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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미술의 상황과 전망 ⑪-1

이영철

필리핀의 현대미술


1.

필리핀이라는 국명은 16세기 중엽 이 지역으로 파견된 스페인 탐험가가 당시의 스페인(에스파냐) 황태자 필립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7,000여 개의 섬으로 되어 있으나 사람이 정착해서 사는 섬은 880개 정도이다. 세계 일주에 나선 마젤란이 1521년 이 나라의 섬에 당도한 후 흩어져 있던 필리핀 원주민 사회가 에스파냐에 정복되었다. 당시의 원주민 사회는 다투(datu)라 불리는 우두머리와 그 가족, 자유민(평민), 예속민의 3계급으로 구성된 바랑가이(barangay: 부족)를 단위로 상호고립적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급 경제를 유지하고 원시적 에니미즘을 믿는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며, 통일이 되어 있지 않은데다 문화수준이 낙후되어 스페인의 정복은 아주 수월했다. 따라서 필리핀에 민족적 통일을 가져다준 것은 에스파냐와 미국의 식민지 지배체제였다. 따라서 토착문화 위에 에스파냐와 미국 문화의 영향이 깊이 뿌리박혀 특이한 복합문화가 성립되었다. 특히 도시인, 그 중에서도 엘리트층의 생활이나 행동양식은 분명히 서구적이다. 에스파냐 사람들이 전파한 로마가톨릭은 필리핀을 아시아에서 유일한 그리스도교 국가로 만들었다. 종파별로는 로마가톨릭 83%에 프로테스탄트와 여러 토착 종파를 합하면 전체 인구의 92%가 그리스도교도이다. 또 연중행사 등과 더불어 플라자(광장)의 교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도시의 생활관습은 그리스도교의 전통이 짙게 풍긴다. 1898년에는 E.아기날도를 수반으로 하여 독립이 선언되었고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공화국 헌법이 기초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미국-스페인전쟁에서 마닐라만(灣)의 에스파냐 함대를 격파한 미국이 1898년 맺어진 파리조약에 따라 필리핀을 할양받은 뒤 1902년 필리핀인들의 저항을 물리쳤기 때문에 이 공화국은 단명으로 끝났다.

새로운 지배자인 미국의 지배 방침도 필리핀혁명을 계기로 활성화하기 시작한 내셔널리즘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으며, 따라서 1907년에는 자치권이 부여되어 필리핀인들에 의한 입법의회가 구성되고 독립을 겨냥한 내셔널리스트당이 결성되었다. 이어서 1934년에는 필리핀 독립법이 미국의회를 통과하였고, 이듬해에는 M.L.케손을 대통령으로 하는 필리핀 연방정부가 1946년 독립을 목표로 발족하였다. 필리핀의 사회는 흔히 2계급 사회라 불린다. 이것은 사회 전체가 일부의 부유한 상류층과 농민, 근로자로 구성되는 하류층으로 나누어져 실질적으로 중간계층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빈부의 격차는 좀처럼 해소될 것 같지 않은데, 일부 부유층은 식민지 시대부터 외국인 지배자와 관계를 맺어 거액의 재산을 축적하였다. 필리핀은 아시아, 유럽, 멕시코, 미국 문화가 혼합되어 있는 곳이다.

19세기 후반의 데미안 도밍고는 필리핀 회화의 아버지로 불렸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초현실주의화 파가 나타났으며 주요 화가는 빈센트 마난 살라, 헤르난도 오캄포, 빅토르 에다데스 등이 있다. 1995년 사망한 요세요야는 추상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조각은 19세기 중반에 크게 발전하였으며 보나파치오 기념비로 유명한 갈레르모 톨렌티노(1890~1976)에 이르러 절정기를 맞이하였다. 현대 조각에서는 톨렌티노의 제자인 나롤레옹 아부에바가 유명하다.


2.

필리핀에서 모더니즘은 확립 당시의 반응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 따라가는데, 아직 필리핀 모더니즘의 명백한 성질은 모더니즘 현상의 일반적인 측면과 유사한 점 보다는 훨씬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모여 필리핀의 콘텍스트에 있어 모더니즘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를 내리는 것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데, 각 나라들마다 특정한 예술 상황에 따른 반응을 수반한 자신들만의 모더니즘이 일어난 이후 각 나라에 적합한 유럽의 모더니즘의 측면들을 취하고, 결국에는 유럽의 현상들을 적절하고 고유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추구해 나갔다. 당시에는 모더니즘은 중립적인 과정이 아니었지만 예술가들은 아카데미의 공식에서 허우적거리는 미술에서 자유로워지려는 열망에서 모더니즘은 매우 신선하고도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다. 물론 필리핀에서 그 진행과정은 나라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의 조건에 따라 형성되었고 필리핀의 문화와 전통에 의해 확정되었다.

기본적으로 모더니즘은 이미 확립된 규율에 반항하면서 이루어졌다. 필리핀에서 모더니즘은 몇 세기나 이어진 고전적인 전통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아카데미즘의 쇠퇴와 함께 일어나는 세가지 화파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었다. 유력한 아카데미가 된 아모르솔로(Amorsolo) 학교, 19세기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유럽 아카데미를 대리하는 아카데미아 드 디부조 이 피누라(Academia de Dibujo y Pinura)의 영향력, 엘리트들이 후원하는 초상 세밀화파가 바로 그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1920년대 말 필리핀에 모더니즘이 소개될 때, 2차원 평면에 안료를 사용하는 구상 회화의 관례는 백년이 훨씬 넘은 것이었다. 19세기 중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필리핀을 기독교화 시키려는 식민지 정책에 묶여있어 그림의 주제는 대부분 종교적인 것이 대부분이었다. 식민화와 더불어 소개된 아카데믹한 형태의 미술을 제외하면 의식이나 일상 용품과 관련된 토착 미술과 공예품을 만드는 얼마 안 되는 무리들이 널리 존재했다. 나무에 영혼의 이미지를 세긴 목판화, 말레이(Malay) 목판화의 초기 전통에서 나온 형태의 디자인과 장신구, 손뜨게, 바구니, 토기, 보석 등 다른 동남 아시아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전통들이 있었다. 식민지화는 전통 공예품을 악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불태워버리기 시작하여 외국의 민속품 콜렉션으로 겨우 살아남는 경우도 생겼고 회화와 조각이라는 고급 미술과 필리핀 토착민들의 생계 수단으로서 사람들이 흔히 부르는 토속 미술이나 민속 미술 간에 확실한 구분이 이루어졌다.


