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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⑧

이영철

1993년 이후
중국 남부 도시들의 도약

중국 문화사는 1990년대의 중국 동시대 미술을 1980년대 중국 근대 미술의 연장으로 보는 경향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1990년대에 개방 정책이 시행되었지만 과거 이데올로기와 신이데올로기 사이의 갈등은 계속되었다. 국제적 관점에서 보면 냉전의 결말이 전세계 정치적, 문화적, 이념적 질서를 바꿔 놓았지만 예술에서의 서구 중심주의는 여전히 존속한다. 그리고 중국의 현대미술은 여전히 냉전의 정치적 유산으로만 인정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변화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1990년대 초반은 ‘정치적인 팝’ 그리고 ‘냉소적 현실주의’가 중국 현대미술의 경향이고 스타일이었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스타일은 문화에 대한 깊은 고찰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현실을 비판한다. 그들은 정통파적인 관행과 중국의 ‘거만함’과 ‘이상’을 줄이기 위해 부인과 조소를 사용하려고 노력하였다.

Wang Guangyi의 ‘Great criticsm 1990’, Zhang Pili의 ‘Standard pronounciation 1990-90’ 그리고 Fang Lijun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른 몇몇 ‘정치적 팝’ 그리고 ‘냉소적 현실주의’ 작품들은 인류적 책임과 사회-비판적인 의식을 포기하고 그 결과로서 허무주의와 시니시즘으로 떨어졌다. 더욱이 그러한 작품들이 서구에 소개되고 받아들여지면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중국작가들은 서구의 큐레이터들과 판매업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들은 정치적 또는 민속전통의 특징들을 대량으로 만들기 시작하였다. 1990년대 중반의 ‘erotic art’의 등장은 이러한 경향을 반영한 것이며 이러한 경향의 결말과 쇠퇴를 예언하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 현대미술에 다소 긍정적, 건설적이고 영감을 주는 변화들이 일어났다. 첫째로 중국작가들이 자신들의 정치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버리기 시작했고 그들에게 관심을 끄는 이슈들과 세계적인 예술적 이슈들 사이의 공시적이고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노력들이 나타난 것이다. 그들은 복잡하고, 변하기 쉽고 유동적인 중국 문화를 보다 효과적인 방법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더 이상 아카데믹하고 진부한 ‘동양적’인 이미지나 상징들을 가지고 서구의 이해를 얻으려 하지 않는다. 반대로 중국의 변동해온 사회의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세계적 관심과 인지도를 얻고 인간 세계에 공통되는 이슈들을 끌어내 서구 미술계와 소통하는 기회를 얻으려고 애쓴다. 예를 들어 왕 지안웨에이(Wang Jianwei)의 회색 시스템‘ 실험, 왕 루얀(Wang Luyan)의 여러 기계로 만든 장치들, 리 용빈(Li Yongbin), 왕유센(Wang Youshen) 그리고 송동(Song Dong)의 자연과 인간 생태와 현대적 매체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일종의 자주적인 작업 방식을 반영하였다. 