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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⑨

이영철

홍콩의 현대미술

1백 55년만의 영토반환. 아시아의 진주로 불린 홍콩이 영국으로부터 1997년 7월 1일 중국에 돌아갔다. 홍콩 반환(중국은 ‘홍콩 회귀’라고 부른다)은 서구 제국주의에 의한 아시아 식민 지배를 청산하는 역사적인 사건으로 당사자인 중국의 변화는 물론 아시아 전체에 많은 파장을 가져왔다. 홍콩 반환에 앞서 중국이 일국 양체제를 표방한 것은, 궁극적으로 대만 통일을 겨냥한 것으로 홍콩의 평화적 인수에 필수 불가결한 전제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홍콩을 반환받은 후 홍콩에 50년간 외교․국방을 제외한 완전자치권을 부여했다. 그러나 반환한지 6년이 가까워지는 지금 일단 연착륙에는 성공했으나 경제난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게 대체적 평가다. 중국은 국제도시 홍콩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경제 현대화를 더욱 가속화시킬 계획이며 21세기에는 아시아를 대표하여 세계질서를 주도한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중국 반환 직전 불안을 느껴 떠났지만 그후 홍콩의 자치가 보장받는 모습에 안도, 고향을 다시 찾는 ‘연어족이 늘어간다. 현재 홍콩은 세계 4개 금융 센터, 5대 외환 시장이 있으며 세계 4백 60개 항을 연결하는 자유무역항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 중국이 홍콩과 대만의 최대수출권으로 부각되는 현상에 비추어 홍콩을 중심으로 한 중화경제권이 급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홍콩 반환 하루 전날인 1997년 6월 30일 저녁 한 그룹의 작가들이 홍콩 아트 센터에서 작은 파티를 열었다. 아트 센터는 ‘통일 기념식’이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컨벤션 센터의 맞은 편에 위치해 있다.
영국이 홍콩을 중국에 공식적으로 반환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응으로 작가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Celebrate the return, like hell we celebrate... 반환을 축복하자, 엿같이 축복하자...“ 전시장 입구에는 조상을 숭배하는 전통적인 신전이 세워져 있었다. 신전 안 사당에는 중국 국기가 놓여 있고 그 밑에는 ’당신의 복을 위해 기도하시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관람객들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신들의 장래에 복을 기원하는 것이다. 반환이 이루어지는 몇 일 동안 아무런 혼란도 극적인 사건도 없었다.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국제 언론들은 이에 실망하였다. 사실 홍콩 사람들은 이미 1997년 초반부터 이양에 대해 지겨워지기 시작했고 그냥 할 수 있는 데로 빨리 끝내버렸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다. 여기에는 전체적인 피로와 무기력이 존재했고 작가들도 이에 동감하고 있었다. 몇몇 작가들만이 이양에 대해 활발하게 반응을 보였다. 아트 센터와 Hanart TZ 갤러리에서만 이 중요한 역사적인 사건과 연관된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예외도 있다. 알프레도 코(Alfred Ko)와 빈센트 유(Vincent Yu) 같은 몇몇 사진 작가들은 1990년대 중반부터 과도기 시대의 홍콩 이미지를 다큐멘터리화 하는 오랜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그들에게 있어서 7월1일을 둘러싼 그 몇 일들은 작품을 완성시키는데 매우 중대한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제작된 수 백장의 사진들 속에는 냉소와 슬픔이 가미되었다. 이양은 극적이거나 감정적인 요소가 너무 결여되어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홍콩 사람들이 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느낌이 없는 것 처럼 보였다. 사실 중국으로 반환된다는 두려움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1997년 초반에 라이 유앤 놀이 공원‘이 문을 닫았을 때 사라져버릴 홍콩에 대한 고향을 그리는 듯 많은 사람들은 애태웠다고 한다. 1980년대부터 인기를 잃어가며 오랫동안 운영되어온 이 공원이 이 도시의 유일한 놀이 공원이었기 때문이다. 누구든 홍콩에서 자랐다면 이 소박한 공원에 관련된 어린 시절의 추억을 간직할 만한 곳이다. 공원이 문을 닫기 몇 일 전에는 예상외로 개인적인 추억이 많이 담긴, 사라져버릴 장소에 마지막 인사를 하러온 관객들이 많았다. Wong Wo Bit의 사진 작업들은 복귀할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애도를 가장 잘 표현했다. 1980년대 초반부터 Wong은 홍콩의 굉장한 부자가 버려 두고 떠난 저택에 몰래 들어갔다. 한때 권력 있고, 부자이며 심지어는 사치스럽기까지 했던 사람들의 흐려진 명성을 기록하였다. 홍콩은 거의 150년 동안 영국과 중국 사이에서 두개의 삶을 가지고 있던 도시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과거에 대한 관심이 그렇게 많았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달라졌다. 1990년대에는 두 종류의 홍콩 역사책이 많이 팔렸다고 한다. 중국의 많은 학자들에게는 이 도시의 공식 역사가 재구성되어야 하는 필요성을 불러 일으켜 역사에 대한 책이 많이 출판되었다. 초기 홍콩에 대한 개인적인 회고의 글을 출판한 것도 있다. 이러한 개인적인 회고서가 반공식적인 역사책들 보다 더 인기가 있는데는 중국이 해석하는 역사에 대한 공통적인 불신을 반영한다. 식민지 정부가 지역 역사에 대한 강한 의식을 방해하는 것은, 특히 그 식민지 역사의 잔인함을 기록한 것이라면, 이는 자연적인 현상이다. 다른 한편으로 중국은 역사를 다루는 그리 좋은 기록이 없다. 홍콩사람들은 자신 이외에는 믿을 사람이 없었다. 역사가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개인적인 이야기가 공식적인 역사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졌다. 개인적인 역사나 어린 시절의 기억은, 개인적인 역사의 재구성을 통해서 현재의 정체성을 확립하려고 열망하는 젊은 세대의 작가들에게는, 작품을 만드는데 여전히 중요하다. 개인적인 물건과 홍콩의 전통 재료를 사용하여 Kith Tsang과 같은 작가들은 개인적인 회상과 연상을 통해 홍콩의 정체성을 나타내려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심층적인 정교함과 숙고가 모자라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야기가 지루해 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편리한 루트를 통해서 Hongkongness 홍콩스러움의 표면적인 슬로건이 되어버렸다. 개인적인 역사는 보다 큰 문화의 문맥에서 보면 그다지 의미가 없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대중에게 공급되는 역사는 믿을 수가 없기 때문에 개인의 기억을 전하는 것이 더 현실성 있다. 아트센터에서는 6월과 7월에 가짜 역사박물관이 만들어지는 전시를 기획하였다. 이 전시에서는 현지의 역사와 신화에 대해 조금씩 여기 저기서 얻은 정보들에 기초하여 홍콩의 고대역사를 지어냈다. 이러한 홍콩의 고대 역사는 여러 작가들, 큐레이터 그리고 학자들이 역사적인 사실 한 조각에서 이야기들을 지어내어 만들어졌다. 지어낸 역사는 홍콩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특수성을 은유하기 위해서 만들은 것이다. 중요한 신화적인 인물, Lo Ting이라고 불리는 반항적인 반-물고기 반-인간이 소개되었다. 많은 작가들은 이 역사를 지어내는데(기획팀에 의해 제공된 줄거리를 바탕으로) 참여하였고 가짜 골동품과 고고학적인 물건들도 만들었다. 이 전시장에 들어가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었다. 거짓과 진실을 구별할 수가 없었다. 현실이 헷갈렸다. 신 세력이 우리들에게 새롭고 개선된 홍콩에 대해 말해주고 있었다. 실재와 위조를 구분할 수 없는 무능력이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지만 눈부신 대중매체의 폭격과 끝나지 않는 불꽃놀이에서 많은 사람들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이다. 오스카 오 힝 카이(Oscar Ho Hing Kay)는 비관적으로 말한다. “홍콩이 중국으로 완전히 넘어간지 거의 수년이 흘렀다. 하지만 홍콩 사람들은 자신의 위치를 잡지 못하고 있다. 불확실한 미래와 애매한 과거, 그전에 했던 약속과 지키지 못한 약속, 별로 중국적이지 못한 현실과 완벽한 중국인 처럼 ‘가공된’ 현실 사이의 모호함 속에서 살고 있다. 이 모호함을 인정하게 되면 지극히 개인적 마주침이나 경험을 빼고 무엇이 사실적일 수 있겠는가? 모든 것은 거대한 조작이다.”