아모르솔로 학교
1920년대 아모르솔로 회화 학교는 교장인 페르난도 아모르솔로(Fernando Amorsolo)와 그 멤버들인 이리네오 미란다(Irineo Miranda), 도미나도르 카스타네다(Dominador Castaneda) 등과 더불어 학교의 우위 확보를 주장한다. 이들의 세력의 영향력은 30-40년대까지 이어졌고 그들의 작품은 회화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달력, 카드로 복제되고, 책의 삽화, 출판물, 광고에 사용 되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조각에서는 로마 아카데미에서 교육 받은 길레르모 톨렌티노(Guillermo Tolentino)가 있는데 그의 공공 조각과 동상에서 보이듯이 그는 고전 조각의 수호자였다. 필리핀의 모더니즘 미술가들이 지극히 반대했던 것은 온갖 회화 장르와 풍경화를 만들어냈던 이 학교들을 일컫는 것이다. 이들 학교의 그림 경향은 미국인 예술 애호가들, 식민지 관계자, 미국에 전시하려고 동방에 있는 새로운 식민지에서 이국정취를 찾으려는 관광객들의 기호에 맞춰진 것이었다. 아모르솔로는 아름다운 땅이라는 연작에서 그는 끊임없이 신비스럽게 모내기 하는 장면을 그려낸 것으로 매우 유명했는데, 푸른 논에서 힘들게 일하는 농부들의 모습은 망고 나무와 오두막, 산 등을 배경으로 하여 우아한 안무처럼 보였다. 배경의 낭만성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노동하는 인물을 금박으로 입히고 부드러운 톤을 내기 위해 금빛 태양 광선을 후면 바탕에 사용하는 기법을 사용한다. 또 아모르솔로가 상상력을 발휘한 그림 주제에는 주민들이 일요일 미사에 가는 수녀님들을 바라보는 것을 꽃이 만발한 나무에 둘러 쌓인 석조 교회를 배치시키는 것이 있다. 그리고 장미 빛의 젊은 여성과 남성이 추수해서 과일을 바구니에 담는 풍요를 상징하는 그림들도 있다. 의심 할 여지가 없이 이렇게 장려하게 그려진 그림들은 미술 시장을 고무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고, 주도적인 화가로서 아모르솔로가 이런 측면을 체계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이미지들은 동양의 신비감을 창출해내는 매력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미술 옹호자인 지주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완화시켜주고 식민지에 밝은 톤을 주었다.

필리핀에서는 모더니즘은 유럽 보자르 아카데미를 대리하는 것에 대항하는 반응이기도 했다. 아카데미아 드 디부조 이 피누라(Academia de Dibujo y Pinura)는 고전적인 아카데미즘의 이상을 전달하는 공식적인 조달자였다. 이 아카데미는 소시에아드 에코노미카 드 아미고스 드 패(Sociedad Economica de Amigos del Pais)의 관리하에 있었는데 스페인 미술 선생들과 이런 경향의 대표적인 모델을 제시하기 위해 유럽 회화의 복제품들을 수입해왔다. 아카데미의 작품들은 주로 어두운 단색조의 풍경과 분리되 보이는 장르와 성격에 대한 연구를 했다. 각각의 분류법을 형성한 것은 19세기의 엘리트들의 초상화나 일루스타라도(ilustrado)였는데, 이는 농산물의 국제적인 무역 시장에 개방과 함께 미증유의 새로운 상업 계급을 탄생시키면서 유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세밀화 스타일로 특징지울 수 있는데 사회적 기품을 나타내기 위한 수장식과 액세서리 등 의상의 세밀한 부분을 면밀하게 묘사하였다. 19세기의 미술 옹호자들은 당시 떠오르는 부르주아지의 야망과 가정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3.

필리핀에 모더니즘이 소개될 당시의 사회-역사적 전후관계에는 다른 관점들이 있었다. 유럽에서 모더니즘은 산업 혁명의 생기가 넘치는 정신을 반영하고 있다. 인상주의의 최초의 자극은 삶의 모든 분야에 있어 변화의 광경 특히, 새로운 기술에 대해 감탄으로 시작되었다. 예술 보호를 위한 교회나 당국의 예산이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이란 시장 원리에 따라 끊기게 된다. 유럽에서 모더니즘은 위험을 감수하고 모험 하는 정신을 특징으로 하며, 소재와 재원의 다양한 가능성을 열어두고, 인간과 세계에 대한 아인슈타인, 프로이드, 막스 등과 같은 새로운 이론을 고무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필리핀에서는 처음에는 스페인의 식민지였고 다음에는 미국의 보호를 받았다. 자본이 경제에 투입되고 도시화가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발의 속도는 더 느려졌고 당시 나라의 대부분이 봉건주의의 진창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모더니즘의 차용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는 관계를 나타낸 시각 미술에서 시골 풍경을 고집했던 것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유럽의 산업 혁명 때처럼 사회의 변화 속에 전통과 모더니즘 사이에 급진적인 파괴는 없었다. 대신에 모더니즘은 재능있는 작가들에게 아모르솔로 학교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아카데미의 명성을 저하시키는 예술 실험을 하도록 격려해주었다. 파리 화파처럼 전세계적인 성격이 부족한 필리핀의 모더니즘은 낭만적이면서도 전통을 존중하는 특정한 지역, 일반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감성으로 걸러졌다. 사실 파리 스타일이나 유럽의 근대 회화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었기에 마닐라의 공공 미술에 이런 것을 들여올 기회가 없었다. 어쨌든 에다드(Edades)가 등장하기 전까지 모더니즘 미술을 알던 극소수의 필리핀 망명자들이 있기는 했다. 19세기 말 화가인 후안 루나(Juan Luna)는 호세 리잘(Jos Lizal)과의 서신에서 인상주의 전시회에 다녀온 것을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1874년에 열린 모네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unrise)'를 포함한 인상파의 첫 전시 이후 였다. 비록 1884년에 마드리드 전시회에서 금메달을 딴 스포리아리움(Spoliarium)과 같은 그의 주요 작품들은 유럽 아카데미 양식을 보이는 것이었지만, 그가 유럽에 있을 때 그린 비공식적인 회화에서는 임의의 공간과 사물에 비친 빛의 효과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는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제작했다. 이런 영향은 당시 필리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했으며 후안 루나가 필리핀에서 제작했던 마지막 작품인 킨의 초상화는 장식적이면서도 보수적인 양식을 띠었다. 또 다른 필리핀 작가인 후안 아렐라노(Juan Arellano)는 20세기 초반 유럽에 있는 건축학교 학생이었는데 인상주의와 대담한 색상을 보여주는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그림들을 그렸다. 어쨌거나 그는 매우 개인주의적이었고 필리핀 미술계에 영향을 행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4.

