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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⑩-1

이영철

태국의 현대미술


1.

아시아가 경제 위기를 겪는 국면에서 태국은 현대 미술의 장이 보다 활기를 띠었다. 이것은 상업 화랑과 별 상관없는 젊은 작가들, 실험성이 강한 작가들에게 경제적 곤경을 자신들의 작업과 별 상관없는 일로 실질적 부담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젊은 계층의 태국 작가들은 환경, 사회, 나라 그리고 세계에 대한 생각과 반응 표현하는데 훨씬 더 자유로워졌다. 따라서 예술과 사회의 관계가 더욱 의미 있고 생기가 넘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설치 미술, 공공 장소와 작은 단체들의 예술 활동과 퍼포먼스 미술이 태국의 현대 미술가들에게 자신들의 삶, 문화와 사회의 모든 양상과 연결된 이해의 범위를 매우 관용적으로 허락하였다. 태국에서는 설치 미술이 낯선 매체가 아니다. 설치 미술의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유형들이 태국에 자리를 잡았고, 심지어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글로벌 아트에 신선한 자극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들 설치작가들의 경향을 몇가지로 분석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생태학적인 문제를 다루는 작가군.
둘째, 전통 문화에 초점을 두고 불교의 세계와 정신성을 다루는 작가군
마지막으로 지극히 사적인 표현을 위한 작업에 몰두하는 작가군.


가장 최근의 경향은 마지막 유형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성격이 강한 작업을 하는 작가들은 메시지를 매우 직선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며, 작품이 설치된 장소에 대해 매우 강한 문맥적인 의미를 드러내고자 했다. 이들은 소통의 중요성, 항상 관객의 직접적인 참여를 유발시킨다. 그들 가운데 국제적으로 활약을 하는 작가들은 몬티앙 분마(Montien Boonma), 카몰 포샤와(Kamol Poasawas), 나빈 라완차이쿨(Navin Rawanchaikul), 술라시 쿠솔웡(Surasri Kusolwong), 자카판 빌라시니쿨(Jakapan Vilasineekul), 피나레 산피탁(Pinaree Sanpitak) 외에 많다.

태국의 설치 미술이 발전한 과정을 보는 것은 흥미롭다. 그들에게는 외부 세계로부터 받은 영향이 있을 뿐 아니라 불교, 전통적인 의식이나 축제를 포함한 태국의 문화로부터 영감을 받은 설치 컨셉을 발전시키는 몇몇 태국 작가들도 있다.

또한 퍼포먼스 미술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되는데, 거의 모든 퍼포먼스의 초점은 사회 정치적인 이슈들에 연관되어 있다. 태국의 퍼포먼스 작가들은 그들의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매체를 사용하는 “사회 활동가들”이다. 퍼포먼스 미술은 작가와 관객 사이의 즉흥적인 상호 영향에 초점을 두는 것과 함께 항상 개념적인 표현의 느낌을 전달한다. 퍼포먼스 미술의 선구자이자 에이즈 운동가인 숨폴 아피숙(Chumpol Apisuk)은 말한다.

퍼포먼스 미술과 작가들의 수가 증가하는 것에도 불구하고 태국의 현재 상황은 이들의 활동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단계가 아니다. 설치 미술과 비교하였을 때 퍼포먼스 미술은 미술 세계와 대중들에게 아직 성공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라이브 아트(Live Art)라는 첫 번째 퍼포먼스는 1996년 농타부리의 콘크릿 하우스에서 공연되었는데, 이 이벤트는 예술의 표현에 있어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 냈다. 이듬해에 두번째 퍼포먼스가 행해졌다. 두 이벤트 모두에 현지 퍼포먼스 작가들이 모여서 각기 다른 형태로 자신들을 표현하였다. 그 후로부터 그 장소는 태국 안에서 그리고 국제적으로 퍼포먼스 미술 이벤트의 주목받는 공간이 되었다. 작가들은 1993년 이 장소가 생기기 전에는 자유롭게 발표할 장소를 갖지 못했었다. 그해 방콕의 퍼포먼스 회의가 마르시(Marsi) 갤러리에서 개최되었다. 아시아, 유럽과 미국에서 참가자들이 초청되었다. 1998년 10월에는 퍼포먼스 아트에 있어 미술가 교환 프로젝트(JAXEPA; Joint Asian Artists Exchange on Performance Art)가 사람롬 공원에서 열렸다. 아시아 퍼포먼스 작가들이 ‘Asia-Topia라는 행사 주제에서 발표하기 처음으로 방콕에 모였다. 이틀이 걸리는 프로젝트는 방콕시로부터 완벽한 후원을 받았다.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태국의 퍼포먼스 작가 숨폴 아피숙은 이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이었다. 20명의 참가자들은 동부, 남부와 동남 아시아의 유명한 작가들이었다.

이 행사에는 일본에서 NIPAF(Nippon; International Performance Art Festival)의 시모다 세이지(Shimoda Seiji)와 타케이 요시미치(Takei Yoshimichi), 한국에서 홍오봉과 윤영석, 싱가폴에서 리웬(Lee Wen)과 조셉 니(Josef Ng), 인도네시아에서 아라마이아니(Arahmaiani), 방글라데시의 아니술 이슬람(Anisul Islam)이 참가했다. 태국에서는 바산 싯케트(Vasan Sittket), 수레퐁(Surepong)과 카이즈랑 판야와시라((Kaisrang Panyawashira), 마이클 샤와나시(Michael Shaowanasai) 그리고 이제 새롭게 출발하는 신예 작가 몬티 톰소밧(Montri Toemsombat)이 있었다.

이 퍼포먼스 미술 이벤트는 기획이 잘 되어 대중들의 큰 반응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의의는 공공 장소가 순전히 퍼포먼스 미술을 위해 처음으로 이용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객들은 그들만의 상상 속 세계를 탐색할 수 있는 기회와 작가와 또 그들의 작품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프로젝트는 넓은 범위의 관객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미래 아시아 퍼포먼스 미술의 기준이 되었다.

2.

1992년이래 인습적인 갤러리와 거리가 먼 장소를 사용하여 미술을 대중들의 삶의 공간으로 가져오는 치앙 마이(Chiang Mai)에서의 사회적 설치 전시가 있었다. 신전, 묘, 개인 주택, 공공 건물, 거리, 강, 다리, 벽, 운하 그리고 열린 공간들이 장소 특정적 작업을 위한 현장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나빈 갤러리 방콕(Navin Gallery Bangkok)'이라 불리는 나빈 라완차이쿨(Navin Rawanchaikul)이 만든 방콕의 프로젝트는 1995년 3월부터 아직도 순회 공연 중이다. 작가에 의하면 이 프로젝트는 미술이 일상 경험의 한 부분으로 만되는 시도와 특히 많은 사람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막힌 도로에서 소비하는 주요 도시에서의 미술과 삶을 보다 단단하게 결합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승객들을 배달하는데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일반 택시는 상호 작용을 만들어내는 공간의 매개자이다. 이는 순회 중인 미술 쇼의 일부이기도 하다. 비디오 모니터는 운전석 뒤에 장착된다. 승객들은 개념화한 비디오 이미지들은 볼 수 있게 된다. 이와 비슷하게 리크릿 티라바니자(Rirkrit Tiravanija)의 <무제 1996(traffic)>에는 택시가 일종을 교류 장소로 사용되었다. 택시 안에 비디오에 프로그램된 서술적 구성을 통하여 작가에 의해 설명된 것은 그들이 처한 위치에 따라 뒷 자석에 타고 가면서 승객이 새로운 모델을 형성할 수 있다. 사실상 이 작업은 갇혀진 공간에 이야기를 삽입한 것이다. 이 프로젝트는 “나빈 갤러리 방콕'로부터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방콕이라는 엄청나게 인구가 밀집된 도시에서 택시를 타는 일, 그것을 통해 일상을 보며 사회에 미술이 개입해 들어가는 일을 목표로 한 것이다.

