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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동(惡童)과 약동(弱童)의 선분 사이에서

이영철

악동(惡童)과 약동(弱童)의 선분 사이에서
- 한성대 미술대학생들의 전시(2007. 10)를 기획하며

대상, 주체, 방법, 영역, 가치, 거리, 기준 등 모든 것이 암흑 지점으로 소란스럽게 빨려 들어가고 있다. 대학 교육의 가르침과 배움의 관계 또한 근본적인 변화를 겪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 한 가지 이유는 대학의 고등 미술 교육이 학생들에게 예술가의 강인한 감수성을 길러내는 것과 별반 관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대학의 고등 미술 교육이, 반드시 질문하고 넘어가야 할 사회적 가치들과 연관된 창조적 사유와 이미지들을 재빨리 조절해버리는 시의적절하고 강력한 현대적 힘들에 맞설 능력 자체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한 채, 이젠 그런 물음 자체가 썰물처럼 지워져 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 교육 조차 전통적으로 장기 지속의 관점에서 유지되어온 자체의 고유한 비판 능력을 상실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가가 되려는 학생들은 무엇을 고민하고 배울 것인가. 스스로 어떤 물음을 생산할 수 있는가. 개인의 잠재적 창의성은 오히려 고등 교육을 통해 평준화되거나 무뎌지기 십상이지만, 그렇다고 대학에서의 교육을 떠나 저 홀로 출발하고 길을 개척하는 예술가의 존재가 사라진지도 오래 되었다.

작가의 존재도 작품의 의미도 미술의 역사도 이제 확고한 것은 없다. 지식의 반감기가 가속화되는 지식 정보화의 압력 속에서 교수는 더 이상 가르치는 자의 위치에 머물 수 없고, 그는 학생과 함께 새로운 배움의 길을 떠나는 도반의 위치에 섰다. 이는 우리가 안정적으로 과거의 기준에 입각하여 미래를 설계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 생의 국면에서건 창작의 조건에서건 위급한 진단이나 처방의 지점에서 번지 점프를 해야 하는 어떤 국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런 정황 속에서 아감벤이 말하듯, 우리는 누구나 '나는 할 수 있다? 혹은 나는 할 수 없다?'라고 하는 잠재성의 물음에 직면하게 마련이고, 이것은 경쟁 사회의 다급한 생존 논리와 달리 창작을 선택한 자에게는 또다른 질적인 생존의 문제가 된다.
객관성이라는 폭력에 저항하면서 사회를 보호할 수 있는 가치 생산자로서의 예술가에게 요구되는 조건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청년 막스 베버가 스스로 문제를 발견하고 스스로 해결해 가려 했던 과제 설정에서 무언가 배울 점이 있다고 본다. 이제까지 어떤 분야의 어떤 완결된 뛰어난 과거의 작품도 단지 서문에 불과할 뿐, 본론이 쓰여져 본 적이 없다고 스스로 설정하는 일이다.

각자 자신이 생각하는 본론을 구상하고 만들어보는 왕성한 실험과 도전의 정신이 필요하다. 상업주의와 전문가주의, 어설픈 현실 정치 학습에 자신의 잠재된 능력을 쉽게 팔아버리는 시대에 우리 각자는 사회를 지켜내는 건강한 아나키스트가 되기를 꿈꾸어야 하지 않을까. 겁낼 것은 없다. 각자의 취향과 재능을 살려 〈악동〉이 되는 훈련을 거듭 반복하자. 부족한 시간에 학생들에게 얼마간의 자극이 되길 바라며 전시에 대해 몇가지 제안을 했으나 그것이 서로에게 얼마나 성실한 일이었는지, 얼마나 성과가 있었는지 별로 확신이 없다. 다만 서로에게 유익하고 즐거운 시간이 되었기를 바랄 뿐이다.

