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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⑬-2

이영철

스리랑카의 현대미술


스리랑카의 근대 역사는 1948년 독립에서 기인한
사회 정치적인 변형을 기점으로 한다. 1958년 Sinhala Only 법령이 통과되었다. 이 법령은 Sinhala를 신독립국가의 유일한
절대 언어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이 법령은 의회 민주정치제도 과정의 일부로 소개되었으며, 스리랑카의 비-Sinhala 사용자들에게서 우려되던
문제점들의 직접적인 결과였던 스리랑카 전국에 걸친 최초의 인종폭동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언어가 후기-독립을 선언하는 국가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자 한다면, 또한 그것은 Sinhala 문화 국가주의의 확립을 인정하는 이 순간부터 전달자 또한 될 것이다. 이 문자 전쟁은
유감스럽게도 1990년대 여전히 거세게 휘몰아친 파괴적인 민족간의 내전으로 이어졌다.

미술은 스리랑카의 오랜 역사에 걸쳐 국민들의
생활 양식 가운데 중요한 문화 활동으로 기록되고 있다. 회화와 조소는 스리랑카의 미술 역사상 가장 광범위하게 활용된 미술 양식이다. BC
3세기에 인도의 아쇼카 황제가 스리랑카에 불교를 최초로 전파한 이래, 회화와 조소는 이 새로운 종교를 신봉하는 신도들에게 부처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두 번째 가장 중요한 미술 매체로 존속해 오고 있다. 그러면서 화가와 조각가들은 예를 들어, 불교 정전이나 그 외 관련 문학 작품,
주로 본생경 (Jatakas: 석가의 전생 이야기를 모은 것)에 나타나는 부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회화작품과 조소작품 제작을
통해 미술 현장에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스리랑카에서 이 에피소드들을 묘사한 벽화와 조각상들은 여전히 주요 예술 활동으로 인식되고
있다. 스리랑카 인구의 70%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섬 전체에 걸쳐 예술품 이상으로서의 미술 작품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불교
신자들은 탄생 이전부터 최후의 순간까지, 그리고 죽은 후에도 여러 세기 동안 존속해 왔다. 불교 신자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곳 어느 곳에나 더
발전되고 새로운 사원을 세우고자 하는 열망을 품는다. 회칠해진 벽, 특히 새로 지어진 사원의 내벽들에는 불경의 장면들을 신속하게 그려 넣어야
한다. 또한 사원을 찾는 불교 신자들이 깨달음의 미덕을 얻기 위해 집중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사원에 있어 최소 한 개의 불상은 필수 불가결한
구성 요소이다. SITTARAS로 알려진 전통 화가들은 그러한 벽화와 조각상들을 제작한다. 이들 화가들은 불교 신자들 중에서도 특히 대게 예술
애호가들의 정신 세계에 있어 높은 위상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미술은 아버지에서 아들에게 세대를 거쳐 계속해서 전수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국가 기금에 의해 운영되고 Colombo에 소재 한 국립 박물관 부서(the National Museum Department)
토지에 총체적인 사원 그림과 조각 작품을 가르치는 학교가 세워졌으며, 이 학교의 미술 수업에서는 전통 사원 예술가들의 가족에서 모집한 어린 학생
지원자들이 이러한 미술 형태에 대한 공정한 지식으로 무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더욱 많은 가르침과 관심을 쏟고 있다. 이 학교는 명성있는 전통
작가들로 구성된 경영 위원회에서 운영한다. 풍경화는 스리랑카에서 제작되는 또 다른 미술 양식이다. 풍경화는 19세기 후반 예술 활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친 유럽인들, 특히 영국인들에 의해 지금의 형태로 스리랑카에 전래되었다. the Ceylon Society of Arts 재단은
1987년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문관들이 함께 확장 협력하여 설립함에 따라, 풍경화는 이곳에서 매우 대중적인 미술 양식으로 자리 매김 하게
되었다. 비록 오늘날 풍경화의 중요도가 예전보다는 못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예술가들에 의해 일종의 취미 혹은 삶의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으며, 또한
이것은 스리랑카의 고등 교육 과정에서 미학적 주제이기도 하다. 초상화 또한 이곳에서 제작되는 또 다른 미술 양식이다. 스리랑카에서 초상화가
오늘날의 모습으로 정의된 것은 영국 식민주의자들과 문서관들이 A.D. 9세기 후반에 살았던 주요 인물들의 초상화를 영국 화가들에게 제작하도록
후원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the Ceylon society of Arts는 초상화가 스리랑카에서 주요 미술 분야가 되도록 장려하였고,
1997년 최초로 개시된 the Ceylon Society of Arts 연례 전시회에서 제외할 수 없는 구성 요소가 되었다. 여전히 초상화는
스리랑카의 미술 현장에 있어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초상화는 미술대학 학위생들을 배출하는 Kelaniya 대학의 미학 분과 교육 과정중
하나이다. 몇몇 미술 비평들 중에는 회화의 습득 단계에 있어 초상화가 그 발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견해도 있다. 추상화는 스리랑카에서 분파적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다수의 젊은 스리랑카 작가들은 추상화 작업 경향을 띤다. 또한 극소수의 구세대 대가들이 여전히 추상화 작업을 하고 있다.
비록 회화작품에서 넘쳐나는 상징들이 스리랑카 화가들에게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상징적 표현법들은 A.D. 5세기 Sigiriya 프레스코에서조차
동일하게 나타난다). 그러므로 추상화가 기술적으로나 주제적으로 이곳 스리랑카에서 20세기 후반에 새로운 형태로 변형된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의심할 여지는 없을 것이다. 그 당시 현대 추상화들은 스리랑카에서 두 가지 존속 방향을 모색하였다. 금세기 초에는 재능있는 일군의 스리랑카 미술
학도들이 고등 미술 교육을 받고자 섬을 떠나 인도의 SHANTHINIKETHAN으로 유학을 갔다. SHANTHINIKETHAN에서 그들은
Rabindranath Tagore를 주축으로 한 저명한 미술가이자 미술 교사들 밑에서 수준 높은 미술 교육을 받았다. 그들의 유학기간 동안
학생들은 현대적인 동양 추상화 영향을 받았으며, 교육을 마친 후 스리랑카로 다시 돌아왔다. 그들은 이제 동양 추상화에 대한 견고한 이론적이며
실질적인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으며, 전과는 다른 더욱 독립적이고 열린 사고를 가진 화가이자 미술 교사라는 미술 분야의 이력을 갖게 되었다.