장 샤오강(Zhang Xiaogang)의 거대 가족, 왕 광이(Wang Guangyi)의 VISA와 천국, 수 탄(Xu Tan)의 새로운 질서 그리고 린 위린(Lin Yilin)의 운전수 등은 모두가 정치, 역사, 국제적인 관계 그리고 냉전 이후 시대의 상업적 소비 문화에 대한 적극적인 협상과 활동적 태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중국작가들은 예술적 이슈들을 논하기 위해서는 서구 현대 미술의 논리에 대한 보다 많은 이해가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시각적인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 다양한 매체를 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중국 작가들은 사진, 이미지 그리고 여러 매체들에 시각적인 에너지를 충분히 반영하기 위해서 자신들을 ‘저질적인’ 정치적 그리고 사회적 연출, 지배와 예술적인 세력에 의해 강요된 사진과 이미지에 대한 조정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보다 더 직접적이고 독립적인 방법으로 예술을 표현하는 방법을 탐구하기 위해서 대규모의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이벤트 서술에서 시작을 할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양한 관점, 인간의 지각, 심리와 생리학에 연관된 토픽에서도 시작된다. 이러한 종류의 작품들은 새로운 활동적, 인류학 그리고 사회학적인 지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예로 Zhang Hui, Shaoxiong, qiu Zhijie, Yan Lei, Zhou Tiehai, Zhao Ban야, Zhuang Hui, An Hong의 개념적인 비디오 이미지 작업과 Zheng Guogu, Shi Yong이 인터넷에 한 작업들, Huang Yan의 10년 편지 보내기 프로젝트, Zhang Dali의 낙서예술(graffiti), 그리고 Guo Wei, Guo Jin, Chen Wenbo, Zhao Nengzhi, Xie Nanxing, He Sen, Xin Haizhou, Yang Mian, Zhao Xiaotao의 회화작품들이 있다. 나는 이러한 경향을 ‘시각의 힘’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발전은 중국의 현대미술을 가짜-문화와 가짜-정치의 기능적인 매력으로부터 보호한다. 그 결과로 중국의 현대미술은 어느 정도까지 ‘한-관념적으로 표현’이 되었고 시각적인 인식론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바로 이 시기 동안에 일반적으로 ‘북쪽에는 풍부하고 남쪽에는 부족하다’고 여겨진 중국현대미술의 지역적인 패턴도 변했다. 이는 부분적으로 중국 남부의 해변 도시들의 국제화와 도시화가 이루어지면서 보다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예술적 환경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에 가치 있는 재료를 제공하는 새로운 사회적 모순도 등장하였다. 그와 반대로 북경과 같은 정치적인 도시의 영향력이 감소하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중국의 남부 출신 작가들은 독자적인 방식으로 움직임을 형성해냈다. 그 예로 Big-Tail Elephant라는 광주의 개념미술그룹(회원들로는 Lin yilin, Chen Shaoxiong, Xu Tan Liang Juhui); 상해의 Shi Nan, Hu Jianping, Ni Weihua, Qian Weikang, Zhou Tiehai 외; 그리고 Chendu의 719 Artists Workroom League는 9명의 작가들로 구성되었고(Dai Guangyu 외) 퍼포먼스 작가인 Luo Zidan가 있다. 광주, 상해, 후지안, 진구와 같이 중국의 남부에 위치한 도시들은 예술가들의 활동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중국 현대미술 집단에 여성 작가들의 활동은 중요한 초점의 대상이 되었다. 활동적인 여성 작가들로는 Lin Tianmiao, Li Xiuqin, Yin Xiuzhen, Chen Yanyin, Jiang Jie와 Liao Haiying 등이 있다. 그들은 다음 세기의 중국 현대미술의 방향에 대해 새로운 문제 제기들을 한다. 그중 한 이슈로는 중국의 오래된 이념과 예술의 속박에 맞서기 위해 인류학적 접근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이냐의 관점과 다른 하나는 문화적 비평의 범위를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의 문제다. 또 다른 이슈는 서구 식민주의자들의 문화적인 정책과 시스템의 압박을 어떻게 견디고 미술계 안에서 동등하고 민주적인 국제적 위치와 신분을 이루어낼 것이냐의 문제다. 이 두가지 실행적 관점이 중국 현대미술이 해결해야 할 중국의 문화적, 예술적인 형태 그리고 서구의 예술적 가치나 규범들을 추종하는 것이 아닌 ‘제3의 방법’을 결정한다.


