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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⑪-2

이영철

캄보디아의 현대미술

(1) 앙코르 와트
캄보디아의 역사는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6세기까지 인도 문명의 영향 아래 번영하였다. 해상 무역을 통하여 6세기 후반까지 발전하였으며 9세기초에 앙코르 왕국이 건설되었다. 앙코르 왕국은 12세기 말까지 번영하였으며, 그 사이에 인도 문명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앙코르톰, 앙코르와트 등 거대한 건축물이 세워졌다. 당시 앙코르의 건축과 부조(浮彫)는 크메르 미술의 최고봉을 이루는 것으로 인류의 불가사이한 문화 유산 가운데 하나라고 말해진다. 13세기부터 에 타이인(人)의 압박이 시작되었으며, 15세기 중엽에 앙코르를 포기하고 남쪽의 프놈펜 지방으로 도읍을 옮겼다. 베트남은 15세기 후반에 크메르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였다. 이후 크메르는 타이, 베트남 양 민족의 압박을 받아 쇠퇴해갔다.
프랑스의 개입에 힘입어 1863년 타이를 물리쳤으나 프랑스의 보호국이 된 이래 90년 동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일부가 되었다. 1940년 일본군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고, 1945년 일본의 조종하에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독립운동은 계속되었다. 일본 패전후 프랑스가 지배권을 회복하였으나 1947년 5월 노로돔 시아누크는 캄보디아 왕국 헌법을 공포하여, 프랑스도 1949년 11월 프랑스 연합 내의 한 왕국으로 인정함으로써 한정된 범위 내에서 독립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완전 독립은 1954년 7월 인도차이나 휴전 협정이 성립될 때까지 기다려야 하였다. 독립 이후 폴포트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유학파 지식인 계층이 귀국하여 1963년 학생시위를 벌인 후 노로돔 시아누크의 대규모 좌익 숙청으로 지하 조직화되었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공산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국내의 정치적 안정에 불안을 느낀 노로돔 시아누크는 1961년 타이, 1963년에 베트남, 1965년에는 미국과 단교하고 차차 용공정책으로 기울었다. 캄보디아는 1965년 월맹에게 캄보디아 동부지역에 보급로 설치를 허용하였고 미국은 베트남 전쟁을 캄보디아까지 확대하였다. 앙코르와트의 유적들은 동서 길이 20km, 남북 길이 10km. 고대 크메르 왕국 앙코르 왕조 시대(9세기 초~15세기 초)의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앙코르의 어원은 산스크리트로 나라 또는 도읍을 뜻하는 나가라에서 비롯되었고, 후에 캄보디아 사투리로 노코르(Nokhor)라 부르다가 이것이 다시 앙코르가 되었다. 이 지역은 1431년 크메르 왕조의 수도가 남동 메콩강(江) 유역으로 천도된 것을 계기로 버려지고 유적군의 존재도 잊혀졌는데, 그로부터 400년이 지나 열대 밀림 속에서 1860년 재발견되어 프랑스에서 본격적으로 보존과 연구를 진행했고 캄보디아의 대표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2) 미술
캄보디아 미술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때 우리는 즉시 유명한 앙코르의 신전들과 크메르족 문명의 영광스러운 시기의 조각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이러한 문화의 미술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특히 이들의 현대 미술품들을 관찰하기 위해서는 캄보디아 미술이 어떤 방식으로 정의되어 왔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고 이러한 정의들이 발전된 역사적인 맥락도 알아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의 보호관계(1863-1953) 수립과 함께 캄보디아에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미술 이미지와 문화 양식의 수가 급증했다. 초기 식민지 보고에 의하면 적어도 프놈 펜에서는 제작하는데 있어 정착된 전통 방식을 따르던 작가들이 그들의 예술작품에 새로 들어오는 이미지나 물건들의 일정하지 않은 요소들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는 1918년 프랑스 학자들이 왕실의 작업장의 행정력을 장악한 후 그것을 에콜 데자리 캄보디엔(Ecoles des arts Cambodgiens)으로 바꿔버리면서 새출발을 하게 된다. 학교의 공식 목표는 창시자인 조지 그로스리에가 ”순수한 크메르 미술“이라 여기는 것을 보존하고 장려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연구 방법 덕분에 그들의 과거, 그들의 문학, 그들의 종교 의식, 그들의 인습과 세월이 흘러가며 소멸하고 파괴되는 조상들의 예술작품들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이다“ 그로스리에의 감독 아래에 캄보디아 미술 학교는 크메르 미술이 어떠해야 하고 미술과 작가가 사회 내에서 어떤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지 기준에 맞는 작가들을 ”배출“하였다.
