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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삶과 작품을 접합하기: ‘조각 여정’이 보여준 어떤 가능성

안소현

삶과 작품을 접합하기: ⟪조각 여정⟫이 보여준 어떤 가능성


작가와 작품은 어디까지 이어져 있을까. 작품은 작가를 온전히 대변하지 않는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 순간, 하나의 독립체로서 스스로 발언하기 시작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둘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다고 단언할 수도 없다. 작가가 몸소 통과한 시간은 크든 작든 항상 작품에 묻어나기 마련이다. 의도주의의 늪을 피하면서도 작품과 작가를 다시 접합할 수 있는 적정 지점은 어디쯤일까? 노해나 기획자의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WESS, 2022.06.01-07.09)은 그 해답을 찾아보고자 한다. 전시는 여성의 사회적 조건이 조각이라는 매체로 각기 다르게 번역되는 방식을 7 인의 여성 조각가(김정숙, 배형경, 백연수, 윤영자, 이경희, 임송자, 황지선)를 통해 보여준다.

전시장에는 다양한 세대에 속한 조각가들의 작품이 각각 한 점씩 대표로 선정되어 좌대 위에 놓여있었다. 여기서 작품은 작가가 지나온 '조각 여정'의 계기이자 결과물로 작동하면서 그가 여성으로서 직접 경험했을 삶을 지시한다. 7 점의 작업은 총 3 열로 배치되어 있었다.

왼쪽 열에는 황지선, 백연수, 임송자의 작품이, 가운데 열에는 김정숙과 윤영자의 작품이, 오른쪽 열에는 배형경과 이경희의 작품이 전시됐다. 그 배경은 화이트큐브였는데, 특이하게도 이번 전시에서는 화이트큐브가 작품과 외부 세계를 분리하지 않았다. 오히려 작품 그 자체를 부각함으로써 작품이 삶을 보다 더 효과적으로 소환할 수 있도록 도왔다.

한편 '조각원정대'로서 기획자와 함께 리서치 과정에 참여한 이유성, 홍기하의 작업은 좌대가 아닌, 양쪽 벽면에 부착된 흰색 선반 위에 전시됐다. 둘의 작품은 앞선 7 인의 작품과는 다른 맥락에서, 다시 말해 환경의 일부로서 작품에 반응하는 관객처럼 기능한다.

처음 작품 배치를 보았을 때는 다소 투박하다는 생각이었으나, 동선을 달리하여 내부를 여러 번 거닐다 보니 그 안에서 수많은 연결선을 상상할 수 있었다. 연결선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페미니즘 화두가 연상됐고, 나는 그 화두를 중심으로 묶인 작품들을 경유하여 작가들의 시간을 추적해볼 수 있었다.



전시 전경. 제공 ⓒ 노해나 기획자


일례로 김정숙, 윤영자, 홍기하의 작업이 형성한 삼각 지대에 대해 한 번 얘기해보자. 우선 같은 열에 병치된 김정숙의 <비상>(1981)과 윤영자의 <율>(1974)은 모두 연작의 일환으로 제작된 브론즈 작품으로, 다소간 추상적인 형태를 띠고 있다. 하지만 공통점은 여기까지다.

<율>은 곡선적이면서도 유연한 데 반해, <비상>은 직선적이고도 대칭적인 형태가 두드러진다. 새의 날개를 닮은 <비상>은 앞으로 미끄러지는 새의 활공을 상상하게 하면서도, 돌진하는 소의 뿔처럼 보이기도 해 어떤 장애물이라도 뚫고 나아가겠다는 꼿꼿한 의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율>은 너무나도 부드러워 미끄러워 보일 정도이며, 그 무엇과도 맞부딪히는 법 없이 모든 걸 포용해 끌어안을 것만 같다.

김정숙과 윤영자는 활동 시기가 겹친다. 흔히 1950년대부터 60년대까지 한국에서 유행했던 생명주의(vitalism) 범주에 속하는 작가로 분류되고는 한다. 최태만에 의하면 생명주의는 '생명의 형태, 직관, 본질의 추구라는 더욱 정통적인 미학에서 출발'한 흐름으로 '물질 속에 인간 정신의 구현이라는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유기적 추상을 지향해왔다.'1) 두 작가의 생명주의는 공교롭게도 '모성'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자주 해설되어왔다. 작가들 스스로도 아이가 있는 여성 작가로서 모성을 주제 삼아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이러한 해설에 특별히 반감을 갖지도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모성'이라는 화두와 연결해 두 작품을 살펴볼 때, 어머니됨에 관한 두 사람의 태도는 아주 대조적이다.