빅토리오 에다드(Victorio Edades)는 1928년 필리핀 콜롬비안 클럽에서 개인전을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 화가로서 선생님으로서 에다스는 필리핀 예술가들을 향해 모더니즘 메시지를 용감하게 들고 나왔다. 그는 유럽의 모더니즘 운동과 필리핀 미술 간의 중개 역할을 자청했고 아모르솔로 학교의 목가적인 이미지들 속에 침잠하기 시작했다. 사실 에다드가 모더니즘에 노출되어있었던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 자신은 모던 미국 예술 아카데미에서 공부했고 파리 화파 작품들에 노출되었던 작품들은 주로 아모리 쇼의 순회로서 한정되어 있었다. 그가 실재로 경험했던 것에 한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더니즘과의 조우는 그의 입장에서는 매우 열정적인 것이었으며, 이 조우는 그의 예술 직업을 바꾼 것 뿐만 아니라 수 십년 동안 필리핀 미술 전개 과정 전체를 바꿔놓았다. 모더니즘 미술을 위한 에다드의 캠페인은 주로 그가 출판을 위해 글을 썼던 주제에 관한 몇 가지 기사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그는 여기서 적대적인 아카데미와 아모르솔로 학교의 지지자들에 대해 논의하기에 앞서 모더니즘 미술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더니즘 미술의 기본적인 이론에서 떨어져 나와 차분하게 설명을 하는데 시각적인 도움을 주는 칼라 삽화가 들어있는 모더니즘에 관한 책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론과 실재를 이어주는 한 가지 중요한 활동이 있는데 회화, 건축, 디자인 분야에 있어 가장 장래가 촉망 받는 세 명의 작가들과 협동으로 작업한 것인데 에다드가 열심히던 캠페인은 진보적인 분야의 미술 보호자의 관심과 주의를 끌어 극장 로비와 거주지를 꾸미는데 임명되었다. 에다드는 이것을 자신의 그룹을 형성할 기회라는 것을 이해하고 트리움비레트(Triumvirate)라는 자신을 포함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Carlos Francisco), 갈로 B. 오캄포(Galo B. Ocampo) 세 사람으로 구성된 그룹을 결성하는데 이 그룹은 필리핀 모더니즘 운동의 중심이 된다. 이들이 공동으로 작업한 벽화와 장식적인 디자인은 보통 열대 식물을 배경과 대조하여 아르 누보에서 영감을 얻은 부드러운 곡선이 춤추는듯 한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필리핀 작가들은 모더니즘을 임시변통으로 만들어냈어야 하기 때문에 본래의 모더니즘 어법을 창조하는데 있어 파리 화파 스타일에는 근접하지도 못했다. 에다드는 그의 캠페인을 필리핀의 특정한 예술과 문화 이슈들과 맞물리게 하였다. 일반적인 보수적인 외양과 관계된 고전적 이상의 강한 영향력을 인지하면서 그는 곧바로 고전주의와 아카데미 미술을 구분했다. 그는 모더니즘이 고전 미술의 걸작들의 가치를 평가절하 한 것이 아니라 형태의 기계적인 반복을 일삼는 아카데미즘을 버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이런 입장은 다빈치, 라파엘, 미켈란젤로와 같은 르네상스 거장의 작품을 예로 들어 도시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는데 성공한다. 그는 아모르솔로를 유능한 작가라고 생각했으나 새로운 어법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필리핀 미술을 새롭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국가의 정체성을 찾는데 있어 모더니즘이 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해 정의 내린 것도 역시 에다드였다. 모더니즘 프로젝트는 서구 모델을 따라 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새로운 예술을 풍부히 하기 위해 토착적인 예술 원천을 추구하는 양식 실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에다드는 모더니즘 어법을 가지고 예술에 있어 국가 정체성을 개발시킨 멕시코를 그 예로 지적했다. 사실 토착 문화에 대한 테마는 고갱의 육체의 순수함(Gold of their bodies)을 축하하는 타이티 그림과 예식과 종교의 사회적 맥락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다. 에다드는 고갱식 스타일을 보여주는 평면적으로 이고로(Igorot) 여인 두 명을 그린 작은 크기의 그림을 제작했다. 모더니즘이 물론 유럽에서 기인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본의 목판화가 인상주의에 영향을 끼치고 아프리카 가면이 입체파에 영향을 끼쳤듯이 비 서구적인 문화에 대한 인정과 이해가 수반된 것이었다.


5.

보수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에서 몇 가지 논쟁점들이 있는데, 이 논쟁점들은 언론에 대담 형식으로 몇 차례 실려 널리 퍼졌다. 떠오르는 세력에 대해 문제를 삼은 것은 화가인 아모르솔로 보다는 조각가인 길레르모 톨렌티노였다. 그는 고전적인 미, 조화, 비례의 규칙을 옹호하며 아카데미의 맥락 안에서 예술이란 인간의 저항과 투쟁을 넘어선 전우주적이며 시간을 초월한것이며, 현재 삶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의 우주적이며 불변의 사상의 영원한 이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술이란 특권의 실행이자 몇몇 선택 받은 소수의 영역 안에 머무르는 것이다. 그리고 아모르솔로에게 있어 예술이란 모든 영원을 위해 과거를 얼려버린 신비스런 낭만적인 노스탈지아라고 할 수 있다.

미에 대한 고전적인 개념에 반대해 에다드는 끔찍하고 못생긴 것들이 미의 고전적 개념의 자리를 빼앗은 형태의 모더니즘 표현방식에 대해 단언하였다. 톨렌티노는 예술에 반대되는 것으로 간주한 추한 것을 사용 하는 것에 강하게 반대하였다. 그는 이 논쟁에서 민속 신앙을 끌어들여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들을 임산부에게는 보여주면 기형아를 출산 할 위험이 있으므로 보여주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다드 역시 예술에 있어 예술 언어가 독특한 디자인이 우위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며 대중에게 있어 예술은 그들의 기대와 가치를 견고히 하고 현상을 유지하는 기쁨을 줄 수 있는 주제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정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에다드는 모더니즘의 개념에 대해 충분히 그 일반적인 개념들을 이해했다. 그는 논설에서 모더니즘을 위한 논쟁을 벌여 대중의 이해도를 늘리면서 모더니즘을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기를 원했다. 아직 고전주의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변화의 기초가 되는 기본적인 이슈들은 아직 충분하게 문제시 되지는 못했다. 보수주의에 대한 최초의 반항을 극복해내면서 모더니즘은 자연스럽고 아무런 문제 없이 뿌리를 내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리 화파의 영향을 받은 양식의 변화보다는 이런 변화를 가져온 생각에 대한 강조를 주로 하였다. 따라서 예술적 지적/ 이념적 문제와 지속적으로 분투하는 것으로서 예술을 인지하는 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이것은 모더니즘의 지적인 물음의 역동적인 역할이 생략되었는데 예술의 창조는 본래 형태를 추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미술 이론의 확장을 수반한 것이었고 그는 용감하게 새로운 지평선을 만들어 나갔다. 예술 연습, 아카데미 형식에서 자유로워짐은 모더니즘에 의해 가능했으며 이는 다시 일반적이면서도 독특한 태도라는 양쪽 이론에 지속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모든 면에서 모더니즘의 기본적인 개념이 지역적으로 받아들여졌기에 유럽에서 필리핀으로 쉽게 유입 될 수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이와 같이 사회 역사적 조건의 중요한 차이점이 겉을 꾸미고 있었기에 다른 나라의 모더니즘 미술의 표시에 명백하고 과대하게 확정 지었다. 서구 모델에 따라 미술을 만들면서 천진난만하면서도 유쾌한 모험을 동반한 이런 특정한 결함은 복잡성과 역사에 대해 명상해야하는 중요성, 이 과정에 있어 기본이 되어야하는 물질적인 조건에 대한 의식없이 이루어졌다. 지역 작가들은 이런 경향의 작품들을 제작하여 이것을 통해 주류에 합류하려는 신드롬을 일으켰고, 종속적이긴 했으나 자신들을 파리와 뉴욕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하며 주류에 낄려고 애를 쓴다. 경제적인 힘의 논리에 의한 관계를 반영할 때, 주변부의 작가들은 인정과 명성을 얻을 기회가 풍부한 세계적인 예술 중심지에 매력을 느꼈다. 이런 경향은 서구의 상업주의에 기초한 문화적, 예술적 지배로 이어졌으며, 아시아에 있어 주변부라는 인식으로 인해 경제적, 정치적인 범위에서 이런 지배가 다시 이루어졌으며 현대 자유주의 운동에서 극복하려는 점도 바로 이것이다.