1940년대 후반에는 캄보디아가 독립을 막 하려는 때에 일본계 프랑스 인 화가가 학교에서 “현대 회화”를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스즈키를 초대한 것은 국가의 문화를 현대화하고 식민주의에 의해 규정된 모델과 다른 것을 제공하려는 보다 보편적인 운동의 일환이었다. 1950년대 내내 프랑스의 영향을 받은 일본의 인상주의적 현실주의를 학교에서 가르치며 스즈키와 그의 학생들이 오늘날에도 “현대 회화”라고 불리는 학과를 개설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형태는 이미 정착된 표현법에 대한 위협이라고 보여지기보다는 이른 후기 독립시기에 육성된 가능한 예술적인 정체성들의 풍부함을 보여주며 현존하는 캄보디안 미술의 연장과 칭찬으로 환영받았다. 불행하게도 특정한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대화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협상을 하는 이 시기는 폴 포트의 통치 기간에(1975-1979) 중단되었다. 대량 학살의 통치기간의 생존자들에게 처음부터 다시 문화를 재건해야 한다는 불가능한 과제가 남겨졌다. 가장 중요한 견본과 모델이(전통적인 형태를 전수하는데 너무도 중요한)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원들마저 잃었기 때문에 1980년도에 새롭게 다시 열린 순수 미술학교에 입학한 어린 세대를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생님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1980년대 중반에는 최근에 졸업한 학생들을 동부 유럽의 나라들로 유학을 보내 고등의 학위들을 마칠 수 있도록 하였다. 1990년대 초반에 그들의 귀국과 함께 생존한 선배작가들이 운영하는 워크샵들의 부활은 늘어나는 제작과 활동의 시대에 박차를 달았다. 이렇듯 소심한 문예 부흥에 의해 제작된 작품들은 크메르 현대미술의 전망을 그리려고 노력하면서 기억하는 근래 역사의 복잡함과 소란을 반영한다.

풍경
현대미술 장면의 빠른 전체상은 다음과 같은 요소들을 나타낸다: 제작과 만드는 것의 전통적인 형태를 물려주려고 고집하며 분투하는 몇몇 작가들; 최근에 돌아온 젊은 작가들이 자의식적으로 ‘현대적인 크메르의 미술’이라고 여기는 것을 만들기 위해 과거와 현재의 요소들을 하나로 봉합하는; 그리고 앙코르 와트의 기계적인 사본을 만드는 익명의 손 바다, 최신 약한 포르노 Apsaras, JayavarmanⅦ의 머리들의 반복과 상업적 그리고 관광 무역을 위해 그린 표지판. 이러한 형태의 그림과 조각이 그래도 인정되는 미술의 분류 안에 떨어지면 우리는 여기서 풍부한 시각적인 경험 또한 제공하는 현대적인 제사 의식과 일상에 사용되는 다른 세트를 만드는 실습들을 주목하게 된다.

