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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건축 앙가주망 종이와 콘크리트전: 한국 현대건축운동 1987-1997

송종열

전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우선, 전시 제목이 ‘종이와 콘크리트’다. ‘한국 현대건축운동’은 그저 운동 기간을 특정하기 위한 수식어로 밀려나고 특정 기간 1987년-1997년(10년)에만 주목했다. 




종이와 콘크리트전


기획자의 설명에 따르면, 종이는 ‘담론의 축적물’이며, 콘크리트는 ‘담론을 물질화한 결과물’이라 한다. 맞는 얘기 같으면서도 뭔가 일반화로 숨어버린 듯한 뒷맛을 남긴다. 그런가? 우리 건축에 ‘담론의 축적’이라 할 만한 게 있었던가? 그리고 콘크리트는 오히려 건설 산업(토목)이 국가경제발전을 주도한 ‘개발독재시대’의 아이콘이 아닌가. 엄밀히 말해, 콘크리트는 ‘담론을 구체화 시킨 것’이 아니라 ‘담론을 배제한’ 개발정책의 은유나 다름없다. 이런 관점에서, <종이-담론>, <콘크리트-구체화된 결과물>이라는 연결고리는 지난 30년 한국건축의 상황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낸 것이라기보다 ‘이러저런 일반화’에 슬쩍 묻어간 것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해방을 맞이한 지 70여 년이 지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그 10년(1987-1997)만을 얘기하는 것일까. 아니 얘기할 수밖에 없을까. <운동>이라는 관점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스펙트럼이 십 년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뜨거운 십 년’도 아니다. 우리 건축계의 노력과 한국현대건축이 생산해낸 담론을 점수로 매길 것까지야 없지만 어쨌든 한국현대건축의 결실이 얼마나 초라한지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숫자가 아닌가 싶다. 그마저도 ‘운동이라 할 수 없다’는 핀잔이 나오는 상황은 무엇 때문일까. 이런 상황은 담론의 생산능력과 무관심에서 비롯된 것일 터다. 혹자는 한국사회가 담론을 생산해낼 만한 여유가 없었다고, 그러니까 ‘먹고사는 일’이 더 시급한 문제였다고 할지 모른다. 사회적 실천과 운동을 촉발하는 근본 계기가 ‘위기와 절박함’이라는 걸 안다면 그 같은 주장이 핑계에 가깝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전시의 뼈대를 구성하는 ‘운동 지점들’을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을 기점으로 ‘사회저항’의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건축계의 흐름은 세 가지 양상을 보였다. 한편으론, 건축의 사회적 역할을 묻고 실천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다른 한편으론, 개인의 건축언어를 찾아가려는 개별적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뒤를 이어 ‘건축가 권익 보호를 위해’ 불합리한 관행과 제도개선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첫 번째 경향에는 청년건축인협의회(1987-1991), 수도권지역학도협의회(1988-1990), 건축운동연구회(1989-1993), 민족건축인협의회(1992-) 등이 있고, 두 번째는 1990년 4월 3일 30·40대 건축가 위주로 결성된 4·3그룹을 들 수 있고, 마지막 경향으로는 건축과미래를준비하는모임(1993-2000)이 있었다. 이들 그룹의 궤적을 보면, 1980년대 중반, 특히 1987년 민주항쟁 이후 ‘사회적 건축’이란 기치를 내걸고 발족했지만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에 들어 사회적 비판의 예봉은 급격히 무뎌졌다. 이 배경에는 노태우정부의 주택200만호 공급(1998-1991), 일산·분당 신도시 건설, 그리고 문민정부(1993)가 들어서면서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분위기가 있었다. 요컨대 건설시장의 폭발적 성장과 맞물려 눈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파이’를 외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건축계의 ‘비판적 담론과 실천’에 대한 관심은 그 이후 급속도로 사그라들었다. 1990년대 중반, 서울건축학교(1995-2000)와 경기대학교 건축전문대학원(GSAK, 1995-2006)설립과 운영은 그나마 ‘건축교육 혁신’에 대한 자각과 의지의 발로였다. 


