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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자하연

최열

관악산 자락 일대를 점거하고 있는 서울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면 언제나 나는 자하연(紫霞沿)을 찾는다. 몇 해 전부터 이 학교 강의를 맡아 학기 중이면 매 주 출근하다시피 하거니와 여름방학이 끝난 9월 1일 들렀더니 낯선 풍경이 맞이한다. 연못 가에 신위 동상을 얹은 기념비가 우람하게 선 것이다.




관악산에서 신림동 쪽으로 흐르는 신림천 계곡을 일러 북자하동 계곡이라 하는데 오늘날 서울대학교 정문으로 통하는 길이다. 바로 이곳이 신위(申緯1769-1845) 가문의 세거지였다. 17세기 어느 땐가 평산신씨 신여석 (申汝晳), 여철(汝哲) 형제가 입주하여 제일계산(第一溪山)이라 불렀고 그 들은 이곳 자하동에 묻혔다. 대를 이어 내려오다가 신위가 태어나 16살 때 이곳 자하산장(紫霞山莊)에 올라 독서를 하였다. 30살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가 오랫동안 자하동을 떠났으나 아호를‘자하’라 하고서 바꾸지 않았으며 50살이 넘어선 1822년에도‘자하산 아래 이르지 못한 것이 어언 19년, 그곳은 원래 우리집 산’이라고 읊조려 결코 잊을 수 없을 고향으로 가슴에 두고 있었다.
강화유수 재직시인 1830년 탄핵으로 사퇴하고서야 비로소 자하동으로 퇴거할 수 있었는데 이 때 자하동 곳곳을 시로 읊었고 또한 <동인논시절구(東人論詩絶句)>, <소악부(小樂府)>와 같은 절창을 냈다. 그러나 시절은 신위를 요구하여 1832년 4월 도승지로 임명되어 자하동을 떠나야 했고 1845년 끝내 돌아오지 못한 채 한양 땅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먼저 별세하여 자하산에 묻힌 부인의 묘소 바로 곁에 자신의 자리 보아 두었는데 죽어서야 비로소 돌아왔던 것이다. 지금 신위의 묘소는 어딘지 흔적조차 없거니와 자하산은 관악산 자락 국사봉(國士峯)으로 지금 상도동 약수터 를 말한다. <하지만 나는 자하산장이 있었던 자하연이 훨씬 좋다. 점심이건 저녁이건 들러 크지 않은 연못 둘레를 거닐면 어쩐지 곱고 조그마한 노인이 나타나 그윽히 보고계실 만 같아서다. 그리고 말씀하시길‘네가 우봉 조희룡을 좋아하여 추사 김정희를 소홀히 여기는 우를 범해선 안될 것이다’라고 하시는데 19세기 전반기 예원의 지도자인 그 분의 말씀 어찌감히 거스를 수 있겠는가. 우뚝 선 지도자 자하 신위의 왼쪽에 사대부 예원의 좌장 추사, 오른쪽에 중인 예원의 좌장 우봉이 자리하고 있으니 자하연 가에 앉아있을 때면 문득 세 분의 모습이 한꺼번에 떠오르는데 마치 꿈결 같다

※ 신위(申緯1769-1845)는 예원의 총수 강세황의 말년 제자로 그 대통을 이어 19세기 전반기 예원에 군림했다. 물론 남인으로 세도가와는 거리를 두어 화려함을 다투지 않았거니와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인품과 역량으로 예원의 흐름을 이끌었는데 당대 지식인들이 시서화가 하나의 법임을 모른 채 그림 그리는 일을 화원에게만 맡겨 두고 있어 이처럼 예원이 낙후되었다고 꾸짖었다. 조선 오백년 최고의 시인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고 또 대나무 그림에서 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는데 왼쪽에 추사 김정희, 오른쪽 에 우봉 조희룡을 거느린 당대 예원의 좌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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