중간 지대에서: 이주(diaspora)와 글로벌 아트
앞서 살펴 보았듯이 1979년의 ‘싱싱(Xing Xing)(Star, star)그룹에서 부터 1985-86의 새 물결 운동까지, 1989년 ’China/Avant-Garde‘전에서 부터 1990년대의 개인적 창작의 확산에 이르기까지 중국 미술계는 대단히 풍부하고 다양하고 복잡해졌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 문화적 개혁에 대한 다양한 지각적 반응의 집합과 같은, 중국 역사와 정치에 대한 비판적인 재고, 개인들의 자유에 대한 추구와 ’국제적으로‘ 미술인 각자가 그리고 중국 현대미술이 자신의 위치를 인정받으려는 기대감을 공유한다. 1990년대에 중국 미술은 아시아의 주요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구 지배적 국제 미술계, 협회, 시장 그리고 미디어와 직접적인 교전, 대립, 협상과 교류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중국 작가들이 직면한 어려움은 이러한 협회들, 시장 그리고 미디어의 헤게모니(주도권)를 어떻게 다루고 소화하는 가의 문제였다.

1990년대 중반부터 서구에서 중국 현대미술 전시가 많이 이루어졌고 중국 미술의 새로운 시장이 생겨났다. 가장 주된 이유는 서구가 중국을 신선하고 거대하며 수익성이 높은 시장이라고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에 덧붙여 ‘새로운 것’에 대한 추구는 - 이국적인 것을 포함하는 - 항상 자본주의 경제와 문화 논리의 한 부분이었다. 그러나 주로 ‘중국 아방가르드’라고 소개되고 활성화된 것은 ‘이국적인 중국’이라는 서방의 상투성(cliche)에 부합하는 정치적인 팝 또는 냉소적 현실주의 작품들이다. 하랄드 제만이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새롭고 흥미로운 아이템으로 소개했던 중국의 현대작가들은 상당수가 홍콩에 있는 한 현대미술 갤러리의 파일을 기초로 한 것이었는데, 이들 중국작가들은 정치적인 팝 내지 냉소적인 리얼리즘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서구에서는 1960년대 이후에는 한물간 경향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도입한 중국의 비판적 정치 미술을 소개한다는 것은 국제 사회에서 호기심을 유발하기 좋은 아이템이었다고 여겨진다. 중국 바깥의 사람들이 생각하건데, 중국 미술은 흔히 미술보다는 먼저 ‘중국’이라는 것이 떠오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중국 미술이 점점 더 국제적으로 소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세계적인 미술 무대와는 별개로 남아 있거나 동시대의 반열로서 문맥화하기에는 뭔가 다른 요소가 있다는 시각이다. 어느 정도의 흥분과 기대의 초기 시기가 지나고 서구 지배적인 세계적인 미술과 중국의 현대 작가들의 접촉은 실망적이고 좌절적이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작가들은 국제적인 미술계와의 관계에 대해 재고하기 시작했다. 다만 미술 시장에서 그들은 인기있는브랜드였고, 몇몇 작가들은 갑자기 급증한 수요와 주문에 맞춰 작품 제작하기에 급급했다.

한편으로는 중국 내부에서 개인적이면서 세계적으로 의미있는 전시 공간을 만들어낼 요구가 늘었다. 미술계를 개혁하고 순수하게 세계적인 활동 공간으로서의 미술 무대를 새롭게 만들 시기라는 인식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문화적인 금욕 혹은 원형을 찾자는 것이 아니라, ‘차이’의 과정이며 다른 문화들이 다른 해석들을 생기게 함과 동시에 중간과 같은 ‘제3 공간’(호미 바바의 용어를 따라)을 열고, 근대 국가의 오래된 위계적 질서, 그리고 동양과 서양의 분리라는 고정된 사고와 감정을 넘어서는 ‘중립지대(mid-ground)를 새롭게 창안하는 일이다. 세계적인 새로운 미술은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반복되는 긴장감과 운동들로 전혀 새롭게 구축될 수 있으며. 열린 공간으로서의 전세계와 오랫동안 폐쇄되거나 고여있던 특정 지역이 서로 만나고 겹쳐지는 곳, 즉 오늘날 글로컬(glocal)‘이라 불리는 가상적, 실재적 장소를 만드는 과정에 있다. 그러한 중립 지대를 마음 속에 그리는 동안에, 그 사람은 다른 문화들에 대한 발견과 그것의 뜻하지 않은 기여와 공헌으로, 현대의 역사를 진정한 의미에서의 글로벌로 다시 구성해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보다 확고하게 지배되고 정착된 문화들 과 새롭게 결합하고 교류와 자극의 영향 속에서 미래를 예측하는 탈국가적(post-national) 공간을 탄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공간을 열어가는 중국 현대미술의 구체적인 변화에 대해 큐레이터 후한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전자 매체와 집단적 이주가 오늘날 탈국가적, 그로벌 세계의 새로운 상상들이 형성되는 주된 동력이고 중국의 집단 이주는 중국의 사회 개혁과 현대화에 주된 원동력이었다. 20세기 동안에 많은 중국 작가들은 서구 모더니즘에 대한 경험을 중국으로 다시 가져오기 전에 외국에서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였다. 오늘날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아방가르드 운동과 연관된 작가들은 외국에서 전시를 하고있을 뿐 아니라 서방 국가로 이주도 하였다. 그들은 새로운 아방가르드 행세를 하면서도 조국에 있는 동료들의 상상력을 활성화기 위하여 정보와 다른 자원들을 계속해서 제공하고 진정한 의미의 글로벌 아트를 탄생시키기 위해 서구 사회에 새로운 ‘인종풍경(ethnoscape)’를 만든다.

