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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이도영 공업전습소

최열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산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1906년 전환국의 기계시험소를 개편한 공업전습소를 창설하였다. 염직, 직조, 제지, 금은세공, 목공과 같은 분야를 교육하고 연구하는 기관 공업전습소는 부국강병의 기초를 육성하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이상을 담은 보금자리였다. 단정한 가운데 화려하여 제국의 미래상을 압축하는 형상을 갖춘 공업전습소 청사는 1907년 독일식 나무벽에 르네상스 양식을 도입하여 착공했다. 목조 2층 건물로 1908년 준공하여 입주했다. 이곳에 스물 넷 청년 이도영이 교수인 기수(技手)로 임명받은 것은 그 전신인 전환국 교육과정을 졸업했기 때문이었을 뿐 아니라 당대 실력자강운동가로 활약하고 있었던 탓이었다.





이도영은 교수로 재직하면서 <<도화임본>>과 같은 교과서를 저술하였던 산업 디자인 분야의 교육자였다. 더불어 이도영은 당대 고전형식파의 정통계보인 안중식, 조석진 문하의 수제자로써 서예와 회화 분야의 신예로 자라났으니 공업전습소는 그의 무대였던 것이다. 전환국 시절 교수이자 스승 조석진 또한 1908년 공업전습소 촉탁으로 도자기에 그림을 그리는 일을 맡았으니 공업전습소는 문명개화사상을 수용한 미술인의 요람이 었던 것이다.





공업전습소 건물은 강제합병 뒤인 1912년 4월 폐지당하고서 중앙시험소로 유지되다가 해방 뒤 상공부 소속 국립공업연구소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전쟁의 참화와 개발열풍에도 불구하고 이 건물은 지금껏 파괴당하지 않은 채 존속하고 있거니와 서구식 목조건물 가운데 유일한 것이다. 지금은 방송통신대학 건물로 사용하고 있지만 언젠가 이 건물은 국립서양디자인박물관으로 전환해야 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 이도영(李道榮1884-1933)은 장승업, 안중식, 이도영으로 이어지는 19세기말 20세기 초 고전형식파 양식의 적통을 이은 명가이지만 오늘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못하다. 이를테면 대상 묘사력은 있지만 진수에 이르지 못했다는 식의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편협한 평가보다는 이 시기 수묵채색화 전반에 대한 폄하 분위기에서 평가절하 당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다. 1898년 조석진이 기수(技手)로 근무하고 있던 전환국에 입학한 이도영은 1901년 전환국을 수료하고서 안중식 문하에 입문, 이후 실력자강운동가로 활약하였으며 1910년대부터 식민지조선 미술계의 중심을 장악한 독보이자 단아함과 유연함을 특색으로 하는 절정의 작품을 쏟아낸 당대 거장이다.

- 日雲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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