 
일본의 현대미술

초대중의 시대에서는 정보 제조자와 정보 수혜자, 지식인과 대중을 대립시켰던 도식이 더 이상 아무런 쓸모가 없으며, 그 주도권은 상류에서 하류로 이동해간다. 이런 시대에는 의사소통의 양상 역시 변형된다. 지식을 향한 새롭고 가볍운 접근법이 의사소통을 중개한다. 의사소통은 대인 간에 깊이있는 관련성을 유지하고자 않으며 오히려 분산 그 자체의 상황 속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정상적인 의사소통이 아니라 오히려 의사소통 불가라고 말할 수 있다. 단적으로 의사소통의 현재 상황은 활홀함, 허구성, 미끄러지기의 양상을 보여준다. 그러나 초대중들은 이러한 상황을 유희의 일종으로 바라본다. 초대중의 시대에서 의사소통(mass communication[mass komi])은 이전의 기능을 상실하고 대중잡담(mass garbage[mass gomi])이 그 기능을 대체하게 되었다.
-구로다 라이지(후쿠오카 아시아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1.
도쿄 현대미술관 수석 큐레이터를 지냈던 시오다 주니치(Shioda Junichi)의 말에 의하면 일본의 미술계는 이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하나는 엄격한 체계로 구성된 협회 중심의 미술가 회원들이 보수적 성격의 전시회를 하는 단체인데, 전통적인 일본 양식 회화와 인상주의와 야수파에 영향받은 서양 회화의 아카데믹한 양식을 말한다. 다른 쪽은 근래의 국제적인 경향들과 유사성을 보이는 다양한 현대 미술가들“이라고 한다. 이는 모더니즘 미술 제도가 이식된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서도 유사한 양상의 구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는 문호 개방 이후 서구 제도의 정착이 보다 두텁게 이뤄진 데다 일본 사회의 관료주의적 속성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이같은 이중적 구조가 두드러진다. 그리고 이 두 구조 간에는 좀체 교류가 일어나지 않는 특성을 보이기도 한다. 대중성의 측면에서 보자면 당연히 좀더 역사가 오래된 아카데믹한 미술이 보다 많은 관객들의 흥미를 유발한다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반면 후자는 현재의 현실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지만 대중들에게는 매우 난해하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다. 일본은 전쟁 이후 미술가들이 개인적, 국가적 문화 정체성을 찾기 위해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제는 일본 사회의 전체적인 발전과 더불어 서구의 동시대 미술과 거의 대등한 수준에서 자기 언어를 찾았다고 말할 수 있다.
1950년대 중반 간사이 지방에서 조직되어 일어난 아방가르드 그룹인 구타이(Gutai)는 당시 유럽의 앵포르멜 운동과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회화와 원시적인 물리적 행위를 포함한 작품들을 제작했다. 1950년대와 60년대 사이에 반예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작품들이 많이 나타난다. 일상용품과 폐품을 이용한 아쌍블라주와 물리적 행위들은 인습적인 회화와 조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 초 모노화 파는 철, 나무, 돌과 같이 거의 인공적으로 가공되지 않은 자연 재료의 특성을 그대로 살리면서 매우 다양한 표현 수단을 확보했다. 모노화파 작가들은 서구 모더니즘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가지고 일본적 철학과 지식의 내용으로 고유한 언어를 찾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최초의 일본의 현대미술이라는 평가를 ‘스스로’ 내리기도 한다. 1980년대 이후에는 일반 대중들이 동시대 현대 미술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상당히 증가했다. 다양한 현대 미술 전시가 대도시에 있는 다수 미술관들과 상업 갤러리들에서 기획, 전시되었다. 현대 미술은 점차 일반 대중 사이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1985년경부터 일본 현대 미술가들은 단체전이나 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외국에 보여줄 기회가 가졌고, 80년대 말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빠르게 일본 현대작가들이 서구의 주목을 얻어내는 성과를 이뤄낸다. 80년대 초에 등장했던 작가들은 모노화 의 전통을 유지했던 반면에 80년대 후반에 떠오르기 시작한 젊은 작가들은 미디어를 사용하여 현대 사회의 정보와 기호를 다루는 것에 관심을 두었다. 그들의 작업은 전통과 멀어진 것 처럼 보이지만 현대 일본의 혼성적이고 경계가 허물어진 문화적 현상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2.
