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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 미술의 상황과 전망 (초록)-2

이영철

20세기의 모든 것, 근본주의 시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민족주의, 냉전, 내란과 혁명이 퍼레이드 처럼 아시아국가들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 기억은 오늘날까지 물리적인 충격으로 자주 깊은 자조와 탄식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아시아 전역에서 정상을 향한 욕구의 격렬한 분출은 서구 모더니티를 변형시키면서 맹렬한 성장 속에서 풍족함에 대한 다양한 갈망의 형태를 내뿜는다. 강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문화제국주의의 내면화’라고 부른다. 포스트 식민주의 문화지배가, 발전이라는 욕구의 측면에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주시를 기초로 아시아 특유의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혼성의 근대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가난과 절망 사이에서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빛나며 열대성의 포스트 모던 리조트들은 홍수림의 더럽고 질퍽한 물가에 인접하여 건설된다. 삶과 죽음이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가축과 사람들의 무리가 길에 떼지어 모여든다. 야외 노점들의 잡음은 과거 모닥불을 회상시키는 노출된 전구들에 의해 밝혀진다. 스텝 지대의 텐트들은 시간이 먼 옛날의 것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잘 알려졌듯이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자 매체를 통하여 동양식의 새로운 상상 지도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매체의 홍수에 빠져있다. 비록 고함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이해한다 해도 “사실적인” 아시아, 진정한 아시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그러한 종류의 확실한 “아시아”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열망하는 것은 ‘동양식’에 대한 욕구일 뿐이다. 아시아는 그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들은 일종의 감정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실상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아시아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문학가나 미술가들이 자주 자신의 예술적 테마로 그러한 종류의 독특한 정체성을 즐기는 것만이 진실일 수 있다. 따라서 아시아 사람들은 “아시아의 단순한 행위 또는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탐욕스럽고 복잡한 요구 형태와는 반대된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이제 아시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아볼 기회가 온 것인지 모른다. 오랫동안 서양의 지적 전통을 유지해온 고정된 실재를 요구하는 귀납적 이론 또는 실용적 원칙은 불필요한 과제일 뿐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또는 “동양적인 정신과 서양 기술”이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자기 방어의 논리를 삼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 세계화(globalization)는 이 지구의 어느 부분도 지정학적 특혜를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함께 공간적인 장소(topoi)는 의미를 잃었다. ‘아시아’에 대한 진부한 생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일은 아시아의 거품이 부풀어나면서 생긴 “부정한 돈”의 통화가 입증하듯이, 자본은 오직 공간적 차이를 사용하는 한에 있어 의미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세계 체계에서 주체성이 없는 은행으로 용해되어 버릴 것인가? 그렇게 되기 보다는 재정상의 그리고 시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체계가 가치를 산출하기 위해 아시아를 형성하는 다양한 특징들을 조작해낼 것이다. 그러한 체계의 지배에 따르고 순응하면서 아시아인들은 체계의 이치에 맞는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울 것이다. 아시아의 진부한 생각들이란 죽지 않는 가공의 공동체로 부활하고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는 이 시대의 헤테로피아로 남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범위에서 아시아는 살아있고 자신을 삶을 영위해 간다.

 

 

2장 아시아 미술과 의사 소통의 문제

 

(1) 암묵적으로 국가 내부의, 그러나 초국적인 지향성

1998년 싱가포르에서 개최된 노키아 국제큐레이터 심포지엄(Nokia International Curator Symposium)에 발제자로 참가한 적이 있다. 이 심포지엄은 다국적인 통신 회사인 노키아 후원으로 개최된 것이었다. 그 심포지엄은 서울, 일본, 타이페이, 페이징 등 아시아의 어느 도시에서도 흔히 보기 어려운 개방성과 참여적 열기를 느끼게 했는데, 참여자의 한 사람은 싱가포르 시민 사회에 뿌리를 내린 토론 문화이 단면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심포지엄에는 외국에서 초청받은 전시기획자들 외에 미술가, 비평가, 큐레이터, 저널리스트, 사회학자, 도시학자 등이 참여했고 일반 학생들과 시민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 토론은 미술 제도적 현실에서 결핍되거나 불공정한 조건을 개선 하거나 극복하려는 욕망을 명확히 함으로써 ‘커뮤니케이션ꡑ이라는 단어는 사회적 의미를 분명히 드러냈다.

