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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징기스칸 백남준에 대한 국제적 공동 연구의 필요성

이영철

야금술과 인류학의 현대적 융합
- 문화 징기스칸 백남준에 대한 국제적 공동 연구의 필요성

이영철│백남준아트센터 초대관장



백남준예술에 대한 연구는 그가 이룩한 ‘믿기지 않는’ 위업들, 남겨진 글들, 기록들, 많은 작품들 그리고 열광적인 몇몇 지지자들과 넓고 다양한 인간관계들에 비할 때,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에서 조차 그 연구가 너무도 충분치 못하다. 보이스, 케이지에 비할 때 그에 대한 조명은 지나치게 피상적이고 이론적 깊이가 없다. 미국 국적으로 40여 년을 살았지만, 최근 뉴욕에서 발간된 통사적 성격의 미술사 이론서인 [20세기 미술](로잘린드 크라우스, 할 포스터 등 저)에서 백남준을 다룬 부분은 너무 빈약하다 못해 왜곡되어 있기 조차 하다. 미디어와 고고학, 종교인류학의 관계에 있어 그 어느 예술가 보다 탁월했던 백남준의 예술 세계에 어김없이 못미치는 지적인 한계 안에서 많은 부분이 가려져 있거나 피상적으로만 언급 되었다. 저널리즘의 과도한 신화화, 혹은 국내 전문가들의 냉소주의 그리고 국가주의/인종주의의 선입견이라는 장벽 속에서 백남준에 대한 연구는 궤도에 진입을 못하고 있다. 부족한 가운데, 이 글은 새로운 연구를 위한 작은 단서로서, 초기의 백남준 예술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메모해 본 것이다.

백남준은 “예술가의 역할은 미래를 사유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세계의 역사는 우리에게 게임을 이길 수 없다면 규칙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일찌감치 열려진 세계로 나가 60, 70년대 아방가르드 예술의 치열한 현장에서 접전을 벌이며, 큰 생각과 평생에 걸친 집요한 실천을 통해 백남준은 마침내 규칙을 바꾸어냈고, 우리는 이제 그 비밀의 문으로 걸어 들어가기 위해 그의 뒤를 쫒고 있다. 이것은 그가 빠져 나온 20세기의 좁은 출구를 찾아 좀 더 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적 여정의 첫 시작이다. 예술가는 현대의 원시인이라는 말이 있다. (원시인 보다는 선주민이란 표현이 좀더 정확하다) 백남준은 TV를 볼 때마다 글자가 아니라 구술과 이미지로 소통하던 신석기 시대를 떠올리곤 한다고 말했다.

신석기 시대는 정복과 지배를 통한 국가의 성립이 일어나지 않았던 시기에 해당하며, 어느 민족이든 상고시대 혹은 선사시대로 올라가면 신화적 담론으로 역사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달은 최초의 TV다“라 언명했을 때, 그것은 유비쿼터스 시대의 테크놀로지의 중요성을 말하자는 것이 아니며, 테크놀로지와 신화적 담론의 상상적 창조적 결합을 의미한다.

