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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④

이영철

3장 아시아의 욕망과 도약하는 도시들

아시아는 오늘 불꽃 없이 타는 빛이다.
아시아는 자동 파괴되고, 건설하고 변화한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현대성을 조각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 이들의 경제는 성장하고 활기를 띄고 수축하였다. 정치는 혼란스럽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면들이 모두 아시아의 다이너미즘을 상징한다. 전통은 재연구되고 부활되며 창조적으로 전달된다. 서구의 근대화로부터 배우고, 연구하고 따라하고 거부된다.
- 후미오 난조


(1) 아시아 도시들의 사회적, 경제적 차원
아시아의 도시들은 발전의 급성장의 중심축이었다. 도시에서 예술의 성장도 중간 계층의 사회경제적인 발전, 여가 시간의 증가와 소비재 그리고 관객의 증가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10년 동안에 전례없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변화는 아시아의 거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마이클 시아오(H. H. Michael Hsiao)는 4가지 지역으로 요약해 준다.

첫째의 변화는 일본에서 일어났다.
둘째는 대만, 한국, 홍콩과 싱가폴이라는 ‘4개의 작은 용으로부터 일어났다.
셋째는 중국 본토의 남동 연안과 ASEAN을 구성하는 6개의 동남 아시아 국가들(태국,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브루네이)로부터 생겨났다.
넷째는 중국 남부(주장강 삼각주와 양자강 삼각주)와 동남아시아의 특정한 '중심지'에서 국제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들 지역에 퍼부어진 자본은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대만과 홍콩의 투자가 집중된 중국 남부를 보면 일본, 미국, 유럽의 경제 단체, 한국 외에 다른 나라들의 자본도 포함된다.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는

1) 필리핀의 수빅만(Subic Bay)의 개발,
2) 메콩 강 중부와 남부의 하위 유역
3)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발전의 삼각관계'
4) ASEAN의 동, 서 그리고 중부의 '삼각 관계'


이것들은 모두 국경을 넘어서는 경제 발전과 자본의 국제적 투자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4개의 축은 아시아가 더 이상 1950년대에 서양에서 바라보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2차대전 후 서양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희망이 없는 곳으로 혹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나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박지향이 저술한 [일그러진 근대](2003년)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아시아는 소위 ’아시아의 기적‘과 ’아시아의 도전‘이라 불리는 잠재력을 크게 표출시켜 서구를 놀라게 하였다. ”무적의 일본“, ”중국의 위협“ 그리고 ”대만의 기적“과 같은 표현들은 아시아가 서양의 시선을 얼마나 끌었는가 보여주며 경쟁 관계로서의 경계심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북에서 동남아로의 발전의 확장이 ”무적의 일본“, ” 4마리 작은 용들의 도전“, ”젓가락 문화의 부흥“, ”유교 문화의 부활“ 그리고 심지어 ”동양적인 가치“라는 표현을 낳음으로써 아시아를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을 바꿔놓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시아의 부러운 성공을 반영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시아를 다룸에 있어 서양의 갈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결과로서 1997년 후반부터 시작하여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심각한 경제적 곤경을 겪었다. 이는 발전과 성장에 대한 속도 조절과 내부에의 성찰이라는 의식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고 전후 아시아의 경제, 사회, 문화적 국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온 발전의 4개의 변화를 좀더 깊이 주시하도록 해 주었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지난 80년대 이후 아시아의 발전에 주요 역할을 했지만 보다 거대한 세계적 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비록 “지방 분할”이 “세계화”와 “국제화”와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가깝게 연결된다. 예를 들어 세계화는 발전의 공통된 목표를 추구하고 어떤 공통된 힘에 의해 추진되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세계화를 뜻하는 외관상 “동질화”되는 경향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또한 “이질성”을 반영하는 “현지 우선” 형식의 역반응을 자극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문화의 창조는 “공통 기반을 찾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성공하는 개성”의 형태로 발동을 조장한다. 다른 시각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면 금융기관의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에서 가장 명백한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에 의해 격려된다. 전세계적인 재정과 대화의 복잡한 네트워크의 창조는 이미 즉각적인 경제상의 전기 통신 상호작용 체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순히 돈과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영역까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터넷 검색”을 한다. 한국과 대만은 세계에서 인터넷 접속이 가장 많은 곳으로 네트워크의 정보가 우리들의 생각하는 방법과 행동을 바꿔놓았다. 정보와 전기 통신의 맥락에서 새로운 기술은 세계화의 현상에서 또 하나의 국면이다. 아시아의 모든 주요 도시의 세계화는 “공통 기반의 추구”라는 것과 “성공하는 개성”이라는 어떤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동경과 대만은 그들의 명백한 비슷함과 개성적인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대만과 자카르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세계화의 영향은 경제, 자본 또는 기술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깊은 면에서 문화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슷함과 차이점들 그리고 공유하고 갈등하는 관심사들의 특징을 그려내는 세계 공동체는 기술과 자본의 모든 시스템의 운영 결과이기 때문에 누가 이러한 세계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세계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동아시아의 도시들이 지역적 조건으로 대응하는 양상은 이제 도시 문화, 법인 경영과 경제의 모든 면에 나타난다. 세계 문화 혹은 “전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 라 불리는 1990년대 이후의 문화 변동의 양상은 크게 네가지 특성을 보이고 있다.