1990년은 싱가포르에서ꡐ시민사회의 해ꡑ라는 명칭이 붙은 해였다. 아시아 경제 부국의 하나로 묘사되온 싱가포르는 1980년대 후반 부터 경제적 풍요를 누려왔다. 풍부한 기반 자원을 갖고 있는 싱가포르는 미래 사회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 그리고 현 시점에서 역동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다양한 실험적 일들을 수행하여 왔다. 10여년간 문화에 대한 국민 토론의 장은 ’참여 담론‘의 성격을 보여주며 한국에서는 이제 노무현 정권의 등장과 더불어 여러 분야에서 국민 토론이 활발해지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전 국민적 관심과 토론을 몰고온 것은 아시아 국가들의 경제 성장과 사회적 안정의 제도적 정신적 기반이라 여겨진 유교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담론이었다. 이광유 전 수상에 의해 주도된 이 정치 철학에 대해서는 많은 찬반론이 있었다. 그것은 또한 싱가포르 안에만 머물지 않았고 아시아의 다른 국가, 나아가 국제 무대에서 많은 관심을 유발시킨 주제였다. ‘시민 사회‘라는 말은 사회적, 정치적 상황과 관련한 실제적 가치 개념들의 표현이자 변화와 개선을 바라는 시민들의 욕구의 표현이다. 서구에서는 시민 사회의 자유주의 모형들이 비정규화된 행동주의적 경향을 띠며, 그러한 특성은 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적지않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이에 대해 싱가포르 정부는 ‘카오스‘적 상황보다는 비정치적으로 변형된 ’수용 가능한(containable)’ 상황을 국민들에게 제안했다. 개인과 단체들은 그들의 ‘경쟁 지역‘이 규제하는 이슈들에 강제적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한번 결정된 계약의 제한 범위는 단체나 개인이 이데올로기적 구조틀에 적응되고, 체계적이고 예민한 싱가포르 문화에 관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시민 사회‘는 사회와 정부간의 ’커뮤니케이션‘을 조정하고, 또한 정부라는 후원자를 인정하여 집중적이고 점층적인 성과를 내도록 한 장치였다. 미술 분야에 대해 관심을 보인 시민 사회 프로젝트는 싱가포르를 기품있고, 교양있으며, 박식한 사회, 그리고 국가의 다문화적 전통을 향유하는 사회로 개발하려는 목적을 충족시키려고 고안되었다. 문화 조직 단체들은 이러한 포부에 구체적인 결과물을 내야 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정보 자원들은 이를 가능하게 했으며, 계획안들이 구상되고 실행되었다.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정부의 풍부한 지원을 예술계에서는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포부의 본질과 이러한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방법들과 의견을 달리하는 또 다른 조직 기구들이 있었다. 문화적 이슈들이 활발하게 논의되는 분야 가운데 하나로 [발전소 회의 시리즈 (Substation Conference series)]를 들 수 있다. 1993년에 열린 첫번째 회의 ’미술 대 미술(Art vs. Art): 대립과 통합‘은 수많은 주요 이슈들을 부각시켰다. 서로 다른 해석 방식을 따르는 예술가, 평론가, 학자, 저널리스트 그리고 미술 행정가 등으로 이루어진 참가자들은 미적 자유, 검열제도, 미적 책임, 미술과 그 제한 영역, 미술과 정치, 미술 비평을 포함하는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토론을 통해 명료해진 것은 지방분권적인 개념들 사이의 긴장과 변두리(margin)에서 발산되는 긴장을 유지하고, 협동 전략을 통해 자치적으로 완성되는 미술의 중심 위치를 표명하기 위한 필수요건인 복수성의 위상과 그 개념을 조정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탕다우(Tang Da Wu), 빈센트 뢰우(Vincent Leow), 차이 쿠닝(Zai Kuning), 매튜 누이(Matthew Ngui), 살레 제이퍼(Salle Japer), 그리고 아만다 헹(Amanda Heng)과 같은 작가들은 기존의 현대 미술 언어 영역을 확대시키고자 하였으며, 서로 다른 각자의 전략들은 기존의 전략들을 정밀 조사하는 개념적, 주제적 관점들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퍼포먼스 예술 활동은 아직 표명되지 않은 담론의 특정 견해들을 제공한다. ‘저속’하며 ‘미적 가치’가 전혀 없다고 평가된 1994년 조셉 뉘의 퍼포먼스는 어디까지 그 경계가 허락되며, 정치적 담론에 따라 어느 지점에서 미술의 일시성과 관련한 미적 범위가 강요되고 확장되는가에 대한 사례 연구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 이 사건은 미적 자유와 창조에 대한 정부의 개입이라는 부정적 견해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건은 절대적인 조정 행위가 이루어지는 협상 단계로 묘사될 수 있다. 계약과 ‘상호교환적‘ 절차를 통한 수용이 이루어진다. 퍼포먼스는 조셉을 포함한 여러 사례들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에서 그 위치를 지켜오고 있다. 적절한 표현 방식으로서의 퍼포먼스가 조셉의 ’케인 형제(Brother Cane)’에서 발생한 ’외설’에 대한 이슈와 분리되어 여겨지는 것은 정부 공무원들에 의해서였다. 미술 자체가 우리가 필요로 하는 사회 환경의 반영에 대한 아이디어를 개선하고자하는 이 사건은 싱가포르 미술에서의 ‘시민 사회‘ 프로젝트의 탄력성을 잘 보여준다. 조셉의 퍼포먼스를 통해 깨닫게 된 것은 예술가와 정부간의 본질적인 적대관계를 지나치게 과장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수많은 경우, 예술인 마을(Artists Village)을 포함한 현대미술 단체나 미술가들은 정부 주최 행사들에 협력하였고 자신들의 ‘대안적인’ 위치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혜택을 누렸다. ‘급진적‘인 예술가들과 정부 사이의 관계는 협력과 저항이라는 복합적인 행위 내에 존재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탕 다우와 아만다 헹의 접근 방식은 유추적이며 포괄적이다.