베를린 장벽의 붕괴, 거품 경기의 절정, 세계화의 강풍 속에서 새로 맞은 1990년의 전후로 두개의 중요한 일본 현대미술전이 미국에서 열렸다. 그것이 중요한 이유는 일본 현대미술의 새로운 국면에 뚜렷한 길잡이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2003년 서울 선재미술관 심포지엄에 참가했던 마츄이 미도리(Matsui Midori)는 '일본 현대미술이 1990년대 초에 이르러 비로소 국제화되었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 이전에는 화풍이나 미술 시장 모두 좁은 아카데미즘에 닫혀있었다“고 말한다. 이는 1970년대 일본 미술계에 강력한 움직임을 형성했던 모노화의 경우에 조차 국제적 미국에서 개최된 두 개의 전시는 일본의 현대미술이 국제미술계에 새로운 관심을 이끌어낸 것은 1989년에 캐시 홀브레히, 코모토 신지, 그리고 난조 후미오가 공동 기획한 <자연에 반(反)하여: 1980년대의 일본 미술>와 하워드 폭스와 하라 미술관의 관장인 하라 도시오가 조직한 <근원적 정신: 10개의 현대 일본 조각>전이었다. 이 전시의 목표는 분명하게 3가지로 요약되겠는데,
첫째, 일본 현대미술에 대한 주목을 끌어내기 위한 것,
둘째, 서구 현대미술에서 영향을 받았다 해도 그로부터 자신의 독자적인 표현 언어를 구축해낸 작가들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
셋째, 일본 현대미술가들이 자국의 풍부한 문화적 유산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고 변용하는 모범을 제시하는 것 등이다.
이 전시들에 대한 홍보 역시 강력했는데, 미국의 통신 회사인 AT & T가 후원하는 광고는 모래와 도시라는 후나코시 카수라의 목조각 옆에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가 무스를 바른 머리를 콘에 넣는 장면을 보여준다. 광고의 문구에는 ”일본 미술이 변하고 있다. 미국은 AT & T가 당신에게 일본의 가장 똑똑한 젊은 작가의 전통 파괴의 창조력을 보여주듯 최근의 발전을 최초로 공개한다.“ 이 전시들은 인지도, 전시, 판매를 위해 좀더 많은 기회를 열어준, 미국의 주류 화단에 일본 현대미술이 상륙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모리무라 야수마사, 구와마타 타다시, 오다케 신로, 엔도 도시카추, 토야 시게오, 미야지마 다츠오, 후나코시 카추라 같은 이름들이 미국 미술계에 알려졌고 모리무라, 미야지마는 90년대 상반기에 미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에서 크게 주목을 받는 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이 전시는 주제와 내용에 있어서 인종적 긴장이나 무역 분쟁, 미국인에 대한 일본인들의 시각이 보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미국인들의 감정을 자극하지 않는 온건한 것들이었다. 따라서 이 전시의 결과에 대한 평가들은 일본이 자신의 중요한 전략적 파트너인 미국을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미술과 문화면에서 동반자적 위치에 올라섰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었다. <근원적 정신>전에 참가했던 가와마타 타다시는 독일의 가셀 다큐멘타에 초대되었고 그의 이름은 모리무라 야수마사, 야나기 유키노리와 더불어 해외에서의 전시 경력과 미술 저널에서의 주목에 있어 아시아의 다른 작가들을 단연코 리드했다. 이는 일본 현대미술의 시스템이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앞서있고 효과적이라는 점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 가운데 야나기 유키노리의 작업을 소개하겠다.
야나기 유키노리(Yanagi Yukinori)는 1980년대 중반부터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울트라맨 인형과 순환하는 스포츠 자동차를 사용하여 팝스타일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 후의 작품에서 그는 일본의 깃발과 엔화의 상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좀더 비판적으로 정치적인 자세로 전시를 하며 그는 시스템을 연구하고 국제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을 가지고 작업을 만들어냈다. 그의 유명한 “World Ant Flag'연작에서 Yanagi는 플라스틱 상자에 다양한 국가의 국기를 만들기 위해 색모래를 사용했다. 그는 그 상자들을 시골뜨기와 연관 시켰고 그 속에 개미들을 듬성듬성 올려놓았다. 개미들이 국기들 사이를 이리저리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은 국기들의 분해를 야기시켰다. 개미의 이동과 모래 깃발의 붕괴가 상징하는 국가 정체성과 경계의 분해는 세계화와 문화의 혼성의 과정에 대한 힘있는 은유를 공급한다. 이 시리즈에서 이후의 다른 작업에서처럼 ”운송“과 ”교통“, ”경계“가 인식될 수 있다.
Yanagi의 최근 전시는 1997년말 도쿄에서 있었다. 그것은 일본의 어려운 과거를 다루고 있으며 이전에 조립했던 각 부분이 사각의 틀에 교묘하게 배열되어 있던 플라스틱 모델 전함을 모방한 청동 조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플라스틱 모델이 아이들의 장난감임에도 불구하고 전함은 어른들의 놀이기구로 간주될 수 있다. 아이들은 순진하게 그들의 놀이를 즐기며, 그 행동의 다양한 영향을 깨닫는 것은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전함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은 그들의 놀이의 의의를 예견할 수 있는가? 세계2차 대전이라 불리는 비극적 세계의 충돌의 플라스틱 모델로부터의 의미를 무시할 수 있는가? 벽에는 태평양의 실크스크린 지도를 건다. 그 지도의 표면에는 오래된 자료 사진에 인쇄되어 있는 가라앉은 일본 전함의 이미지의 꼴라쥬를 만드는 유리 조각이 있다. 그 지도는 꿈의 표현과 일본 제국주의의 붕괴 두개 모두 비틀고 있다. 그것은 생존하고, 발전하고, 팽창하기 위한 제국주의의 욕망을 환기시킨다. 다른 이들에 반하여 관리할 때 욕망은 폭력으로 변하였으며, 비록 그것이 고결한 이상의 외양 아래 숨겨져 있을 지라도 식민주의는 필연적으로 폭력을 수반한다.
검은 전함의 기능적인 아름다움은 종국엔 파멸적이며 무용하다. 바다를 건너는 전함은 지옥에서 온 무시무시한 전령과 같은 어두움의 미이다. Yanagi는 쓰디쓴 현실과 경험을 플라스틱 모델의 형태로 나타낸다.
 
3.