첫째, 그로벌화한 조직 문화이다. 예를 들어 조직의 생각, 복장 규정과 언어의 형태를 보면 세계는 상당히 똑같고 상호간에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이미 조직 세계는 세계적인 문화를 위한 근대적인 구조, 문화와 경영의 형태를 가진 경영 모델을 만들어 놓았다.

둘째, 일상 생활의 세계화된 문화이다. 예를 들어 빠른 속도로 도시 생활과 소비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패스트푸드와 탄산 음료의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제품들을 생산하는 회사들은 아시아 도시인들의 생활 감각과 삶의 스타일을 바꾸었다. 그것들은 이제 대만, 도쿄, 서울, 홍콩과 싱가폴과 같은 도시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되는(특히 젊은 층에게는) 부분을 형성한다. 서구의 패스트푸드 식당은 아시아인들의 음식과 음료수의 종류 안에 포함되어 우리들의 일상의 음식물을 “풍부하게” 하지만 현지의 지역적 특이성 안에 자리잡은 역사적인 식 습관과 취향을 “대체”하지는 않았다.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서구의 패스트푸드 식당은 단지 햄버거나 후라이드 치킨을 먹는 곳이 아니라 “한입 먹기 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회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적인 실내장소가 된다. 비록 이것이 일상의 세계화의 한 면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적인 대중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소비가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째, 세계화된 지식 문화이다. 아시아의 교육을 받은 도시 거주자의 증가하는 숫자와 새로운 중간층은 외국으로 나가서 서양의 생각하는 방식, 훈련과 행동에 참여하고 배운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통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단체나(여러 동창회와 같은) 클럽을 구성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아시아의 도시들에 “국제적인 능력 단체”라고 불리는 문화와 태도를 가져와 서구의 지식 문화를 이식한다.

네째는 새로운 사회 운동의 글로벌 문화이다. 환경 보호, 인권, 여성의 권리, 페미니즘, 소수의 권리와 종교 부활과 같은 공통된 세계화 활동들은 전 세계에서 공유하는 대중적인 문제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문화적 세계화의 네 가지 국면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대중적 열망의 새로운 장소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과 물품을 소비하고싶은 욕구, 공통된 인식과 가치 체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요구와 현세긍정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은 소망을 포함한다.

이러한 4가지 전지구적 문화의 양상들은 대만, 일본, 한국, 중국, 홍콩과 싱가폴에 지역 특유의 적응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근대적이고 국제적인 조직 구조에서 찾을 수 있는 서양 방식의 경영이 아마도 사람들을 하나로 단합시켜온 오래되고 정착된 형태의 관리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방식의 관리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만에서는 개인 중심적인 모델의 미국 기업과 단체 중심적인 일본 모델이 모두 소개되었지만 그다지 적당하지 못하다는 평가들이 있다. 세계화의 영향 아래 모든 기업은 자기들만의 모델, 구조와 훈련 방법을 찾는다. 이들은 모두 현지의 기업들이 지역 문화와 습관에 어울리는 방법과 스타일을 찾으면서 그와 동시에 세계화에 발맞추어 나가는 여러 형태의 반응을 보인다. 예를 들어 대만의 현대적 생활은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고가구에 대한 관심의 부활, 찻집, 현지 음식, 전통적인 점치기와 우주론 그리고 흙 점과 같은 여러 가지의 지역 기반적 반응들을 포함시킨다. 1970년대의 대만의 생활 문화 운동은 공통적인 기반을 조성해냈고 80년대의 사회 운동은 사회 조직들의 개혁을, 90년대의 정치적인 운동은 국가 정체성을 재건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대만 사회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문화적 인식, 사회적 개혁과 국가적인 정체성의 목표들에 대한 지역적 반응들이다. 대만은 대중 소비 문화에 대한 세계적 유행에 능동적으로 반응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카톨릭의 복음 전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활동이었지만 대만에서는 그와 다르게 생활 속에서 불교의 새로운 적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대만에서 불교의 부활은 개종이나 불교적인 관념적 요소들을 퍼뜨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생활 방식으로 “속화”하는 것으로 구성된 대중적인 운동이다. 대만의 불교는 섬의 남부, 중부, 북부 드리고 동부의 네 명의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가 있고 비록 그들의 스타일이나 관객들이 다를 지라도 그들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대만의 환경 보호, 소비자, 소수 그리고 여성의 권위를 포함한 지역 우선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회 운동들과 깊이 연관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동아시아 도시들에서 글로벌 컬처의 트랜드를 가장 뛰어나게 흡수하고 퍼뜨리는 능력으로 지역적 반응을 만들어 내는 사회 계층은 중간 계층이라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지난 20년간의 경제 발전의 바탕은 도시 중간층의 “집단적인 소망”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그러한 소망들은 물질적인 부를 소유하는 것, 현대적인 소비 방식의 추구, 사회적 지위의 성취, 정치 참여와 국가적 정체성을 활성화시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도시 문화의 그 무엇도 중간층의 소망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러한 전지구적 문화의 네 변화와 그것들에서 발생하는 지역 고유의 반응 속에는 명백히 지역의 내부 메커니즘과 연관이 있다. 상호 자극과 영향 관계, 외부적이고 내부적 요소들의 영향을 통해 지적이고 사회적인 운동들이 세계 자본주의 문화에 대응하고 그것을 내부로부터 재구축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의 도시들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네가지 변화를 따라 “문화적 변화”의 대안적 타입을 형성해가는 다섯 번째 길 위에 있다.