김정숙은 모성을 마냥 긍정하지만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카이브 섹션에도 전시됐던 자서전 『반달처럼 살다 날개되어 날아간 예술가』에서 어머니됨과 작가됨이 충돌해 내적 갈등에 시달리던 순간을 여러 차례 회고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 유학 시절에 관해 얘기하는 대목에서는 '아무리 예술이 좋다 한들 아이들보다야 중할까. 내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 어머니로서의 의무를 등한히 해도 좋은 것일까. 회의와 번민의 나날이 계속됐다'2)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에게 어머니됨은 커다란 기쁨이면서도 동시에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 제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비상> 연작의 창작 계기와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여성으로서 사회 일선에서 전문가로 일한다는 것, 
더욱이 남성들과 대등히 일한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어요. 
그래서 훌훌 벗고 속 시원하게 날고 싶다는 생각이 절실해졌고, 
그것이 날개란 모티프로 반영되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3)

결국 <비상>은 김정숙이 여성 작가로 활동하며 마주해야 했던 현실적 제약들을 나름대로 풀이한 결과물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어머니로서의 역할 역시 그러한 제약들 중 하나였을 테다. 그에 반해 윤영자에게는 어머니됨이 특별히 제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율>에서 모성은 오히려 힘의 근원처럼 묘사된다. 이 작업은 추상화되기는 했지만 아이를 품에 안은 어머니의 모습을 상기시키는데, 둘이 맞물린 모습에서 상승하는 힘과 하강하는 힘이 뒤얽히며 생명의 선율이 연주되는 듯했다. 그 선율이 무척이나 역동적으로 느껴져 순간적으로 보치오니의 <공간에서 연속하는 단일 형태>(1913) 같은 작품이 떠오르기도 했다. 따라서 이 작업에서 그려지는 모성은 제약이라기보다는 생동하는 생명력 그 자체에 훨씬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두 대조적인 작품은 지난 세대의 두 여성 조각가가 모성 문제를 다루는 서로 다른 해법을 보여준다.



김정숙, 비상, 1981, 브론즈, 37×100×18cm
제공 ⓒ 노해나 기획자


이때 대각선 방향 맞은편에 위치해 삼각형의 꼭짓점을 담당하는 홍기하의 <모자상>(2022)이 끼어들어 이들의 해법에 딴지를 걸기 시작한다 — 홍기하는 1994년생으로 두 작가와 세대가 다르다. 이 조각 작품은 보는 각도에 따라 삼각뿔처럼 보이기도 하고, 직사각형 기둥처럼 보이기도 한다. 대리석을 내동댕이친 뒤에 깨진 조각을 그러모아 석고로 고정시켜 완성한 것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이 무뚝뚝하고 울퉁불퉁한 흰색 덩어리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계속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 번 깨졌다가 결합된 형태가 주는 응축된 힘과 같은 것이 단단하게 느껴졌다. 이 작품은 고요하면서도 시끄럽고, 폭력적이면서도 다정하다.
(어떤 의미에서는 김정숙과 윤영자의 작품도 포함될 수 있는) 전통적인 모자상이 대리석처럼 공고히 미화시켜왔던 모자 관계 이면에 은닉되어 있던 온갖 노이즈를 거칠게 들춰내면서도 — 이런 점에서는 상당히 쿠르베적이기도 하다 — 동시에 그 모든 노이즈에도 불구하고 계속 지속해 나가보겠다는 따뜻한 의지를 전달하기도 하는 것 같았다. 이 작업에서 어머니와 자식의 관계는 규정되기보다 현재진행형인 관계의 풍경으로 그려진다.

<모자상>은 이런 식으로 '모성'이라는 화두를 분명하게 끌어내면서, <비상>과 <율>이 유지하고 있던 수직선의 팽팽한 균형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관람자는 균형이 깨져버린 그 자리에서 몇 가지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다. 왜 모성은 항상 부성보다 특별한가?

삼위일체 상과 성모자 상의 간극을 한번 생각해보라. 어머니의 사랑이 항상 아버지의 사랑보다 따뜻한 건 아니지 않는가? 이러한 시각이 미술사를 가로질러 수백 년간 되풀이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가부장제'라는 단순한 해답으로 만족하고 넘어가도 괜찮은 걸까?