 

명제1: 중요한 것은 하나의 유기적 단위이며, 숙명적이기보다는 오히려 역동적인 성격을 갖는 공동체 개념이다.

 

아만다와 다우의 근작들은 순응적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들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자들의 창조적이고 해석적인 에너지는 종종 목적, 의미, 그리고 중요성이 단일적으로가 아닌 참가자로 인해 생성되는 협동적 단계 내에서 사용된다. 국가, 공동체 사회,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아이디어들은 대부분 상호 작용적으로 측정된 형태뿐만 아니라 그들의 관람객과 장소를 함께 고려하여 표현된다. 우리는 그러한 협동적인 전략들을 자기 검열의 행위로 간주하기보다는 표현 공간과 의사 소통 방침을 유지시키는 것과 관련하여 예술가와 공동체 사이의 사회 계약을 재성명하는 행위로 고려할 수 있다. 아만다 헹과 탕다우는 모두 지역 사회를 포함하는 이슈들에 관심을 표명할 뿐 아니라 작가와 관람객들 사이 그리고 더 나아가 관람객들 사이에서 공유되는 생각과 감정을 표명할 수 있는 방법들을 자신들의 작품 방향으로 설정한다. 아만다는 지역 사회에서 소외된 ’이웃 정신‘을 회복하고자 하는 시도를 보이며 또한 집합적인 치유를 통한 접근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다우는 세 개 프로젝트로 이루어진 Life in the Tin, Rubber Road and Jantung Pisang: Heart of a Tree에서 참가자들의 반응을 마치 캔, 고무, 바나나 나무와 같이 평범한 물질들로 해석하고 있으며 그들 관계를 폭로하고 사회사, 문화, 그리고 상황에 따라 그 물체들과 재료들의 사용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사회적 문맥을 고려하는 작가들의 작업은 지역적 담론 내에서 식별되고 문맥화되지만 정보 기술과 세계화의 출현에 의해 가능해진 유동성과 접근성은 예술가들이 더 이상 관람객을 국가 내부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는 의식을 갖게 한다.