(2) 아시아 도시들의 문화적 잡종성
아시아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을 끄는 매력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혼자서 생겨난 경제적 자급 자족의 닫힌 세상이라는 사실보다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잡종성’을 가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동아시아의 도시들의 매력은 묘하다. 사실상 어떤 문명도 아직까지 평화를 가지고 있는 조각 그림 맞추기의 조합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 변화무쌍한 지역을 만화경같이 끊임없이 변형되는 거대한 변화가 지나왔다. 아시아 도시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 높은 밀도 density
밀도가 높다. 인구 밀도, 공간 밀도, 이용 밀도에서.
․ 빠른 변화 속도 speed of change
변화 속도가 빠르다. 변화 주기가 짧다. 경제 격변과 밀접하다.
․ 큰 변화 규모 size of intervention
개입의 규모가크다. 재개발/신개발 등. 대기업화/정부의 공룡적 개발 프로세스
․ 극적인 화려함과 극적인 한계성의 공존 parallel formality & marginality
소위 잘사는 곳과 못사는 곳이 바로 이웃한다.
․ 극과 극의 스케일의 병존 extreme contrast of scale
대형 초고층과 미세한 작은 건물들이 한 장면에 얽힌다.
․ 수많은 요소들의 한 장면화 limitless elements in one scene
특히 정보 커뮤니케이션 요소들. 간판․사인․문자․색깔 들.
․ 무질서/혼돈? disorder/chaos?


아시아의 도시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동경대학 문화정치과의 강상중 교수의 말을 인용해보자.

가난과 절망이 들끓는 한복판에 초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 처럼 세워지고 열대성의 후기-모던한 리조트들이 홍수림의 더럽고 질퍽한 물가에 인접하게 건설된다. 삶과 죽음이 혼란스럽게 모아지는 가축과 사람들의 무리가 길에 떼지어 모여든다. 야외 노점들의 잡음은 모닥불을 회상시키는 노출 전구들에 의해서 밝혀진다. 초원 위의 텐트들은 시간이 먼 옛날의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자 매체를 통하여 동양식의 새로운 상상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매체의 홍수에 빠져있다. “사실적인” 아시아, “진정한”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종류의 확실한 “아시아”를 찾는 것은 부질없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열망하는 것은 동양적 양식에 대한 욕구일 뿐이다.아시아는 스스로 그러한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들은 일종의 감정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러한 면에서는 아시아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그러한 종류의 정체성을 자지고 있다는 소설을 즐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시아 사람들은 “아시아의 단순한 행위 또는 순수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탐욕스러운 욕구 형태와는 반대된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그들에게는 아시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아 줄 기회가 왔다.