건설 붐을 타고, 그 운동들이 일시에 시들해졌다는 사실은 곱씹어봐야 할 대목이다. 오비이락(烏飛梨落)이라 했던가. 이 시기 한국건축의 뚜렷한 경향으로 등장했던 ‘작가주의’ 역시 미심쩍다. 그 변화의 바탕에 사회적 실천을 전제로 한 ‘공적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스스로 ‘자본의 상품’이 되고자 했던 욕망이 깔려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당시 건축이 관여했던 사회비판적 실천이 그토록 허무하게 무너질 리야 없지 않았을까.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혐의는 그래서 나온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진행되고 있는 〈자율진화도시〉전의 키워드는 단연 ‘자율-진화’다. 하지만 시간의 축을 따라 곳곳에 박힌 수많은 건축물은 어떤 것도 도시의 ‘자율진화’와 관련이 없다. 작가주의에 걸맞은 다양한 표정들만 있을 뿐 지속가능한 도시 공간이나 삶에 대한 탐색도 없으니 수사에 그칠 뿐이다. <종이와 콘크리트전>, <자율진화도시>를 관통하는 낱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앙가주망’이다. 이 단어에는 ‘실존 자유, 사회 비판적 관심과 참여, 개입, 실천, 사회(상황)변화’라는 말들이 들러붙어 군집을 이루기 때문이다. 


6월 민주항쟁이 있은 지 올해로 30돌이다. 한세대를 훌쩍 넘어 ‘한국 민주주의’ 바통을 2016-2017년 촛불이 받아들였다. 민주주의에는 완성이란 마침표를 찍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김성홍은 <종이와 콘크리트전>에서 30년의 세월을 언급하며 “(우리의) 건축운동은 미완성이며, 실천과 실험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옳은 주장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지속적 관심과 개입’이 전제되어야 한다. 문제는 지금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데 있다. 단지 한 세대! 시간의 진자는 변함없을 텐데, 망각과 무관심은 우주만큼 먼 거리를 만들어냈다. 일분일초라도 손안에 스마트폰이 없으면, 답답함과 고통을 호소하는 세대들에게 ‘그 가혹했던 시절과 사회저항’은 사실 다른 나라 얘기다. 말하자면, 이런 전시가 아니라면 한국건축의 ‘짧은 과거’조차 대면할 기회가 없을 것이란 얘기다. 비록 당시의 실천(행위)들이 오늘날 유의미한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래서 운동이라 이르기에 민망할 지경이라도 ‘시대의 결, 그 자체’를 보여준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다. 어떤 형태로든 후학들에겐 남길 수 있는 교훈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종이와 콘크리트전>은 격동의 시대를 맞이해 한국건축계가 보였던 대응방식과 한계를 동시에 읽을 수 있는 드문 기회였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는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의 궤적을 추적하고 관계망을 만들었지만 섣부른 평가를 내리지 않으려 한다”는 기획자의 말은 계속 맘에 걸린다. 특정 시대를 조명하는 일은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평가’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키 때문이다. 기획의도와 ‘전시의 시의성’도 이와 무관치 않은 까닭에 (오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서라도) 적극적인 평가와 해명이 따라야 했다. 전시에 대한 느낌과 평가는 관객의 몫이지만, 모든 걸 관객에게 떠넘기고 한발 물러선 대목은 두고두고 아쉽다.


지젝의 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사회-초월적 아프리오리, 사회-정치적 관계의 매트릭스”다. 그만큼 자본주의의 촘촘한 그물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얘기다. 건축 역시 자본의 망치 소리에 발맞춘 지 오래다. 게다가 〈먹고사니즘〉은 한때, 삶의 절박한 사태에 직면한 ‘민중의 노고’를 은유하는 말이었지만, 이젠 이기주의와 온갖 ‘불합리와 부조리’를 용인하는 핑계로 전락해버렸다.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폭탄은 ‘먹고사는 문제’는 극적으로 해결했지만 ‘함께 사는 문제’를 전혀 고민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더 늦기 전에 〈함께사니즘〉을 고심해야 한다. 타인을 끌어안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건축이 붙들어야 할 ‘마지막 화두’다.



송종열(1970- )『건축평단』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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