아트센터의 소수의 연구자들과 함께 일하면서, 백남준과 그의 친구들, 그리고 현재 활동 중인 젊은 예술가들이 각자 그려내는 ‘구체적인 유토피아’의 그림을 이해하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그 과정에서 세계 곳곳에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심고 떠나간 백남준에게 모두가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마음을 혹시라도 한 단어로 표현할 수가 있다면, 아마도 해원상생(解寃相生), 즉 원한을 풀고 서로 살자는 말일 것 같다. 백남준이 바라는 세상은 세계적 차원의 상호 이해, 전쟁 없는 사회, 투명하며 서로 연대하는 사회, 지구촌을 향한 행복한 꿈이 어우러지는 그런 이미지의 세계, 현대의 만다라 풍경 같다. 작년 10월 개관한 백남준아트센터는 그런 취지에서 이솝 우화의 한 구절 “여기가 로두스섬(*유토피아)이다. 지금 점프해라(Now Jump)”에서 따온 ‘Now Jump’를 페스티발 주제로 정하면서 백남준의 정신에 접촉하려고 했다. 그 말 속에 ‘남준파이크’의 약자인 N. J. P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우연히 김문수 도지사가 발견한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나치 치하에서 레지스탕스 요원으로 활약하다 전후에 독일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던 장 피에르 빌헬름은 누구보다 20대 나이의 청년 백남준의 천재성을 가장 먼저 포착하여 오늘의 백남준이 되게 만든 귀인이다. 백남준은 자신의 인생에서 세 번의 중요한 기회가 있었고, 이것은 빌헬름이 만든 것 이라고 했다. 1978년 그가 병으로 죽자 백남준은 그를 오마주하여 길에서 조용히 ‘무위(無爲)’의 퍼포먼스를 했다. 백남준은 길을 걷다 멍하게 하늘을 쳐다보고 쇼 윈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하품을 하다 느닷없이 공중으로 펄쩍 뛰기도 한다. 습관적인 동작을 하다 하늘로 솟는 것이다. 그 모습은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것의 중간 형태를 띄고 있다. 이런 실존 방식을 귄터 안더스는 미디어적(medial)이라 불렀다. 형이상학적인 사이비 개념들을 제거해 버리는 표현 차원의 깨끗한 정화(淨化), 지루한 기다림과 예측할 수 없는 놀람, 부드러운 유머와 우정 어린 몽상. 이 모든 것이 만프레드 레베가 사진으로 기록한 백남준의 오마주 퍼포먼스에 있었다.

백남준의 유럽 데뷔무대는 1959년 바로 빌헬름이 주최하는 전시 행사였다. 백남준은 이 전시의 개막 퍼포먼스를 맡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존 케이지에게 경의>라는 제목의 공연이다. 12음계가 매너리즘에 빠졌다고 실망한 백남준은 쇤베르크로부터 멀어졌고 1958년 다름슈타트 음악 페스티벌에서 만난 케이지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읽었다. 그러나 백남준은 좀 더 파격적이면서 자극적인 방식으로 ‘반음악‘이란 단어를 사용했다. 그의 공연은 심오한 철학적, 이론적인 음악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음악에 다다를 끌어들여, 음악을 통해 그가 생각하는 새로운 사유를 발생시키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러한 사유의 방식은 있음(being)의 철학이 아니라 되어감(becoming)의 철학 혹은 인류학적 사고에 근접한 것으로 읽혀진다.
당시 지적 토양을 살펴보면 레비 스토르스가 [야생의 사고]라는 명저를 출간하면서 구조주의를 통해 비서구권에 대한 연구에 불을 지폈고, ’타자성‘을 학문에 끌어들인 정신적 분위기가 있었다. 따라서 이와 유사한 내적인 발견이 백남준에게도 있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아시아에서 온 키 작은 청년의 내면에서 마그마의 뜨거운 열기가 솟아올랐고, 그것은 유럽중심주의의 국가체제를 넘어 지성의 새로운 회복을 일깨우기 위해 인간의 모든 감각들을 불러내는 복합적인 지적 혁명이었다. 청각, 촉각, 관객의 능동적인 개입을 유도하면서 테크놀로지를 메시지 전달의 선전 도구로부터 해방시키는 격렬한 시도가 당시 세계 대전으로 주눅 들어 있던 독일 국민들, 그리고 가해자, 피해자 의식에 시달리고 있던 유럽의 백인들에게 적지 않은 해방감과 통렬한 웃음을 선물하였다. 일본의 종교학자 나카자와 신이치가 말했던 것처럼, 무의식 속에 잠재해 있는 감각과 사고의 야생을 잠에서 깨어나게 하고, 일어서게 하고, 그것에 표현을 부여할 수 있는 지성의 형태로서의 예술을 선물하고 많은 대중들과 공유하고자 했던 것이 <존 케이지에게 경의>라는 작품의 핵심이었고, 이것이 백남준 예술의 기본적인 출발이었다고 본다. 그는 자신이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고 확신하면서 독일 국민들 앞에서 브루주아 교양취미의 허식을 공격했고, 유럽의 음악인들 사이에서 악기 자체를 부술 수 있었다. 이는 매우 대범하고 놀라운 일이다. 총 3악장으로 이뤄진 이 작품에 대해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1악장: 마르셀 뒤샹 + 도스토예프스키 = 쿠르트 슈비터스(*백남준은 슈비터스에 열광했고, 1989년 제2회 슈비터스상을 탔다. 1회는 그의 프랑스 친구였던 로베르 피유가 받았다)과 같은 도식으로 표현하였는데, 제 1악장의 핵심은 라디오 소리들의 콜라주와 언어의 융합이다.