나빈과 리크릿은 현대 도시의 일상적 생활과 창조적 활동을 연결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나빈 협동체(Navin Cooperative Society)> 같은 여러 프로젝트들에 협조하여 왔다(치앙마이,1997). 활동 중 하나는 <20 툭 툭>전에 소개되었는데 태국의 삼륜차가 이용되었다. 또 다른 프로젝트로는 움직이는 도시(Cities on the Move)전이다. 1997년부터 지역 사회를 근거한 미술 프로젝트들은 비록 관객들이 그러한 프로젝트를 받아드릴 준비가 되지 않더라도 태국 현대미술계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했고 대중들이 미술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드리는 것에 어색함을 덜 느끼도록 했다. 태국의 현 시점에 근거하여 개인이건 단체건 작가들은 ‘삶의 일부분인 미술’에 대해 걱정과 자각을 보여주었다. 그 결과로 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이 지역 사회 예술 프로젝트를 활성화시키는 방법의 길을 열었다. 1998년 1월에는 방콕의 지역사회의 사람들이 프로젝트에 참여할 것을 성공적으로 설득시킨 진취적인 젊은 작가 자카판 빌라시니쿨(Jakapan Vilasineekul)이 시작한 에는 모자이크 기술이 표현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지역 사회 주위의 포장도로들이 꽃, 동물과 사물들의 여러 모티브로 묘사하는 다채로운 모자이크로 변신하였다. 빌라시니쿨의 신념에 찬 말을 인용하자면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사람과 사람을 결합시키는 힘이다. 이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들에 의해서 인정을 받는다”. 작가는 미술이 대중을 섬겨야 된다고 강하게 믿는다. 또한 같은 지역에서 역사적 장소인 최초의 출판사인 쿠룬사파 (Kurusapha Publishing)는 대안적인 예술 공간으로 바뀌었다. 7일 밖에 지속되지 못한 ‘책(Book)이라고 제목이 붙은 장소 특정적 미술전이 열렸다. 철거해 버릴 계획 속에 있는 66년이 된 역사적 장소를 구하려는 목적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실험적 작업을 하는 젊은 작가들이 개입했다. 이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의 눈과 생각을 뜨게 하였다. 방콕의 시 공무원들은 그 장소의 의미를 되새기며 이 건물을 지역 미술 센터로 사용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다. 1998년 방콕 예술계의 하이라이트인 <방콕 아트 프로젝트(Bangkok Art Project)>는 1998년 12월에 시작되어 1999년 1월까지 진행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78명의 태국 작가들을 포함한 아시아 7개국 작가들의 협력으로 제13회 아시안 게임을 기념하는 일환으로 기획되었다. 프로젝트의 목표는 미술을 대중으로 끌어내고 고대 유산과 현대미술의 흥미로운 병렬을 탐구하는데 있다. 잉크젯 광고 게시판, 조각들과 설치 미술들은 야외의 길거리, 벽과 역사적인 장소들 주변에서 전시되었다. 이렇듯 매우 활발한 공공 미술 프로젝트는 태국의 관광 공사, 방콕의 도시운영위원회, 실바콘 대학, 많은 작가들과 대중들의 협력을 통해 가능해진다.


3.

1990년대 말 이후 국제적인 미술 교류 활동은 태국의 방콕과 치앙마이에서 특히 많이 이루어졌다. 어느 정도까지 다른 형태와 교환 프로그램에 대한 견해가 태국 현대미술의 발전을 증가시켰다. 이같은 연계는 세계 여러 곳에서 방문한 작가들과 워크샵, 세미나와 전시들에 있다. 여성의 목소리를 형성한 국제적인 여성 미술 교류인 ‘Womanifesto’는 1997년 3월 국제 여성의 날 열렸다. 전시는 호주, 인도, 이태리, 일본, 파키스탄, 미국, 싱가폴과 태국의 9개국에서 18명의 여성 작가들이 참가했다. 이 전시를 위해 만들어진 작품들은 회화, 혼합 매체, 조각, 설치와 퍼포먼스들이다. 작품들은 여성의 역할과 신분 변화의 인지, 그들의 투쟁과 성공 그리고 품위와 같은 여성의 이슈에 중점을 둔다. 이 그룹의 작가들은 미술을 사용하여 사회 안에서의 그들의 역할을 질문한다. 참가하는 작가들 사이의 강력한 관계는 1999년 3월의 두 번째 ‘Womanifesto라는 앞으로의 교류 프로젝트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는 방콕의 매트로폴리탄 운영위로부터 완전한 후원을 받게 되었다는 점이 주목할만하다. 1999년 1월에는 또 다른 색다른 프로젝트가 진행되었다. ’Alter-Ego라는 제목이 붙은 두 달간의 프로그램은 13명의 태국 작가들과 벨기에,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 그리스, 핀란드, 이태리, 독인, 프랑스와 스웨덴의 유럽연합국 출신의 13명의 작가들을 ‘짝짓는 것’을 포함하여 태국과 유럽간의 가까운 관계와 보다 나은 문화 교류 발전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양쪽 지역의 작가들은 합심해서 공동 작업하였다.

국제 미술 교류의 늘어나는 흐름은 새로운 경험, 새로운 태도, 새로운 생각과 태국 작가들의 발전을 풍부하게 하였다. 이에 더하여 국제적인 연계와 대화를 통해서 현대 태국 작가들은 자기 자신과 그들의 문화, 정체성에 대해 더 알아가고 자신들을 보다 분명하게 혁신적으로 표현한다. 과감하고 개방적이고 사회 비판적이고 생활에 밀착해 있는 작업을 해감으로써 그리고 국제 미술계와 세련되고 두터운 네트웍을 형성해 감으로써 현재 태국의 현대미술이 상당히 좋은 방향으로 진전되리라는 것이 분명하다.