또한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안 자제들로 구성된 또 다른 미술 학생들은 현대미술 트렌드가 한창 번창하고 있던 영국, 프랑스, 이태리
등으로 이민을 갔다. 그들은 좋은 시설을 갖춘 대학에서 매우 영향력 있는 교수들과 비평가들의 지도를 받으며 최신 현대 미술 풍조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특히 서유럽에 있는 저명한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현대미술 작품들을 보고 감상할 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다. 그들 또한 고향으로
돌아와 소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택하였고, 나머지는 현대 추상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현재 이 두 예술가 그룹의 차세대 제자들은
스리랑카의 현대 추상화 작업을 하고 있다. 비록 이들 작가들의 추상화 작품이 적정성과 유사성 개념에 있어 다수 현대 스리랑카 국민들의 삶에 대한
서로 다른 시각과 견해들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추상화 작품들은 오늘날의 스리랑카 미술 현장에서 자신의 지위를 견고히 하고 있다.
미술 전문가(Art Connoisseurs)들은 이러한 추상화들에 대해 미학적 의의로 충만한 의미심장한 예술품이라는 평을 내린다. Pandal
painting은 스리랑카의 또 다른 미술 양식이다. Pandal은 특히 5월 (Vesak season)에 석가모니(Lord Buddha)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정립되었다. 6월 (Poson season)에는 또 다른 pandals들이 B.C. 3세기 스리랑카에 불교를 소개한
Arahant Mahinda Thero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세워진다. 일반적으로 pandals에는 부처의 삶과 그의 제자들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판자나 캔버스에 기름이나 다른 색들을 사용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려지며, 그것들은 보통 30m 이상의 높이의 나무 구조물에 맞게
그려진다. pandals들은 전구로 치장되어 밤에는 황홀한 빛으로 장식된다. 그 pandals들은 Vesak 보름날부터 Poson 보름날까지
각각 여러 날 동안 전시된다. 외국인을 포함하여 타종교를 믿는 수천명의 사람들이 그것들을 보고자 열광한다. 비록 이러한 pandals들의 건립은
19세기 후반에 시작되었지만, 그것 자체는 긴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으며 여기서 Pandal은 그 자체로 중요한 미술 형태로 존속하게 된
것이다. 불교 성전에서 볼 수 있는 미술과 건축에 대한 필수 구성 요소는 최소한 한 개의 불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며, 이는 스리랑카에 불교가
처음 등장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불상 조각은 BC 3세기가 시작되던 그 시점부터 계속하여 제작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불상과 더불어
불교 문학에서 묘사되는 불신도, 신, 악령, 동물 등과 같은 주목할 만한 조소상들이 그 사원들에서 발견되는 나머지 집합군이라 할 수 있다. 그
불상들을 제작하는 것은 이곳 스리랑카 사회에서 높은 수요율을 보이며 일종의 삶과 같은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비특권 계층을 위한
복지 임무를 수행했던 다른 인물들의 조소상을 제작하는 새로운 경향이 생겼다. 불교 성전들과는 별개로, 다른 종교적 장소들에 또한 예수, God
Vishnu, Saraswathie 여신 같은 주요 종교 인물상들이 존재하기도 한다. 가장 최근의 조소 분야 트렌드는 이 조소 작품들을 종교적
작품과는 다르게 단순히 예술 작품으로서의 미적 감상을 위한 개별적인 작품으로 제작한다는 것이다. 신세대 조각가들은 이러한 미술 오브제들 종류에
민감한 관심을 갖는다.