제2악장: 가능한 지루하게(*지루함은 반자본주의적이다): 프루스트, Zen, 그레고리 합창, 미사, 파리의 카페, 삶, 섹스, 먼 곳을 바라보는(*tele-vision의 의미) 개 처럼. 존 케이지와 다른 방식으로 ’조작된 피아노‘를 사용가 사용되었다.

제3악장: 확성기를 통해 신음악의 철학자 아도르노와 랭보의 구절이 울려퍼지게 함. 고답적이고 젠체하는 음악 극장의 질식할 분위기에서 능동적으로 도주한다.

피아노는 넘어지고 유리가 깨지고 계란이 던져지고 종이는 찢어지고 살아있는 닭이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오토바이가 들어온다.

1963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은 음악의 역사, 그리고 시각 예술의 역사 양편 모두에서 중대한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다만 그 전시를 보고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손을 꼽을 정도이고, 불과 몇 사람에 의한 간단히 쓰여 졌거나 사진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전시는 16개의 스토리로 구성된 옴니버스식 구성으로, 예술에 대한 기존의 생각들과 단절을 선언하는 일종의 스테이트먼트였고, 따라서 EXPEL이란 글자를 크게 강조하고 있다. 갤러리 입구에 걸어놓은 잘려진 소머리, 각기 다르게 조절된 13대의 TV 모니터, 음악과 시각의 관계, 쿠바 침공에 대한 항의, 20세기의 기억들, 4대의 ‘조작된 피아노’, Zen 퍼포먼스와 결합된 각종 오브제들, 동료 작가들에 대한 참여 기회 제공, 관객들의 능동적인 참여 유도 등 젊은 작가의 첫 개인전이라 하기에는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큰 비용이 든 것이고, 발상의 놀라움과 역사적인 첫 시도들, 광기에 찬 에너지의 분출을 보여주었다. 당시 전시를 본 전문가들의 평가로는 이 전시는 당시 느슨한 모임에 불과했던 플럭서스의 영향, 혹은 연장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며, 오히려 그의 지적인 스펙트럼과 기발한 창조력, 실행력이 당시의 전문가들을 크게 놀라게 했다. 비행기 사고에 유목민 타타르족의 보호로 목숨을 건졌던 보이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사진은 남아있지 않지만 보이스는 백남준의 첫 개인전에서 백의 과격한 퍼포먼스를 보았다고 증언되는데, 백남준의 첫 개인전에서 피아노를 거칠게 망치로 내려치는 퍼포먼스는 백남준에 대한 보이스의 오마주로 이해 될 수 있을 것이다. 보이스는 백의 전시를 보고난 후에 갤러리 주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의 갤러리에서 열렸던 백남준의 전시는 ‘역사적인 모멘트’이며, 이에 경의를 표합니다. 이 전시 후에 나는 어떤 것도 새롭게 제안할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라고 극찬하였다. 바로 이 개인전은 45년이나 지난 지금에서야 독일이 아니라 비엔나를 대표하는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매우 진지한 연구를 기초로 해서 전시를 재연해 냈다.
이와 같이 백남준의 초기 프로그램 속에는 이미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전개될 예술의 DNA가 내재해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는데, 음악과 철학에서 시작한 그는 독일에서 훨씬 포괄적인 공부를 통해 영감에 불을 지폈을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음악, 유럽의 건축사, 헤겔 철학, 미술사 등을 공부하며 유럽 문명의 컨텍스트를 이해하게 되지만, 무엇보다 전후 독일에서 아방가르드 문화 중심지였던 뮌헨, 쾰른, 뒤셀도르프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굉장한 의욕과 자신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백남준이 떠나고 없는 지금, 이제 우리는 해석자의 입장에서 백남준에게 접근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여느 천재들이 그랬듯 백남준은 매우 친절하게 많은 단서들을 남기고 떠났다.