마니트 스리와니크품 Manit Sriwanichpoom (Thailand)
마니트 스리와니크품(Manit Sriwanichpoom)은 그의 작품이 명백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저명한 프리랜서 사진가 겸 작가이다. 사회활동가로 알려진 작가는 예술을 태국의 사회와 정치적인 문제들에 저항하고 비판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은 예술을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접근할 수 있고 적절하게 만드는 것이 예술가의 사명이라고 믿는다.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의 첫 번째 개인전 '흑백 속의 작가 Artist in Black and White'는 1990년 Bangkok의 Alliance Francaise에서 열렸다. 그 전시는 태국 작가들의 특성의 정수를 묘사했다. 그의 사진전에는 방콕의 빠른 현대화와 도시화의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언급에 주제를 맞춘 흑백 사진전 방콕의 위기 2000 Bangkok Crisis 2000가 포함된다. 1997년 기획된 '이 피 없는 전쟁 This Bloodless War'전은 중국과 베트남에의 일본의 침략 전쟁 기간 중 찍혀진 유명한 장면들을 기반으로 한 6개의 사진 연작이다. 이러한 눈에 띄는 흑백 사진은 매우 자극적이며 차바리트 용채유드히(Chavalit Yongchaiyudh) 전후 시기의 경제 위기에 대한 반응이다. 이 사진들에서, 새로 보강한 점은 중국과 베트남인들의 행사 때의 원판 사진의 구도를 기반으로 한 개별 이미지들의 배치와 구성이다. 사진 속의 연기자는 젊은 예술 수집가이자 잘 알려진 작가인 차트차이 푸이피아(Chatchai Puipia)와 같은 작가의 친구들과 지인들이다. 각각의 사진 속의 행동은 경제적 위기와 태국 사람들이 직면해야만 하는 충돌을 극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마니트(Manit)에 의하면 '이 피 없는 전쟁'은 경제적인 전쟁을 전개시키는 경제적 위기를 폭로한다. 태국의 바트Baht화는 총이라기보다는 탄약이다. 작가에 의하면 피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태국인들에게 그 상흔은 너무나 현실적이다.
'이 피 없는 전쟁'은 이동성이 있는 전시일 뿐 아니라, 거리 퍼포먼스로도 행해졌다. 전시와 퍼포먼스는 다른 장소에서 보여지도록 계획되었다. 모든 장소들은 경제적 중심지이다. 작가가 묘사하길, 이 사진 모음은 우리가 괴로워하고 있는 암의 X-ray와 같은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표피 밑의 진실이며, 그 진실은 이 피 없는 전쟁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은) 여러 개의 지방자치단체의 예술 프로젝트를 역시 기획하였다. 캥 수텐 프로젝트 (Kaeng Sua Ten Project)(p190)는 정부의 댐 프로젝트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마을 사람들의 자각을 일으키는 것을 희망하고, 환경적 영향력에 집중하여 정치적 안건을 수반하여 1997년 시작되었다. 작가는 이 지방자치단체의 예술 프로젝트가 댐 건설에 반대하는 그들의 캠페인에서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이 프로젝트의 참여자는 작가와 댐 건설 예정지의 주변에서 살아가는 마을 주민과 농부들이었다. 이 지자체 예술 프로젝트는 어떻게 지방의 공동체 예술이 확장되고 부양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답 역시 반영하였다.

작가는 1996년 휴에 쾅-메가 시티 프로젝트 (Huay Kwang-Mega City Project)라 명명된 지자체 야외 전시와 퍼포먼스의 조직에 핵심 역할을 맡았다. 그 모든 프로젝트는 오래된 도시와 오래된 가치들의 파괴의 반작용을 강조했다.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이 태국 철도청의 공유지였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불법 out law이라 말해졌다. 그 프로젝트의 주최자는 의도적으로 그 장소를 프로젝트 활동의 무대로 허가받지 않았다. 작가들의 협력과 개인별 상호 후원은 강한 결속력을 만들어 냈다. 이 프로젝트는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인식을 자극하는 것과 단시 예술의 테두리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적 대중에게 직접적으로 그 안건을 일으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98년,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은 '절대 내 땅이 아닌 Never my land'라는 프로젝트를 위해 비디오 작품을 만들었다. '여행 중인 분홍빛 사나이 Pink Man on Tours'의 엽서와 비디오는 역설적이게도 태국을 놀라운 태국 Amazing Thailand, 1988~1999라는 관광프로그램을 통해 팔고자 하는 태국 정부와 개인적 영역에 대해 비판하고 항의하였다. 지속적인 '충격적인 분홍빛 연작 Shocking Pink Series'으로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의 최근 전시인 '충격적 분홍빛 의상 : 변덕과 환상의 소비자, 이미지 구축과 역할 놀이를 위하여 Shocking Pink Collection : Fancy and Fantasy Costumes, for Image-Buildings and Role Playing'는 1998년 10월 공공장소에 전시 되었다. 이 실물 크기 사진 연작은 그의 예술가/시인 친구인 솜퐁 타웨(Sompong Tawee)를 다양한 분홍빛 의상으로 개인성의 다른 겉모습을 특성화하여 그려낸다. 스리와니크품(Sriwanichpoom)에게 충격적인 분홍빛의 뉘앙스는 거짓말과 사기를 상징한다. 이러한 연작은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반영한다.


인도의 현대미술


오늘날 인도의 젊은 세대 미술가들에게 있어 다중 문화에 대한 적응은 과거와 너무 다른 사고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인도의 고유 문화와 동시에 세계 각국으로부터 모여드는 다양한 문화적 영향력이 공존한다. 인도의 식민지화를 야기했던 1800년대 초반의 근대화(서구화)는, 한 세기가 넘는 기간 동안 삶의 모든 영역에 걸쳐 인도의 정신이 억압되었던 시기에서 받아들여 지게 되었다. 만일 1940년대에 15년에 걸쳐 인도 예술가들이 서구 근대 미술과의 제휴의 필요성을 확신하고 맹목적으로 근대화를 받아들였다면, 재고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을 것이다. 60년대의 미술가들은 서구의 진부한 모방적 사실주의를 거부하고, 인도 철학과 관습의 형이상학으로 돌아가 추상개념의 분위기를 탐구하고 고유한 근본으로 돌아서려는 자의식을 키워 나갔다. 그들은 토착 재료를 사용하고, 익숙한 미학을 진전시키는 고유의 맥락에서 이미지를 창출하는데 그들의 재능을 쏟았다. 타고난 감각과 정통은 식민 통치 권력과 지배의 고통스러운 여파가 남아있는 가운데 열등감의 망상을 떨쳐버리려는 투쟁의 책임 행위로서 표현되며, 그들의 전방으로부터 정체성과 자기표현의 요청을 정면으로 받아들였다.

서구에서는 여전히 인도에 대해 뱀을 부리는 사람이나 인도 무희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겠지만, 사실 인도 작가들이 다루는 내용은 극도로 복잡한 여러 관계 속에서 창출된다. 인도와 같은 광대한 다민족국가는 여러 독특한 상황들과 다양한 요소의 내포, 사회 변화, 경제적 현실이라는 특정한 현안에 직면하게 된다. 모든 개발도상국에서는 연속과 단절이라는 양극이 만연함으로 오래된 것들이 새로운 것과 경쟁하기도 하고, 자극하기도 하면서 지속적으로 공존해 왔다. 내향과 외향의 양향(兩向)적 시각과 특권이 없는 욕망, 혼성의 유산, 예측할 수 없는 통찰력은 작가들의 마음을 불확실한 현실을 처리하는 적정한 수단을 찾도록 고무시킨다. 미술가와 아이디어의 광대한 확산과 함께, 1990년대 인도에서의 미술행위는 새로운 활기와 개방적 기질로 채워져 극도로 변덕스럽다. 이러한 상황은 오늘날 개별적 경험의 약속에 대한 모든 의문부호와 연속의 중단된 틈, 우회, U턴에 의해 격렬해진다. 예술을 둘러싼 아우라의 상실은, 요즘 세대가 그들의 시대와 환경에 대한 안건에 대해 논쟁적으로 토론하고, 그 활발한 상호작용, 그리고 제언을 하는 데 관심이 있음을 입증한다. 주류미술에서의 다양한 대안적 경험들은 집합적 경향에 의문을 제기하는 분위기에서 생겨났다. 권위의 파괴라는 위치에서 고전적 계급제도는 거부되고, 세대간의 다른 관점의 충돌은 개별 미술가들이 마치 그들이, 과거 영광에 대한 단순한 향수로부터 멀리 떨어진,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과거의 복합성과 씨름하는 것처럼 그들 스스로를 교차하는 관념들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미술가의 오늘을 예증하는 미술에 있어서 최근의 절충주의는 그들의 선택을 변화시키고, 그들의 경험에 진정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 다양한 출처에서 차용된다. 특히 직접적인 식민주의의 경험이 없는 현재의 미술가 세대들은 그들이 그들의 경험의 영역과 공간을 넓힌 것 만큼이나 민족주의의 정서를 약화시킨다. 유학과 해외여행, 전세계를 통합하는 미디어와 인터넷의 결합, 세계적인 아이디어들의 빠르고 자유로운 흐름을 통한 혼성 문화적 만남은 다양한 다른 문화적 현실을 통한 여정을 물질화하는 노출의 가능성을 증가시키고의 커뮤니케이션을 확장시킨다. 예술가들이 좀더 다양하고, 좀더 멀티미디어를 기반으로 하고, 좀더 분리되고, 광범위한 관심과 국제적 안건에 대해 더 많은 인용과 제안을 하게 된 것은 당연하다. 오늘날 미술가들의 다차원적 요구는 한편으로는 인터미디어의 시도와 장르들의 종합, 다른 한편으로는 화랑 공간에서 장소성이 중요하게 부각되는 야외의 공원과 공공장소들로의 외출, 그리고 독특한 방법들로 건축된 미술관, 화랑의 공간에 의해 충족된다.