스리랑카의 지난 세기의 현대 미술 활동은 황량한 문화적 정세에도 불구하고 활기 넘치고, 의욕적이며, 솔직한
풍자성을 띠며 계속 발전해 왔다. 예술가들은 극도로 무기력화 된 사회 경제 정치적 위기를 겪으면서도 작업을 계속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있어
풍부한 창의력을 보여준 반면, 이보다 더 넓은 예술의 하부구조는 체계 없이 개발되었고 이것은 43 Group의 출현으로 희망의 빛을 보이던
포용력있는 비평적 문화 담론에 대한 지지를 집합시키는데 실패했다.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시각 예술에 대한 대부분의 비평문들은 논리적으로
약하며 한때 유행한 과거의 관례들을 따르고 있다. 이는 정통적인 국가 노선과는 상반된 노선을 지지하는 현대적 감수성들에 대한 의지가 결여되어
있는 것들이다. 반대로, 독립 이후 수년간 나라를 떠나 흩어져 있던 작가, 출판가, 영화감독, 교수 등과 같은 산재 집단은 고향에 남아있던
사람들과의 강화된 협력 작업을 통해 스리랑카의 고속 성장을 위해 노력했다. 국내외 작품들을 함께 보았을 때, 국가에서 도입하는 추론적인 요소들은
놀랍도록 끝이 없는 논쟁을 만들어 낸다. 1990년대는 매우 다양한 형태의 예술 활동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스리랑카의 현대미술을 장려하기 위해
George Keyt 재단에서 주최하는 아트 페어인 the annual Kala Pola에서부터; 상업 화랑에서 열리는 크고 작은 연속적인
개인전들(Gallery 706, the Heritage Gallery, Gallery Mountcastle, Paradise Road - the
Gallery); 1994년 스리랑카의 독립기념일에 Colombo 국립미술관(the National Gallery of Colombo)에서 열린 스리랑카 현대미술의 새로운 시도들(new Approaches in Contemporary Sri Lankan Art)과 같은 주요 전시들이 그
예이다. 1998년에는 제50회 스리랑카 독립기념일 행사로 Lionel Wendt Art Gallery에서 작가 위주의 기획 그룹 전시인
In Dependence전이 열렸으며, 이것은 정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작품으로부터 국립 미술관의 독립 전시에 대한 대응물이었다.
작가-주최 전시, 토론 그룹과 미술 교육의 중요성은 1993년 화가 Chandragupta가 창립한 the Vibahavi Academy of
Fine Arts의 설립에서 가장 역력히 드러난다. 이것은 그 후 Gallery 706의 설립에 참여한 사진가 Dominic Sansoni와
현재는 문을 닫은 Heritage Gallery를 운영하던 작가 Balbir Bodh의 큐레이터/코디네이터 역할로 인해 더욱 강조되었다. 영국
문화원, 프랑스 문화원, 인도 문화 센터, 그리고 독일 문화원과 같은 국제기구들의 후원은 전시 기획과 진행을 순조롭게 진행시켰다. 네 정부 기관
모두가 협동적으로 참여한 가장 최근에 두드러진 이들 후원은 annual international Artists Camp 주최와 Workshop
진행에서 찾을 수 있다. 첫 번째 camp는 1997년 Kandalam의 문화 회관에서 열렸으며, Colombo에 있는 국립박물관에서 있을
전시를 준비하는 스리랑카 작가들과 외국인 작가들이 참여했다. 같은 맥락에서, 1998년 스웨덴 협동 조합의 후원을 받아 Lionel Wendt
Art Gallery에서 열린 Self Help전은 스웨덴에서 열리는 워크샵에 참여할 작가를 선발하는 경쟁대회의 목적을 갖고 있었다.
1999년 11월, Lunuganga Trust의 협력을 통하여 스리랑카에서의 첫 번째 Australian Asialink residency와
스리랑카 작가들의 참여한 워크샵이 열릴 것이다. 또한 UK residency에 대한 계획도 현재 진행 중에 있다. 스리랑카 정부의 자국 현대미술
지원에 대한 역할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이전 국왕의 콜렉션(Governors Collection)을 토대로 하여 최근 확립된 대통령
컬렉션(Presidents Collection)은 - 국왕 관저에 수납됨 - 스리랑카의 미술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컬렉션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는 않는다. 새로운 국립미술관의 건설 계획은 검토 중에 있으며 중요한 현대미술 작품들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국영 컬렉션의 미래는 밝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현대적 작업을 위한 가장 중요한 대중 지원의 예는 대통령 기금에서 후원 받아
무고한 이들을 위한 사당)(스리랑카에서 정치적 폭력이나 인권 침해를 받은 희생자를 위한 기념비)을 세우는 것이다. 이것은 작업 전체를 개념화하고
통제하는 작가가 참여한 최초의 주요 공공 미술 프로젝트 임무였다. Jagath Weerasinghe가 이 프로젝트에서 작가로서 선택한 것은
현대미술(contemporary art) 작업을 통해 내전에 대한 이슈와 연결 지은 자기 자신의 촉매적 위치에 대한 자각이었다. 또한 이것은
역할의 입장과 현존하는 아방가르드의 중요성에 의한 자각이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 Weerasinghe의 무고한 이들을 위한 사당은 1994년의
그의 초기사당 (Shrine) 작품 시리즈에서 발전된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 또 다른 면에서 이 작품은 대안 작업의 영역에서 현 정권을 지지할 수
있는 공공 장소로 건너가는 전환점으로 보여진다. 그의 제3회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 참여는 이 작품의 중추적인 본질과 전통, 종교의식, 그리고
국가 내에서의 문화유산 보존에 대한 고찰시 처해있는 전략적 문제점들을 문서화하고 있다.



