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자용 관장
우리나라 박물관운동의 선각자로 조자용(趙子庸) 박사를 빼놓을 수 없다. 조 박사는 1926년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19세이던 1945년 부모마저 북에 둔 채, 혈혈단신으로 월남했다. 2년(1947) 뒤, 그는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그가 본 미국은 국가 간 적자생존의 냉엄한 현실이 문화정체성을 앞세운 치열한 격전지였다. 문화의 중요성과 글로벌한 안목을 키우며, 대학과 하버드대 대학원(1953, 구조공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엘리트코스를 거쳐 귀국(1954)한 조 박사에게 한국은 6.25전쟁의 혼돈과 불안정한 문화정체성으로 고아의식을 심화케 하는 부유지(浮遊地)같았다. 미국에서 체득한 문화인식과 귀국 후 절감한 부유의식은 그에게 정체성(Identity)을 고민하게 했다.
비로소 그에 눈에 들어온 것이 도깨비, 호랑이, 용, 잉어, 돌거북 등 벽사(辟邪)와 입신, 전통 신앙인 삼신 등이었다. 그는 이를 중심으로 우리 전통문화의 실체를 발굴하고 이론으로 정립하는데 전념했다. 그 과정에서 에밀레박물관(1968.10, 서울 강서구 등촌동)이 탄생했다. 한국박물관협회의 전신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을 주도한 것도 이와 궤를 같이함은 물론이다.
조 관장의 활동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째, 박물관 운동이다. 그는 민간 중심의 자생적 박물관 모임인 한국민중박물관협회 창립을 주도해 초대회장에 추대(1976.12.5, 한독의약박물관)되었다.
‘세계의 일등 문화국이 되려면 적어도 1,000관은 되어야 한다. 이 큰 과업에 우리는 당면해 있다. 이 현실을 국민에게 호소하기 위해 민중박물관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스스로 공개하고 보다 뜻있게 보존하자는 취지이다.’ 조 회장은『民衆博物館運動 Folk Museum Movement』(한국민중박물관협회 1981.10.2 발행) 머리말에서 이렇게 밝힌바 있다.
한편 ‘민중박물관에 필요한 제반 사무를 총괄하고 회원 상호 간의 복리와 협조를 도모하며 나아가서는 민중문화부흥운동을 통하여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부흥시킴으로서 우리의 현대 문화건설에 기여한다. (정관 제4조)’고 민중박물관협회는 그 설립목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조 박사의 인터뷰와 정관에서 보는 바와 같이 문화와 박물관에 대한 인식이 매우 글로벌하며 미래지향적이라는 점, 민중박물관협회의 자율적 태생과정과 공익적 활동을 지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기치를 내세워 민중박물관협회는 신생박물관 발굴 및 소개, 답사, 학술세미나 개최, 연구자료 발간, 박물관법 제정 자문 및 협력 등을 통해 박물관의 척박한 환경을 개선하고 인식을 환기하고자 노력하였다. 이 중심에 조 관장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둘째,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발굴과 정립이다. 그는 특히 민족성이 해학과 은유로 잘 조우된 민화와 목기, 와당에서 민족미학의 단서를 확인했다. 특히 민화는 분명했다. 일관된 해학과 풍자, 솔직한 표현, 규범에 구애받지 않은 독창성과 풍부한 예술성은 조 박사가 민화에 빠져든 이유였다. 조 박사는 수집한 민화로 1978년부터 약 2년여 동안 미국 주요 박물관을 돌며 순회전을 가져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단일 사립박물관의 소장품만으로 한 최초의 국외전으로도 평가되는 국제전은 우리 민화 세계화의 시발이 되었다. 이렇듯 조 박사는 민화를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보급하여 민화가 우리 민족 DNA의 정수임을 밝히고자 힘썼으며, 오늘날 민화가 우리 미술사의 중요한 지점을 점하게 하는데 시금석을 놓았다.
셋째, 에밀레박물관 건립과 활동도 중요하다. 그는 민화적 콘텐츠를 중심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관리·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저변 확산하고자 박물관을 건립(66년 착공, 68년 준공, 70년 개관)했다. 준공 5주년 기념 ‘한화백호전(韓畵白虎展)’(1973.4.21-6.30) 등 연 4회 기획전을 개최하는 등 전시에도 열정적인 활동을 했다. 박물관은 그에게 자료수집과 연구의 터전이었고 교류와 소통의 사랑방이었으며 터미널이었다. 그러나 50세가 되던 해(1976)에 심장에 문제가 생겨 쓰러지게 되면서, 평소 매력을 느껴왔고 또 때맞춰 관광지로 개발계획이 발표된 속리산으로 박물관을 이전하기로 했다. 이로서 8년여 에밀레박물관의 등촌동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