이들의 집단 이주적인 경험은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배운 가치와 미의식을 재고하게 만들며, 외부 세계의 변화하는 환경, 사건 그리고 생각들로부터 새로운 아이디어를 흡수할 수 있게 한다. 그중 황용핑(Huang Yong Ping), 첸젠(Chen Zhen), 채국광(Cai Guo Qiang), 구웬다(Gu Wenda), 야지창(Yang Jie Chang), 왕두(Wang Du), 센 우안(Shen Yuan) 그리고 수빙(Xu Bing)과 같은 작가들은 이제 국제적인 미술 활동 무대에서 가장 활발한 작가들로 이름을 얻었다. 1983년부터 세계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작품 활동을 한 첸젠은 자신들을 정신적 도주자(spiritual runaways)라고 부른다. ‘도피’라는 것이 그들의 삶과 예술을 새로운 세계적 풍경 속으로 위치시켰고 자신들의 초경험(transexperience)이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에 대해 상상이나 의문들을 구체화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 또는 표현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다.

왕성한 작업을 하다 암으로 사망한 첸첸(Chen Zhen) 같은 작가가 자신의 망명적diasporic 삶에서 주장하는 것은 자신과 다른 것들 사이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초국적 초문화적 주체성이다. 이 주체성은 중국 전통에 대한 기억과 그들이 현재 처한 이주적인 삶이 교차하고 대립하며 알 수 없는 제3의 공간을 향해 이동하고 변화하는 것을 말해주며,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새로운 가능성들을 위한 ‘협상negotiation’의 성격을 띠게 된다. 첸첸과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중국 예술가들이 오늘날 정착의 관점을 버리고 이주, 유목의 삶을 살고 있으나 자신들의 전통적 또는 현대적인 중국 문화를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1989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고있는 황용핑(Huang Yong Ping)은 <주역>이라는 자신의 작품에서 도교적인 참고(참조)들을 소개하고 세탁한 책, 중국 음식과 양, 살아 있는 곤충과 동물들을 작품의 소재로 사용한다. 그에게 있어 이렇듯 ’다른‘ 참고들이나 재료들을 사용하는 목적은 다른 것에 대한 ’색다른‘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전과는 다른 사고 방식, 다른 세계관과 서양적 인식의 범위를 넘는 현실을 소개하기 위한 것이다.


외국에 사는 중국 작가들은 오늘날 서구의 사회적인 변화에 대립함으로써 문화적인 협상에도 관여한다. 국경을 넘어 이주하고 서구 사회의 주류 안에 비-서구 문화들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찾아내 서구 내부에 비-서구 이주적 공동체들의 문화를 형성해가는 것이다. 첸젠은 자신의 설치작업 <회의 테이블(Round table)>에서 국가들 간에 다른 것에 대한 열망과 두려움의 딜레마를 보여주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이 작품에서 국제 연합 기구의 50주년을 ’기념‘하려고 둥근 탁자를 설치하였다. 세계 여러 곳에서 수집한 의자들은 탁자 높이 위까지 올려져 탁자에 끼워 넣어 버린다. 따라서 실제로는 아무도 앉을 수 없다. 이상적인 원탁이라는 것이 가능하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개념과 현대미술