오늘날의 인도 미술가들은 새로운 경향의 출현을 기다리거나 어떠한 존재하는 경향에 속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 순수함이나 독창성에 대한 관념은 그들에겐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들과 전통의 관계를 신성하고 봉인되어 있는 완전한 통일체처럼 다루지만, 그것에 덧붙여진 불확실함은 자기 반영적이지 않다. 예술의 오랜 숭배관습에서 요즘의 즐기는 분위기까지, 그들은 신화의 희화화와 비평이나 사회 풍자의 사실성을 사용하여 그들의 작품에 불경한 속성을 도입하고 있다. 문화의 재해석을 가로지르기 위한 충동은, 동시성과 그것에 의해서 야기된 평행하는 역사들에 대한 관심으로 대립된 1차원원적 관념을 폐기시켰다. 많은 미술가들은 그들 작업에서 열려진 결말을 겨냥하는 서술의 경로를 복수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자기 지시성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러한 미술가들이 인도 현대미술의 현장을 대변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작품은 분명 인도미술의 중대한 경향들을 반영하고 있다. 기민한 개별 작가들은 그들이 자기 정체성/ 복합적인 정체성들, 젠더의 충돌, 민족과 경계와 같은 다양한 안건들에 대해 용감한 자세로 그들의 개성을 작동시킨다. 그들은 분해된 사회적 현실 가운데 적절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개인적인 분류를 통해 과거와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태도와나 행동을 통해 인도 현대 미술의 현장은 점차 명확해 지고 있다. 그들이 자신의 미술을 현대적 시각에서 풀어 가는 점은 그들 고유의 시각을 통해 세계를 볼 필요를 느끼는 것만큼이나 오늘날의 인도 현대미술의 새로운 세대들에게 특히 중요하다. 다양한 독립된 미학적 전략을 사용하고, 그들의 물질과 개념 양면에 대한 그들의 반영과 선정에서 선택을 수행함에 의해서, 이 예술가들은 신선한 관점과 위험을 감수하는 모험과 함께 예술의 원기를 회복한다.

미술에 있어서 경험은 절대로 전 세계에서 동일한 경향으로 획득될 수 없으며, 서구에서 벗어난 예술은 다른 모험을 관통하며 다른 의미들로 얻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몇 년간 미술비평과 작가, 미술가들은 함께 인도 모더니즘의 독특한 특징의 명시를 완수하려고 고심하고 있다. 기타 카푸르(Geeta Kapur)는 ‘우리는 근대(modern)를 근대화의 역사적 경험의 기간으로 다시 구분하고 (reperiodise), 우리의 모더니즘을 명시하여 잠재적으로는 우리의 고유한 기간으로는 포스트 모던에 접어들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고 적고 있다.

인도 현대미술의 현장은 내부적으로 하나의 계기를 만들어냈다. 90년대 인도 미술가들은 진보적 시각의 세대이다.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을 탐구하고 재해석하기 위해 투쟁하는 비평가, 역사가, 철학적 사상가들의 통찰력을 조합하여 복귀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집단적인 관심과 개별적인 자기탐구 사이를 오가며, 오늘날의 예술가 세대는 다양한 언급을 통해 새로운 확신을 표출한다. 이들은 인도의 고유한 상황에 대해 연구하는데 너무나 오랫동안 서구에 의존해오다가 최근에 들어 토론, 비평문, 출판과 의사소통의 효과적인 통로에 의해 이론화된 이들 고유의 시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것은 인도 작가들에게 완전히 위안이 되는 상황은 아니다. 식민주의 문화적 부과물을 극복함에 따라, 그들은 이제 인도의 문화적 역사의 판단의 권리를 주장하는 국가 내부의 정치적 폭력의 근본주의자의 테러를 직면하게 된다. 불안정한 경제와 제도적 장려의 결여, 깨끗한 문화적 정치의 부재, 제한된 개인적 후원, 창조적 자유의 배려가 쉽지 않은 분위기는 바로 지금 인도 미술의 현장을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더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은 그들 관중의 수에 의해 방해받거나 협박받지 않고, 손해을 감수하는 그들의 용기를 꺾지 않고 있다.

긴장된 환경 속에서, 정체성과 자연, 미술의 기능에 대한 불확실성은 여전히 미술은 무엇이며, 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아마도 삶의 진실은 미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며, 여기에서 한시적인 대답만을 갖는 그 질문들은 영원히 남게될 것이다.


수보드흐 굽타(Subodh Gupta)
그의 이미지들은 그가 경험한 다양성이 반영된 그의 개인적 기억과 현대의 경험들에서 전통과 현대 도상학의 관계를 관통한다. 그는 그의 마음과 기억의 변화하는 경계를 조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세계의 안과 밖 사이에서 정체성의 확산과 싸우기를 즐긴다. 그는 인도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낙후되어있는 곳 중 하나인 비하르(Bihar)의 크하고울(Khagoul)이라는 작은 외딴 마을 출신이다. 농촌 환경에서 도시환경으로의 이동은 변화로의 욕구에서 비롯된 혼란의 감정을 반드시 수반하게 된다. 그의 작품은 개인적 역사와 교육, 주류로의 이동의 경험에서 시작된다. 그의 작품은 현대적 맥락에서 전통과 근대성을 위한 공간에 개방되어 있다. 긴 기간동안 축제의 형태로 나타나는 비탄과 찬양의 복잡한 의식이 치뤄지는 인도는, 신화를 농담으로 다루고, 그것을 지속시키기에 이상적인 곳이다. 복잡한 지방적 비탄의식을 막연하게 구성한 설치 작품인 “29 MORNING는 29일이 넘는 비탄 의례를 행하는데 사용되는 다양한 방법과 물질들을 사용하여 구성된다. 유년기에 그의 아버지를 잃음으로서, 그는 어린 나이에 보고 경험하였지만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를 발견하였다. 시각과 미각, 후각, 청각의 조합은 현실과 가상 양자의 다양한 물질들의 관습과 통합된다. 예를 들면 가정용 그릇을 Shraddh(장례의식)을 행하는데 모두 필요한 것인 밀 줄기와 태운 나무조각, 백단향, 동전, 진흑, 붉은 옷과 성스러운 실에 버터기름(전화시킨 버터)과 기름, 우유를 더하는 신성한 제물을 위해 사용하였다. 일상용품의 재조합은 여기서 관람객과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사용된다. 그는 이런 일상적인 물건들을 그 기능적 맥락에서 벗어나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한 의문과 사회적 조건, 심지어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의식을 이끌 ‘다른’ 대화를 고안하기 위해 이용한다.