베트남의 현대미술



베트남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안의 끊임없는
외침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국민'으로 자신들을 표현하고자 하며, 무엇보다 외세에 굴복하지 않은 역사를 지닌 나라라는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한
무제의 침략으로 1000년간 중국의 종주국이 되었고, 938년 중국의 원정군과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19세기
중엽까지 강력한 왕조 국가를 이어 오다 영국과 경쟁하며 일찍부터 인도차이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에게 1859년에 점령당한다. 프랑스
식민지가 된 후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했고 1927년에는 베트남 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조직되었다. 프랑스의
강압적인 지배권 주장으로 1946년 말부터 8년(남부에서는 9년)이나 끌었던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된다. 그 뒤 1975년 미국이 월맹에게
굴복하여 베트남에서 철수하기까지 30년간 베트남인들은 전쟁을 치러냈고 결국 승리를 했다.
작가와 작업을 포함한 베트남의 미술은 현재
70년에 걸쳐 존재고 있다. 늦은 시작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미술은 베트남 사원의 Cham탑과 미신적 조각으로 고대 베트남 인들의 일상생활을
묘사한 Dong Don의 청동북의 추상적 디자인에서, 마을의 평범한 가옥의 디자인, Tay Nguyen묘의 조각, 성상화, Dong Ho와
Hang Trong의 전통회화에서 천년의 예술적 전통을 구현시킨다. 인도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문화권의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트남
미술은 그러한 영향의 그늘에 가리워져 있지 않은 반면, 오히려 그러한 예술의 정수를 취하고, 오늘날 독특하고 강력한 국가 정체성을 생산해내는
그들 고유의 특성과 통합하였다.

프랑스의 유화 기술과 같은 서구 문화로부터 배운 발전된 현대 베트남의 기술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기술을 바탕으로, 베트남의 작가들은 전통적인 중국과 일본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르지만 극동지역 예술에 수세기에 걸쳐 영향을 끼쳤던
증거인 silk painting과 같은 재료로 순수한 베트남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베트남 작가들이 디자인과 수공예에 사용하곤 했던 우리 고유의
회화방식으로부터 어떻게 독특한 베트남 옻칠이 생겨났는가를 아는 것은 더욱 굉장한 일이다. 상기 사항을 놓고 봤을 때, Ecole des
Beaux-Arts de Indonesia(The Indonesia Fine Arts School)이 개교한지 5년만에 베트남 미술이 당시
미술의 수도였던 파리에서 환영받았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이후로, 베트남 미술은 종교처럼 초기의 영향으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분리시켜 일상생활에 좀 더 집중하였다. 풍경,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 평범한 일상 활동들이 현대 회화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Nguyen
Phan(fig.2)의 점잖은 농부, To Ngoc Van의 매력적인 여성들, Luong Xuan Nhi의 어부의 가족들, Ngyen Gia
Tri의 사랑스런 모습들은 베트남 미술에 있어서 현대 베트남 미술의 길을 닦은 첫 번째 세대를 일으켰다.

그런데 1945년 8월
혁명의 성공과 독립과 통일을 위한 두 개의 연이은 전쟁 이후, 우리의 미술은 사회에서 그 역할을 확정시키고, 국가에 실질적인 공헌을 하였는가?
어려움과 역경을 참아내는 것은 삶이 가득 들어있는 작은 스케치에서 그 자체로 우리나라의 화려한 영광의 30년이라는 미술사의 백과사전이 될 수
있는 연필과 잉크, 실크에 나무조각을 하고, 유화와 옻칠로 생각과 깊은 감정을 표현하는 커다란 크기의 회화로 우리의 작가들은 거대한 물량의
작품을 만들고 발전시켜오는 투쟁을 불러왔다.

많은 재능있는 작가들이 To Ngoc Van의 “Ho 삼촌의 Tonkin 궁에서의
노동 Uncle Ho Working in Tonkin Palace', Nguyen Sang의 ”입당 Admitting to the Party'와
“적들이 나의 마을을 불지름 The Enemies Put My Village on Fire', Nguyen Chungs Tien의 ”추수철
Gathering Season', Tran Van Can의 “여름 협동 농장에 물대기 Taking Water from the Field in
Summer Corp', Nguyen Tu Ngiem의 ”성 Giong St. Giong', Phan Ke An의 ”Tay Bac에서의 오후를
그림 Missing an Afternoon in Tay Bac', Lu Huy Hoa의 “Dong Loc로 Dong Loc Crossroad',
Huynh Van Gam의 ”심장과 총 The Heart and the Gun', Nguyen Hiem의 “Tan Vu 전투 Tan Vu
Battle', Bui Xuan Phia의 ”Hanoi 고대 거리 Hanoi Ancient Streets' 등과 같은 그들의 걸작으로 베트남
미술사에 그들 고유의 페이지를 장식했다. 정부의 Doi Moi(혁신) 정책을 통한 통일에서 경제는 급속하게 성장하였고 사람들의 삶은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면 모두 성장하였으며 베트남 미술 역시 전환점을 맞이하였다. 중장년층의 작가들은 그들의 사실주의에 충실하였지만 점차 극적인 주제의
작품보다는 삶의 긍정적인 문제에 집중하여 좀 더 자유롭고 탄력적으로 되었다. 젊은 세대의 주류는 새로운 것에 대한 훌륭한 에너지와 열정, 용기,
감각, 그리고 미술의 현대적 경향과 그들 스스로 쉽게 접촉할 수 있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상징주의, 인상주의는
젊은이들이 전쟁 동안의 고난의 시간, 인간의 운명, 영혼의 뿌리, 혹은 그들의 아름다운 이미지와 색상에 대한 헌신을 표현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다. Vna Thuyet이 관능성으로 가득 찬 거칠고 둥근 형태에 열정적인 반면, Tran Hoang Co는 사물의 원시적인 자연을 얻기 위해
노력한다. Nguyen Minh Thanh가 여전히 베트남인의 시각으로 설치 작업을 대담하게 진행하는 반면, Dao Hung은 과거와 현재
사이의 단절없는 연결을 염두에 둔다. Le 뼈뭏 Ha 은 시장경제 원리의 압박 하의 인간의 심리를 반영하는 모든 길의 종점으로 가고 있으며,
베트남에 공헌한 많은 다른 이들과 함께 오늘날 세계 사회의 경향에 나란히 도약을 시작하였다.
베트남 미술은 지금과 같은 힘과 다양성으로
발전되었던 적이 없다. 개인전이 일상화 되었고, '비온 후 버섯“처럼 미술 화랑이 생겨나고 있다. 대중매체와 같은 문화적이고 예술적인 상호
작용과 교환은 외국인들에게 베트남 미술을 더 잘 이해하고 최대로 관심을 기울이게 하는 뛰어난 보조자이다.