보수주의와 모더니즘 사이에서 일어난 논쟁의 분파는 화가와 문인들 사이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징적인 교환은 예술에 대한 첫번째 비평과 심각한 글쓰기로 이어졌는데 특히 시각 예술에 있어 그랬다. 특히 호세 리잘(Jos Rizal)의 루나(Luna)와 히달고(Hidalgo)가 상을 탔던 1884년 마드리드 전시회에 관한 그의 의견은 예술 담론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작가들의 참여는 지금까지 아카데미즘에 의해 질식되어있던 예술에서 좀 더 자유로운 이론의 도입과 논의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 모더니즘 시에 있어 최고봉을 이루는 호세 카르시아 빌라(Jos Gracia Villa)는 시각 예술에도 모더니즘의 잣대를 사용하였다. 그는 에다드의 기본적인 형태를 넘어서 예술의 형식주의를 주장했다. 말 할 필요도 없이 생생한 지적 교환으로 인한 대소동은 모더니즘 예술에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논쟁에의해 고무된 다수의 협력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경향
세계 제 2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필리핀의 모더니즘의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장래가 유망한 청년 작가들은 아모르솔로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중에 모더니즘이 가장 매력적인 것임을 발견했다. 에다드-갈로 오캄포-카를로스 프랑시스코의 트리움비레트(Triumvirate)는 비센트 마난살라(Vicent Manasala), 세자르 레가스피(Cesar Legaspi), 로메오 V. 타뷰에나(Romeo V. Tabuena), 안티아 마그세이세이호(Antia Magsaysay-ho), 헤르난도 R. 오캄포(Hernando R. Ocampo), 푸루그간난(Purugganan) 등을 포함한 13인의 현대인(Thirteen Moderns)으로 확장되었다. 30년대에 들어서야 모더니즘의 어법에 대한 추구를 이루어냈다. 모더니즘의 본래 운동이던 트리움비레트라는 단체가 필리핀 미술에 있어 가장 전조가 좋았다고 증명되었다. 아카데미의 보수주의에 맞선 모더니즘에 대한 믿음은 세 명의 전사들로 하여금 붓과 펜을 들어 모더니즘 계열의 예술 발전을 고취시키도록 하였다. 1934년 세 명이서 시극장과 카피톨의 로비에 작업했던 초기의 상호작용을 보여주는 벽화작업은 공화국 시절의 국수주의적 주제와 동맹한 새로운 예술 강령에 기인한 표현이었다.

모더니즘의 선두를 달리던 카를로스 프란시스코와 같은 작가는 리잘 지방에 있는 고향인 앙고노의 풀뿌리와 그의 작품을 연관시킨 적이 없다. 그러나 민속의 삶의 방식에서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필리핀 모더니즘에 있어 가장 적절한 방향으로 개발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모더니즘과 필리핀 토착의 미학의 종합을 이루어내는 그만의 독특한 통찰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의 작품에서 모더니즘은 토착화되었고 지역의 맥락 속으로 뿌리를 틀었다. 선적인 관점을 사용하기 보다는 다양한 요소들을 사용 시각 범위를 모두 다루는 민족적 취미에 알맞은 공간 구성을 사용하였다. 양감의 착시 효과를 주기위해 틀을 만들기보다는 모양을 납작하게 하고, 곡선의 디자인과 리듬감을 풍부하게하고, 밝고, 생생한 색들을 캔버스에 얇게 펴 발랐다. 이런 점은 평면의 회화라는 2차원의 캔버스, 색상의 강조 그리고 좀 더 중요하게는 현실의 일루젼을 창출하려는 전통적인 회화의 노력에 대한 반대와 예술의 창조는 작가의 구성과 발명이라는 것을 다시 깨달은 모더니즘의 주장과 일치하였다. 이런 것들이 전달하는 사회 가치는 물론 그들의 일과 의식이란 민속적인 것에서 주제를 차용했던 것은 그에게는 아주 잘 맞는 형태였다. 물물교환 할 때 무리의 사람들의 상호작용, 축제를 즐기고, 공통으로 저항 할 때 단결되는 필리핀 사람들의 모습에서 그는 공동체적 삶에 대한 감각을 얻었다. 앙고노에 있는 카를로스 프란시스코의 작업실은 유망한 젊은 작가들에게 그 문이 열려있었는데 곧 융성한 학교의 중심이 되었고 그의 사후에도 그는 역시 앙고노에서 작업하던 호세 블랑코처럼 라구나 레이크쇼어(Laguna Lakeshore) 지방에서 민속 장르를 그리는 지역 작가의 모델이 되었다. 이 외에도 타네이(Tanay)의 탐 오스트리아(Tam Austria), 네그로스(Negros)와 세부(Cebu)처럼 전국의 각 지방에서 활동하는 작가들과 미술 그룹이 생겨났다.


전쟁 이후 주요 이슈와 경향
제2차 세계 대전을 맞으면서 미국의 필리핀 독립을 인정하려는 문화적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작가들과 미술가들은 필리핀 문화와 예술의 외형을 정의내리고 날카롭게 하는 것을 그들의 과업이라고 생각했다. 독립에 대한 논의는 후기 식민주의 담론에 의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하지만 후기 신민주의라는 최근 용어는 이전의 식민지 관계를 표면적으로는 내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재로는 좀더 교활하게 경제, 정치, 문화 영역에 대한 비밀스러운 지배 형태를 띠는 신 식민주의 현실의 연막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이다.