게다가 김정숙과 윤영자는 여성 작가로서 왜 이러한 프레임에 크게 저항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이는가? (홍기하의 작품으로 인해 이러한 면모가 유난히 크게 부각되었다.) 달리 보면 <비상>의 해방감은 주어진 어머니 역할을 어쨌든 순순히 받아들인 한 여성이 감정적 동요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한 번 상상해본 가짜 해방감에 가까워 보이기도 한다. <율>은 또 어떤가?
가부장적인 어머니 역할을 적당한 합리화로 체화한 결과물처럼 보이지 않는가? 실제로 두 작가의 해법은 가부장적 프레임을 공고히 하는 데 일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너무 쉽고, 무엇보다 가혹하다. 시대적 상황이라는 것 역시 고려해야 하며, 다른 해석의 여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선 <비상>은 모성이 제약일 수 있음을 드러냄으로써 어머니의 완전무결한 사랑에 균열을 내기도 한다. 이를 통해 어머니는 마침내 성모의 왕좌에서 내려와 인간의 자리를 되찾게 되며, 그의 사랑 역시 자신의 불완전함을 여과 없이 드러낼 수 있게 된다 — 이러한 의미에서 이 작품은 홍기하의 <모자상>과 비슷한 태도를 일부 공유하고 있기도 하다. <비상>이 선사하는 고요한 해방의 순간은 바로 이 불완전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해방은 구체적인 삶의 조건과 씨름해본 불완전한 이들만이 맛볼 수 있는 특권이다. 이 작업이 왠지 모르게 마음을 울리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여기서 느껴지는 해방감은 초월보다는 순전한 자유의 감각에 더 가깝다. 초월은 내가 나 아닌 것으로 스스로를 내던질 때 성립하지만, 이 작업에서는 '나'라고 하는 형식이 어쨌든 굳건히 유지되고 있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무한한 해방감을 즐기고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이며, 나는 무아지경에 도달함으로써 무한을 향해 확장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무한이 내게로 미세하게 새어 들어오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상>이 '나'를 보존하고자 하는 동일성의 원리에 철저하게 지배되고 있는 것 같지도 않은데, 그 이유는 이 작업에서 움켜쥠의 힘과는 완전히 상반된 펼침의 힘, 거의 해탈에 가까워 보이는 자유 그 자체를 향한 염원이 함께 감지되는 까닭이다. 요컨대 이 작업이 전달하는 해방감은 자아와 무아의 사이의 흔들림에서 발생하는 듯하며, 이 지점에서 삭제되어온 어머니의 자아가 역설적으로 복원된다.



윤영자, 율, 1974, 브론즈, 75×27×51cm
제공 ⓒ 노해나 기획자


반면 <율>은 확실히 초월에 가까운 운동을 보여준다. 이 작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기독교적 금언을 상기시키며 레비나스의 아가페적 사랑과 모성을 연결한다.
생각이 이런 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 작품 오른편에 임송자의 <부활예수상(안양성당모형)>(2004)이 배치되어 있었던 데다가 — 임송자는 이웃의 얼굴에서 성인의 얼굴을 본다 — 윤영자가 실제로 독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는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에서 이웃, 즉 절대적 타자를 향한 노출을 모성과 연결했다.
그에게 있어 '주체'라 함은 이와 같은 완전한 노출의 효과와 다름없는 것이다. 노출은 주체의 의도와는 완전히 무관하게 이루어지기에 주체는 전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자이기도 하다.
레비나스가 주장하는 책임의 윤리는 주체가 동일성을 유지하려는 욕망 — 예를 들면 허기를 채우고자 하는 미각 — 에 반해 타자를 대신하는 순간 — 제 입 안의 빵을 꺼내 이웃에게 내어줄 때 — 비로소 시작된다. 레비나스는 이를 가리켜 '어머니의 몸과 다름없는 심성'4)이라고 설명한다.

꽤나 보수적으로 들리기도 하는 이 대목과 관련해 캐나다 철학자 리사 군터는 '어머니의 몸'보다는 '다름없는'이라는 단어에 주목하자고 제안한다. 어머니의 몸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라도 어머니의 몸과 '다름없는' 심성을 갖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이다. '제가 이 온 백성을 배기라도 하였습니까? 제가 그들을 낳기라도 하였습니까?' 5)라고 신에게 항의하는 모세의 어머니됨(motherhood)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 과정에서 누구라도 내적 갈등에 시달릴 수 있으며 자신의 불완전함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다. 이로써 우리는 성별이나 자식 유무와 관계없이 누구나 따를 수 있는 모성적 윤리를 상상하고, 모성이 자동적으로 여성 혹은 책임과 같은 개념과 연결되는 흐름을 끊어낼 수 있게 된다.6) 그렇게 모성적 윤리는 남성으로 대표되는 인류를 얼마간 여성화한다.7) 윤영자의 작품 역시 레비나스의 윤리처럼 상당히 보수적인 언어를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힘들 듯하다. 하지만 <율>이 은은하게 내비치는 수동성의 감각이 (적어도 내게는) 어머니의 몸과 '다름없이' 이웃에 응답하는 모성적 윤리를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었다.