(1) 풍수(Feng shui)
현대 중국 작가들의 창작에 있어서 새로움을 이해하기 위해 풍수, 이미지, 극에 대해 살펴보자. 카이 쿼 창(Cai Guo Qiang)은 중국의 전통적인 불꽃 놀이에 착안하여 매우 흥미로운 작업을 해온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화약을 재료로 사용했고 캔버스로 지구를 나타내고자 했다. 작가는 사람이 모험스런 우주 여행을 한다는 개념과 우주와 소통하는 방법으로서 지구를 바라보는 시각을 표현하고자 했다. 그는 약초를 태워 사람들에게 허브 차를 마시게 함으로써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는 의도를 드러내기도 한다. 우리 각자의 삶이 우주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동양의 전통 사상에서 오랜 뿌리를 가진다. 미술은 자연, 사회, 문화, 역사적 요소와 다양한 관계에서 존재한다. 때로는 그 요소들이 서로 모순되기도 하지만 이런 모순들을 수용하고 화합하고 서로 공존하려는 동양 문화 근저에 흐르는 일원론이라 할 수 있다. 이런 동양의 전통적 사고가 오늘날 새로운 예술 방법을 찾도록 도와준다. 우주 , 삶, 문명과 예술을 완전하게 해주는 단일화된 힘에 대한 추구는 과학자들의 오랜 숙원인 우주의 모든 것과 상호작용을 이루는 우주적 바탕을 찾으려는 것과 비슷하다. 이러한 사고의 실험은 동양 세계로 돌아가자는 의도라기 보다 풍수(feng sui)나 고대 연금술사들 처럼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미래까지 시간 여행을 하려는 의도라 할 수 있다. 자유롭게 동서양을 넘나들며, 미시에서 거시의 영역으로, 전세계에서 지역적인 세계 사이로 여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풍수 이야기를 해보자. 풍수는 사람이 사는 환경에서 번영을 이루고 기의 흐름을 찾아내는 고대의 기술이다. 카이 쿼 창은 풍수 개념을 모델로 해서 (도시계획과 사진들), (무덤), 소나무 등을 골자로 한 미토 프로젝트(Mito Project)를 했다. 그는 도시의 번영을 기원하면서 그 지역의 개발안을 시의 전문가들과 협동하여 작업했는데, 도시의 미래를 예시하며 도시의 주거 조직에 있어 치료해야 할 곳에 침을 놓는 것 처럼 행위를 했다. 그는 많은 곳을 여행함에 따라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땅의 침술점을 인식하는지를 깨닫았다. 과거 동아시아 사람들은 풍수의 지식으로 사람들은 하늘, 땅, 사람, 음양의 힘의 조화에 따르고 기의 흐름의 강도에 따라 도시건설을 위한 장소를 찾았고, 도시 번영을 위한 탑과 절, 왕궁, 정부건물, 그리고 다른 중요한 문화재를 짓기 위해 생명점을 찾았다. 이런 식으로 사람이 만든 건물들은 하늘, 땅, 사람, 신과의 상호 관계의 유기적인 실체로 여겨졌다. 동양에서 건물을 지을 곳의 장소를 찾는 방법은 동양 의학과 비슷하다. 자연 환경의 물리적 상태 그리고 바로 가까이에 있는 물질 등을 이용하여 건물들과 도시가 서로 긍정적으로, 상생하도록 작동시키는 원리이다. 이러한 분야는 전통적으로 아시아에서 항상 중요하게 여겨온, 자연과의 조화, 모든 물질은 우주와 관통한다는 사실 그리고 본질을 직관한다고 하는 세 개의 관점들이 만들어내는 종합적 성격의 철학과 일치한다. 이 철학은 토지의 측정, 도시 계획, 전통 의학, 왕조의 변화 등 미시적, 거시적 모든 영역에 활발하게 적용되었는데, 이것은 실용적 차차원에서 지극한 자유를 누리며 발전했다. 고대 풍수의 방법론의 실용적 가치가 현재 높이 발전된 과학 기술과 어느 정도 일치되고 있는가의 문제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겠다. 오늘날 우리는 20세기 서양 모더니즘의 한계를 인식하기 시작함으로 해서 서양인들의 생각과 표현 방식을 받아들이기를 꺼려한다. 또 동양사고의 방법론의 이유로 세계를 보는 서양식 관점을 버리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표현하는 수단의 방법으로서 아시아 예술의 역동성 부족을 고려할 때(서구와 비교할 때) 현재 상황에서 풍수의 중요성을 재평가할 확실한 이유가 있다. 이 방법론은 세계적 관점에 적용시킬 수 있고 우리가 효과적인 방법론에 입각해 살고 있는 세계와 역사적 상황에서 자라날 수 있다. 우리는 지난 100년 동안 우리 자신이 서양에 원하든 원치 않든 많은 부분 의존해 왔다. 그리고 다시 그들을 동양에 눈을 돌리게 만들고 우리의 사고방식, 방법론, 우리의 체제, 우리의 땅, 전통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가 아닌가? 이러한 것은 우리 전통의 부흥으로 되돌아 가자는 의미뿐만 아니라 세계 사회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문제들에 접근하는 창의적 안목과 에너지와 새로운 문화의 르네상스를 가져오자는 것이다.