전쟁 이후 국수주의의 등장은 미국의 간섭에 대해 필리핀 사람들의 영구적으로 보호를 받고자하는 상태에 이르게 될 것을 경계하는 우려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식민지 경험에 대한 관계에 있어 필리핀의 국수주의는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어쨌거나 마르코스 통치 기간동안 국수주의는 사람들을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정신과 문화적 전통으로 묶어주는 가장 알맞은 권위라고 여겨졌다. 같은 시기에 국수주의와 반제국주의가 결합된 대중적인 반대 운동이 일어났다.

정식으로 독립인 인정되면서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에 의해 문화 정체성에 대한 추구가 필리핀 문화의 특정한 측면에서 나타나게 된다. 토착 문화와 비히스페닉 문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일어났다. 민다나오(Mindanao)의 필리핀계 회교도의 오키르(okir) 디자인이 산맥(Cordillera)과 다른 그룹의 예술 표현으로 각광 받게 된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런 예술들은 오랜 세월 동안 논외로 치부되었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절 이런 것들은 이교도의 작업으로 치부되어 파괴되었으며 미국 식민지 시절에는 학자들이 인류학적, 민족학적인 관심에 대한 이국적인 것에 대한 추구로서 동양학 아카데미 규칙에 결합되었다.

지식인들은 토착 필리핀 사람들의 전통적인 생활과 토착 문화의 바탕에서 문화 정체성의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 어떤 과도하게 열정적인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필리핀 사람들이 다시 회복해야하는 진정한 정체성이라고 주장한다. 아직 이런 정체성에 대한 정적인 정의에는 정치적 과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또 사람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은 반항과 긍정이라는 이중의 움직임에 의해 지속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란 사실을 무시하고 있다.

어떤 이들 중에는 스페인 식민지 유산의 표면이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엘리트적 관점에서 보면 식민주의는 백인들이 문명화의 임무를 띠고 기독교를 들여온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카톨릭이 필리핀에 전파되면서 민속 신앙과 의식이 풍부하게 결합되었다. 그리고 카톨릭의 믿음이란 것은 순수하고 이타주의적인 신앙을 널리 전파한다기 보다는 신의 섭리로 식민지 압제를 좀 더 쉽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데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들에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개념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초기 영향에 의해 누적된 부스러진 바위에서 발굴해낸 고고학적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주로 형이상학적이며 역사적인 정수로 간주되었다. 또한 그것은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영감을 얻고 교화되는 이음새가 없는 온전한 전체로 여겨졌다. 국가 정체성에 대한 이런 개념과 국가적인 문화에 대한 개념은 물론 피할 수 없이 논쟁과 불화를 일으켰고 동질한 정체성에 대한 신화는 관심에 대한 지배적인 도구로 사용되었다.

전쟁 이후 모더니즘을 위한 투쟁이란 문화 문제에 대응하여 더욱 강렬한 열기로 다시 전개 되었다. 유럽중심주의로 닫혀진 아카데미를 부수고 들어간 파리 화파의 모더니즘은 필리핀과 같은 아시아 국가권에서 모더니즘을 유효하게 만들어주는 비유럽적 기질을 전면으로 내세웠으며 아프리카, 일본, 중국, 남태평양과 같은 비유럽 문화와 유럽 문화 사이의 풍부한 상호작용에서 모더니즘이 태어날 수 있는 산실을 제공하였다. 서유럽에서 태어난 모더니즘은 샤갈, 러시아 발레와 같은 동유럽의 공조와 이베리아 반도의 고대 로마 문화로 더욱 풍부해졌다. 예술은 토기, 가면, 토템 등을 포함한 매우 다양한 매개를 접합 시키면서 점차적으로 확장되었다.


전쟁이후 주요 모더니스트들
에다드가 영감을 받았던 모더니즘에 대한 투쟁은 본래 트리움비레트와 13인의 현대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카를로스 프란시스코는 몇몇 벽화작업을 통해 확정적으로 모더니즘 작품을 선보였다. 그의 첫 번째 중요한 벽화는 1953년 마닐라에서 열린 국제 박람회를 위한 작업이었다. '필리핀 500년 역사'라는 주제였는데 벽 전체에 전설에서 유래한 필리핀의 첫 남성과 여성인 말라카(Malakas)와 마간다(Maganda)가 대나무에서 나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현대 정책가인 키리노(Quirino) 대통령까지 그려넣었다. 카를로스 프란시스코의 불후의 명작은 마닐라 시청을 위해 그린 벽화 작업이다. 벽화는 필리핀의 역사 자체였는데 톤도(Tondo)의 위대한 라자스(Rajahs)를 시작으로하여, 스페인 식민지 시대, 발라가타스(Balagtas), 리잘(Rizal), 1896년의 혁명, 미국 점령 시기까지 나라의 역사 전체를 그려내었다. 그의 작업은 여러 개의 역사적 장면들을 그리는데 중심되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나머지 이야기들은 그 주위에 작은 크기로 그려나갔다. 각각의 이야기들은 정적이기보다는 구불구불한 강을 서로 이어주며, 불꽃이 분리되고, 구름이 나선형으로 감기는 것처럼 서로에 영향을 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벽화는 예술적인 원기와 지칠 줄 모르는 창조력으로 역사적인 인물들을 생생하게 되살리고, 그 모두를 통합시켜 모더니즘 디자인에 대한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었다.

트리움비레트의 세 번째 멤버인 갈로 B. 오캄포 역시 필리핀의 모더니즘 어법을 창조해냈다. 50년대 작가를 사로잡았던 것은 전쟁에 대한 주제였다. 그의 자신을 채찍질하는 사람(Flagellant)이란 연작에서 예수의 열정에 대한 이미지는 초현실주의 기법을 동원하여 전쟁의 이미지로 다시 차용되었다. 한 작품에서는 하늘에서 전투기가 날라다니고 예수가 가시면류관을 쓰고 플라젤란트의 덮개를 입고는 팔이 묶여 서있는 그림이 있다. 다른 작품에서는 신자가 쓰러져 바닥에 십자가 형태로 팔을 그렸고 모래에는 전투기들의 그림자가 반영되어 있다. 이런 그림들은 밤색 톤이 주를 이루는데 황량한 땅과 전쟁의 파편들이 흩어진 감정을 일으킨다. 하지만 갈로 B. 오캄포는1973년에야 비로서 59세의 나이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회를 위해 새로운 연작들을 제작했는데 필리핀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인간 화석 타본 인간에 경의를 표하는 작품이었다. 팔라완(Palawan)의 들판에서 작업은 아담과 이브가 고대 석순에서부터 자라 신비스런 동굴의 변하지않는 색채를 반영한 초기 필리핀의 이미지를 그리도록 영감을 주었다.