(추신)
복수성(複數性)의 함축과 표현을 위하여

한성대 회화과 서양화 전공자들이 모여서 이러한 대외적 형태의 전시 행사를 도모하기 시작했던 것이 10년 전 일이다. 98년에 시작된 경원대와의 교류 형태의 선발전이 양쪽 학교의 전시 공간을 오갔다. 거기서부터 담당 교수들의 작업과 선발된 학생들의 대등한 참여가 시작되어 학교 내 전시 공간 외에도, 시내 전시장을 이용하기도 했다. 또한, 경원대 외에도 세종대와의 교환세미나도 여러 차례 진력나게 진행된 바 있다. 당시 순회 세미나를 주도하며 열강을 펼쳤든 이가 바로 재독 전시 기획자 이면서 평론가인 류병학 선생님이었다. 그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의 젊은 미술인들에 몰두하기 시작했으며 그 모습이 알려지기 시작한다. 아마도 이런 여세와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이 당시 시내 8개 대학을 한 마당으로 불러들여 미술대학들간의 실기실 울타리를 걷어낸 만남과 충돌을 부추겼던 ‘공장미술제(2000)’로 옮겨 붙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이 전시회는 21세기를 눈앞에 둔 한국의 현대미술의 향방과 고등미술교육의 재평가를 위해 이루어졌다.” 이 새로운 형식의 ‘공장미술제’를 통한 미대생들의 마주보기라는 현장은 사실 당시 우리의 미술교육계의 폐쇄성을 돌아보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이 뿐 아니라, 그 전후해서 우리 학생들은 임동식이라는 한 작가를 통해서 공동체 미술이라는 새로운 가능성을 목격하게 된다. 충남 공주 원골이라는 한 오지 농촌마을에서 일어난 공동체 미술의 가능성의 실험과 열망에 우리 학교 또한 여러 해 동참하게 된다. 이는 미술이 오로지 하나의 스튜디오 안에서, 산업 자본주의가 길러낸 화랑의 벽만을 향한 작업만으로 안주 할 수 없다는, 보다 넓고 두터운 미술계의 시야를 학생들에게 절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돌아보면, 현대미술계가 여타한 작업조건과 진화적 환경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우리 미술계와 교육계는 급작스레 부상하기 시작하고 있는 미술의 상업주의적 성공이라는 환경에 너무나 협소하고 강렬하게 노출되고 있는 것이 문제로 다가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시대가 자본이라는 거대논리에 통섭되지 않을 수 없게 돌아가지만 상업주의라는 것도 그렇게 방법적인 편승 스타일로 도모되는 그런 단순한 구조는 아닐 것이다. 자본의 파고가 이렇게 가까이 높게 다가와 우리를 흔들어 대는 이럴 때일수록 우리의 작가적 태도와 비전이 어떻게 탐구/실험/견지되어야 하는 가는 오히려 더욱 선명해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예술적 통찰 없이도 상업주의가 과연 힘을 쓸 수 있을지 가늠하는 자가 누구인가? 상업주의의 유행은 동시에 이러한 물음을 우리들에게 던지고 있지 않은가?

현대는 어느 분야에서든 새로운 감성적 통로에 대한 창의적 실험 정신과 도전 의식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런 추이는 사회-정치-경제-문화 전반에 걸친 우리의 환경에 대한 줄기찬 새로운 인식과 더불어 자신의 환경을 새로이 설계하고자 하는 비전을 제시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삶을 영위하기 어렵게 되어 감을 말한다. 바로 여기에 오늘의 미술 교육이 당면한 과제의 비중이 드러나는 것이며, 이는 어느 전문교육의 장 보다 체험적인 감성 교육을 통한 창의적 실험 정신과 풍부한 상상력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전시의 목적은 하나의 대화 방식을 모색하는 데 있다. 즉 여기서 대화란 논리의 통합이 아니라 느낌 영역의 확대이다. 무엇을 전달할 것이냐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서로(타자)가 나눌 수 있는 ‘감응의 장’을 어떻게 설정하느냐 하는 예술적 호소의 방법과 그 기능에 있다 할 것이다. 이는 한 작품의 통제자로서의 작가가 아니라, 미학적 의미의 작용 구조를 짜는데 모두가 타자의 다름들 사이를 유기화 시키는 어떤 상호작용의 문화의지로 작동되는 컨텍스트라는 허구적 구성을 통해서 에토스를 나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석권을 장악하여 예술의 담론을 지배해온 서구 역사는 무수한 해석의 정권교체라는 이해 갈등의 국면이 일직선상에서 만 이루어져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세계가 다층적 문화 구조의 두께와 틈새를 지지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는 이 때, 학생이라고 해서 항상 일방적 배움의 논리에 안주하거나 대세에 끌려 다닐 수 없다는 자각과 그에 따른 모험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번 전시 기획은, 국제적 전시 기획의 경험을 탁월하게 쌓고 있고 일찍이 우리 미술교육의 현장에 최초로 각 대학의 실기실 담을 타고 넘어본 ‘공장미술제’를 주도하였든, 평론가이며 전시기획자인 이 영철 교수에게 부탁드렸다. 크리틱을 했다하면, 장장 7-8시간을 몸 던져 내려주곤 하던 열정의 그는, 마침내 우리들에게 요구한다. 악동의 조건들을. 왜 이리도 나약한가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난 방학 중 화두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악동-되기의 조건
쓰여진 적이 없는 것을 읽기 (To read what was never written)
그려진 적이 없는 것을 보기 (To see what was never pictured)
들어본 적이 없는 것을 말하기 (To say what was never heard)

〈누구나〉이면서 〈아무나〉가 될 수없는, 참여 의지와 여과, 거스르기, 제치기, 비끼기, 삐지기, 멀찍이 또는 가까이, 또는 우회해서 다가가 본다. 학교가 후원하는 행사 방식을 전시회 형태로 바랬든 결과와 이렇게 마주 하고 있다. 지도 교수들은 전시 선발과 꾸미기에서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많은 자극과 열정, 거리낌과 답답함들이 교차했다. 중용을 깨는 악동이 되어봐야 할 조건들을 요구 받았을 정도로 우리는 약동이기도 했다. 점 하나 차이지만, 악동과 약동의 선분에서 가까스로 기우뚱거리며 줄을 탄다. (홍명섭, 한성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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