(2) 중국적 전통에서의 이미지
전통적으로 중국인들은 극이나 회화에서 그림자를 사용하지 않았다. 중국 지식인들은 이미지는 단지 환상이지 현실이 아니라는 플라톤의 생각에 가까운 편이었다. 중국말로 이미지는 ‘인상(ying xiang)이라 불린다. 이는 그림자를 나타내는 단어와 유사성을 나타내는 말의 조합이다. 이 단어는 무언가 비현실적이고 착각적인 것을 암시한다. 중국인들은 삶과 예술에 있어서 빛과 그림자의 배치는 사물의 형태를 더 잘 알아보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서구의 원근법적 사고를 오래도록 받아들이지 않았다. 16세기 후반과 17세기 사이에 이탈리아의 예수회(Jesuit) 선교사는 기독교에 대한 설명과 증명을 위해 고전적 르네상스 이후 사용된 사실주의 재현 방식의 그림을 중국에 가져왔다. 17세기(명왕조 후기 청(Qing)나라 초기)에 마리아와 아이(아기예수)를 본 어떤 중국 예술사가는 이 그림이 ‘마치 거울의 반영’ 같다고 했고 중국의 직업 화가는 그 그림이 기적(wonder)의 작업이라 했다. ‘거울의 반영’이라는 묘사는 유럽 고전 회화의 칭찬인 것 같이 들리지만 중국 철학과 미학의 문맥상 그림의 이미지가 거울 같다는 말은 단지 환상이고 사실이 아니라는 뜻이다. 중국인들에게는 이것이 중국회화에 길들여진 눈에는 너무 사실적으로 보이기 때문에 환상으로만 보였을 수 있다. 17, 18세기의 중국 회화 이론가들은 일반적으로 서양회화에 대해 ‘유사성’을 관점으로 중국에 들어왔다고 썼다. 그들은 회화의 그림자의 명확성 ‘가까이 가고 싶게 만드는’ 놀라운 유사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학자들과 회화 이론가들이 변호하는 것은 수백 년간 지배해왔던 지식계급의 미학이다. 이러한 미학은 취향의 열등한 선택을 암시하는 ‘형식적 유사성’보다는 ‘정신적인 자유(untrammeledness)’를 강조했다. 12세기 지식계급 회화의 개론가로써 수쉬(Su Shi)는 “만약 표면의 유사성을 조건으로 회화를 논한다면 그의 이해는 어린아이 수준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말로 표면의 유사성을 강조하는 것은 천박하고 순진한 것이다. 18세기에 청나라 왕, 건륭(Qianlong)은 비교적 서양 회화에 우호적이었다. 어쨌든 그조차도 청의 궁정에서 살고있는 이탈리아의 예수회 화가 지누세뻬 까스틸리오네(Ginuseppe Castilglione, 남세녕)가 왜 그림자를 그려야했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그림자를 최대한 약하게 그렸지만, 건륭왕은 “까스틸리오네는 문제의 그림의 하이라이트를 없애야한다.”고 판결했다. 하이라이트는 그림자에 의해 생긴다. 하이라이트를 없애는 것은 그림자를 없앤다는 뜻이다. 다수의 중국인들은 그림자는 암흑과 죽음을 뜻한다. 그림자는 ‘음(yin)의 일부이며 ’양(yang)‘의 대조이다. 그림자는 어둠과 나쁜 조짐을 암시하고 확고하게 죽음과 연관된다. 그림자는 이렇게 우주적인 관점에서 해석되었다. 중국인들에게 그림자는 환영이며 비본질적이고 삶과 ‘양’의 반대이므로 위협적이다. 전통 중국회화와 극에서는 그림자는 피해졌다. 그림자가 사실상 존재함에도 이는 환경을 깨닫게 하고 회화와 극에서의 스펙타클 효과를 만들기 위해 사용될 수 없었다.