Vu Thang 과
Nguyen Trung Tin, Nguyen Minh Thanh 의 작품은 큰 규모 때문에 첫눈에 개별적으로나 총괄적으로나 인상적이다. 사각형의
측정기는 그 영향력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예술을 위한 경제의 도래를 통해 고무된 대작이다. 새로 발견된 의사소통의 자유에 의해 자극받고,
심각한 언급의 결단으로 고무되며, 완벽하게 물질적인 신뢰에 의해 창조되며, 지역들 간에 동등하게 참여에 대한 작가들의 열망으로 전달되는 이
작품은 확실히 많이 사랑받게 될 것이다. 이 세 작가의 작품은 오늘날 베트남에서 변화되고, 새로이 부여된 예술 위상의 징후를 보여주며,
APT에서 각기 보여지는 베트남 작품은 10년간 많은 면에서 이 발전의 전철을 밟았다. 예술가들의 국제적인 행보는 전례가 없는 수준이다. 호주를
비롯한 북아메리카와 유럽, 아시아 다른 나라로부터의 베트남 미술에 관한 관심은 격렬한 변화와 평가, 재평가에 대한 관심의 분위기를 더욱
증가시킨다. 비록 전례 없는 국제적인 노출의 시기가 기대하는 영향력의 범위가 몇몇 예술가들의 작업에 한정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대
후반의 베트남 예술은 본질적으로는 ‘국가적인’ 프로젝트로 남아있다. 이것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예술 작품과 1960년에서 1980년의 수십
년간 정치적으로 고무시키는 사회적 현실주의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분명 이러한 시기들은 분리된 세계다. 하지만 이 새로운
세대와 예술가들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경험은 너무나 분리 되어 있다. 1,2회 아시아 태평양 트리엔날레의 참여는 분명 베트남 예술가들을
국제적 경력의 광범위한 범주로 받아들이게 했다. 이러한 것들에 포함된 것은 예술가들이 한때 그들 고유의 삶과 이와 유사하게 그들이 살았던
공동체의 경험과 가치에 관해 요약하는 독립적인 해설자였음을 승인하는 것이다. 새로 발견된 자유를 광범위하게 탐구하는 기회의 포착과 비판적인
판단과 논평을 만들어내는 것은 베트남 예술가들이 Ho Chi Minh시의 붐비는 거리와 가족관계, 시골의 호수와 평야에 거주할 것 같은 영혼으로
돌아서게 하였다. 이러한 감각으로 베트남 예술가들에게 미래를 넘어서는 것은 ‘외부의 거기(out there)가 아니라 ’내부의
여기(inside here)에서 찾아지는 것이다. 이러한 특질은 Vu Thang, Nguyen Trung Tin, Nguyen Minh
Thanh에 의해 가장 잘 느껴지는 것 같다.

Vu Thang은 전통적인 재료와 공예적인 기술과 개인적인 형상의 탐구라는 쉽지 않은
혼합물로 작업한다. 강력한 이미지들은 영혼이 살고 있는 삶의 그림자로서 나타난다. 기술의 물질적인 성질 과 그 비유적이고 추상적인 이미지 사이의
주의력의 변천은 예술가들이 영적이고 물질적이어야 하고, 자연과 대도시여야 하며, 최후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의 변천으로 밤낮으로 늘
변화하는 관계를 제시한다.

Nguyeng Trung Tin의 작업은 기술과 그 실행의 명확성에 있어서 최고로 자신이 있다. 이러한
커다란 작업은 프로페셔널리즘의 등장과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다른 예술가들과 동등함이라는 목적으로의 펼침의 전조가 된다. 이것은 모두 잠재적인
호언장담이지만 가장 쉽게 집중하는 아이들의 놀이와 더욱 벅찬 문화가 거의 없는 아이들에 의한 절멸이라는 작업 주제에 의해 매우 잘 결정된다.
베트남 젊은이들에 대한 코카콜라의 급속한 식민지화는 군부와 미술관에서 비판을 받고 있고, Nguyen Trung Tin의 작업은 장대하지만
새로운 전쟁에서 아마도 이미 상실해 버린 부드러운 집합의 조각들이다.

