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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조선중앙일보사 사옥

최열

1924년 3월 최남선이 <시대일보>를 창간하여 기존의 동아, 조선을 압도하는 호소력을 발휘하였다. 자본의 열세를 겪던 시대일보사는 1926년 11월 판권을 이상협에게 인계하였고 이상협은 <중외일보>로 개제하여 민족의 선봉과 척후를 자임하였다. 하지만 경영난으로 1931년 9월 중단, 11월 <중앙일보> 속간했다가 1933년 2월 여운형(呂運亨)을 사장으로 영입하면서 <조선중앙일보>로 개제하였다. 뛰어난 수완을 발휘하여 경영을 정상화한 여운형은 신문사에 정치범 출신을 다수 채용하였다. 본사에 20여 명의 지국장들은 한결같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자’를 자처하였으므로 세간에는 ‘적색신문’이라는 소문이 공공연했다. 당시 <조선중앙일보>는 친일귀족의 비리보도와 학생, 노동자, 농민 관련 보도 및 체육활동 보도에 집중하여 애독자가 급증, 최대의 일간지로 군림하였다.

여운형은 전후 두차례의 투옥생활을 마치고 1935년 2월 출옥한 김복진(金復鎭)을 학예부장으로 채용했다. 김복진은 여운형의 배재학당 후배였으며 여운형이 1929년 투옥 당했을 때 서대문형무소에서 만난 이른바 감옥동지였다. 의기투합한 이들은 혼신의 기력을 다해 민족언론으로 육성해 나갔지만 1936년 8월 13일 저 유명한 베를린 올림픽 우승자 손기정 시상식 장면을 보도하면서 가슴에 달린 일장기를 말소한 사진을 내보냄으로써 끝내 폐간당하고 말았다. 흔히 일장기말소사건에 대해 미술동네 사람들은 동아일보와 이상범을 떠올리지만 이것은 이상범과 동아일보가 뒤따라 같은 행동을 한 것일뿐, 사실은 조선중앙일보사 체육부 및 사진기자의 거사였다. 이 때 학예부장 김복진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 밝혀진 바 없거니와 사장실이 체육구락부와도 같았다고 하는 조선중앙일보사 분위기로 미루어 구성원 대부분이 뜻을 함께 했었을 터이다.





검열을 통과하여 지나칠 수 있었던 이 거사는 동아일보사가 모방하여 8월 25일자 제2판에 말소사진을 게재했고 곧장 검열에 걸려 즉시 수사가 시작되었다. 당연히 조선중앙일보사에 대한 수사도 시작되어 끝내 두 언론은 휴간을 당해야 했다. 조선중앙일보는 휴간 뒤 폐간에 이르렀고 따라서 일장기말소사건은 해방 뒤 동아일보의 전유물로 바뀌고 말았다. 하지만 지금 조선중앙일보사 사옥이었던 건물은 여전히 농협 소유로 건재하고 있는데 이 건물 앞을 너무도 자주 지나치는 나는 70년전 이곳으로 출퇴근 했을 사장 여운형, 조각가 김복진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혹 그림자가 밟힐지도 모른다는 몽상에 빠진 채로 말이다.



※ 김복진(金復鎭1901-1940)은 동경미술학교 조각과를 졸업하고 숱한 제자와 후배를 양성하였으며 이론 및 비평으로 미술사의 새로운 장을 개척한 20세기 미술의 참된 스승이었다. 특히 카프 내의 유일한 조선공산당 당원으로서 학생 및 문예 부문 조직담당자로서 카프 중앙위원 서열 1위에 올라 당대 문예운동을 이끌었다. 그 댓가로 검거 당해 무려 5년 6개월을 투옥당해야 했지만 출옥 한 뒤 1940년 8월 별세할 때까지 변화한 시대조건에 조응하여 새로운 단계의 창작과 비평활동을 눈부시게 전개해 나갔다.

- 日雲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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