빈센트 마난살라, 세자르 레가스피, 로메오 타뷰에나 와 같은 선도적인 작가들은 전쟁 이후에나 파리에 있는 예술 학교에 잠깐동안 수학했다. 마난살라 같은 경우 캐나다에 있는 몬트리올 에꼴 데 보자르와 미국, 페르낭 레제 밑에서 잠깐 수학했던 프랑스에서 교육을 좀더 받았다.

아모르솔로의 목가적인 농촌 풍경을 피하면서 마난살라는 전쟁 이후 도시 현실에 기반을 둔 새로운 그림을 개발해낸다. 그는 1950년대 강력하게 등장하는데 빈민가의 마돈나(Madonna of the Slums)와 지프네(jeepneys) 등을 그린다. 마닐라시에서는 작가들의 시각을 통해 길거리 상인들과 민속 문화의 상징들을 지닌 키아포(Quiapo) 신자들의 강한 민속적인 색상을 만들어내었다. 어머니와 아이를 그린 회화이외에도 그는 지프네이, 바롱-바롱, 수탉 싸움, 검소한 식사에 모인 가족들, 양초, 뼈, 음식 등을 파는 키아포 행상 여인 등을 포함한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그가 그린 여자 상인들은 베일로 가리고 그들의 상품에 가려 앉아있는 모습으로 그렸는데, 그들의 밤색빛 수동적인 얼굴은 토착민 뷰롤(bulol)이나 코르딜레라 수문장의 모습과 같았고, 커다란 맨발은 치마의 가장자리에서 삐죽튀어나왔다.
마난살라가 큐비즘을 토착화 시키고 그의 동료들인 신리얼리즘 작가들인 세자르 레가스피와 로메오 타뷰에나와 공동으로 나누었던 투명한 큐비즘의 양식을 개발했다라고 말 할 수 있다. 마난살라의 작품들은 큐비즘적인 입장에서 보면 사물의 면들이 기하학적인 형태를 띠면서 평면이 변환되고 겹쳐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은 원래 큐비즘 양식보다도 사물의 면과 평면이 넓어지며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다. 그는 창문이나 문의 선형의 철장식과 같은 선의 장식적인 패턴을 사용하였다. 제멋대로인 파편들이 형태를 복잡한 추상 요소로 절개하는 분석적인 큐비즘과는 달리 마난살라는 기본적인 기하학적 모양으로 단순화 시켜 형태를 유지한다.
구성에 있어서 그의 작업은 관점의 선을 나타내기는 하지만 깊이감은 선과 평면이 창출해내는 공간의 모호성으로 인해 동시에 거부당하고 있다.

마난살라의 작품 주제에 있어 도시에 대한 전망과 필리핀 사람들에 대한 접근 방식은 도시라는 맥락 속에 민속적인 주제를 담아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마난살라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 중에 마우로 말랑 산토스(Mauro Malang Santos)와 같은 작가는 그림에서 자기만의 민속적인 낭만주의 버전을 만들어냈는데 나약함을 수반하며 50년대의 임시 변통적인 특성을 보여준다. 마난살라가 한때 가르쳤던 산토 토마스(Santo Tomas)대학을 졸업한 안토니오 오스트리아(Antonio Austria), 안젤리토 안토니오(Angelito Antonio), 마리오 파리알(Mario Parial), 파에트(Paete) 출신인 마뉴엘 발드모어(Manuel Baldemor) 등도 그런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세자르 레가스피 역시 1953년에서 1954년 마드리드에 있는 히스패닉 문화 학생으로 공부를 했는데 뒤이어 파리에 있는 랑송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레가스피는 분석적 큐비즘의 엄격한 지적 접근 방식에서 좀더 조화로운 종합적 큐비즘으로 경향이 바뀌었다. 그의 작품에는 형태 면들이 더욱 넓은 평면들과 겹쳐지고 공간 속에서 잘려 선의 리듬감이 살아나며 투명하게 비춰지는 색과 색조의 조화로운 구성을 일궈낸다. 당시 레가스피의 초기 그림들은 전쟁을 전후한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일명 거지들이라고도 명명된 남성과 여성(Man and Woman)은 1945년 그려졌는데 뒤틀린 표현주의 어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거적을 둘러싼 연인이 뼈대만 있는 빌딩 사이로 쉴 곳을 찾는 그림인데 초현실주의 조각을 연상시킨다. 기계장치(Gadget)는 전쟁 이후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을 기계로 변환시키는 위협적인 삶 속에 기계가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 반영하고 있다.

60년대 중반 후기 작품에서는 원래 스타일인 각이진 그의 큐비즘의 언어는 콘트라스트가 강한 평면에서 선형의 리듬감 넘치는 선들로 뚜렷하게 변화되었다. 1974년 이후 레가스피의 그림들은 더욱 색체가 강해지고 빛이 투명하게 비춰져 프리즘 효과를 내었다. 형태들은 역동적인 행위에 의해 공간을 가로질렀다. 빛은 색과 형을 강화 시키고 그것들은 투명한 공간 속에서 비물질화되고 용해되어 공간 속에 공명을 만들어냈다.

70년대와 80년대에는 생존자(The Survivor)와 같이 전 인류적인 주제를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 대형 캔버스에 인간의 포부, 투쟁, 승리의 용솟음치고 팽팽한 운동감을 역동적으로 그렸다. 인간의 모습은 매우 잘 조직된 근육과 구조를 가져 표현의 풍부한 견인차 역할을 하는데 거기에는 기관의 형태와 기하학적 구조, 투명함, 단단함 사이에서 일어나는 유연하면서도 무자비한 긴장감이 돈다. 1976년에는 나무 판넬을 겹쳐 놓고 그 위에다 그림을 그려 공간 운동에 있어 일루젼 효과를 주는 실재 깊이감과 그림자 효과를 낸다.

자기 혼자 그림을 독학한 에르난도 R. 오캄포는 13인의 현대인의 멤버이자 신리얼리즘 계열의 작가였다. 모더니즘의 의미심장한 콘택스트에서 진정한 필리핀 추상화를 창조해내는데 파리 화파와의 관계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모더니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프롤레타리아 시기와 부합되는데 이것은 30년대에 공황기에 미국에서 논쟁이 되었던 프롤레타리아 예술과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영한다. 그의 그림들은 당시 경직된 현실과 사회 계층간의 격차를 보여주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극도로 양식화 되었는데 디자인, 색, 질감을 우선 고려한 추상적인 경향의 작품을 제작한다.

추상화 경향으로 옮아가는 60년대 작품들은 대개 돌연변이 시기에 속하는데 이것은 핵폭발로 인한 이상한 물질들이 터져 나오는 공상과학 팬타지에서 기인한다. 시각적 멜로디 시기에는 유기적인 모양의 추상 디자인에 색조를 다시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좀더 풍부한 추상 형태를 만들어낸다. 이런 양식을 대표하는 것으로는 창조(Genesis)라는 필리핀 문화 센터 극장을 위해 제작한 타피스트리를 들 수 있다. 이 작품의 주요 모티브는 붉고 노란 요소들의 무늬가 주변을 감싸고 있으며 진동하는 그림자들을 반영하는 밝은 불꽃이다.