그의 작품은 문화적인 한정성을 강조하고, 특정한 물질의 은유적인 효과와 상징적인 의미에 대한 믿음에 의해 향상된다. 문화적 현실들로부터의 다양한 경험의 조각모음은 작가를 홀로 공간이나 시간, 심지어 정체성에 도전하는, 그 스스로를 의식적으로 애매한 위치에 놓는 지역과 전세계,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영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의 분열을 강화한다. 그는 그가 새로운 문화적 의미와 취향을 탐험하는 반면, 물려받은 기억을 규명하고, 그의 과거로부터 모순된 생각이 남아있는 메아리를 듣는다. 그의 작품은 혼합된 자극을 통해 그의 뿌리를 재발견하며, 새로운 존재를 발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설치 작품 중에는 그의 농가 마을 생활과 교육의 한 부분을 이루는 타버린 재와 쇠똥덩어리로 만들어져 있다. 그는 성스럽고 세속적인 접경의 양면에서 깨지기 쉬운 물질을 다수적 의미의 인도생활에 대한 상징들로서 늘어놓는다. 예를 들면, 소는 심지어 요즘 세대에서도 어머니로서 경배되며, 쇠똥은 요리할 때의 연료와 벽과 바닥의 회반죽으로서 쓰여지는 일상적인 마을 생활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오늘날에는 소의 소변과 똥 잿가루는 많은 예식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그에게 순수성과 실용성의 조합인 쇠똥을 사용하는 것은 향수 젖은 경외이다. 그는 기억의 재생과 그것들의 새로운 함축을 재장전하기 위하여 회상의 힘을 사용한다.

인도에서의 “미래”라는 개념은 다양한 층위를 가지고 있다. 그저 “과거”가 연속적인 존재로 느껴지는 것처럼, 모든 미래로의 여정은 과거, 현재, 혹은 “과거-현재”라고 불려지는 것에 대해 우월한 위치에서 조절된다. 미래를 이해한다는 것은 또한 사회(공동체)와, 고대와 최근의 역사에 대한 태도에 의해 진정된다. 미래에 대한 정의는 인도의 시간 공식화와도 연관이 있다. 12세기 수학자 브하스카라(Bhaskara)에 의해 숫자 “영”과 무한대의 밀접했던 관계가 최초로 완전하게 나뉘어진 곳에서의 시간 그 자체는, 인도인이 아닌 사람의 관점에서는 예기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역법은 적어도 인도식 shaka력, 이슬람력, 기독교식의 3가지를 따라 나눠질 수 있으며, 힌디(Hindi)와 같은 현대 인도어에 있어서는 “kal'과 같이 하나의 단어가 ”어제”와 “내일”에 모두 사용될 수 있다. 고대 인도인들에게 시간은 서구나 이슬람의 전통에서처럼 단선의 길을 따른다기보다는 순환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파괴는 생성의 구성요소가 된다. 하나라기 보다는 다양한 미래들은 현재를 넘어서 확장된다.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철학에서, 개인은 영혼의 해방이 이루어질 때까지 무수한 재생의 주체가 된다. 이러한 시간의 무수한 가닥은 현재와 미래 모두에 복잡한 거미줄을 엮는다. 시간을 설명하는 독특한 방식은 많은 인도 현대예술가들이 인도의 과거를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수단으로서 바라보는 데 있어 유용한 은유로 다루어진다. 미술사가이자 비평가인 기타 카푸어(Geeta Kapur)는 최근 “인도 문화 환경에 있어서 과거에 대한 현저한 인식”이라는 글을 썼다. 과거는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개인과 공동체의 기억은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상상할 때 결정적인 요소로 드러난다. 하지만 공동체의 기억은 1992년 힌두교 근본주의자들이 아요드히야(Ayodhya)에 있는 바브리(Babri) 모스크가 힌두신 라마의 탄생지에 세워졌다는 주장이 제기된 이후 파괴해버린 것과 같은 공동의 폭력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가 될 수도 있다. 그 결과로 일어난 전국적 폭동에 관해서는 평론가 차이타냐 삼브라니(Chaitanya Sambrani)가 “기억은 전장이다. 문화는 그 참호들 사이에 있다”고 시사한 바 있다.

현재의 사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과거의 표상을 의도적으로 차용하는 것은 인도에서는 오래된 전통이다. 예를 들면 간디는 영국 식민통치에 저항하는 무기로서 손으로 짠 면을 사용할 것을 권장하였다. 그리고 일부에 의해선 신기술의 무차별적 도입 대신 가내공업의 개발이 인도의 비동맹 미래를 위한 길로서 제시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로 1993년 첫 번째 아시아-태평양 트리엔날레에서는 인도 작가의 참여가 없었지만 1996년 2회 행사에서는 날리니 말리니(Nalini Malani), 므리날리니 무크헤르지(Mrinalini Mukherjee), N.N. 림존(N.N. Rimzon), 닐리마 셰이크흐(Nilima Sheikh), 비반 선다람(Vivan Sundaram)의 5명의 인도 작가가 참가했다. 1999년 열린 3회 행사에서는 남아시아 기획팀이 문화적 전통에서 다양한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는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의 작가들을 선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러한 집합적 선정은 아시아 대륙에 있어서 이러한 경계를 넘나드는 행사의 희소성 때문에 더욱 막대한 중요성을 드러낸다. 남아시아 국가들 간의 거미줄처럼 복잡한 관계들 속에서 인도는 막강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가장 극적인 사건은 1998년 3,4월에 인도와 파키스탄 사이에서 일어난 핵무기 극단정책이었다. 그리고 스리랑카의 내전(시민전쟁)과 같은 여러 가지 다른 원인에 의한 중대한 문화적 긴장 상태는 여러 해에 걸쳐 벌어져 왔다. 그렇지만 남아시아의 미술가들은 국가와 문화의 숨어있는 경계를 허무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인도에서 SAMHAT라 알려져 있는 미술가와 지식인 집단은 아요드햐(Ayodhya)를 비롯한 인도의 많은 곳에서 전시와 퍼포먼스, 출판, 학술회의, 다양한 멀티미디어 행사를 통해 90년대에 공동체의 분열에 저항해 왔다. 1997년, 인도의 독립 50주년을 맞아 열린 “인도를 위한 선물”이라는 국제전에는 파키스탄을 비롯한 많은 국가 미술가들이 참여했다. 같은 해, 델리에서는 “지도그리기 : 깨지기 쉬운 자아의 역사 공유하기”라는 온건하지만 중요한 전시에 많은 파키스탄 작가들이 참가했다. 하지만 이러한 전시 중, 남아시아 작가들이 현재 활동하고 있는 잠재된 현실과 정치적 환경을 변화시킨 것은 없다.

오히려 개별 작품들은 공동체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를 들면 잘 알려진 화가 M. M.F. 후세인(F. Husain)의 힌두교에서 학문의 여신인 사라스와티(Saraswati)의 누드 초상화는 최근 인도에서 주류와 비주류 문화 사이에서 긴장을 증폭시키는 논쟁을 일으켰다. 우선, 현대 예술이 중산층의 거대한 보수적 취향과 겨루었으며, 둘째로 이슬람교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그가 인도인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힌두교의 정서를 모독한다는 종교 원리주의자들의 폭동을 일으키는 표적이 되었다. 이러한 운동은 아흐메다바드(Ahmedabad)에서열린 한 전시에 출품된 몇몇 그림이 신성모독과 소위 표현의 자유에 대한 방종한 사용이라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고 대중적 항의를 받았다. 이는 전체 국가의 집단적인 유산을 하나의 공동체가 독점할 권리와 어떠한 하나의 집단에 소속된 미술가가 다른 종교의 성상을 판단할 자유를 가질 수 있는가에 대한 문제를 전면에 내세웠다.