90년대 벽두에서의 일본 작가들의 진출은 아시아 미술가들 중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것이었지만 곧 이어서 중국과 한국 작가들의 빠른 추격을 받게 되었다. 유럽과 미국의 큐레이터와 비평가들이 일본 보다는 아시아의 다른 국가들에 대해 알고자 하는 열망으로 인해 관심의 초점은 중국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1989년 천안문 광장 사태 이후 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해간 중국 대륙의 미술가들의 활동 그리고 1997년 7월 홍콩에서의 영국 식민 통치가 끝나면서 중국 기독교인들의 영향력 증가로 중국 현대 작가들의 해외 활동에 불이 당겨지게 된다. 장 위베르 마땡이 기획한 <지구의 마법사 Magician of the Earth>전과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옥스퍼드 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고요한 에너지>전시에서의 중국 작가들의 괄목할만한 참여 그리고 구웬다와 수빙의 개인전에 대한 서구인들의 열광적인 관심이 바탕을 마련해주었고 한국 현대미술의 경우는 1993년 뉴욕 퀸즈미술관의 <태평양을 건너서>전, 그레이 아트 갤러리에서의 한국 작가전을 계기로 90년대 후반에 약진이 돋보이게 된다.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기 직전 도쿄에서는 일군의 작가들 간에 <자연에 반反하여>와 성격이 매우 다른 경향의 미술이 활기차게 등장했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실제로 90년대 후반은 이들의 국제적 활약상에 크게 일본 현대미술이 빚을 지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경향은 1959년과 1965년 사이에 태어난 작가, 평론가, 큐레이터 그리고 캘러리스트들에게서 였다. 그들은 어린 시절에 만화책, 애니메이션, TV의 공상과학 영화를 어느 세대 보다 더 많이 즐기며 자라난 세대이다. 1980년대 후반 일본의 거품 경제가 절정에 이를 무렵, 도쿄현대미술관, 스파이럴 가든 그리고 나고야 ICA 등 새로운 미술관과 전시장이 유럽과 일본 현대미술가들의 전시를 잇달아 개최하고 도쿄 미술계의 하부구조가 변화하자 그 세대의 미술인들이 새로운 자극을 받은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린 검퍼트(Lynn Gumpert)가 동경의 미술지형에서 일어난 급진적 변화를 담은 글을 [아트 뉴스]에 게재했고(Vol.89, no. 3, pp. 132-7), 알렉산더 먼로는 [플래시 아트](vol.25, no.163,pp.71-4)에서 기술 및 대중적 도상을 이용하여 눈에 띠지 않게 침입해있는 자본주의 권력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젊은 일본 작가들의 비판적 성향에 갈채를 보냈다. 1991년 거품 경제가 꺼지면서, 이들 젊은 세대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미술공간, 미술운동을 만들어내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대두한 새 경향은 크게 두 시기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 시기는 1991년과 1992년 사이이며,
두 번째 시기는 1993년과 1995년 사이다.
그들의 작업은 일본 대중문화의 도상을 세련되게 사용했다는 점과 자기 세대의 정신을 보여주는 수단으로서 하위문화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 특징이다. 그들의 작품을 소개했던 화랑의 이름을 따서 `뢴트겐 그룹`이라 불리기도 했던 이 새로운 그룹은 도쿄 미술계의 미술생산과 전시방식, 현대미술의 비평언어, 작가와 관람객 사이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츠토무 이케우치가 이끈 뢴트겐 쿤스트 인스티튜드(Roentgen Kunst Institute)의 공간은 천장 높이가 4 미터, 전시 면적은 109 평방 미터였다. 이는 일본의 전시 면적 치고는 예외적으로 큰 규모였다. 뢴트겐은 작가들의 작품 제작비와 전시 비용을 전부 부담했다. 뢴트겐이 키운 작가들 중에는 무라카미 타카시, 야노베 켄지, 오자와 츠요시, 유타가 소네가 있다. 이 작가들은 1990년대 후반에 이르러서 해외로 자신들의 활동 무대를 넓히게 된다. 평론가 노이 사와라기와 민 니시하라가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미술에 지적인 토대를 지속적으로 제공했다. 사와라기의 `시뮬레이셔니즘(simulationism)`과 `변이(Anomaly)`라는 개념은 현대미술을 보다 광범위한 시각 문화의 맥락에서 고려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다. 1993년과 1995년 사이에 미토 아트 센터의 큐레이터 신 구로자와는 야노베, 소네, 오자와와 함께 워크숍을 기획했고 그것이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자, 젊은 일본 작가들이 국, 공립 미술관에서 전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1990년대 전반기(1991년-1995년)에 도쿄에서 새롭게 떠오른 미술 현상과 중요한 작가들을 살펴 보자.

무라카미 다카시: 네오팝
평론가 노이 사라와기와 미술수첩의 편집인 쿠스미 키요시가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데, 이 용어는 소비시대를 살아가면서 파편화된 일본인의 주체와 밀접하게 관련된 문화적 리믹스라는 포스트모던으로서의 시뮬레이셔니즘의 개념을 미술에 적용한 것이다. 제프 쿤스, 하임 스타인바흐, 피터 핼리 그리고 신디 셔먼으로 대표되는 미국식 시뮬레이셔니즘과 차용(parody)에 기초한 사와라기의 개념은 1987년과 1991년 사이에 미술 수첩의 편집인으로 재직하던 당시에 기획한 특집호를 통해서 미대생들과 미술인들에게 전파되었다. 새로운 일본적 팝아트의 경향은 무라카미 다카시, 나카하라 코더이, 타로 치에조, 니시야마 미나코, 야노베 겐지 그리고 야나기 유키노리 등이 포함된다.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공상과학 소설 속의 괴물이나 로봇 장남감을 차용한 거대한 조각과 설치작업을 통해서 이 작가들은 일본의 정치 세력과 대중 문화 사이의 모호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드러내면서 위기에 처한 나약한 정체성을 투사하였다. 그들의 과도한 시각성과 강인한 비판의식은 당시 일본 미술대학을 지배하던 미술형식인 추상회화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구실을 했다. 1992년에는 일본의 새로운 팝이 폭발적인 급진전을 이룬다. 1991년 12월 하소미 갤러리와 1월에서 3월에 걸쳐 뢴트겐에서 열린 무라카미의 개인전을 비롯, 야나기, 나카하라, 치에조 타로, 니시야마, 야노베 모두 1992년 1월과 3월 사이에 도쿄와 오사카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3월에는 이 작가들이 국제 아트페어인 NICAF를 통해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미술수첩 1992년 3월호에 실린 「막대사탕: 극소의 삶, Lollipop: Its Smallest Life」에서, 사와라기는 국가 권력을 은연중에 강화하기 위해서 일본 소비문화와 천황 또는 경찰 등을 종종 귀여운 캐릭터로 재현하고 있다는 주장을 폈다. 