Nguyen Minh Thanh는 그의 드로잉과 회화,
설치에서 도발적인 요소로서 규모를 채택한다. 그것들은 그 굉장한 크기 때문에 주의를 끌지만, 친숙한 종이 작업과 조형적인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서
편안하게 해준다. 이러한 작업은 베트남에서 가족관계의 가치와 중심적 위치에 관한 것이며 동시에 국가의 문화정치와 교육 제도에 있어서 최근의
제도적 변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Nguyen Minh Thanh와 이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은 이 문화적 시행의 좀더 개방적인
접근에 가장 직접적으로 반응하며, 좀더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차례로 과거로부터 그들의 미래를 친밀하게 구성하는 선택권을 가지고 있다.




몽골의 현대미술



정식명칭은 몽골 인민공화국(Mongolian Peoples Republic)이다. 몽골은 해발고도 약 1,600m의 고원국으로서 지형은 대체로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다. 국토
중앙부에서 동부에 걸쳐 목축에 알맞은 대초원이 전개되고, 서쪽으로 갈수록 높고 험준하지만 이 지역도 천혜의 고원성 초원 지대를 이루어 목축이
가능하다. 몽골의 경제를 뒷받침하고 있는 기간 산업은 목축업이다. 1990년 당시 양 1천 3백만 마리, 소 3백만 마리, 말 2백 50만
마리와 염소․돼지․ 닭 등을 합쳐 약 4천만 마리가 있는데, 이는 몽골인(人) 1명당 20마리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세계에서 2번 째로
사회주의 국가가 된 몽골은 1961년 UN에 가입하였으나, 1963년 영국과 수교를 맺기 전까지는 철저한 고립주의 정책을 추진했다. 1980년대
중반 부터 몽골은 시장 경제로의 개혁 및 민주화 추진으로 아시아 지역에서 처음으로 탈사회주의 국가를 추구하는 나라가 되었다. 1990년 3월
헌법을 수정하여 공산당 1당 독재를 포기하고 복수 정당제를 채택하였다. 최근의 주요 대외 정책은 심각한 경제난 타개와 경제지원 확보를 위한
서방과의 관계강화 및 국제기구 가입, 안보 및 경제적 차원에서 주변국과의 관계 증진을 추구하고 있다. 몽골은 사상과 이념을 초월한 개방 외교를
추진하고 있으며 외국 군대의 주둔을 일체 불허하고 있다. 몽골 민족은 BC 3세기 흉노 시대로부터 유목생활을 해왔지만, 지금은 유목에서
정착(定着) 목축 방식으로 전환했다. 옛날과 같은 유목사회는 아니지만, 인구 약 50만 명이 사는 수도 울란바토르의 주민 42%가 흔히
몽골파오[蒙古包]라고 불리는 게르(원형 천막)에서 살고 있고, 국토의 태반을 차지하는 농촌의 초원지대에는 거의 게르를 치고 살고 있다. 현대식
아파트는 1960년대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몽골인들의 아파트 거주율은 49.1% 수준이다. 최근에는 산업발전과 경제개발에 따라 이농과 인구
도시집중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종교는 티벳 라마교가 국교였으나 공산화 후 쇠퇴하여 많은 사원이 헐려 100여 명의 승려가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민주화 운동 이후에는 공산 정권에 의해 제국주의자․전쟁광으로 낙인찍혔던 칭기즈칸의 복권 운동이 일어나 칭기즈칸 추모사업회도 발족하였다.
몽골리안의 정신적 우상이기도 한 칭기스칸은 바이칼호 근처에서 출생했고 ‘칭기스’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 하며,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gis Tengri)의 이름이라고도 전해진다. 그는 샤머니즘 신자였으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도
관대하였고 외래문화의 흡수에 노력하였다. 물가에 비해 급여 수준이 너무 낮아 대다수의 몽골인들은 문화, 여가 활동을 즐길 수 없는 형편이지만
발레나 연극, 극장 등은 보편화되어 있어 가족 단위로 즐기는 편이다. 몽골인의 음식문화 가운데 가장 특이한 것은 이들이 물고기를 전혀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2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라마교에서는 물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다른 한가지 이유는 몽골에는 바다가
없기 때문에 물고기 문화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것이다.