Living Tradition 전통
보통 한 선생님으로부터 오랫동안 훈련을 받는 것으로 몇몇 작가들은 계속해서 이미 확립된 인간 등의 형상의 규범과 장식적인 방정식을 따라서 작품을 만든다. 연습은 그들을 특정한 가치를 지닌 ‘사물을 만든 제작자’로써 고정된 역할을 위해 준비시킨다; 주어진 형태의 완성에 그들의 숙달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Som Samai의 은상자의 표면에는 조각된 형태들은 마치 나타나고 살아날 것 같은 the kbah(크메르 장식)이 최고도의 3차원을 얻기 위해 반복해서 끌로 판 것이다. 같은 Kbach 패턴들이 형태의 방정식을 어떻게 전통적인 미술 제작의 모든 분야와 공유하는지 보여주며 An Sok의 칠기 그릇들의 세부묘사에 다시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형식적인 면을 제외한 보다 더 학문적인 규정은 An Sok의 가면들과 Chet Chan의 그림들에 나타난다. 여기서 크메르의 고전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들(예를 들어 The Reamkea)은 오랫동안 내려온 비율(knat) 법칙과 제스처와 색상 따라 표현되었다. 그의 템페라와 실크에 그린 금 잎사귀에 Chet Chan은 Preah Ream과 Preah Leak의 특징들을 공식적인 묘사를 현실로 가져오는 타는 듯한 풍부함을 가지고 정확하게 표현되었다. 그의 작은 그림들은 한때 캄보디아 전역에 Wats의 벽에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림의 대중적인 사용을 민영화한다(오늘날 이 그림으로 나타낸 풍부함은 슬프게도 파괴되거나 덧칠하여 진다). 위에 스케치된 활동들은 ‘전통적인 크메르 미술’이라고 알려진 특징들에 충실하다. 그러한 ‘가치들은’ 개념의 확실성을 가지도록 허용하며 사회적인 기준을 제공한다. 캄보디아의 현대 사회에 불화와 변화들이 주어지고 파괴하는 과정에 이러한 합의들이 있다.

Difficult Transitions 어려운 과도기
자신들을 차별화하고 싶은 소망에 의해 동기를 부여받은 몇몇 작가들은 그들이 ‘현대 크메르 미술’이라고 하는 쪽을 향해 이런 합의들로부터 유유히 떨어져 나간다. 그러기 위한 전략 하나는 전체로써 이를 거부하고 다른 모델을 찾기 시작하는 것이다. Soeung Vannara의 그림에는 크메르 문화의 평범한 풍경이 삶으로부터 스며 나오고 치료를 통해서 재형성된다. 표면을 부수어 그리는 선을 열고 형상들을 색깔과 자국 놀이로 분해하여 크메르 그림의 정의된 전통들에 도전할 방법을 찾는다.
Phy Chan Than의 그림들의 깎은 표면들은 이와 같은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자신을 과거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약간 다른 전략으로 전통적인 크메르 미술의 요소들이 사용되고 그들을 다른 환경에 집어넣는 것을 통해 소생된다. 예를 들어 Long Sophea의 작품을 보면 kbach와 Reamkea에서 등장한 인물들은 빛과 그림자의 기하학적인 패턴으로 조립되어 새로운 배경에 가족들의 이야기를 재상연 한다. An Sitha와 전통적인 워크샵에서 교육을 받은 다른 젊은 작가들은 그들이 표현하길 자신들의 공예품을 ‘현대화’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전략을 따르는데 관심을 가진다. 정체성을 만드는 과정의 어려움을 고려했을 때도 그의 새로운 작품들을 모두 보다 큰 미술 세계의 환경에 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하게 개인적인 차이를 전통적인 미술과 대비하여 주장하는 것은 지금쯤에는 벌써 진부해진 ‘현대미술의’ 흔적을 빌려서 만들어진 작품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보일 수 있다. 사실 지난 아방가르드 운동의 형태들을 캄보디아의 맥락으로 취하는 전략은 이와 같이 빌린 형태들이 그 목적을 잃고 속이 빈 스타일이 되게 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겸손하지만 일상생활의 감지 할 수 없는 순간들의 꾸준한 관찰로부터(바나나를 파는 상인, 자식과 이야기하고 있는 아버지, 벼를 베는 농사꾼...) 생기는 작업을 하는 Svay Ken과 같은 작가들은 가능한 태도를 제시한다. Svay Ken은 직접적이고 겉치장 없는 스타일로 즉각적으로 친숙한 장면들의 부분을 그려서 그 자체로써의 순간을 지탱한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표현의 이상화한 상연을 거부하고 그 대신에 그리는 것을 살고 있는 현실을 인지하는데 필요한 기구로 사용한다. Prom Sam An의 조각에서도 일상에 대한 시가 작품의 출처와 바탕이 되는 비슷한 관심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일상적인 문화적 상징과 물체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the koom(물을 기르는 양동이), 물레바퀴, 배- 이러한 요소들을 새로운 개념을 열어주는 다른 형상으로 조립하고 병렬한다.