사와라기는 일본의 새로운 팝 아티스트들이 권력과 귀여움(cuteness) 사이의 교묘한 관계를 역설적으로 모방함으로써 문화적 위선을 드러내고, 그 예쁘장하면서도 불온한 외모를 통해 일본의 부드러운 감시 체제와의 비판적 거리를 드러낸다고 본 것이다. 무라카미 타카시는 원래 전통 일본 회화 기법과 후기 인상주의 이후희 서양 근대화풍을 절충적으로 결합한 `일본화(nihonga)`를 배웠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가장 인기 있는 미술 장르인 일본화의 공허한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기획에 참여했다. 이와 동시에, 그는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로써 일본화의 인기를 능가하고자 하는 소망을 품었다. 1991년 초 무라카미와 사와라기는 `귀여움`이 일본 사회에 미치는 교묘한 영향에 대해 대화를 나눈 이후, 그러한 기능을 노출함으로써 전복시키는 일본 대중문화의 막강한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 1991년 12월 호소미 갤러리에서 열린 무라카미의 전시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주인공 바카본과 그의 아버지를 등장시켜서 일본 가부장 사회 근저에 자리잡은 부조리한 유치증(infantilism)에 대해 비판했다. 무라카미는 일러스트레이터를 고용해 등장 인물들을 원작보다 더 귀엽게 그리게 한 후, 그 모습을 합성수지 판 위에 복사하고, 액자에 넣고, 사인하고, 예쁘게 장식한 상자 속에 담았다. 그가 이러한 작업을 하게 된 이유는 천황에게 바치는 진상용 일본화의 제작 과정을 패러디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이, Anomaly>전은 1992년 9월부터 11월까지 뢴트겐 쿤스트 인스티튜트에서 열렸다. 이 전시는 새로운 팝과 뢴트겐이 중요한 문화현상으로서 널리 인정 받는 계기가 되었다. 사와라기가 기획한 이 전시에는 나카하라 코다이, 야노베 켄지, 무라카미 그리고 컴퓨터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편집가인 이토 가빈 등 네 명의 작가가 참여했다. 이러한 작가 선정은 오타쿠 취향을 모방하는 미술이 펼쳐나갈 엉뚱한 상상력의 격돌을 예상한 것이다. 이제는 영어 어휘에 편입된 `오타쿠`란 말은 만화, 애니메이션, 만화 주인공을 본뜬 플라스틱 모델 등에 열광하는 성인 팬들의 문화를 일컫는다. 1980년대 초 애니메이션 세대의 하위문화로 출현한 오타쿠 현상은 1990년대 초까지 일본 대중문화의 중요한 지류로 발전했다. 분자물리학에서 따온 `변이`이리는 개념은 `필수적인 부분을 구성하는데도 불구하고 정상적인 구조에 반발을 일으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는 전시의 맥락에서는 오타쿠 세대의 미술을 가리킨다. 사와라기는 전시도록에서 만화, 애니메이션, 공상과학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 컴퓨터 또는 비디오 게임으로 분기되는 일본 대중문화의 전개 방향이 순수 일본문화에도 서구문화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변이라는 개념을 빌려 설명했다. 불순하고도 과잉적이지만 전 세계로 퍼져나간 새로운 팝은 일본 미술의 폐쇄적 영역을 넘어서는 자유로움을 보여주었다.
<변이>전에서 이 작가는 대형 입상 작품이자 초기의 대표작인 <해풍>을 선보였다. 이 작품은 양쪽 벽이 각각 초록빛이 도는 노란색과 밝은 빨간색 형광 페인트로 채색된 트레일러와 그 안에 들어있는 야구 경기장용 플래쉬라이트 여덟 개로 장식된 거대한 원형 철제바퀴로 이루어져 있다. 불이 켜지면, 플래쉬라이트는 엄청난 강도(16000w/1600v)의 빛과 관객들이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뜨거운 열을 발산했다. 관람객의 시선을 유혹하면서도 좌절시키는 <해풍>이라는 이 불가항력적인 물리적 존재는 순수 미술작품의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무라카미가 받았던 진부한 미술교육과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애착이 무덤덤하게 혼합되어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풍>에서 보여준 미적 성향으로 인해, 그 이후부터 무라카미는 사와라기 및 뢴트겐 그룹의 하위문화적, 사회학적 논의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오자와 츠요시
1993년 1월에서 5월 사이에 니시하라 민이 기획한 <포(-)튠스, Fo(u)rtunes>전 이후 뢴트겐은 두 번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 네 명의 작가들이 몰두해 있던 신체에 대한 개인적 의미들 그리고 이 전시의 시적 분위기는 새로운 팝과는 전혀 다른 감성의 출현을 암시했다. 일본 대중문화의 주류인 애니메이션과 플라스틱 모델을 시뮬레이션한 무라카미와는 대조적으로, 오자와 츠요시는 1970년대 언더 그라운드 하위문화를 참조했다. 그의 작품에는 일본 사회가 1970년대 후반 급격한 도시화를 거치기 이전의 일본인들의 생활과 그 풍경이 남긴 유산에 대한 애정이 깃들어있다. 1989년 이후, 오자와는 일본 도시와 시골 그리고 아시아의 분쟁 지역을 여행하면서, 여행객을 보호하는 `지조(지장보살의 뜻)` 조각상을 통해 자신이 다녀간 흔적을 남겼다. 그는 `지조 만들기`라는 은유적인 행위를 사진으로 기록했다. 처음에는 작은 지조 조각상을 들고 다니다가, 나중에는 드로잉이나 땅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로 표현했다.이러한 취약한 표현들은 그 중요성이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장소를 방문하고 그 특성을 파악하는 행위에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그는 중국의 천안문 광장, 모스크바, 이란, 네팔 그리고 한국의 휴전선까지 두루 여행했다. 그는 사진을 통해 정치적 언급운 하지 않는다. 사진들은 단지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한 지조의 모습을 통해 불길한 기운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그림 사이로 모호하게 보이는 지조의 모습은 자신의 자율성을 부분적으로 단념하는 작가의 겸손함 그리고 우발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여준다. 오자와는 <포(-)튠스>전에서 사진 작품을 지지대 위에 후통(일본식 침구)을 쌓아 올려서 만든 작은 언덕 모양의 설치 작품과 함께 전시했다.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은 햇빛에 말려 따뜻해진 후통 더미 위에서 놀던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기도 했다. 새로운 팝의 공격적 논쟁과 요란한 물질주의에 비하여 그의 작업은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또한, 그의 설치 작품은 1970년대 격렬한 학생 운동과 특히 중요한 관련성을 가진 『가로』 잡지의 주요 만화가였던 유시하루 츠게의 `소년 요시의 범죄`라는 만화의 한 장면을 참조한 것이기도 하다. 지조를 담은 사진과 설치 작품의 퍼포먼스적 효과 그리고 츠게 만화와 일본인의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 어린 언급이 혼합된 그의 작품은 관중들의 문화적 무의식을 건드리며 상상력을 증폭시켰다.