인도에는 전근대의 고전적인 전통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마을이나 구역에서 토착 문화로서 아직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남아시아 거대 도시에서의 도시 대중문화는 종교와 정치는 물론 영화 세계에 보조를 잘 맞춰나가고 있다. 힌두교, 불교, 이슬람교라는 적어도 세 개의 세계의 주요 종교들이 공존하고, 종교와 사회경제적 공동체 양측에 의해 여성의 지위가 극적으로 변화할 수 있으며, 파르시(Farsi)어와 우르두(Urdu)어가 아라비아 필적으로 쓰여지는 것이 세계에서 가장 세련된 서법이 되어가는 지역에서, ‘영성(spirituality)’과 ‘젠더’, ‘텍스트’와 같은 기본적 주제들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과거에는 불교가 남아시아를 가로질러 통합시키는 연결고리였다. 현재에는 식민주의의 영향이 인도와 파키스탄, 스리랑카라는 근대국가들 사이에서의 주요 공통 쟁점이다.

인도에서의 현대 예술 관행의 광범위한 개관은 지방-종족, 도시대중, 그리고 도시의 ‘근대’라는 세 개의 경향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이러한 경향들 사이에는 거의 상호작용이 없다. 지방과 인도 종족의 미술가 공동체는 지역적 소비를 위해 그들의 작품을 생산한다. 도시의 대중적 하루살이는 끊임없이 증가하는 중산층의 수요와 욕구에 감응한다. 근대와 포스트모던 예술 문화는 교양있는 엘리트 계층을 상대로 한다. 그러나 최근 몇 년간 근현대 인도예술과 국제 경매장의 입회의 주류는 중산층 사이에 근대예술에 관한 광범위한 관심 뿐만 아니라 미디어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지방- 종족의 전통은 주로 화랑계나 미술시장과 관련이 없는 동떨어진 마을에서 살아가는 문맹인들에 의해 보존된다. 델리(Delhi)와 브호팔(Bhopal), 아흐메다바드(Ahmedabad)의 특성화된 미술관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인도 미술관들은 민족/지방, 종족미술은 그들의 민족학 구역으로 전시를 제한한다. 도시의 근현대미술 화랑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공동체 민족정신의 독자적인 산물이어서 개별성이나 고유성을 결여한 것으로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를 포용하는 곳은 거의 없다. 예외를 제외하면 지방-종족 전통은 주로 현대미술보다는 ‘공예’의 범주에 속한다.

1970년대 푸풀 자이카르(Pupul Jaykar)의 정책들과 마드후반(Madhuban)의 여성들과 왈리(Warli) 종족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미술을 통한 실천을 보인 하스카르 쿨카르니(Bhaskar Kulkarni)의 개인적인 공약은 인도에 처음으로 충격 주었다. 그 후 1980년대 초반 지방-종족의 전통을 대변하여 중대한 발언을 한 것은 화가 J. 스와미나탄(J. Swaminathan)이었다. 그는 종족 미술이 도시근대 미술과 대등한 품격을 자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대중적 참여와 개인적인 실천을 통합하기 위해서 독창성과 독자성을 고려하는 전통적인 전형을 거부했다. 델리의 공예미술관 디렉터 죠틴드라 자인(Jyotindra Jain) 박사는 1998년 “또다른 거장들 : 다섯 명의 인도 현대 전통과 종족 미술가들”이라는 전시에서 다섯의 시골미술종사자들을 개별의 작가로서 승격시킴으로써 인도에서 미술실행의 체계에 깊이 박혀있는 카스트 제도의 선입견을 타파하는 데 업적을 남겼다.

도시 대중 미술의 예측 불가능하고 변덕스러운 특징은 교화와 규정에 저항한다. 1997년에 열린 ‘거리의 꿈 : 사티쉬 샤르마(Satish Sharma) 컬렉션의 현대 인도 스튜디오 사진’전은 중산 계급이 그들 고유의 윤리와 미학을 규정지을 수 있는 권리를 강조했다. 대중적 이미지를 담고 있는 브후펜 크하크하르(Bhupen Khakhar)와 수드히르 파트와드한(Sudhir Patwardhan)가 열어 놓은 길을 따라 라빈더 레디(Ravinder Reddy)와 아툴 도이야(Atul Dodiya)와 같은 작가들은 조각과 회화를 통해 거칠고 분류할 수 없는 상점가의 미술과의 상호 소통에 한 걸음 더 진입했다. 설치와 행위 미술, 장소특정성을 중시하는 작품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길거리 “미장센”의 좀 더 직접적인 대립에 관한 징조를 잘 보여준다. 지방-종족과 도시 대중의 흐름, 이 양면에 대한 존중은 사실상 미래로 진입하는 전략적 도약점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도시 현대화의 흐름과 상호 교류하는 장을 열고 있다.

APT 3에 참여한 5명의 인도 작가의 작업은 지역/지방과 종족 미술, 도시의 대중적 이미지, 도시의 현대미술이라는 인도의 최근 예술 흐름과 이미지제작의 세 가지 흐름을 모두 보여준다. 그들은 인도 중앙부의 고립된 마을(소나바이 sonabai)로부터 동쪽의 비샤크하파트남 Vishakhapatnam (라빈더 레디 Ravinder Reddy), 남쪽의 미소르Mysore (N.S.하르샤 N.S. Harsha), 서쪽의 바로다 Baroda (수렌드란 나이르 Surendran Nair)를 거쳐 멈바이 Mumbai 거대 도시 (루마나 후세인 Rummana Hussain)에 이르는 공동체들의 광범위한 단면들을 제시한다.
N.S.하르샤 (N.S. Harsha)는 드로잉으로 현재를 언급하고 일상에 기초한 미래를 상상한다. (공적으로) 그는 작은 크기의 회화작품과 다양한 매체를 사용한 커다란 크기의 작품 모두 다 전시한다. 그는APT 전시에 인도 남부의 탄조르(Tanjore) 미니어쳐 화가들이 쓰는 전통적 방식의 작품을 출품했다. 콩 추출물로 처리한 실크로 된 커다란 반원형 틀 위에 잉크와 아크릴 물감, 청동가루, 금박을 결합시킨 것이다. 작가는 금박의 벌집 무늬 속에 텍스트의 삽화와 달력에 실린 값싼 그림, 거리의 단편적 이미지를 포함하여 광범위한 출처에서 베껴낸 인도와 외국 유명인사들의 미니어쳐 초상들을 배치하였다. 텅 빈 금빛 페이지와 여기저기 발자국이 찍혀 있는작품에서, 미래는 틀림없이 공유된 역사의 현실과 공동 지식을 통해 이루어진 관습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제시한다.

힌두교가 우세한 인도에서 이슬람교도 여성작가인 루마나 후세인(Rummana Hussain)은 “공동체”와 (주류/비주류, 토착/ 외국의 대립의 연관성)이라는 논점과, 인도아시아 대륙의 미래에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보인다. 식민주의의 폐해에 의한 지난 중재를 포함한 공동의 유산의 세습에 대한 그녀 의 권리를 청구하며, 그 유산에 대해 일제히 의문이 가해지는 동안 스스로를 그녀가 태어난 이슬람 문화 사이에 위치시킨다. 그녀의 치유를 위한 공간 Space for healing 1999이라는 APT를 위한 설치 작업은 치유공간의 은유로서 몸을 위한 병원과 영혼을 위한 ‘모스크를 만들어 냄으로서 강조되었던 과거에서, 수용 가능한 미래로 나아가고자 한다. Hussain에게 치유, 종교, 젠더와 가장 중요한 화해의 개념은 다음 밀레니엄의 첨단 예술로서 그녀가 추구하는 본질이다.