Conclusion 결론
완전한 참상으로부터 재건축하는 과정동안에 미술은 사회의(정치, 종교, 교육 등) 다른 범위들과 같은 문제들에 직면한다: 지속할 수 있는 토대를 가진 이용할 수 있는 자원, 모델 그리고 가치는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주체적인 구성은 주로 차이를 인정하고 공통기반을 공유하는 것보다 반대와 거절에 근거한다. 캄보디아의 빠르고 무질서하게 발전하는 현 상황을 보면 미술을 좀더 안정된 미래로 연기해야 되는 사치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느 장소가 예술이 제공하는 비평의 형식과 상상의 축적에 의해 발견되지 않으면 그곳에 세워질 사회는 영혼이 없이 존재할 것이다.

Svay Ken
Svay Ken의 그림의 특징은 그의 작품에는 일상생활의 대상물들이 단순한 방법으로 묘사되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리는 행동은 말하기, 먹기와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기초적인 필요성이다. 어떠한 사건도 표현될 수 있으며 주제를 정하는 원리도 없다. 예술가들이 주로 이상적인 장면이나 고급문화의 상징들에 집중을 하는 캄보디아 현대미술의 맥락에서 보면 Svay Ken은 대신 일상생활의 검소한 관찰의 세계로 우리들을 후퇴시킨다. Svay Ken은 한번도 정식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로 소위 사실적인 표현 또는 정확한 비례를 걱정하지 않는다. 그 대신에 그는 자기가 인생에 있어서 보고 느끼는 점들을 직접적이고 표현적으로 표현하는데 집중한다. Svay Ken는 그의 훈련의 부족함으로 인해서 다른 캄보디아 작가들에게 끼치는 영향이 작다. 그 이유는 현재에는 제도적인 허가와 학구적인 완성이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는 특징이기 때문이다.

Collaboration of the Faculty of Plastic Arts 플라스틱 미술교수들의 합작
Royal University of Fine Arts
오늘날 캄보디아가 예술적으로 다른 지역들과 고립되었기 때문에 'Calling Cambodia'는 예술과 생각의 교류를 활성화시키기를 소망한다. 이 전시가 지속되는 동한 캄보디아 작가들의 작품이 전시된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의 전시장과 조형미술학과의 회의실 사이에 비디오 링크가 이루어질 것이다. 한쪽 장소에 있는 관객들은 다른 현장에서 상연되는 것과 준비된 테이프들을 볼 수 있고 어쩔 때는 서로 직접적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녹화된 인터뷰와 스튜디오 장문들을 통해서 넓은 범위의 캄보디아 현대미술 작가들을 소개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관객들이 오늘날 캄보디아 미술의 현장을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예술 장소와 학교들을 견학시켜줄 것이다.