몽골의 미술은 수십년간 지배 체제의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쓰여 왔다.
1990년에 시작된 몽골의 대규모 민주화 과정은 몽골의 작가들에게 새로운 가치와 새로운 개념의 미술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자주적으로 창작하는 것 보다 서로의 것을 모방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작가들은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자신들만의 스타일은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옳은 방향의 길을 가고 있다. 몽골의 미술을 발전시키는 것이 작가들의 과제이자 정부의 책임이다. 장래의
국가 발전의 열쇠로 문화에 우선권을 두어 예술과 문화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몽골의 전통 문화를 물려받는 것과 동시에 세계의 문명을 결합시키는데
중점을 두었다. 더 나아가 정부 계획의 움직임은 몽골전통 문화의 풍부한 유산과 진보한 세계 문명의 조화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지난 몇 년간 많은 활동을 해왔다. 몽골 정부는 예술가들의 권리와 예술작품들을 국가적 그리고 국제적인 수준에서 실증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게 된다. 저작권에 대한 법(1993), 특허권에 대한 법(1993),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을 보호하는 법(1994),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의 거래와 매매에 대한 절차(1994),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의 데이터베이스 구성 절차(1995),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유산에
대한 탐색과 연구 절차(1995), 그리고 국가 기금을 위한 예술품 구매 절차(1998) 등이 지난 몇 년간 문화와 예술에 관련하여 의회에서
통과된 법률들이다. 1998-2005년 예술과 문화 영역의 개혁과 쇄신에 대한 정부의 지침을 기준으로 하여 정부와 비정부 단체들 그리고 예술과
문화 협회들은 전국적인 디자인 미술 프로그램과 예술과 문화 협회들의 민영화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활동들이 작가들 사이에
창조적인 활동을 장려하고 작가들의 기량을 늘리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미술단체는 하나밖에 없는 NGO와 대학들에 의해서 그 구조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몽골작가 연합회, ‘Green Horse그룹(fig.3,4), Space그룹, ‘April그룹, Cita art그룹
등의 여러 NGO 단체들이 존재한다. 예술대학과 학교의 수도 증가하고 있다. 오늘날 전문적인 예술가들은 University of Fine
Arts, the Institution 'Urlah Erdem', Setgemj, Green Horse, Anima와 - 국립대학의
학교들이나 순수미술 학부의 교수단, 문화와 예술 대학교, 사범대학교 등에서 훈련을 받는다. 그 결과로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 맞추어 학교의
프로그램이나 순수 미술 교육의 질이 향상되어야 한다. 적임 교사들을 이에 준비시키고 교육을 시키며 보다 능률적인 프로그램을 준비할 필요성이
있다. 근래들어와 작가들의 개인전을 개최하는 수가 증가하고 있다. 전시공간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작가들은 몽골작가 연합회가
전시장을 확장하게될 것이라 말한다.
최근의 작품들을 관찰해 보면 몽골작가들의 작품들은 현대적인 경향이 지배적임을 볼 수 있다. 특히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술의 소개와 발전에 있어서 효과적인 역할을 했다. 현대미술에 대한 국제적인 심포지엄은 작가들이 서로의 경험을 교환하는 장으로는
불규칙적이 되었다. 오히려 심포지엄 중에 개최되는 현대미술 전시들이 관객들에게 작가들의 이러한 미술과 새로운 작품들을 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Odgerel은 지나 몇 년간 현대적인 미술 방향으로 작업을 해온 작가이다. 그는 연작을
전시한 작가이다. 이 전시에는 100개가 넘는 작품들이 전시되었다. 그는 그림을 만드는 것을 통해서 새로운 개념을 강구하였다. 그 개념에 의하면
영혼은 나쁜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작이다. 그의 개념을 방어하기 위해서 빠른 말을 그의 그림에 영웅으로 선택하였다. 그는 영혼이 그 나름대로의
형태와 색채를 지녔고 이들을 때에 따라서 바뀐다고 주장한다. 살아있는 환경, 음식, 과정의 재현, 영혼의 형태와 소리는 정의될 수 있고 그려질
수 도 있다. 영혼은 바람과 같은 속도와 공간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Orgerel에 의하면 이를 기하학적, 물리적, 화학적, 지리적, 생물적
그리고 철학적인 감각으로 그릴 필요가 있다. 울란바토르에서 개최된 소위 <대립(Opposite)>이라는 현대 미술 전시는 작가들과
관객들 모두에게 일종의 시험이었다. 기획자는 현대미술을 성공적으로 발전시키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 전시 제목을 몽골의 전통적인 전투 기구
또는 무기인 ’Opposite라고 붙였다.(이 무기는 아래 부분에 분리되지 밑은 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에는 18명의 작가들의 120여 작품이
전시되었다. 이 전시는 회화와 설치의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다. 회화작품들은 색채에 중심을 두었으면 설치 작품들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전문가들이 전시에 대해 따뜻하게 반응하였지만 관객들 사이에서는 오해와 싫어하는 것이 있었다. 이는 몽골의 관객들이 아직 이러한 예술을
수용할 준비가 모자람을 의미한다. 몽골의 순수미술을 위해서는 작가들에게 자신들의 재능에 도전할 수 있고, 유명한 대가들을 불멸시키고 신세대와
구세대 사이의 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는 보다 편리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몽골의 현대미술의 발전은 어느 정도 이 방향으로 성공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조각가이며 화가인 S. Sarantsatsralt와 화가 Z. Usehbayar에게 기대를 걸고 있다.