 

명제2: 커뮤니케이션은 중립적인 방법이 아니다. 커뮤니케이션은 권력 관계 아래 놓여있다.

 

왕궁우(Wang Gungwu)는 ꡐ전통과 변화ꡑ라는 책의 서문에서 현재 모든 문화들은 하나 혹은 다른 형태에 도달해 있음을 언급한다. 우성 분자는 어느 곳에나 편재해 있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이 조정하는 권력과 부로 인해 거의 억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들 각각은 거짓들이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를 매체와 정보의 또 다른 채널들을 향해 개방되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해야 하는 위치에 있다. 사실 그들은 지배 문화와 필적할 수는 없지만, 열등한 문화에는 현재 쉽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오늘날 국제적인 전시들은 거의 공통적으로 인종들 간에 다리를 놓고 실제의 혹은 상상의 벽들을 극복하는 문화들을 연결하는 미술을 제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아직도 작가들은 근대 국가의 상징인 국기와 배너가 휘날리는 곳에서 자신들의 작업이 자신이 속한 국가의 사회적, 정치적 환경으로부터 받는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국제전을 관람하면서 종종 당면하게 되는 의문은 이슈를 기반으로 하는 경향의 작품들, 즉 차이에서 비롯하는 주변성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하는 작품들이 실질적으로 커뮤니케이션될 수 있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용자로서 실제와 허상을 구분할 수 있는가? 또한 문화적 표명과 오해에 대한 의문들에 대해 물을 수 있다. 아시아의 밖에서 일어나는 국제 전시 행사들은 냉소주의와 이의제기, 그리고 비판을 포함하는 동시에 인종적 페르소나와 관련된 자기-이국성(self-exotism)을 포함하는 미술 작품을 거의 대안적인 고려사항 처럼 장려하는 경향이 있다. 이 작가들, 그리고 그것을 유발시키는 큐레이터들은 서구적 인식(선입견)와 결탁하여 아시아에 대한 중복 해석을 시도하게 된다. 좀더 극단적인 경우 아시아는 신비하고 이국적(유혹적)이며, 또한 인간 권리의 억압(제압)이 계속되는 곳으로 해석한다. 서양에 있어 아시아는 적당하게 유혹적이며 제도적으로 억압적인 것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런 까닭에 현대 미술에서 상호 교환적 표현의 해석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중심-주변적인 관계를 넘어 서서 커뮤니케이션의 변증법적인 본질을 회복시킬 수 있다면, 커뮤니케이션 또한 화해를 허락하고, 침략자와 희생자 모두가 상호 범죄와 고통을 인식하고 함께 애도할 수 있게 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은 극도의 간소화에서 오는 위험을 무릅쓰고 협상 방법의 도구로 사용되는 메시지나 정보의 매개물로 간주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목적은 정보를 알리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수용자들로 하여금 정보를 모으고 축적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나중에 혹은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도록 해준다,

커뮤니케이션의 교섭적이고 효과적인 방법 절차는 변형적이고 또한 동시에 반동적일 수 있다. 따라서 미술에 대한 주목은 국내적 담론에 의해 특징지어진 ꡐ민족적(national)ꡑ에 동의할 것이 아니라 불균등한 국가 간의(inter-nation) 교환 상황 속에, 보다 광범위하게는 ‘국제적 범위에 관계하는 상호 교환적 의미로서의 ꡐinter가 ’national의 의미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는 것에 보다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2) 의사소통의 두가지 차원