Surendran Nair 의 회화는 그것들이 현실이 개념을 극복한 온건한 초현실주의를 도입함으로서 차례로 장난기 있고, 반어적이며, 기묘해질 수 있다. 그는 우주인의 몸이나 힌두교의 신 Vishnu가 누워있는 형상으로부터 생겨난 신화적이고 현대적이며 고전적이고 세속적인(우주의) 이미지들의 거미줄을 촘촘하게 짜낸다. 그의 미묘한 풍자는 과거와 현재 사이의 일시적인 중지를 전복시킨다. 그의 “추론신화”시리즈에서 Nair는 인도와 서구 예술 양자로부터의 시각적 표준과 새롭고 기이한 도상을 생성해내는 신화를 함께 엮어내는 작업의 실체를 제시한다. APT 3면화는 현대 대중문화의 시각적 하루살이(ephemera)를 개시하기 전에 고대인도 도상학에서의 직접적 참조를 시작했다. 의도적인 그것들의 남김이 다양한 시점의 해석과 통함으로서 Nair는 인도의 공동체와 개인의 소유물과 의견차이와 같은 미래의 중대한 문제에 관한 토론을 만들어 낸다.

Ravinder Reddy는 길거리의 놋쇠로 만든 성애도와 인도의 종교조각 전통 사이의 신성하지 못한 결합을 찬양한다. 그의 작품에서는 경솔한 관람객에게 영화 광고 게시판의 존재와 정치지도자들의 거대한 도려낸 그림이 야단스러운 포장도로의 노점상에서 발견되는 혜택을 하사하는 여신의 배설물과 번쩍거리는 합성수지나 회반죽의 욕망의 우상을 강요한다. 이번 APT에서 그는 유리 섬유와 금박으로 만들어진 실제보다 커다란 조각인 연꽃을 들고 있는 여인 Woman with lotus flower1997/98으로 대변된다. 육체와 영성의 적절한 타협은 Reddy가 충분히 부여한다. 관람객의 눈에서 폭발하는 성적인 존재로서의 디바는 벌거벗고 있지만, 아직까지 숨겨져 있어 감질나게 한다. 그녀의 커다란 눈은 미래를 바라보며 정면을 응시하는 반면, 그녀의 다리는 고전적 불교조각의 전통인 연꽃바닥 위에 머물러 있다.

독학한 예술가인 Sonabai의 작품은 보통 장소특정적이다. 그녀의 Madhya Pradesh 시골의 진흙과 짚으로 만든 집의 실체는 확장되어 벽의 표면과 곡물단지, 선반과 구멍 뚫린 칸막이에 새와 동물, 사람의 실제와 상상의 형상을 만들어 낸다. 현재 68세인 그녀는 현대의 거장으로서의 승인을 얻기 전, 1983년 Bharat Bhavan의 Swaminathan의 연구팀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녀는 1988년의 선구적 전시인 ‘다른 거장들 Other Master’전에서 5명의 예술가 중 한 명이었다. APT를 위하여 Sonabai는 Brisbane에서 그녀의 작품을 이끄는 전통을 현대인도 예술의 또 다른 흐름으로서 관람객이 심사숙고하도록 만든 진흙과 찰흙, 건초, 안료로 만들어진 공간을 형성하는데 거의 2달을 작업했다. Sanabai에게 미래는 친구와 시골, 공동체가 정정당당하게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는 일종의 근본적인 가정생활에 의해 조절되는 ‘진보’ 개념의 개인적 영역이다.


브루나이의 현대미술


브루나이는 15세기 초 브루나이 회교 왕국 건설 이래 강력한 토후국이었으나 1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다가 19세기 말(1888년)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기간에는 일본군이 점령하였다.(1942-1945년) 1959년 자치 정부 헌법을 제정하여 공포하고 1971년 외교는 영국이 관장하며 국방은 상호 협의한다는 내용의 영국과의 조약 개정으로 내정 부문의 완전 자치를 실현하였다. 1979년 브루나이․영국 우호 협력 협정에 따라 1984년 1월 완전 독립하고, 독립과 동시에 영국 연방에 가입하였다. 회교 절대 왕정 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모든 분야에서 왕실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왕실에 대한 비판은 금기시 되고 있다. 정부의 고급 관리들은 주로 영국, 호주 등에서 교육받은 젊은 엘리트로 충원되어 있으며, 상권은 전체 인구의 18%를 차지하는 중국계가 장악하고 있다.

브루나이의 예술적인 전통은 오래되었지만 역사적으로는 회화나 조각보다는 주로 수공예, 다시 말해 은세공, 직조와 놋쇠 그릇, 대포를 만드는 작업이 주를 이루었다. 이태리 저술가인 피가페타는 16세기에 마젤란의 배들이 브루나이를 방문한 것(1521년)을 기록하였다. 방문 기록을 보면 ‘술탄의 궁전 앞에는 56개의 놋쇠로 된 것과 6개의 대포들이 설치된 요새의 방식으로 커다란 벽돌과 전초로 만들어진 성벽이 있다’고 적혀 있다. 20세기의 초에 브루나이의 연간 보고서는 ‘쿠알라룸푸르에서 개최된 농업-원예 대회에서 브루나이의 은세공이 6개 분야 중 5 부문에서 1등을 수상하였고 2개의 2등 매달을 획득하였다. 브루나이의 직조공이 면부문에서 1등 그리고 실크와 금으로 짠 옷 부분에서 2등을 했고 다른 부문에서도 2개의 1등과 2개의 2등을 했다.’고 적고 있다.