 
싱가포르의 현대미술

싱가폴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의 여러 가지 첫 인상들 중 아마도 다음 것이 우선 순위를 차지할 것이다. 일단 국제 공항의 세관을 통과하면서 편리함과 효율성을 경험하게 된다. 도심 길을 따라 택시가 달리면서 나무, 수풀, 그리고 부겐빌리아가 길게 뻗어있는 수퍼 하이웨이를 달린다. 공항이 전 국가를 대변하는 메타포의 기능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마도 오늘날 잘 발달된 수도들 그리고 싱가폴의 특징일 것이다. 싱가폴이 추진한 국영 항공사와 공항에 대한 경제적이고 상징적인 투자는 이 도시 공원 국가에서 세계화가 현실화될 수 있다는 신념과 확신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싱가폴은 외국인이 살기에 가장 편한 아시아 국가로 꼽히기도 한다. 싱가폴은 작은 국토 면적이라는 안타까움을 영원히 지워버릴 수 없겠지만, 그 제한적인 상황에서 최상의 이익을 창출해 냈다.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그러한 총체적인 국가 계획이 성공적이었던 경우는 드물다. 싱가폴 정부는 독재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그 정교함과 효율성에 있어 매우 유명하다. 마약 밀매와 예술 문화 파괴 행위에 대한 사형 선고는 국민 전체를 위한 주택, 고용 창출에 대한 국가적 목표에 상응하는 정부 제도를 설명해준다. 싱가폴 정부가 자국을 개방적 사회 공학이 매일 토론되고 실험되는 질서 잡힌 실험실로 묘사하는 것은 틀린 것이 아니다. 싱가폴 정부는 금세기 가장 효과적인 근대화 프로그램을 수행한 국가 중 하나이다. 이 실험실에서는 확실한 싱가폴 스타일의 실용주의 아래 어떤 요소들은 수용되고, 그렇지 못한 요소들은 과감히 버려지게 된다. 정부가 이러한 사회적 손실들을 바로잡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하고 있으나, 싱가폴 국민들의 노력 없이는 성취할 수 없었을 것이다(다수가 중국인이며 소수의 말레이시아 인들과 인도 지역 사회로 이루어진 다인종 국민). 이러한 시도들은 문화, 예술 개발을 위한 정부 정책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정부가 추진한 문화 대응 정책과 예술 분야와 관련하여 현실화된 결과 사이에는 차이점들이 많다. 정부 담론에서의 문화란 주로 민족과 관련되어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 정부의 모든 관심사는 급속한 현대화와 사회 규범에 대부분 치중하고 있었다. 정부는 기존 분류에 따른 ‘중국인’, ‘말레이시아인’, ‘인도인’, 그리고 ‘기타’(예를 들어, 유라시아인)로 민족 문화와 정체성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정부는 다민족주의라는 국가이념을 통해 이러한 민족/문화적 범주를 시행하였으나 그와 동시에 그들의 ‘문화’ 진흥에 대해서는 개인과 자발적인 단체의 사적인 영역으로 분류해 버렸다. 비평가들은 결과적으로 그곳에는 ‘민족’간의 피상적인 교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정부는 국가 공공주택 프로그램과 같은 수단을 통해 정치적으로 잠재력 있는 민족별 지지자층 확보를 위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는 80% 이상의 싱가폴 국민들을 위한 주택을 건설했으며, 이는 소수 민족 국민들의 저항을 예방하기에 충분했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싱가폴은 상당한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고 문화 중심의 대표적인 아시아 국가로 스스로 선전하였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용어가 근대화 이데올로기의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사회학자 추벵홧(Chua Beng Huat)은 주장한다:
소위 말하는 아시아적 가치‘ 라는 개념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서구의 사회적 가치들의 음흉한 잠식성에 대항하기 위한 필수 방어법으로 보여진다. ... 즉, 자본주의의 문화적 수반인 개인주의는 경제계의 산물이며 반서구화의 도덕적 언어로 치장되어 있다... 그러나 전통과의 유대관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다움(Asian-ness)을 새기기 위한 프로그램들은 궁극적으로 생산과 경제적 성장을 지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으며, 아마도 이보다 더 중요하고 현존하는 정치적 질서를 지탱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1990년대까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강조가 계속되었고, 아시아 국가들의 깊은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사실은 싱가폴 정부가 세계적인 항구, 공항, 하이테크 경제 혹은 지역 비즈니스 중심지가 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감행했고, 예술에 대한 지원 또한 아끼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부의 예술 부흥 정책은 오히려 자본의 흐름에 대한 유인과 장려가 우선시되고 세계화의 사회적 추이에 대한 고려들이 덜 절박할 시기인 전-아시아적 가치 모드가 적용되던 때로 돌아간다. 여기서 우리가 ‘자본‘ 대신 갖고 있는 것은 ’예술‘에 대한 세계적 성향이다: 브로드웨이의 블록버스터형 뮤지컬들이 칼랑 극장에서 공연되었고 구겐하임과 그 외 주요 콜렉션들이 싱가폴 미술관을 방문하였다. 예술 중심지로서의 싱가폴을 만들려는 노력의 현재 상황은 세계 수준의 국제 공항에 그 발판을 마련하는 일이다. 수백만불의 자금을 들여 건설한 에스플라나데 아트 센터는 자본이 집중된 초대형 산물이다. 대형 공연들이 도시로 몰리고 국내 관람자들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인근 나라의 여러 도시들에서 관람객들이 최신의 호화 공연을 놓치지 않으려고 비행기를 타고 올 것이고, 호텔과 관광 사업 또한 호황을 이루고 있다. 만약 싱가폴 내에서 자국 블록버스터 작품들을 생산해 낼 수 있다면, 수출 또한 가능해 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싱가폴은 예술 분야의 발전에 대한 강조가 순전히 성공적인 국가적 차원의 동기, 즉 예술의 진흥 보다는 사실은 돈을 창출하기 위한 목적에 의해 제한 받고 있다는 것을 명백히 알 수 있다. 이에 덧붙여 싱가폴의 예술 산업은 외국 전문가들이나 국가의 경제적 경쟁력을 책임지는 ‘인재들이 싱가폴에서의 일과 삶에 대해 매력을 느끼도록 만든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싱가폴 예술 산업을 지칭하는가?
싱가폴에는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건축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건축물이 많지만, 정부에서 주도해온 예술 발전에 대한 이슈는 작가들에게 소극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 비교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단 그 안에서 살면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기대와 열망에 비춰 판단할 일이다. 정부의 정책적 결정들에 도전하는 대안으로서의 성격을 강조하는 협회, 단체, 그리고 개인들이 존재하지만 싱가폴에서는 대안이라는 범주가 명확치 않다. 예를 들어, 연극작품은 몇몇 유명한 지역 연극을 공연했으나, 실험적인 ‘포스트모던적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저명한 극작가인 쿠오 파오 쿤(Kuo Pao Kun)은 싱가폴미술계에 성숙한 주류가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대안미술 운동이 활동할 수 있는 에너지와 자질 모두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순수한 주류 문화가 없다면, 순수한 대안 문화도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쿠오 파오 쿤은 이러한 주류 문화의 부재를 안고있는 싱가폴 사람들을 ’문화적 고아‘로 묘사했으며, 이것은 근원에 대한 집합 의식을 확보하는 사회적 필요성을 무시한 국가의 급속한 현대화와 경제성장이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러므로 예술 단체들과 개인 예술가들은 싱가폴 예술과 문화의 대용품적인 주류 가치에 반대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가치들에 담긴 복합성과 그 이면에 담겨진 협의 사항과 가정들을 가시화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정 단체들과 개인들은 정부를 향해 끊임없는 비판적인 입장을 세우지만, 이러한 비평적 입장들의 저변에는 지역 예술과 문화 산업에서 지역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명료하게 하고자 하는 포부가 깔려있다. 