유타카 소네
유타카 소네는 뢴트겐의 두 번째 시기와 관련된 또 다른 작가이다. 비록 그의 작업이 1995년 <출발, Departures>이라는 제목의 2인 전이 열리기 전까지 뢴트겐에서 열린 적은 없었지만, 1993년 미토 아트센터의 워크숍에서 <그녀의 19번째 발>이라는 제목의 개념 작업을 처음으로 선보였을 때 큐레이터 민 니시하라를 만난 적은 있었다. 19대의 자전거를 외발 자전거로 개조해서 체인으로 묶은 이 작품은 수수께끼를 제시한다. 소네의 예술을 최초로 다룬 평론가 니시하라는 그 작품이 악의에 찬 소통 문제를 다룬 것이라 주장한다. 그녀가 워크숍에서 본 것은 바로 `끝없는 디스커뮤니케이션`이다. 즉, 19명의 기수들이 끝없이 엎치락 뒤치락거리면서 서로의 무게에 떠밀리고, 소네가 만든 지긋지긋한 기계의 심술궂은 구조는 이를 증폭시켰다. 제대로 움직이고자 하는 기수들의 의지를 꺾는 <그녀의 19번째 발>은 다시 자전거 위에 오르려는 욕구를 끊임없이 부추기면서도 이유없이 에너지를 소모하게 함으로써 강렬한 희열을 느끼는 듯하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미술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이 드러난다. 이렇게 좌절시키고 지연시키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이 <야간 버스>(1995)를 포함한 소네의 초기 작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생성과 좌절 사이의 긴장은 <야간 버스>에서 가장 고조된다. 이 작업은 인스트럭션 아트(instruction art)인데, 소네는 친구들을 동남 아시아와 미술 서부 해안으로 여행을 보내서 야간 버스의 차창 밖에 펼쳐지는 풍경을 비디오로 촬영하라고 지시를 내린 뒤, 자신은 도쿄에 남아 친구들이 보낸 결과물을 편집을 했다. 비디오 기록물은 작가의 모습과 작가의 모습이 없이 촬영된 장면을 담은 추가분으로 이루어졌다.

나라 요시모토의 등장과 무라카미 타카시의 회화로의 복귀
1993년과 1995년 사이에 작가 양성과 마케팅에 중점을 둔 와코워크 오브아트, SCAI 배스하우스(Bath House), 오타 파인아트 등 새로운 비영리 공간이 잇따라 개관하자, 조각과 현대미술의 결합이라는 개념은 타당성을 잃었다. 포스트모던 문화 비평은 개인적 감성에 대한 재평가와 일상 경험으로부터 개념적 태도의 재편성에 자리를 내주었다. 소네와 오자와의 개념 미술이 점차 많은 대중적 관심을 끌게 되었고, 이와 함께 비판적 평가도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1995년 봄 SCAI 배스하우스에서 첫 번째 개인전 <매우 깊은 웅덩이>를 개최한 나라 요시모토는 시들해진 도쿄의 관중들을 매료시켰다. 전시기간 동안, 무라카미 타카시 또한 새로운 팝의 진보적 `해체주의`와 결별했다. 1994년에 SCAI 바스하우스에서 열린 개인전 <어떤 것이 내일인가>전에서, 무라카미는 커다란 캔바스에 일본 전통 회화와 애니메이션의 反모방적이고 장식적인 미감을 혼합하여 직접 만든 `DOB`라는 만화적인 캐릭터를 그렸다. `DOB`의 짓궂은 웃음이 일본의 애니메이션과 미술의 파생적인 본성에 대한 무라카미의 자기역설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스다 요시히로(Suda Yoshihiro, 1969)는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한 작가이다. 그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극사실적인 수법의 목조각으로 나무를 이용하여 풀이나 꽃들을 실제 사물처럼 재현한다. 여기서 그의 관심은 진짜 같은 재현의 문제가 아니라 공간 안에서 그것이 배치되었을 때, 일상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허구와 진실, 삶과 죽음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드러내는 것에 있다. 스다는 실내 공간에서 자연적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존재하는 것 처럼 보여지나, 그럴 수 없는” 공간을 만들어내고자 한다. 다시 말하자면 순전히 환영인 그럴듯한 사실이다. 그는 비교적 상징과 기호적 특성이 적은 튤립이나, 장미, 잡초와 같은 식물 형상들의 사용을 선호한다. 연꽃을 닮은 목련을 선택하기도 했는데, 목련은 중국이 원산지이며 “숭고”를 상징한다. 목련이 봄의 끝을 알리는 동시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꽃의 하나라는 점 때문에 시(詩)의 재료로 많이 택해지나 그는 역사적이거나 문화적인 관점에 의존하기를 피한다. 사실, 이 작가는 어떠한 서사 구조로도 자신의 작품이 읽혀지기를 피하는 경향이 있다. 중국의 전통 고전인 서유기에서 마법을 부리는 원숭이가 돌에서 태어났고, 둥글게 부풀어 오른 돌은 자궁을 상징할 수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꽃잎은 생식기를 상징할 수 있다. 그리고 스다의 나무 꽃은 모든 것의 근본이 되는 힘의 집중을 나타낸다. 종교적 분위기를 연상시키듯 빛이 후광처럼 반투광 종이를 통해 꽃의 배경에 선을 만들어 낸다. 길고 좁은 통로는 심리적인 효과를 끌어 낸다. 꽃과 식물들은 자각하고 있는 의지가 없으며 늘 재생되는 내장을 드러내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행위와 삶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스다의 꽃은 탈출에 대한 무의식적인 강한 의지를 표명한다.
