서 차츰 희귀조개류를 감식하는 눈도 커져만 같다. 어느 해인가는 세계적인 패류학자들이 포함된 유럽 해양생물전문가들이 동남아시아 쪽으로 조사차 대거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가 그들을 만나게 되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박물관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인간의 역사나 무덤에서 나오는 유물만이 아닌 해양생물표본도 훌륭한 박물관의 소재가 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박한호는 이때 막연하게 해양생물표본박물관에 대한 꿈을 갖게 되었다. 한편, 이렇게 해외에서 조개류와 자개원료를 직접 가져오면서 집안 형편은 차츰 나아지기 시작했다. 1970년 초부터는 부산 성도(成都)에 작은 해양생물기념품판매소를 열어 아내에게 운영하게 하였고 한호는 보다 희귀하고 다양한 해양생물자원을 조달하는 일에 더 적극적으로 매달리게 되었다.


박물관 개관식, 2011


1980년 초에는 ‘미래상’이라는 무역회사를 설립하여 해양표본 관광 상품을 개발하는데도 손을 대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보다 규모가 큰 희귀생물표본을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93년 우리나라도 ‘국제희귀동식물보호조약(CITES)’에 가입하면서 희귀산호와 조개류의 국내 반입에 일정 부분 제동이 걸리게 되었다. “무역회사 일을 하면서 하나, 둘씩 모으기 시작했던 조개류가 어느 날 보니 창고 3개(약 300평)나 되었어요. 쌓아만 두다 보니 관리도 힘들고. 이것들을 여러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고, 또 자라나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해양교육 자료로 활용하면 좋겠다 싶어 어릴 적 향수가 남아있는 울산 서생마을을 다시 찾게 되었습니다. 어머니의 고향이자 어릴 적 추억이 모래사장에 고스란히 퇴적되어있는 간절곶 서생에서 일생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어 박물관을 짓기로 했었지요. 30대에 나도 죽기 전에 좋은 일을 하고 싶은데 뭐가 있을까? 했던 것이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후에야 그 꿈을 이루게 되었네요.” 역시 박한호 관장의 회고다. 

병신년(丙申年) 새해가 가장 먼저 떠오르게 될 동해의 끝자락 간절곶. 서생, 산호와 꿈. 참 잘 어울리는 이곳에 이렇듯 울산해양박물관은 들어서게 되었다.

- 박한호(朴漢浩, 1938- ) 일본 오사카 출생, 9세 때 울산시 서생면으로 이전, 대구영남고등학교 중퇴, 서생면에 박물관 부지매입 및 공사착공(2008), 체험관동 준공(2009), 전시관동 준공 및 전시물 배치완료(2010), 간절곶해양탐사체험장 개관(2011.7), 울산해양박물관으로 기관명 변경(2011.10) 후 울산광역시 6호 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2011.12), 현재 미래무역(옛 미래상) 대표, 울산박물관협의회 부회장, 울산동부초 교육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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