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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이하응 운현궁

최열

이하응은 19세기 후반 최고의 사군자화가였다. 그의 호를 딴 석파란(石坡蘭)은 당대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거니와 21세기인 지금에도 여전히 빼어난 자태를 과시하고 있는 중이다. 너무도 많은 애호가가 즐비하여 위작이 진작보다 훨씬 많을 지경이라는데 실로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날렵하고 또한 호방하되 세부로 가면 가냘프지만 비단 올처럼 강인하여 결코 끊어지지 않을 질긴 생명력을 머금고 있다. 이런 위력 탓인지 왕족의 기품 그대로라는 평가가 적격이다.





이하응이 살던 운현궁(雲峴宮)은 처음에야 그리 넓지 않았으되 아들이 왕위에 오르자 터를 넓히고 건물을 지어 거대한 궁궐에 방불해졌다. 아들 고종이 1863년 12월 왕위에 오르자 1864년 조대비가 이하응의 저택 이름을 운현궁이라 지어주고 여러 채의 건물을 세우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때부터 이하응은 대원군으로 세도를 누리며 조선 국운을 좌우하던 끝에 10년만에 정권을 내주고서 1873년 운현궁을 떠나야 했다. 청나라로 납치를 당했다가 1885년 귀국해 운현궁에서 10년을 보냈으나 또 다시 이곳을 떠나 은거를 강요받았고 겨우 생애의 끝 무렵에야 귀가할 수 있었다.





그 파란만장의 세월을 겪으며 또한 이하응은 당대 예원의 후원자로써 군림했다. 스스로 추사 김정희를 이었으되 독자한 양식을 창안해 냈던 이하응은 1875년 5월 노안당(老安堂)을 전시장으로 꾸미고 ‘매화루(賣畵樓)’란 글씨를 내걸었다. 이곳에서 난초그림을 판매하기 시작했는데 끝이 없어 한달만에 그만 두었다. 창작의 산실이자 유통의 시장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역사의 숨결을 머금고 있는 운현궁은 그러므로 정치사의 산실이면서 또한 미술사의 근거지였다고 할 것이다.

- 이하응(李昰應1820-1898)은 사도세자의 후손으로 자신의 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왕권으로부터 멀어진 처지였다. 그러므로 이하응은 숱한 이들과 교유하면서 특히 예술가들과 깊이 사귀었다. 19세기에 급격히 부상한 중인예원의 명가들과 사귀며 후원을 아끼지 않아 커다란 지지세력을 확보하였고 또한 제주도에 유배 가 있던 김정희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예술로 사귀는 가운데 어느덧 스스로 빼어난 서화의 경지에 도달했다. 고종의 섭정으로 숱한 개혁정치를 실현했지만 밀려나 파란의 생애를 살다가 사라져야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석파란’은 독보의 세계로써 지금도 여전히 애호가의 사랑을 얻고 있고 또한 미술사상 위대한 성취로 기록되어 있다.

- 日雲미술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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