야나기 미와(Yanagi Miwa, 1967)는 백화점의 엘리베이터에서 제복을 입고 안내하는 여성들, 엘리베이터 걸과 상점, 현대적 건축 등을 검퓨터의 합성 기술을 이용하여 다소간은 수족관 속의 풍경 같거나 꿈 속에 보는 듯한 느낌의 세계를 만들어낸다. 1993년 진짜 엘리베이터 걸이 들어간 설치 작업에서 시작하여 최근 도시 중심부의 상업적 공간의 거대한 사진 작업에 이르기까지 그녀는 계속해서 엘리베이터 걸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이미지는 토쿄, 타이페이, 홍콩이나 서울과 같은 커다란 아시아 도시의 거주자들의 일상 속에서 친숙한 공간인 백화점, 쇼핑몰, 지하철 통로 등에 놓여진다. 극도로 투시되고, 반복되는 이미지의 사용을 통해, 그 이미지들은 건축적 공간을 창출해 낸다. 여기저기 뿌려진 이미지들은 사실과 허구의 혼합된 환영의 세계를 창출하는 기억의 단편을 불러낸다. 그들은 쏟아져내리는 붐비는 인파가 순간 사라져버린 도시 공간의 구획을 드러내고, 관람객은 시간과 공간의 틈새를 통해 갑작스럽게 나타난 숨겨져 있는 냉담한 세계에 내밀히 관여하는 환영을 갖게 된다. 이 엘리베이터 걸은 개별성 없이 인형 같은 획일적인 몸짓의 냉정한 태도로 인공적이고 차가운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미지의 반복은 마치 관람객을 작품 표면 배후로 초대하는 것 같은 괴기한 시각적 효과를 창출하기도 하는데 야나기 자신은 자본주의를 수반한 현실의 심연인 도시 중심부의 가장 밀도가 높은 기역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야나기의 이상한 꿈과 같은 이미지들은 마치 이 “깊숙한 현실”을 들여다보는 구멍처럼 기능하는 것으로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 구멍의 안쪽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로부터 확장되어 나간 바닥없는 거울의 벽과 엘리베이터는 단지 이 내부의 진실을 제시할 뿐이다. 이미지는 우리의 시선을 끌어당기지만, 그 시선은 에워싸인 공간에 머물러 있어서, 관람객의 시선은 반원형 아치나 그리스식 원주와 함께 일본이나 아시아 상업 디자인을 특징지우는 서구문화의 단편을 절충하는 꼴라쥬와 소비문화의 지역 특정성을 가지고 있는 구매 욕구를 고무시키는 다양한 수단의 친숙한 도시 환경의 야릇함에 잡혀있게 된다. 야나기는 친숙한 공간을 해체한 후, 그것을 우리의 과도하게 발전된 도시들의 심장부의 상업적 공간의 진실된 본성을 드러내는 그녀의 독특한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제시한다.
많은 외국인 거주자들에도 불구하고 다문화적 국가로서 보여지지 않았던 일본에서는 이제 대도시들의 변두리에서 명백히 혼성문화적인 모습의 지역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역들에서는 한글(한국 문자) 간판의 음식점과 필리핀과 태국인을 위한 비디오 대여점과 겸업하는 잡화점들이 있다. 이러한 마을은 도시와 유행하고 있는 “비특정적 민족” 식당에서부터 완전히 다른 측면에서 일본의 현실에 뿌리내렸다. Iwai Shigeaki는 이러한 다문화적 도시의 붐비는 거리로부터 시작해서 그의 개념을 소리, 언어, 도시의 소음, 이방인과의 무작위 만남으로 발전시켜 온 작가이다. 그의 진행 프로젝트 “대화 Dialogue”에서 Iwai는 처음으로 4명의 화자를 위한 대화의 영문 시나리오를 썼다.(그 시나리오 안에는 대화의 불완전함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나서는 함께 작업하는 이들에게 각기 다른 그들의 모국어로 그 시나리오를 행하도록 요청했다. 비디오 이미지에서는 시나리오의 내용은 참여자 스스로에 의해 번역되어 나타났다. 만들어진 비디오 이미지들은 신중하게 유도된 화자들이 보여지면서 관람객들은 각기 정해진 지점에서 그 작업을 경험하게 하였다. “대화”의 첫 번째 버전은 만일 관람객들이 그 그룹 안에 있는 언어의 하나라도 알아들을 수 있다면, 4개의 장면을 보고.들은 후엔 그들은 모든 대화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수정본에서는 모든 문장은 관람객이 그 내용을 동시에 이해할 수 있는 이미지의 텍스트여서 4개의 언어로 보여지지만, 반면에 너무 많은 문장들이 비디오 이미지의 시각적 정보에 끼어들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이미지와 언어를 동시에 경험하는 것은 바로 다국가, 다문화, 다언어 도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다양한 “타자 others”의 존재에 의한 교향곡을 생산한다.
우리는 이 작업을 다른 문화들 사이에서의 대화의 가능성의 낙천적인 제안으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차라리 단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로 말하는 이들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대한 문제뿐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자의 언어와 참여할 기회가 없는 상황을 어떻게 참아내는가라는 우리를 심각한 문제들과 대면하게 한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고유한 위치에 조화시키는가에 의해 타자를 받아들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의사소통의 작은 섬에 도착하기 위하여 소음의 대양을 가로질러 수영해나감으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가?

새로운 팝의 변화 : 수퍼 플랫(Super Flat)의 개념
1995년 12월, <변이 2>전을 마지막으로 뢴트겐은 문을 닫았다. 뢴트겐은 도쿄의 현대미술에 새로운 개념적 지평을 여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화랑과 작가들이 보여준 온고지신과 자기경영 정신은 1995년 이후 지속적으로 도쿄의 미술계에 영감을 불어 넣어주었다. 무라카미 타카하시의 ‘수퍼 플랫, Supper Flat이라는 개념은 <변이 1, 2>의 정치적 논의에 대한 반발에서 배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새로운 팝의 냉소적인 전략에서 일본 교유의 미술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으로 변화한 점은 뢴트겐이 이끈 예술적 혁신의 가장 커다란 결실이다. 『수퍼 플렛』에서, 무라카미는 2차원적 구성을 이용하여 인체 비례를 재치 있게 왜곡시킨 애니메이션 그리고 17세기 린파 대가들과 18세기 에도 매너리스트 작가들의 ’키소‘ 또는 비정상적 구조 사이의 양식적 유사 관계를 효과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과거의 이론 및 미술 작업을 일관성 있는 이론으로 통합했다.7) 그의 야심은 주변화 되어있던 근대 전후의 대중적 상상력의 전달 수달들을 통합함으로써 재패니즈 팝의 이론을 형성하는 것이었다. 일본에서 널리 알려진 비평서『일본, 현대, 미술』에서 사와라기는 일본 현대미술의 전반적인 상황을 ‘패쇄적 순환(close circle) (도쿄: 신조사, 1998, 12)이라 표현했다.8) 이러한 표현은 세대 간의 대화와 진정한 비평 언어의 부재로 인한 역사적 연속성의 결여 그리고 일본 현대미술의 국제적 부상 등을 일컫는다. 줄여 말하자면, 일본 현대미술에서는 공적인 공간(public space)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9)
무라카미와 사와라기는 일본 현대미술에서 공적인 공간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다. 일본 고급문화 시스템의 소극성과 새로운 팝의 중요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발언하고자 한 그들의 지속적인 노력은 지적인 면에서 존중되었으며, 오늘날에도 그 의미가 상호교차 하고 있다. 1999년과 2000년 사이에 미토 아트 센터에서 사와라기가 기획한 전시 <그라운드 제로, Ground Zero>는 무라카미, 야노베 등의 작가들과 1950년대와 1960년대 태생의 재패니즈 팝 작가들의 작품들 그리고 톨 나리타의 카이쥬 인형을 나란히 전시했는데, 이는 일본의 대중적 상상력과 관련된 대안적인 미술 전통을 보여주었다.