네팔의 현대미술


인류는 세계의 가장 중요한 주민이다. 그리고 인류의
감성과 느낌과 필요에 의해 세계는 확장되었다. 네팔은 종교적 감성이 대단히 깊은 나라로서 인도와 중국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여건상 아리안족,
힌두문화, 티베트, 몽골, 불교 문화를 혼합한 성격을 띠고 있다. 현재의 카트만두 분지에는 본래 호수물이 괴어 있어서 네팔 계곡이라고도
불려왔는데, 네팔이란 국명은 그 계곡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계의 지붕 히말라야 산맥의 중앙부에 있으며 삼림과 수자원(세계 2위)이
풍부하고, 비동맹 중립 노선을 주장하는 나라이다. 공용어는 인도아리아어계(語系)의 힌디어(語)에서 유래한 네팔어이나, 티베트-버마어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종족도 많다. 그밖에 10여 개의 부족언어가 사용되며 지식층은 영어를 구사한다. 종교는 헌법에 국교로 명시한 힌두교가 86%로 가장
많고, 나머지는 불교(8%), 이슬람교(4%)를 믿는다. 전설에 의하면 석가가 네팔의 타라이 지방 룸비니에서 태어났다고 하며 과학적으로
입증되었다. 7세기 초에 티벳의 속국이었으나, 9세기에서 15세기에 걸쳐서 이슬람교도의 침략에 쫓긴 라지푸트족(族)이 인도로부터 이주해옴으로써
인도적 문화 요소가 섞이기 시작했다. 성인(成人)의 문맹률이 90년대 말까지 60%에 달하며 네팔 문화의 큰 특징은 힌두교와 불교의 종교적
조화로서 불교 사원 내에 힌두 사원이, 힌두 사원 내에 불상이 있으며 종교․ 예식 행사도 힌두교인․불교인이 함께 참여하고 거행한다. 1인당
국민총생산은 220달러(1999)로 매우 가난하지만, 숭고한 자연미와 종교 문화의 전통이 깊어 많은 외국인들이 방문을 한다. 황금시대로 알려진
네팔의 ‘말라 시대(Malla era)는 예술과 공예의 시대였다. 세계 문화 예술 유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 시대의 예술적인 보물은 그
당시의 공예의 발전상을 증명한다. 역사적으로 예술 유산은 풍부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에 예술분야는 난관을 겪고 있다. 104년간의
‘라나스 통치(Ranas regimes)’ 시대에 네팔 예술가들과 조각가들은 큰 압박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압박의 이유에 대해 우탐
네팔리(왕립 아카데미 미술과 교수)는 “라나스 시대의 국무총리(prime minister)가 영국을 방문하여 영국 예술에서 큰 영향을 받아
네팔에서 외국의 예술을 강제로 이식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파우바(Paubha)라 불리는 네팔 전통예술은 자연적인 색깔이 사용되었으나
그들은 영국의 색깔을 쓰도록 강요받았다. 이는 파우바의 전통적인 기법과 기술에 변화를 가져왔다. 수채색과 유화색 사용의 차이 때문에, 파우바의
창작은 줄었다. 파우바라는 이름은 ’탕카(Thanka)라고 바뀌었다. 그리고 이는 티벳의 ‘라사(Lhasa)에서 발전을 이루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탕카는 실제 ’뉴와리(Newari)의 파우바가 그 뿌리이다. 그러나 이를 여기서 기술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라나스 왕국이 끝날
무렵, 복수 정당의 민주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에 따라 네팔 예술의 변화에도 희망이 보였다. 1958년 마헨드라왕은 네팔 왕립
아카데미(Royal Nepal Academy)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예술과 문학의 발전을 도왔다. 네팔 예술과 문화는 힌두교에 의하여 이끌어
진다. 힌두교를 기본으로 한 철학과 지식은 지난 세기에 설립된 믿음에 기반하고 있다. 네팔 예술에 있어서 ‘탄트라(Tantra), 추상적인
상징과 종교적 의미는 힌두교의 개념을 기반으로 창조된 철학과 추상적인 표현을 보여준다. 네팔의 현대예술에서 예술가들은 창작 속에 종교적 힌두
철학과 믿음을 새겨넣는 것이 거의 기본으로 되어 있다. 오늘날 네팔의 현대 예술에서는 예술가들이 그 자신을 회화나 조각 등의 매체를 통하여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반면에 서구식 설치 미술과 테크놀로지를 이용한 표현은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가능하지 않다. 1064년 당시 왕자였던
Birendra Bir Bikram Shah Dev에 의해 순수 예술 협회(the Association of Fine Arts)가 설립되었다.
이 협회의 설립 이후에 네팔의 현대 예술이 일보 전진하게 된다. 이 분야의 진보는 교육받은 네팔 예술가들의 헌신과 노력에 의해서이만, 예기된 것
만큼의 발전은 없었다. 경제적인 부족 때문에 예술 교육 프로그램, 사회 프로그램이 대중들에게 베풀어질 수는 없다. 이는 이런 필요에 대해 국가적
차원의 문제 의식이 크게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1990년 복수 정당 민주주의가 발현된 이후 예술과 문학의 발전을 고려하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네팔 전통 예술과 공예와 현대 예술의 발전을 위해 왕립 정부는 독립적인 순수 미술 학교를 세울 예정이다. 이 학교는 미술의 장기적
발전을 도울 것이다. 네팔의 근/현대 미술의 역사는 사십 년의 나이를 갖고 있다.
오늘날의 현대예술은 국가적 지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전세계의 다른 문화, 역사적 설정, 생활 방식, 전통을 흡수함으로써 예술이 번창한다. 인간은 진화하는 존재이다. 당연히, 문명의 긴 역사동안
인간은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고 이러한 발전은 계속되고 있다. 어떤 지식의 분야도 본질적으로 흥미롭지는 않지 않다. 어떤 분야를 선택하느냐는
개인의 경향(aptitude)이다. 인간은 한 분야를 선택한 후에는 그 분야에 대해 직관적으로 민감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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