전쟁 이후 예술의 중심지가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간다. 미국은 가장 피해도 적고 전쟁에서 가장 이득을 많이 본 나라였고 새로운 초강대국으로 떠오른다. 따라서 예술의 국제적인 중개자로서의 역할도 요구되었다. 이런 점은 전에 미국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게 있어서는 특히 명백한 것이었다.
공황기에 미연방 예술 프로젝트에서는 광범위하게 예술을 지원했는데 잭슨 폴록, 프란츠 클라인과 같은 추상표현주의 뉴욕 화파 작가들은 벤 샨(Ben Shahn)과 랄프 소이여(Ralph Soyer)와 같은 지역주의자와 사회 리얼리스트들의 지지를 받았다. 냉전시기와 매카시즘에서 나온 미학은 사회상을 반영하지 않는 직접적인 표현과 움직이는 미술을 촉진시킨다. 이런 미국식의 패셔너블한 모더니즘이 50년대 미술계를 지배한다. 이와는 또 다르게 평행을 달리는 것으로 요셉 알버스와 같은 기하학 추상화가와 형식주의 회화의 한스 호프만이 전쟁 이후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었다.

미국의 컨택스트안에서는 모더니즘 예술은 예술의 진정한 자율성과 형식주의로 확장되었다. 예술은 순수하고 자율적인 영역에 머무르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정치로부터 보호 받아야 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힘이 넘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은 근래 전쟁에 의해 고삐가 풀렸고 예술에 있어 이를 테면 판도라의 상자를 담고있는 위험한 죄의식과 회의적인 물음들은 멀리해야 했다. 초강대국의 사전에는 이런 것들이 낄 자리가 없었다.

미국은 문화 중개자이자 선생으로서 예전의 식민지였던 필리핀에서 그 역할을 유지하려고 했다. 그 역할을 맡기에 이보다 더 순조로운 때는 없었다. 전쟁 이후 50년대에 필리핀을 자유화시킨 미국의 신화는 특히 필리핀 사람들에게 제국주의자들의 의도를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그 예로 미국은 교육의 매게체로 영어를 쓰도록 공립 학교 시스템을 만들었던 것을 잃고 싶어하지 않았다. 따라서 미국에 있는 대학들에서 좀더 높은 학위를 받고자 하는 뛰어난 학생들을 끌기위해 후기학사학위(pos-baccalaureate) 제도를 만들었다. 시각 예술 분야의 주요 학교들은 미시간에 있는 크랜브룩 예술 아카데미(Cranbrook Academy of Art)와 뉴욕에 있는 프랫 그래픽 아트 센터(Pratt Graphic Art Center)이다.

필리핀 모더니즘의 두 번째 단계는 크랜브룩 출신인 호세 조이야(Jos Joya)와 예일대 출신인 콘스탄시오 베르나도(Constancio Bernardo)가 귀국하면서 시작되었는데, 그들은 곧바로 필리핀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모더니즘의 첫 그룹인 티르움비레트나 13인의 현대인 모두 파리 화파 영향을 받은 에다드의 영향 아래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종류의 미술은 당시 미국의 예술에서 영향을 받아 일어났으며, 주로 추상 표현주의와 행위 페인팅의 영향과 적게는 옵티칼 인식에 대한 바우하우스 연구로 돌아간 기학학 추상의 영향을 받았다. 50년대 말에 조이야는 동적 충동으로 가득찬 행위 페인팅 경향의 작업을 한다. 뚜렷하게 폴록의 영향을 받은 그의 작품들은 어쨌거나 구성에 있어서는 차이점을 보이는데 폴록한테서 보이는 물감 뿌리기보다는 중심을 벗어난 비대칭적인 특징을 지녔다. 조아야에게서 나타나는 비대칭적인 특징은 단에서 나타나는 공간을 기로 가득 채운 전통적인 아시아 미학에 대한 고려를 반영하고있다. 초기의 모노크롬 작업을 제외하고 또 다른 차이점이 있다면 쾌락적인 색상의 사용을 들 수 있는데 색은 그저 자연스럽거나 객관적인 미디움이 아니라 주관적이며 기쁨과 감정을 나타내고있다. 뉴욕 화단의 영향을 받으면 받을수록 그의 추상화들은 색과 형의 미묘한 조화를 이루었으며 동적인 행위는 점점 더 조용해지고 둥근 형태들이 뒤엉켜있었고 아크릴이나 유화를 사용하던, 닭종이든 콜라쥬던 자연에 대한 희미한 암시를 담고있었다.

또 다른 추상화가인 콘스탄시오 베르나르도는 1952년 예일 미술 대학에서 공부를 마쳤다. 그의 경우 미국 미술에 지배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요셉 알버트나 한스 호프만처럼 유럽에서건너 온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기하학과 색을 조합한 앨버스의 스타일을 반복하였다. 베르나르도의 그림이 아무리 기술적으로 완벽할지라도 자기만의 것을 만들기 보다는 서로 다른 문화적인 콘텍스트를 우선으로 해서 그들의 지적, 이념적인 뒷받침 되었다. 베르나르도는 리 아귀날도(Lee Aguinaldo), 알란 코지오(Allan Cosio), 임피이 필라필(Impy Pilapil)와 같은 추상화 계열 작가들에게 직접,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

5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아방가르드 예술이 뚜렷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화가이자, 조각가이자, 시인이었던 앙팡 테리블 다비드 코르테즈 메달라(David Cortez Medalla)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예술 개발에 있어 유럽 중에서도 프랑스의 영향을 특히 많이 받은 그는 실험적인 키네틱 예술의 선구자가 되었으며 전통적인 아카데미 기준에 반대하는 행위 예술을 벌인다. 그는 즉흥적이면서도 비이성적인 방식으로 주제로 초상화들을 해체시키고 평면 회화의 2차원에 양감을 주려는 스트레스에 벗어났다. 그의 몇몇 작품에서는 원시적인인 요소와 어린이 미술의 요소, 다다이즘과 아트 브뤼(Art Brut)의 영향을 뚜렷하게 보여줌과 동시에 고급 미술의 진지함을 조롱하고 놀이의 요소를 회복시킨다. 스크래칭 기법에서 보이는 아트 브뤼의 영향은 불규칙적인 외곽선과 얼룩덜룩한 질감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가 해외에 알려진 것은 거품을 내뿜는 기계와 같은 키네틱 조각으로였다.