브루나이에는 회화나 조각은 걸음마 단계에 있다. 그곳에는 미술 학교도 없고 국립 미술 갤러리나 미술관도 없다. 하지만 이러한 시설 없어도 미술은 이뤄지고 있다. 이 나라에서 최초로 결집된 조각품 컬렉션들은 문화와 정보 단체(COCI)의 프로젝트에 의해서 제4회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의 조각 마당을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다. 이 작품들은 술탄의 궁전 맞은편에 위치한 Damuan강둑의 Nurul Iman 공원에 설치되었다. 이어서 1996년도에 ASEAN의 젊은 조각가들에 의해서 다시 ASEAN COCI프로그램을 통해 다른 컬렉션의 조각품들이 제작되었다. 이 조각품들은 현재 브루나이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회화의 형태를 띈 작품의 장려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다. Awang bin Sitai가 1997년 ASEAN 미술 시상식 카탈로그에 ‘브루나이 미술의 발전’이라는 글에서 말하기를 ‘오늘의 대회는 1950년대의 해마다 열리는 농산물 품평회들에 작은 수채화나 연필 또는 크레용으로 그린 초등학교 또는 저학년의 중학생들 아니면 선생님들이 그린 그림과 야채나 과일 등의 농산물 등이 같이 전시되었던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 대회에서는 고리 세공이나 나무 조각 같은 수공예품들도 같이 전시되었을 것이다.’ 1960년대에 들어서 술탄의 생일을 기념하는 것과 합동으로 해마다 미술대회가 개최되었다. 1972년에는 브루나이 박물관의 새 건물이 미술 전시나 대회에 필요한 개최 장소를 제공하였고 현지의 재능 있는 사람들을 자극하기 위해서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작가들을 초대하여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것이 브루나이 박물관의 정책이었다. 브루나이가 완전한 독립을 하고 ASEAN의 회원이 되고 나서 브루나이의 작가들은 ASEAN COCI 프로그램에 의해 기획된 순회 전시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브루나이의 작가들은 결과적으로 ASEAN COCI의 여러 프로젝트를 통해서 여러 미술전시, 워크샵과 심포지움을 경험하였다. 다른 ASEAN 국가에서 전시를 했을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그들의 작품을 전시하였다. 1989년에는 브루나이 작가들이 일본 후쿠오카의 제3회 Art Show에 참가하도록 초대되었다. 브루나이 작가들의 국제적인 전시활동은 필립모리스사의 ASEAN 미술 시상식 설립에 의해 더 많이 증가하였다. 1995년 이후 해마다 필립모리스사는 브루나이에서 필립모리스사의 ASEAN 미술 시상식에 출품할 5점의 최고 작품을 선발하는 대회를 주최한다. ASEAN 미술 시상식은 ASEAN의 회원 국가들이 돌아가며 주최한다. 이 대회의 목적은 ASEAN지역의 생겨나는 작가들을 격려하고 발전시키고 그들의 재능을 넓히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있다. 브루나이 필립모리스사의 ASEAN 미술 대회를 제외하고도 1993년에 처음 시행된 Dato Paduka Haji Ibrahim미술대회와 같은 국가적인 미술 시상식이 있다. 고인 Dato Paduka Haji Ibrahim bin haji Mohamad는 브루나이의 성공한 건축회사의 Aritek Ibrahim의 소유자이다. 그의 15주년 활동을 기념하기 위해서 미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브루나이 작가들의 능력을 알리기 위해서 2년마다 주어지는 유명한 미술 시상을 만들었다. 1997년 5월에는 홍콩은행사가 브루나이에 은행이 설립된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또 다른 시상식을 개최하였다. 우리들은 더 많은 기업이나 개인들이 이 나라의 미술을 격려하고 발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앞으로 나서기를 기원한다.

브루나이에는 정규적이고 전문적인 화가가 없다. 미술 대회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작가들은 일러스트레이터나 그래픽 디자이너, 정부의 전시 관계자들로 취직되어있는 사람들이다. 그중 몇 사람들은 학교나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거나 브루나이 대학에서 미술 교육을 가르친다. 또 다른 작가들은 지역 신문사나 여러 인쇄소 등의 사기업에 취직하고 있다. 많은 수의 브루나이 작가들은 회화, 조각 또는 그래픽 디자인 수료증, 졸업증이나 학위 등의 증명서를 받는 정식 미술 교육을 주로 영국에서 받았다. 처음으로 정부의 장학금으로 영국에서 미술 교육을 받는 몇몇의 학생들이 1965년에 영국으로 떠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부가 끝나면 귀국하여 미술을 가르치도록 교육학과에 소속되어있었다. 비록 1985년에 정부가 학생들을 미술공부를 하도록 보내는 것을 중단하였지만 몇몇 정부 부서는 계속해서 적당한 직원들을 해외에서 미술 공부를 하도록 내보냈다. 작가들은 정식적인 미술 교육을 받을 기회의 부족함에도 두려워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들의 동료들을 통해서나 자신들의 불굴의 노력으로 계속해서 미술 공부를 했다. 놀랍게도 그렇게 스스로 공부한 여러 작가들이 훌륭한 작품들을 제작하였고 미술대회에서도 시상하였다.

1997년 필립모리스사의 ASEAN 미술 시상식의 심사위원들이 말한 비평들 또한 브루나이의 미술 발전에 빛을 더했다. 작가이며 싱가폴 현대미술 협회의 회장인 Thomas Yeo가 ASEAN 지역의 가장 유명한 미술대회를 위한 브루나이 삼사위원들이 선택한 5개의 선발을 하는 중에 나온 말로 1997년 필립모리스사의 ASEAN 미술 시상식이 규정하기를 ‘2년 전 브루나이의 미술과 비교했을 때로부터 큰 도약이 있었다. 매우 발전하였다. 짧은 시일에 그 수준이 되었다니 매우 놀랐다. 예술은 2년이라는 시간에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공로는 브루나이의 미술에 종사하는 모든 분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래프의 곡선이 조금 올라가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도약은 볼 수 없었다. ’그가 계속 말하기를 ‘브루나이의 미술은 매우 어리다. 개념이 생기는데는 10년이 걸린다. 강한 브루나이의 미술을 가지려면 그 해답은 지금으로부터 30년 후이다. 브루나이는 아직 고유한 미술을 가지기에는 많이 어리다. ’ 현지 4명의 심사위원에 속하는 Awang bin Sitai사 덧붙이기를 ‘독창성은 매우 중요하다, 메시지의 독창성과 작품이 어떻게 창조되었는가도 중요하다. 우리들은 보다 적은 반복, 이미 존재하는 트랜드의 반복이 적은 작품을 찾고 있다. 모두 시도된 것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척도에서 행해졌다.’ 그가 계속 말하기를 ‘브루나이 미술의 특징은 술탄의 궁전인 Kampong Ayer, 모스크이지만 관광 예술과 갤러리에 전시되는 예술은 다른 것이다. 관광객들은 예술이 우리가 말하려고 하는 것과는 다른 가볍고, 말아서 가방에 넣어 가져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누군가가 새로운 경향을 창조하고 학파를 만들고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ASEAN에는 트랜드가 거의 없다. 세계적인 트랜드가 미래에 영향을 끼칠 것이고 시장을 조정하게 될 것이다.’

브루나이는 국립 미술 갤러리가 없지만 어른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도 미술은 매우 높은 인정을 받고있다. 때때로 청소년 문화체육부의 청소년 체육부가 어린이들을 위한 미술 대회를 개최하였다. 실제로 일본이나 다른 ASEAN 회원 국가들의 여러 어린아이들의 그림들이 브루나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예를 들어 1994년부터 홍콩 은행은 연간 아동 미술대회를 주최하는 등 다른 개인 단체들도 선례에 따랐다. 이렇듯 자라나는 어린 예술가들이 미술에 참여하도록 격려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들이 나중에 자라서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같은 국제적인 미술 대회나 전시에 브루나이를 대표하여 참가하는 작가들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국제적인 전시들의 수준에 맞추기 위해서 높은 수준의 작품들을 출전시켜야만 한다.

이 나라에서는 말레이계 브루나이 사람들이 서예를 높이 산다. 모든 가정에서 그것이 진품이던 복사한 작품이던 간에 서예가 벽을 장식하는 가장 주요한 예술품이다. 국외 거주자나 외교관들은 물의 마을이나 모스크 그리고 현지의 풍경화를 선호한다. 브루나이 박물관은 그림 497점 중 170점이 1965년부터 미술 전시를 통해 구입하고 나머지는 기증되었거나 제6회 ASEAN 청소년 그림 워크샵과 COCI프로그램 전시들을 통해 수집한 적당한 수의 작품들을 모았다.

부루나이의 작가들은 개인적인 개념이나 철학에 근거한 개인적인 스타일을 찾기 위해 점점 실험적으로 변화는 것도 좋지만 보다 인습적이고 전통적인 스타일의 작품들 또한 계속해서 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노력이 현존하는 미술시장의 수요를 충족시키는 것과 동시에 국립 미술 갤러리에 전시할 현지 작가들의 작품들을 모으는데 선행하기 위한 다양한 스타일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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