근래의 시각 예술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다양한 예술가들이 한편으로는 우월적인 국가 입장과 자신들의 예술적 가치, 문화적 특정성과 경계 사이의 긴장 관계;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지역 사회, 민족주의와 세계화의 특성 간의 긴장 관계를 어떻게 드러내느냐에 관심을 둔다. 즉 싱가폴 작가들은 젠더, 종교, 문화, 민족, 국민성, 그리고 사상에 대한 잡종성과 정체성에 관해 포괄적으로 연관되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물음은 그 자체가 이 지역이 의미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비평적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여러 면에서 그들은 새로운 경계 간의 절충적 범주가 제안하는 유동성에 대해 반응한다. 유동적 경계선은 싱가폴이 심각하게 고려해 볼 문제다. 한편으로 이것은 외국인 인재, 자본, 정보와 같은 최고조에 달하는 공급이 요구된다. 또 다른 면에서, 엄격하게 조정되는 국내 경계선들은 고도로 억제되고 생산적 사회를 유지하는 것과 관련된 불안을 가르킨다. 싱가폴은 모순의 섬으로 불려져 왔다-열린 경제이지만 닫혀진 정치 구조를 갖고 있다. 고도로 민족주의적인 사회이지만, 또한 경제적 세계화의 아시아 기지라고 말해진다. 싱가폴에게는 이러한 외관상의 모순점들이 공존하는 것이 일종의 도전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점들이 작가들을 지속적으로 자극한다. 싱가폴 작가 중에 자주 거론 되는 아만다 헹(Amanda Heng)이 있다. 유교의 가르침에서 여인은 아버지를 섬기고, 남편을 섬기고, 다음에는 아들을 섬기는 것이 미덕의 상징이다. 유교는 싱가폴에 있어 극히 중대하며 자아의식 문제에 영향을 끼쳤고, 전통적인 ’여인의 상징들‘은 아마도 잠재적인 부도덕(subtle vice)이다.
싱가폴은 문화 사회적 관례들을 통틀어 ’탈-가부장제’와 동떨어져 있다. 아만다의 <유괴>(1995)에서 작가가 의도한 것은 ‘문화적 가치들‘의 극명한 표출에 대한 비평이다. 특히, 여자 영아의 살해. 중국에서 이러한 행위를 막기 위해 천벌에 관한 어두운 설화가 전해지곤 했다. “한 여자가 자신의 4번째 딸을 연속해서 익사시키자, 태아는 뱀으로 변하여 그녀의 왼쪽 발목에 자신을 감아 두 죽을 때까지 그녀의 배를 물었다.” 아만다 자신과 어머니의 초상화들, 문화적이며 일시적인 특정성의 이미지들이 옛 사진들 사이에 중심으로 위치하고 있는 반면, 최근 것들은 영원히 ‘현재’에 사로잡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적으로 관상학(physiognomy)과 초상화법은 둘다 가족적 그리고 사회적 역할 수행과 연결되어 있고, 가족의 유사성에서 발견되는 자아/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변형된 얼굴로 단순히 끝나지 않는다. 핏줄들 간에 이어지는 얼굴 이미지의 상속은 전통적인 ‘가족’과 문화적 가치들의 변형과 연속으로 지속된다. 아만다의 초상화에서 나타나는 것은 특정한 ‘싱가폴인다움’이 아니며 공간은 육체, 얼굴 이미지를 통해 총칭적이고, 계보학적이고, 성별화된 ‘중국인이라는 문화적으로 규정되는 자명성을 포함한다.

심린 질(Simryn GILL)
“많은 사람들은 머리에 나무를 기르고 있지만 뇌 자체는 나무라기보다는 풀이다.”
3회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APT3)에서 Simryn Gill의 작품은 -자주 그렇듯이- 그녀 특유의 표현으로 ‘경계의 교차’, ‘세계적으로 이동성을 가진’ 개념적 몰두, 실행과 개인적인 궤도에 주로 틀이 짜여진다. 당연히 이러한 틀은 이미 본래부터 역설적이다: APT3에 있어서 ‘경계의 교차’는 목록에 추가되는 또 하나의 분류로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국가적인 주체성이라는 특유의 표현으로 계획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또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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