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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우선 액자의 유리부터 떼어 내자

박원식

전시장을 찾아간 손님 몇에게 그 전시의 주인이 다과를 내 놓는다. 손님들은 차를 마시며 반짝이는 비닐 봉지 안에 든 크림빵을 꺼내 먹는다. 손님 중의 한 사람인 나는 비닐 봉지 안에 든 크림빵을 비닐 봉지째로 입에 넣고 씹는다. 비닐 봉지째로 씹으니 빵이 제대로 입에 들어갈 리가 없다. 그런 상태로 두어 번 씹고 있으니, 같이 간 일행들이 의아한 눈으로 보다가 말을 건네온다.

“박선생님, 비닐 봉지 벗기고 잡수셔야죠.”
내가 답한다.
“저기, 벽에 걸린 유화 그림에 유리 끼워 놓은 액자도 있는데, 비닐 껍질째 빵 씹어 먹는 것이 뭐가 그리 이상한가요?”
위는 아직 실행하지 못한 나의 ‘현장 퍼포먼스’ 시나리오다.
일전에 전시장을 돌다가 액자에 유리를 한 작품을 보고서는 나는 작가에게 말을 걸었다. 한 손으로 작가의 윗도리 어깨 부분을 쓰윽 긁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액자에 유리는 왜 했습니까? 이렇게 옷 입은 채로 긁으면 시원합니까?”
그 작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고려해 보겠습니다.”고 겸손한 태도로 나의 말을 받아들였다.
액자에 끼워진 유리는 작품 감상에 방해가 된다. 유리면에 사물들이 비치어서 심하게 번들거린다. 유리가 든 액자의 전면에 서면 어김없이 선 사람의 상(像)이 비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작가들에게 이렇게 묻기도 한다.
“당신의 작품 위에 유리를 끼운 것은 유리를 통해서 감상자의 모습이 겹쳐서 보이는 것을 의도하신 겁니까?”

이는 유화만의 문제가 아니다. 족자를 생각해 보자. 족자에다가 유리나 아크릴을 덮어 씌우는 것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렇게 덮어 씌우는 것이 사실상 족자의 형태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족자로 해도 될 작품을 액자로 하면서는 유리를 갖다 붙이는 것은 무엇 때문일가? 먹과 종이의 내구성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왜 액자만 만들면 모두들 유리를 덮어씌우는 걸까? 작품의 보존을 위해서? 흔히들 작품을 더 잘 보존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자. 추사의 작품이나 이중섭의 작품이 애초에 유리로 잘 보존되었기 때문에 지금에까지 이어지고 있는가? 이중섭은 재료를 구하지 못해서 종이나 합판, 은박지에다가 그림을 그렸지만, 첨단의 기술들이 그 그림의 보존을 위해서 동원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작가 정신이나 작품 내용에 대한 천착은 소홀히하면서 작품을 포장하는 껍데기는 유별나게 신경쓰는 우리의 풍토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재료학이나 보존학에 충실한 것일까? 이내 용도 폐기되어서 쓰레기로 화할 작품에다가 철갑 포장을 한다고 해서 그 작품의 생명력이 더 오래가는 것일까? 오히려 훌륭한 작가는 진짜 쓰레기에다가 작가의 혼을 불어넣어서 그 쓰레기를 예술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래서 그는 인접 과학에게 보존을 위한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는 사람이다. 작품의 내구성을 고민하는 작가들은 물질의 내구성에 앞서 예술품으로서의 생명력에 대해서 더 진지하게 성찰해 봐야 할 것이다.

포장과 껍데기를 제거하자
우리 미술계에 너무도 만연해 있어서 나의 거실에까지 스며 들어와 있는 이 액자 속의 유리 문제는 단순히 액자의 문제에만 그치지 않을 성싶다. 한국 미술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학의 본질이나 작품의 내용보다는 포장과 껍데기, 곧 내실보다는 치장과 겉으로 드러나는 위세의 그늘에서 한국 미술은 서식해 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뿌리칠 수 없기 때문이다.




미술 대전의 문제나 미술 제도의 개혁 문제도 바로 이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나는 보고 싶다. 작품의 문제성보다도 오로지 겉으로 번들거리기만 하는 데에 한국 미술은 너무도 빠져 있어서 너도 나도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고 오늘에까지 이른 것이 아닐까?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내 거실에 걸린 액자의 유리를 돌로 쳐서 거미줄처럼 금이 가게 만들어 버렸다. 방사선 형태의 그 균열이 오늘 나에게 참으로 흐뭇하게 다가온다. 여가 봐서 깨어진 유리를 떼어내고 나머지 액자의 유리도 제거할 작정이다.


액자의 유리처럼 우리들의 눈에 희멀건히 끼어있어서 그것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눈꼽을 떼어 내는 일을 올해의 과제로 삼을 것을 한국미술계에 제언해 본다. 눈꺼풀만 제대로 씻고 나면, 사물들이 있는 그대로 보일 것이니 다음 일들은 시원시원하게 진척되리라.
나는 내 거실의 액자 유리를 돌로 치는 것으로부터 이 일을 시작하고자 한다. 이것이 어찌 구둘목 위의 퍼포먼스에만 그치겠는가? 아름드리 거대한 나무도 그 시작은 손톱만치 작고 여린 떡잎에서 비롯되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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