공통점이 없는 역사적 배경, 문화, 정치와 경제적 상황을 가진 국가와 지역 사이에서는 차이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어떠한 교류의 형태이건 우리는 늘 이질적인 문화들 사이에 ‘대화’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그 용어에 대한 통일된 시각이 부족하거나 결여되는 수가 많다. 교차하는 문화의 대화는 굳이 여러 문화에 양다리를 걸치고 서있는 작가들이 어떻게 자기의 작품을 구성하느냐가 아니다. 주목해야할 점은 작가와 관객들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이다. 또한 간과해서 안되는 것은 작가의 내면 의식을 포함하는 대화이다. 특히 이 후자의 것은 모더니즘 이후 미술의 전개에 있어서 자주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싱가포르 출신의 작가 아만다는 과거에 한번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자신과 어머니 사이의 새로운 대화를 표현하기 위해서 자신과 어머니와의 관계를 표현하는데 사진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아만다는 자신의 주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일종의 가족간의 관계를-더 넓게는 우리가 속해있는 사회나 사회단체간의 관계- 포함하는 대화들이 이 전시 뒤에서 추진하고 있는 힘들이다. 우리들은 다른 매체를 통해 일어나는 대화의 질적인 변화에도 우리의 관심을 돌려야 한다. 그에 대한 하나의 예로는 고정된 물리적인 환경이 가정된 마을 공동체의 지역적이고 친족관계에 의해 형성된 대화이다. 다른 하나는 전자 매체의 결과로 멀리 떨어진 장소들과의 동시적이고 여러 차원에서 연결되는 대화이다.

 

명제3: 간과하기 쉬운 것은 미술이란 단순한 일상적인 대화의 장이 아니라, 자아를 찾는 발생지의 역할을 하는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영역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대화로 부터 생겨난, 대화 뒤에 숨은 에너지를 끌어내는 시도는 서구적 자아와 다른 자아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 결과로 미술계에서 대화에 집중되었던 관심은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미술과 일상 생활의 대화 사이의 혼돈은 피해야 한다. 대화가 모티브 또는 소재가 되는 일상 생활을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미술 그 자체는 우선적으로 항상 일상의 현실과 분리된 자아를 발견하는 잠정적 공간이라는 명백한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는 것이 예술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다함께 찾아가는 생산적 대화와 해석을 낳게 된다. 미술은 시각 예술로서 인식되지만 대화는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로부터 생겨난다. 다시 말해 미술은 주로 물체나 물리적 물질로 보여진다. 반면에 대화는 무형의 해프닝 또는 사건이다. 이론상으로는 시각적인 물체나 구체적인 물질들을 매체로 사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자아가 보이지 않는 관계를 의미하는 대화에 의해서 생긴 것이라고 경험하고 인식하게끔 하는 것이다. 만약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들에 근거한 자아가 예술의 중심에 서있다면 예술 작품들은 그런 관계에 근거한 자아가 의식적으로 인지되는 방법으로 작가들에 의해 구성된 장소들이다. 작품은 작가가 관객들과 함께 그 자아를 경험하는 현장의 역할을 한다. 미술 작품이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에 근거한 자아를 경험하는 장소라는 사실은 자아란 감각의 경험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아는 다른 견해들 사이의 내적인 대화에 근거한다고 말한다. 바꾸어 말하면 어떠한 것들 사이의 대화는 예술 작품 안에 묻혀 있다. 예술에 있어서 자아와 외부 세계 사이의 대화는 자아 안의 관계로 옮겨진다. 이는 내적인 대화에 의해 자체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고 표현될 수 있는 근원의 역할을 한다. 내적인 대화는 반드시 둘 사이의 조화로운 공존으로 예상하여 진행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로 대립하고 상대화하는 관계가 보다 보편적이다. 자아는 마찰이 수반되는 조화를 추구하는 도중에 그것들 간의 미묘한 틈새에 생긴다. 예술과 대화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단단한 틀은 아시아 미술에 있어서 세계적인 메시지를 진실로 전달하는데 필요한 조건이다. 근대 이후 형성되온 서구적 자아 개념에서 벗어나 자아를 내적인 대화로 지각하는 개념적 틀로 변화시키고 그것을 보다 활성화시키는 것은 아시아 미술을 서구적 전통과 개념으로부터 차별화하는 하나의 유효한 방편이 될 수 있다.

 

(이글은 한국학술진흥재단 연구지원금을 받아 3년간에 걸쳐 작성해온 논문으로 아시아 26개국의 현대미술 상황과 전망에 대해 다룬 내용의 일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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