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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광통관

최열

1910년 3월 13일 광통관(廣通館)에서 한일서화전람회 개막식이 열렸다. 대한제국 황족과 관료 및 통감부의 일본인 관료가 소장한 서화골동품을 진열한 전시장은 매우 현란했다. 당시 광통관은 청계천을 가로지르는 광교(廣橋) 남쪽 대로변에 새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었다. 1909년 7월 3일 완공한 광통관은 그 무렵 일본과 조선에 유행하던 서양식 건축의 물결을 따른 것이었다. 한일전람회를 주도한 인물은 일본인들이었는데 이들이 조선의 골동품 전시장으로 광통관을 선택 이유는 아무래도 균형과 조화가 완벽하여 찬탄을 빚어낼 만큼 아름다운 건물이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광통관 전람회는 휘호행사도 겸했는데 조선인 및 일본인 20명이 나란히 참여했다. 1909년 3월은 바야흐로 일본이 조선을 강제합병 하기 직전 폭풍전야 시절이었지만 당시 대한제국 주류미술계는 일본의 지원을 받아 역량을 육성해야 한다는 이른바 자강운동 노선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조선과 일본의 우호관계를 긍정하고 있었다.





오늘날 광통관은 우리은행 지점으로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 누구도 이곳이 미술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있거니와 그 시대의 미술문화 풍토를 압축해 보여주는 전람회를 열었던 공간이었음을 이제부터라도 뚜렷하게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바로 이곳 광교 일대는 조선시대 전 기간에 미술시장의 중심지였으며 광통관이 들어설 무렵에도 여기 서화사(書畵肆)가 즐비하여 최대의 미술시장임을 과시하고 있었음을 떠올릴 일이다.





미술시장 공간을 상징하는 광통관을 미술시장역사박물관으로 가꿀 수 있기를 바라는 이유가 거기 있음을 안다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겠는가.

식, 조석진 그리고 오세창이었다. 특히 오세창, 안중식은 개화당 당원으로서 당시 자강운동 세력의 중심에 서 있으면서 조직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한일서화전람회에서도 상당한 역할을 수행했을 법한 이들에게 광교 일대는 자신들의 무대였을 것이다. 이를테면 오늘날 인사동이 미술인의 무대이듯이 말이다. 사실 인사동 일대가 미술중심지로 떠오른 때는 20세기 들어와서였고 사간동 일대는 21세기에 이르러서이니 광통관을 요충지로 하는 광교일대는 조선시대 내내 미술핵심지대였고 또한 안중식을 중심으로 하는 미술계 주류의 무대 또한 바로 이곳 광교일대였다. 서화미술회가 바로 이 지역에 장기간 자리했던 것이다.


- 日雲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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