오자와, 소네, 나라의 작품은 일본의 지역적 전통을 넘어서는 대중적 뉘앙스를 지닌다. 일상 생활에서 버려진 물건들을 들여와 화랑의 실내에서 신선한 바깥 공기를 불어 넣는 개념적 퍼포먼스의 도구로 사용한 오자와와 상상의 자유와 물리적 한계 사이의 불가분한 관계를 환기시키는 소네는 1995년 이후 세계 도처에서 출현한 리크릿 티라바니쟈와 매튜 바니 같은 새로운 개념 미술과 맥락을 함께 한다. 소네와 오자와는 <누토피, Nutopi>, <뮌스터 조각 프로젝트> 그리고 <움직이는 도시 Cities on the Move> 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미술사의 그 어떤 기존 모델도 모방하지 않은 그들의 독자적인 개념적 태도는 젊은 작가들의 작업에 끊임없는 영감을 불어 넣는다. 현재, 국내외적으로 명성을 얻은 나라 요시모토는 젊은 세대 화가들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는데, 그 중 특히 히로시 스기토가 주목할 만하다. 소네가 퍼포먼스, 오브제, 드러나지 않는 내러티브 구조를 결합함으로써 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은 젊은 작가들 사이에 상당한 호소력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뉴욕대에서 공부한 후 뉴욕에 거주하는 오치아이 탐은 오브제, 회화, 비디오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을 통해 자신의 감수성을 드러내는 일단의 문화적 시적 파편과 그가 속한 도시 미술인들의 작은 공동체를 떠올리게 한다. 오가이 타케하루와 오가와 아이는 그들이 가고 싶은 장소를 세밀한 건축 모델로 만든 다음 실제 하늘이나 자연광이 비치는 들판을 배경으로 촬영하여 상상 속의 풍경을 제시한다. 일본열도가 체계적으로 도시화되기 이전의 낯설지만 소박한 삶의 유산을 작품에 끌어들이는 오자와의 작품은, 오래된 2층집을 개조한 스튜디오 겸 대안 미술공간에서 매일 하얗게 칠한 신문지 위에 자신만의 신화를 시적인 기호와 더불어 만화풍으로 그리는 젊은 작가 아리마 카오루와 비견할 수 있다. 이러한 반향은 이상에서 논의된 새로운 일본 미술의 중요성와 그 잠재력을 입증해 준다. 개인 차원의 작가들과 평론가들이 일본 미술계의 정식 시스템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문화가 지닌 잠재력을 이용하여 문맥을 스스로 구축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기에, 이러한 작가들이 개척한 풍부한 표현 영역이 그 영향력을 확장시킬 것인가는 아직 분명치 않다. 그러나, 미완의 일본 현대미술사에서 그들이 담당한 혁신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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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트뉴스에 개제된 린 검퍼트의 글「The Distnat Morror」는 진취적인 큐레이터 및 화상에 의해 추진된 도쿄 미술지형의 급진적 변화를 다루었다. 한편, 알렉산드라 먼로는 『플래쉬 아트』에서 기술 및 대중적 도상을 이용하여 눈에 띄지 않게 침습해있는 일본 제국의 권력을 역설적으로 비판하는 젊은 일본 작가들의 비판적 성향에 갈채를 보냈다. (Lynn Gumpert, 『Art News』 Vol. 89 no. 3, pp. 132-7: Alexandra Monroe, 『Flash Art』 Vol. 25, no. 163, pp. 71-4
2) Alexandra Monroe. 「Wandering Position」. 『Flash Art』Vol. 25, no. 163, pp, 71-4: Noi Sawaragi and Fumio Nanjo, 「Dangerrously Cute, ibid., pp. 77-9
3) Noi Sawaragi, 「Roripoppu, Sono Saishogen No Inochi」, 『Lollipop: Its smallest Life』(Bijutsu Techo), Vol. 44, no. 651, pp. 86-98
4) Noi Sawaragi, 「Bijutsu Toiu Anomari(Art as Anomaly)」, 『Anomaly』(Tokyo: Roentgen Kunst Institute, 1992), n.p.
5) 이렇게 거리감을 상징적으로 극복하는 과정은 나시하라가 뢴트겐에서 개최한 두 번째 기획전 <출발>에서도 나타난다. 이름만 보고 상상으로 재현해낸 미지의 도시에 대한 강력한 이미지를 주제와 하고,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나 《토너먼트》처럼 그들 간의 임의적인 관계를 축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서, 토너먼트 차트를 수놓은 모직 벽걸이를 전시했다. 이는 유사한 분위기로 이루어진 비디오 작품 《보이지 않는 부분을 볼 수 있는 안경》과 더불어 전시되었는데, 비디오에서는 손네가 자신의 얼굴에 맞게끔 인공 잔디로 만들어진 마스크를 쓴 채 인공잔디가 깔린 운동장에서 혼자서 축구를 하는 장면이 재생된다.
6) 오자와의 《나수비화랑》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카미아 유키의 아티클 참조 「아시아를 향한 대화로의 접근」, 『언더 컨스트럭션: 아시아 미술의 새로운 국면』(도쿄: 오파라 시티 아트 갤러리, 2002), pp. 132-5
7) Murakami Takashi, 「Supa-furatto Nihon Bijutsu Ron(A Theory of Super-flat Japanese Art)」『Super-flat』(Tokyo: Madra Press, 2000), pp.8-25.
8) Noi Sawaragi, 『Nihon, Gendai, Bijutsu(Japan, Contemporary, Art)』(Tokyo: Shinchosha, 1998), p.12
9) 먼로가 지적한대로, 1990년대 후반까지 일본 현대미술은 미국과 견주어 볼 때 그만큼 확고한 화랑 시스템과 비평적 평가를 통해 작가를 지원하는 구조를 갖추지 못했다. 비평 활동마저도 구심점도 공동 논의의 장도 없었다. 일본 미술이 1980년대 내내 형식주의에 대한 반항을 지속해온 아방가르드 정신을 유지했다는 평론가 치바 시게오의 가정에도 불구하고, 자체적으로 수용한 그린버그적 형식주의와 미니멀리즘을 이론적 기반으로 하는 회화 및 조각 평론가들은 자생적인 개념주의에 반하는 근거 없는 정통성을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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