(3) 중국의 무대
전통적인 중국의 오페라는 대낮에 공연되었다. 만약 밤에 공연이 되더라도 전체공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관객의 감정을 흔들기 위한 빛과 그림자효과를 위한 어떤 특수 조명도 사용되지 않았다. 무대는 영구적이거나 임시적인 것이나 극도로 간단했다. 무대는 보통 네모난 약간 높은 연단에 천 덮개가 천장에 씌워져 있는 것이다. 이는 하늘과 땅과 4개의 모서리로 이루어진 세계의 축소판이다. 커튼이 무대의 뒤와 앞을 나누지만 분리의 미봉책일 뿐이다. 호기심 많은 관객들 특히 어린아이들은 무대 뒤로 가서 배우들의 분장실을 엿볼 수 있다. 어떤 경우 오페라 무대는 바닥에 임시적으로 깔아놓은 네모난 깔개정도로 간단할 수 도 있다. 극은 모든 곳에서 이루어짐을 암시하며 현실과 극의 고의적인 분리는 없다. 전통 중국 오페라는 기계 장치된 무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스펙타큘라 효과를 위해 관객의 감각을 조작을 위한 기계장치로 돌변하는 검은 상자 같은 극장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대체로 무대는 간단한 배경 장막과 최소한의 상징적인 의자와 탁상으로 이루어져있다. 장면의 전환을 위하여 장면을 바꾸는 사람은 커튼을 내리는 것 없이 단순히 무대위로 올라와 테이블과 의자를 옮긴다. 이는 마치 “인생은 연극이요 연극은 인생 같다(life is like the stage/the stage is like life)'라는 철학을 반영하는 듯하다. 이러한 공연 태도는 동시에 배우의 노래와 연기, 감식가(connoisseur)로써 공연의 질에 집중하기 위해 드라마에서 거리를 두는 것과 관객이 드라마에 몰두하고 그들이 보는 것을 현실로 해석하는 것을 허용한다. 중국 오페라는 주로 배우의 가극 가사(libretto)와 태도(posture)로 삶을 재현한다. 극소의 상징적인 세트는 전혀 재현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종류의 재현은 반추상적이라고 묘사되거나 중국옛말을 빌어 “유사성과 비유사성사이를 방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유사성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상상을 위한 공간의 시적임을 깨닫게 하는 중국 전통 회화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대 중국 예술 전통은 20세기에 중국에 들어온 사진과 영화의 장관(spectacular)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몇몇 중국의 학자와 예술가들은 중국예술이 끝에 이르렀고 더 이상의 쇠퇴를 막기 위해서 서양 고전과 사실적 전통을 받아들여야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의 영향으로 지난 세기초에는 많은 중국 학생들은 유럽으로 예술을 공부하러 갔다. 일본의 제국정책 아래 타이완은 일본의 서양화를 따르면서 유럽 예술전통을 받아들였다. 19세기 끝무렵과 20세기 초엽에 사진과 영화가 유럽에서 중국으로 도입되었을 때, 그들은 대중(public)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많은 사람들은 사진이 영혼을 훔칠 것이라 생각했다. 카메라의 상자에 사람의 이미지를 가둘 수 있다면 영혼도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유럽, 미국과 일본에 의해 거의 식민지가 될 뻔했던 중국에 유럽에서 들어온 카메라는 일종의 스펙타클이었다. 더욱 스펙타클한 것은 영혼을 훔치는 도구로써의 사진이었다. 중국인들은 사진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권력관계를 분명히 나타낸다. 사진은 중국의 전통미학을 전복했고, 중국인들을 응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이는 관객이 감식가(connoisseurs)로써 예술창작과 공연에 역할을 하는 중국 전통예술의 반대되는 것이었다. 사진에서 관객은 힘이 없다. 그들은 응시되고 그들의 이미지는 카메라에 의해 포착된다. 그들은 감식가로 참여할 수 없다. 그들은 사진이 현상되기 전까지는 그들이 어떻게 응시되고 있는지 모른다. 중국에서는 사진과 영화를 쉬 잉(she ying)과 디안 잉(dian ying)이라 부른다 모두 ‘그림자/유사성(shadows/likeness)을 기록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19세기에 중국에 영화가 처음 도입되었을 때, 영화는 “서양 그림자극”이나 “전기불 그림자극”이라고 알려졌다. 배우는 그 장소에 없고 “그림자”만 어둠 속에서 하얀 화면에 투사되기 때문에 “그림자극”이라는 이름은 널리 받아들여졌다. “그림자극”은 특히 서양세계를 보여주고 서양인의 생활방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중국의 새롭고 이국적인 스펙타클이 되었다. 이 움직이는 이미지 때문에 중국인들은 사실의 진실된 재현이라고 쉽게 믿을 수 있었다. 더욱 중요하게도 영화를 통해 중국 밖의 세계-특히 서양-에 대해 배웠다. (참조; Chia Chi Jason Wang, [From Shadow Magic to the Spectacle, 'Great Theater of the World, 2002 Taipei Bienn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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