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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이태준 고택

최열

김용준(金瑢俊)과 이태준(李泰俊)은 둘도 없는 지상의 벗이었다. 동갑내기였지만 스물이 넘었을 때 현해탄 건너 동경에서 처음 만났는데 운명이었던지 두 사람은 생애가 끝날 때까지 모든 것을 함께 했다.

동경미술학교 학생 김용준이 백치사(白痴舍)란 조직을 만들고서 백귀제(百鬼祭)란 망년회를 열어 귀신 흉내들을 내며 악마주의에 빠져들었을 때 이태준이 여기 함께 했던 일을 떠올려 보면 아마도 사람만의 인연이 아니었던 게다. 미술비평 분야만 하더라도 김용준이 훨씬 일찍 시작했지만 이태준 또한 못지 않은 문제작을 발표하였고 또한 문학과 미술 양쪽에 심미주의와 상고주의(尙古主義)를 짙게 드리워 1930년대를 수놓았던 것이다. 특히 두 사람은 <<문장>> 동인으로 동반자임을 과시했던 것인데 특히 이태준의 <무서록>,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한국 수필문학 역사상 위대한 쌍벽이라 할 것이다.





이태준이 숲 우거진 성북동으로 파고든 1933년은 모더니즘 문학운동의 근거지인 구인회를 조직하던 바로 그 해였다. 김용준도 이무렵 성북동으로 옮겨왔을 것이다. 이태준의 수연산방(壽硯山房)과 김용준의 노시산방(老옥山房)은 이렇게 해서 조선상고주의의 요람이 되었고 이후 숱한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빨려들어 갔다. 다음해인 1934년 전형필(全鎣弼1906-1962)이 이곳에 오늘의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터를 마련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지금은 김용준의 노시산방은 오간데 없고 간송미술관과 수연산방만 남아 그 시절 조선 제일의 향기를 뿜고 있거니와 지나칠 때마다 김용준의 메마른 걸음걸이를 음미하게 하곤 한다.

※ 김용준(金瑢俊1904-1967)과 이태준(李泰俊1904-1960년대초)은 미술과 문학 분야에서 나란히 심미적 정신주의 미학을 절정으로 이끌어 올린 이들로 조선 고전을 사랑한 예술가였다. 두 사람 모두 월북했지만 남한의 연구자들이 나서서 방대한 분량의 전집을 간행할 만큼 중요한 업적을 쌓았고 세기가 바뀐 오늘날까지 여전히 잊혀지지 않고 있다. 김용준의 노시산방은 1944년 김환기에게 넘겨졌는데 김환기가 떠난 뒤 사라져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다만 이태준의 수연산방이 원형을 유지한 채 찻집으로 꾸며놓아 많은 이들이 발걸음을 옮겨 그 추억을 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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