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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돌장승, 도깨비처럼 살다 민화가 되다. 에밀레박물관 창설자 조자용

윤태석

에밀레박물관(서울 등촌동 206번지, 1984년 택지 개발로 철거)


조자용 관장


우리나라 박물관운동의 선각자로 조자용(趙子庸)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조 박사는 1926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19세이던 1945년 부모마저 북에 둔 채,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2년(1947) 뒤, 그는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가 본 미국은 국가 간 적자생존의 냉엄한 현실이 문화정체성을 앞세운 치열한 격전지였다. 문화의 중요성과 글로벌한 안목을 키우며, 대학과 하버드대 대학원(1953, 구조공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코스를 거쳐 귀국(1954)한 조 박사에게 한국은 6.25전쟁의 혼돈과 불안정한 문화정체성으로 고아의식을 심화케 하는 부유지(浮遊地)같았다. 미국에서 체득한 문화인식과 귀국 후 절감한 부유의식은 그에게 정체성(Identity)을 고민하게 했다.
비로소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이 도깨비, 호랑이, 용, 잉어, 돌거북 등 벽사(辟邪)와 입신, 전통 신앙인 삼신 등이었다. 그는 이를 중심으로 우리 전통문화의 실체를 발굴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데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에밀레박물관(1968.10, 서울 강서구 등촌동)이 탄생했다. 한국박물관협회의 전신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을 주도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함은 물론이다.
조 관장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박물관 운동이다. 그는 민간 중심의 자생적 박물관 모임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회장에 추대(1976.12.5, 한독의약박물관)되었다.

‘세계의 일등 문화국이 되려면 적어도 1,000관은 되어야 한다. 이 큰 과업에 우리는 당면해 있다. 이 현실을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 민중박물관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스스로 공개하고 보다 뜻있게 보존하자는 취지이다.’ 조 회장은『民衆博物館運動 Folk Museum Movement』(한국민중박물관협회 1981.10.2 발행)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바 있다.   
한편 ‘민중박물관에 필요한 제반 사무를 총괄하고 회원 상호 간의 복리와 협조를 도모하며 나아가서는 민중문화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부흥시킴으로서 우리의 현대 문화건설에 기여한다. (정관 제4조)’고 민중박물관협회는 그 설립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 박사의 인터뷰와 정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화와 박물관에 대한 인식이 매우 글로벌하며 미래지향적이라는 점, 민중박물관협회의 자율적 태생과정과 공익적 활동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치를 내세워 민중박물관협회는 신생박물관 발굴 및 소개, 답사, 학술세미나 개최, 연구자료 발간, 박물관법 제정 자문 및 협력 등을 통해 박물관의 척박한 환경을 개선하고 인식을 환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중심에 조 관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둘째,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발굴과 정립이다. 그는 특히 민족성이 해학과 은유로 잘 조우된 민화와 목기, 와당에서 민족미학의 단서를 확인했다. 특히 민화는 분명했다. 일관된 해학과 풍자, 솔직한 표현, 규범에 구애받지 않은 독창성과 풍부한 예술성은 조 박사가 민화에 빠져든 이유였다. 조 박사는 수집한 민화로 1978년부터 약 2년여 동안 미국 주요 박물관을 돌며 순회전을 가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일 사립박물관의 소장품만으로 한 최초의 국외전으로도 평가되는 국제전은 우리 민화 세계화의 시발이 되었다. 이렇듯 조 박사는 민화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여 민화가 우리 민족 DNA의 정수임을 밝히고자 힘썼으며, 오늘날 민화가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지점을 점하게 하는데 시금석을 놓았다.
셋째, 에밀레박물관 건립과 활동도 중요하다. 그는 민화적 콘텐츠를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저변 확산하고자 박물관을 건립(66년 착공, 68년 준공, 70년 개관)했다. 준공 5주년 기념 ‘한화백호전(韓畵白虎展)’(1973.4.21-6.30) 등 연 4회 기획전을 개최하는 등 전시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박물관은 그에게 자료수집과 연구의 터전이었고 교류와 소통의 사랑방이었으며 터미널이었다. 그러나 50세가 되던 해(1976)에 심장에 문제가 생겨 쓰러지게 되면서, 평소 매력을 느껴왔고 또 때맞춰 관광지로 개발계획이 발표된 속리산으로 박물관을 이전하기로 했다. 이로서 8년여 에밀레박물관의 등촌동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총회(1976.12.5, 한독의학박물관), 박종환, 허동화, 노석경, 조자용, 한기택,
고중광, 구순섭, 윤열수, 진성기, 김만희, 조병순, 김종규, 김조형, 황규완, 김쾌정(아랫줄 좌측부터)


1983년에 속리산 정2품 소나무 인근에 둥지를 튼 에밀레박물관은 보다 역동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전통문화 수련장 삼신사(三神祠)을 개장했고, 박물관을 체험형 교육시설로 운영하는 한편 삼신제, 산신제 등 동제(洞祭) 부흥운동에도 전력했다. 흥으로 풀어낸다는 의미를 부여해 ‘흥풀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내는 등 우리 전통문화 전승에도 힘썼다. 박물관에서 시행한 체험으로는 떡 만들기, 가면 굿, 사물놀이, 도깨비놀이 등 전통과 관계된 다양한 것이 있었으며, 이러한 체험 역시 우리나라 박물관에서는 처음 시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지역적인 한계는 커졌고 개발계획마저 무산되면서 운영은 어려워만 갔다. 그러는 와중에도 조 박사의 소망은 큰 규모의 공간에서 전시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전EXPO(2000)장에서 전시가 성사되었다. 그러나 여기까지였다. 질곡의 역사가 굳은 절개로 승화된 조선 소나무를 사이에 두고 해학적인 표정으로 담소하고 있는 까치와 호랑이[鵲虎圖], 구름을 뚫고 거침없이 승천하는 용[雲龍圖]이 지켜보는 가운데 차디찬 전시장 바닥에서 그는 쓸쓸히 눈을 감았다(2000.1.29). 설상가상으로 부인마저 이듬해 작고함에 따라 박물관도 역사가 되었다.
다소 늦은 감은 있지만, 김종규(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윤열수(가회민화박물관장), 윤범모(가천대 교수), 이호재(가나아트 대표) 등의 주도로 지난해 ‘조자용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다. 첫 사업으로 금년 초 조 박사의 아호를 딴 ‘대갈문화축제’를 성대하게 개최했다. 지금이나마 조 박사의 생애와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조 박사,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도깨비(유물)처럼 다시 살아나길 기대해 본다.


- 조자용(趙子庸)(대갈(大渴), 1926-2000) 황해도 황주 출생. 박물관장, 건축가, 미술사가. 1947년 도미(渡美). 웨스레안초급대와 벤데빌트대,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에밀레박물관 설립, 한국민중미술협회 창립 발기인 및 초대회장.「동이족의 수호신, 장수도깨비」(1985) 등의 학술논문과『한국 호랑이 미술』(브래태니커, 1970),『한얼의 미술』(에밀레미술관, 1971),『한호의 미술』(삼화인쇄, 1974), 『 삼신민고』(가나아트, 1998) 등의 논저 발표, 공저로는『조선시대 민화』(예경,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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