“나는 내가 왜 ‘가장 극단적인 것’에 관심을 가졌는지 되물었습니다. 그것은 몽고인으로서 내가 지닌 유전자 때문입니다. 몽고-우랄-알타이 등지에서 말을 타고 사냥하는 민족들은 선사시대에 시베리아에서 페루, 한국, 네팔에서, 라플란드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녔습니다. 그 사람들은 중국의 농경사회처럼 중심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저 멀리 보았고, 그들이 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지평을 보았을 때, 그들은 가야만 했고, 더 멀리 보아야만 했습니다.” -백남준

여기서 그의 발견, 비디오 아트의 창안을 정주민이 아니라 유목민에게 고유한 전쟁기계로 파악할 때 그 비밀이 밝혀질 수 있다는 가정을 제기하고 싶다. (전쟁기계라는 개념은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전쟁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국경선이 명확해진 상황에서 국가 장치로 귀속 되어버렸지만, 본래 전쟁은 국가의 형성을 제거해 버리는 유목민에게 고유한 것이었다. 기동성과 즉흥성이 뛰어난 유목민이야말로 전쟁기계의 발명자였다. 전쟁기계라고 하면 오늘날 우리가 뉴스에서 흔히 접하는 탱크나 미사일과 같은 무기로 생각해 버리기 쉬운데, 신화, 서사시, 연극, 춤 그리고 각종 놀이 역시 유목민에게 있어서는 중요한 전쟁기계였고, 이것은 문화인류학적 고리를 갖는다. 오늘날 장르나 시대에 구애받지 않는 예술인류학적 사고를 현대 미디어와 융합시켜 매우 포괄적으로 힘 있게 작업한 예술가는 백남준이 거의 유일하다. 백은 자신의 탄생 100주기가 되는 “2032년이 되면 자신의 존재를 세상 사람들이 알아줄 것”이라 했지만, 친절하고 성실한 그는 미래의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동시대 사람들을 위해 많은 글과 인터뷰를 남겼다. 백남준에 대해 오랜 세월을 걸쳐 긴 논문을 썼던 장 폴 파르지에는 말했다. 마르셀 뒤샹이 20세기 전위 예술의 아버지라면, 백남준은 다음 세기의 예술을 열어주는 예술의 어머니라고.

백남준의 예술을 유목론에 위치시킬 때 중요한 또 다른 측면은 전자 공학, 테크놀로지를 가능하게 한 유목민의 야금술이다. 프랑스 학자 시몽동이 “역사적으로 볼 때, 야금술 없이는 전자 공학도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전자의 속성은 금속성이다. 이때 모든 물질은 야금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심지어 물이나 풀이나 나무, 짐승조차 소금이나 광물적인 원소로 가득 차 있다. 모든 물질이 금속은 아니지만 광물질의 금속성은 물질 전체를 연결시키는 소통의 매개이다. 그가 쉔베르크, 케이지를 거쳐 자신에게 흡족한 방식으로 음악(소리)을 다루는 것을 보면, 유목민의 야금술과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야금술과 음악의 관계는 대장장이가 내는 소리 때문이 아니라 둘 사이를 관통하는 경향, 물질의 연속적인 변주에 있다고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개의 고원에서 주장한다. 백남준은 음악가로서의 대장장이, “금속성의 합성음”을 내는 최초의 적극적인 변형자였다.