시장이라는 교환 시스템 주위를 가득 채운 소망이 아시아 도시들의 혼란스런 간판을 지나가는 빛의 흐름처럼 사람들을 활기 띄게 한다. 이는 마치 개별적인 아시아들이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의해 단 하나의 아시아로 단단하게 압축된 후 사방으로 흩어진 것과 같다. 그 모든 조각적 부분들에 아시아가 새겨져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아시아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많은 환상이 존재하는 동시에 하나인 것처럼 과장된 다수의 ‘가짜 아시아’가 소생한다. 도쿄는 아시아인가? 홍콩, 상해, 서울, 대만 아니면 싱가폴이 그러한가? 그것들은 모두가 분명히 아시아의 도시들이다. 대영 제국식의 지배가 성급하게 꾸며놓은 자리의 흔적을 보유한 고층 빌딩, 식민지의 대로를 채운 밀집된 빌딩들; 국적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발산하는 아시아 금융 센터, 왕조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는 도심에 유럽의 세기말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이종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장소들, 모든 것이 혼성된 채 시간이 흘러가는 아름다운 섬인 타이완, 뉴욕을 독창성이 없는 미니어처로 모방한 도시 국가들. 이 가운데 어떤 단 하나의 도시라도 서구로부터 침탈당하지 않은 것은 없다. 또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일본 식민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도시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중 어느 도시도 자신들의 의식을 잃거나 처참히 붕괴한 것도 없다.

20세기의 모든 것, 근본주의 시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민족주의, 냉전, 내란과 혁명이 퍼레이드 처럼 아시아국가들을 관통하고 지나갔다. 그 기억은 오늘날까지 물리적인 충격으로 자주 깊은 자조와 탄식을 가져오지만 동시에 아시아 전역에서 정상을 향한 욕구의 격렬한 분출은 서구 모더니티를 변형시키면서 맹렬한 성장 속에서 풍족함에 대한 다양한 갈망의 형태를 내뿜는다. 강 교수는 이같은 현상을 ‘문화제국주의의 내면화’라고 부른다. 포스트 식민주의 문화지배가, 발전이라는 욕구의 측면에서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문화 제국주의에 대한 주시를 기초로 아시아 특유의 것이라고 여겨질 수 있는 혼성의 근대적 공간을 만들어냈다. 가난과 절망 사이에서 고층 아파트와 빌딩들이 빛나며 열대성의 포스트 모던 리조트들은 홍수림의 더럽고 질퍽한 물가에 인접하여 건설된다. 삶과 죽음이 혼란스럽게 교차하는 가운데 가축과 사람들의 무리가 길에 떼지어 모여든다. 야외 노점들의 잡음은 과거 모닥불을 회상시키는 노출된 전구들에 의해 밝혀진다. 스텝 지대의 텐트들은 시간이 먼 옛날의 것이라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상기시켜준다. 잘 알려졌듯이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자 매체를 통하여 동양식의 새로운 상상 지도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우리는 매체의 홍수에 빠져있다. 비록 고함을 지르고 싶은 욕구를 이해한다 해도 “사실적인” 아시아, “진정한” 아시아는 찾아볼 수 없다. 이제 그러한 종류의 확실한 “아시아”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것인지 모른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열망하는 것은 ‘동양식’에 대한 욕구일 뿐이다. 아시아는 그러한 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점점 분명히 드러내고 있으며, 그것들은 일종의 감정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실상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아시아가 존재하는지 의문이 생긴다. 오히려 문학가나 미술가들이 자주 자신의 예술적 테마로 그러한 종류의 독특한 정체성을 즐기는 것만이 진실일 수 있다.

따라서 아시아 사람들은 “아시아의 단순한 행위 또는 순수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이러한 단순성은 탐욕스럽고 복잡한 요구 형태와는 반대된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이제 아시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아볼 기회가 온 것인지 모른다. 오랫동안 서양의 지적 전통을 유지해온 고정된 실재를 요구하는 귀납적 이론 또는 실용적 원칙은 불필요한 과제일 뿐이다. 물론 그것에 대해 “동양은 동양이고, 서양은 서양이다” 또는 “동양적인 정신과 서양 기술”이라는 진부한 표현으로 자기 방어의 논리를 삼으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다. 이제 세계화(globalization)는 이 지구의 어느 부분도 지정학적 특혜를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시간과 공간의 압축과 함께 공간적인 장소(topoi)는 의미를 잃었다. ‘아시아’에 대한 진부한 생각으로 자신을 재현하는 일은 아시아의 거품이 부풀어나면서 생긴 “부정한 돈”의 통화가 입증하듯이, 자본은 오직 공간적 차이를 사용하는 한에 있어 의미를 지배한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히 확인시켜 준다. 그렇다면 아시아는 세계 체계에서 주체성이 없는 은행으로 용해되어 버릴 것인가? 그렇게 되기 보다는 재정상의 그리고 시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체계가 가치를 산출하기 위해 아시아를 형성하는 다양한 특징들을 조작해낼 것이다. 그러한 체계의 지배에 따르고 순응하면서 아시아인들은 체계의 이치에 맞는 적절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욕구를 채울 것이다. 아시아의 진부한 생각들이란 죽지 않는 가공의 공동체로 부활하고 전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는 이 시대의 헤테로피아로 남을 것이다. 적어도 그러한 범위에서 아시아는 살아있고 자신을 삶을 영위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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