이런 식으로 전시는 연상작용을 통해 삶의 어떤 측면들을 작품으로 소환하고, 관람자에게 그 광경을 목도하라고 요청한다. 기획자는 이번 전시에 삶의 질감을 담아내고 싶었다고 밝혔다: '⟪조각 여정⟫은 우리의 삶과 미술을 따로 떼어내 볼 게 아니라 조각과 그 삶의 다채로운 정서와 생활, 환경, 조각계, 미술계의 긴장과 힘이 얽혀 있다는 것을 제시한다.'8)
그간 저자와 분리되어 일종의 '텍스트'처럼 작동하던 작품을 저자 및 외부 세계와 다시 연결하고자 하는 의도로 읽힌다. 그렇다고 해서 작가의 의도 혹은 작품을 둘러싼 맥락이 '올바른' 해석의 기준점이라고 주장한다는 말은 아니다. 이 전시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어떤 것에도 쏠리지 않으면서 이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해석이라고 해야 할까.
여기서 작품과 작가 그리고 세계는 서로를 형성한다. 작가는 삶의 과정 가운데서 작품을 제작하고, 작품은 다시 작가를 변화시킨다. 그리고 둘 사이의 틈에 셀 수 없이 많은 요소들이 끼어든다 — 이를테면 감상자, 전시, 비평, 가부장제 등등. 이것이 아카이브 섹션에서 완결된 나의 관람이 결과적으로 끌어낸 해석이다.

특별히 조각이라는 장르를 선택한 이유도 아마 여기에 있을 테다. 기획자는 '조각은 개인의 경험과 시간의 층위를 고스란히 현현하게 하는 물질 같다. 신체의 힘과 정서가 그 표면과 물질에 각인된다'9)라고 얘기한다. (이게 꼭 조각만의 특성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기획자의 말이 타당하다면 조각은 삶과 작품을 재접합하기 위한 시도에 가장 적절한 장르일 수 있다.
다만 작품 하나로 삶의 질감을 충분히 담아내기에는 다소 역부족이었던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이토록 야심 찬 주제를 담아내기에는 전시 공간이 너무 협소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고백건대 전시 서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이 전시가 전달하고자 했던 바를 직관적으로 감지할 수 없었을 것 같다. 가능하다면 훗날 더 규모가 큰 공간에서 보다 더 확장된 전시로 다시 한 번 만나볼 수 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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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태만, 『한국 현대조각사 연구』, 파주: 아트북스, 2007 년, p.288.
2 김정숙 외, 『반달처럼 살다 날개되어 날아간 예술가 - 조각가 김정숙의 삶과 예술』, 파주: 열화당, 2001, p.47.
3 오광수 (2001), p.306.
4 에마뉘엘 레비나스, 『존재와 달리 또는 존재성을 넘어』, 문성원 옮김, 서울: 그린비, 2021, p.148.
5 가톨릭 성경, 민수기 11 장 12 절. https://bible.cbck.or.kr/Knb/Nm/11 (2022 년 8 월 17 일 접속).
6 오해의 소지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면, 군터는 레비나스의 모성적 윤리가 얼마간 인류를
여성화(feminization)한다고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해석이 가부장적 맥락에서 그려지는
이상적 여성상을 공고히 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우려를 표한다. 따라서 그는 어머니의 몸과 '다름없이'
되기를 지향하는 모성적 윤리가 재생산과 어머니됨에 관한 페미니즘 정치를 필요로 한다고 강조하기도 한다.
7 Lisa Guenther, ''Like a Maternal Body': Emannuel Levinas and the Motherhood of Moses', Hypatia,
2006, vol 21, no 1, p.121, 131.
8 노해나, ⟪조각 여정: 오늘이 있기까지⟫ 리플렛.
9 위 글.




안소현(1991- ) 홍익대 예술학과 박사 재학. 2021년 골드스미스, 런던대학교 현대미술이론 석사 졸업. 202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 평론 부문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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