백남준은 유목민 전사에게 특유한 성질인 광기, 기묘함, 비밀성, 정념 등에 대해 ‘자신에게 내재한 극단주의’라 불렀고, 그것이 몽고 유목민의 DNA에서 기인한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플럭서스 운동을 창시한 마치우나스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 “짐은 곧 국가다”(루이 14세)를 뒤집어 “나는 황화(黃禍)다!”라고 과감하게 말한다. 황화는 13세기를 살았던 유럽인들에게는 몽고 기마민족들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과 재앙을 의미했다. 칭기스와 쿠빌라이가 유라시아 영토의 절반을 차지하여 지구를 축소시켰듯이 백남준은 ‘세상을 축소시키자’ 혹은 ‘스킵’이란 표현을 즐겨 썼다. 따라서 세상을 실시간으로 연결하는 전자 수퍼 하이웨이를 구상하고 그것이 위성-예술로 이어지는 것은 필연적인 진행이다. 전자 기계화 속의 삶에 대한 예견과 창조 속에서 다양한 계열의 TV 시리즈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유태인 백인 여성 샬롯무어맨과의 역사적인 만남을 통해 ‘전자 육체’를 만든 것은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루벤스의 그림에 나오듯 풍만한 여성의 가슴(지구 생명의 젓줄인 달)에 TV 브라를 부착한 후, 소형 모니터 속에서 인간의 달 착륙 장면이 보여지게 한 상상력은 흥미롭다.


“달은 최초의 TV이다” -백남준
지구가 생명의 배양소라면, 달은 조수 간만의 차이, 생명의 전 과정과 모든 동식물의 생체 리듬을 조율하도록 신중하게 설계된 우주의 놀라운 장치이다. 또한 현대 진화론이나 시스템 이론에 가장 근접한 종교인 불교에서 달은 부처의 마음이다. [월인천강지곡]에서 보듯, 빛이 없는 세상과 인간사에서 천개의 강에 똑같이 자신을 비추는 달의 모습이 곧 부처인 것이다.

라인강의 물결처럼 주사선이 흐르는 TV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부처는 바로 생명의 어머니인 달이다. 그 달이 백남준을 만나 최초의 TV가 되었다. 백남준은 인간이 달 표면을 밟은 바로 그 날(7월 20일) 출생했다. 백남준의 가장 초기의 예술이 개화하던 50년대 말부터 60년대까지 미국과 소비에트 사이에는 위성 탐사, 로봇 개발의 우주 경쟁이 치열했던 점이 백남준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었을 것이라는 점을 외면할 수 없다. 백남준은 구텐베르크시대의 끝자락에서 종이 없는 사회를 대비한 신교육을 천명하면서도 백남준 자신은 집에서 TV를 보는 것이 아니라 매일 여러 나라 언어로 된 일간지를 샅샅이 읽었다. 인간, 기계, 자연이 하나가 되어 비유기적 생명의 차원으로까지 인간의 지성이 고양되는 미래, 그것을 남보다 먼저, 더 멀리 보아 현재로 끌어당기는 위대한 몽상이 백남준을 미디어 아트의 황제, 문화적 징기스칸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테크놀로지의 인간화라는 말은 인간의 속성이 변하지 않은 채 테크놀로지를 인간적 도구로 활용한다는 말과는 다르다. 삶과 분리되거나 단지 그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재현하는 수단으로서의 비디오 아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와 반대로 비디오, 전자 기계 세상이 자연, 인간과 하나가 되어 행복하게 어우러지는 텔레토피아(tele-topia)의 세상에 대한 꿈이고, 그것은 사이버네트 아트와 혼동될 필요가 없는 사이버네이티트 라이프인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초기 백남준 예술에 크게 영감을 불러일으킨 천재 수학자 노버트 위너, 그리고 맥루한을 백남준 예술에서 재맥락화 해야 할 것이다.

위의 글에서 언급한 지점들은 백남준 예술 읽기에 있어 단지 몇 가지의 가능성에 불과하다. 백남준아트센터는 지난 2월 <백남준의 선물 1>이라는 타이틀의 세미나를 시작 하였는데, 백남준 예술 실천을 관통하는 핵심 개념으로서의 선물(증여)은 자본주의 교환에 대한 대척점으로서 유용하게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아트센터는 앞으로도 계속 같은 이름으로 개최해 나갈 것이다. 백남준 선생이 남긴 많은 단서들을 추적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사유의 지평을 펼쳐가기 위해서는 국제적 수준에서 함께 연구하고 대화하고 토론하는 지속적인 모임을 만들고 유지해 나가는 것이 우리의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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