메달라(Medalla)의 예술적 기여도는 레이 말바노(Ray Albano)와 로베르토 샤벳(Roberto Chabet)에 의한 첨예한 아방가르드 개념 미술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다. 이런 경향의 작가들은 알바노가 예술 감독으로 일하던 필리핀 문화 센터에 모여들었고 당시 아방가르드 작곡가인 루크레시아 카실라그(Lucrecia Kasilag)는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최근의 경향들
초기의 예술을 위한 예술과 프롤레타리안 미술에 관한 논쟁은 시각 예술뿐만 아니라 시와 소설에서 두드러졌는데 이 논쟁은 나중의 예술에도 그 영향이 지속되었다. 프롤레타리안 미술을 주장하는 대표 작가로는 문학과 사회라는 책을 쓴 수필가 살바도르 P.로페즈(Salvador P. Lopez)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장하는 대표 작가로는 모더니즘의 기수였던 시인 호세 가르시아 빌라가 있었다. 사회에 대한 주석을 덧붙인 프롤레타리안 미술은 헤르난도 R.오캄포 , 세자르 레가스피, 빈센트 마난살라의 초기 작품에서 보이는 전쟁 이후 비참한 상황에 대한 반응이었으나 전쟁의 상처가 치유된 현 시점에서 그들은 다시 생각할여지도 없이 훌훌 털어버리고는 다른 예술 방향으로 나갔다.

60년대에는 예술적 열정으로 사회 문제에 대해 부딪치는 젊고 뛰어난 작가군이 등장한다. 이 시기의 모더니스트로 꼽을 수 있는 사람은 앙그 키우콕(Ang Kiukok), 벤 카프레라(Ben Cabrera), 다닐로 달레나(Danilo Dalena), 오닙 올메도(Onib Olmedo) 등이다. 이들은 모더니즘에 개인의 다양한 양식에 따라 풍부함을 부여하였고 더 나가서는 현대 필리핀의 삶과 역사에서 나온 소재들을 그리면서 지역 조건에 유연하게 대응하도록 만들었다. 60년대에 모더니즘은 완전히 소화되고 토착화되었다.

60년대에는 조각과 판화에서 새로운 발전이 이루어졌다. 모더니즘 조각의 최고봉을 이루는 나폴레온 에뷰에바(Napoleon Abueva)에서 에두아르도 카스트릴로(Eduardo Castrillo), 솔로몬 사피리드(Solomon Saprid), 라몽 오를리나에(Ramon Orlina) 이르고 알란 코지오(Allan Cosio), 임프티 필라필(Impty Pilapil)과 함께 선두적인 조각가들은 새로운 조각 개념을 세우는데 공을 세운다. 돌, 나무, 금속과 같은 전통적인 미디움에 크롬 플랙시글라스, 스튜디오 글라스, 기본 단위, 모빌, 아상블라쥬 등을 덧붙였다.

70년대 이후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후계자들은 오캄포, 레가스피, 마난살라를 그들의 빛나는 선조로 삼는 사회주의 리얼리스트 작가들을 일컫는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 두 세대 간의 차이점을 중요성을 지적하면 첫 세대를 이룬 쪽은 자신들의 주변에서 목격했던 사회적 불평등과 가난에 대해 개인적으로 민감하게 반응을 보였다. 마르코스 대통령이 지배하던 1976년 경 만들어진 단일(Kaisahan)이란 단체를 결성한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의 핵심을 이룬 또 다른 편에선 사회 변화를 위해 급진적인 대중 운동에 연관된 정치적 예술 그룹이었다. 좀 더 높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적인 의식으로 그들은 나약하고 국수주의의 순수한 문화 형태로 남아있지 않았으며 한정된 사회 프로그램의 재편성에 머무르지 않고 명료한 국수주의를 프롤레타리아와 농민들에 관심을 갖는 급진적인 담론으로 탈바꿈 시켰다. 사회주의 리얼리스트들이 들고 나온 주제 중에 페미니즘이나 환경 결정론은 변화를 위한 커다란 움직임의 맥락에서 나온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 사회에 대한 논평과 항거를 넘어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모두를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와 자유를 누리는 인간 체제에 대한 꿈을 가진 이상적인 순간을 꿈꿨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구상적인 양식은 아니었지만 초현실주의와 표현주의 같이 다양하게 영향을 받은 다른 많은 양식들을 보여지는데 그 중에서도 리얼리즘은 유일한 스타일 이었다. 에드가 페르난데즈(Edgar Fernandez)의 몇몇 작품들에는 복잡한 상징이 들어있기는 하다. 르나토 하뷸란(Renato Habulan)과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이끌어가는 작가들은 현대의 다른 측면의 경험들에서 나온 풍부한 기호를 얻었다. 이것은 호세 텐스 뤼즈(Jos Tence Ruiz)의 경우에 있어서도 실험적인 아방가르드란 입장의 운동을 통해 신비스러운 경험에 공헌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회주의 리얼리즘 그룹인 단일 외에도 많은 작가들이 사회, 정치적 주제들을 다루었고 특히 마르코스 통치 시절 막바지에 심했는데 이것은 군국주의 고취와 압력에 기인한 것이다. 국수주의적인 관점이 예술가들 사이에서 통용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정치적 맥락을 넘어선 좀 더 넓게 영향을 끼쳤다. 그 예로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만화, 일러스트레이션, 시사 만화, 들고 다닐 수 있는 벽화 등과 같은 대중적인 형태를 사용했는데 좀더 많은 대중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노력이었으며, 이런 형식을 사용 엘리트들에 대한 편견을 깨는 뛰어난 예시가 되었으며 그들이 자신만의 우수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대안 공간에서 전시를 하기 위해 공원, 캠퍼스, 교회 등 일반 갤러리 외의 공간을 찾았다. 이것은 시각 예술에서 뿐만 아니라 음악, 연극에서도 나타나는데 사람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견인차로서 도심을 벗어난 풀뿌리 수준에서 예술을 할 수 있도록 고무시켰다. 이로 인해 전통적인 마닐라 주변부에서부터 지방에 이르는 대중에게 열린 예술을 제공하여 삶 속에 예술의 생기를 고양시켰다.

요즘 필리핀 예술에 있어 주요 흐름은 토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것인데 바귀오(Baguio) 예술가들이 가장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의 완전한 혁신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경향을 새로운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이라고 투사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고 레이 알바노(Ray Albano)가 필리핀 문화 센터에 있던 개념주의 작가들로 구성 되있던 초기 아방가르드 운동을 대체했다는 것이다. 초기 아방가르드 운동은 세계주의적인 어조에서 배양되었고 만일 이들이 필리핀에 대해 암시했다면 이것들은 소수의 엘리트 그룹에서만 통용되는 농담의 성격을 띤 밀폐되고 까다로운 것이었고 그들은 이에 자부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들의 대다수 작품들은 마르셀 뒤샹의 본래 일상 용품을 갤러리란 콘텍스트에 위치시키는 그 유명한 변기를 사용한 작품에 대한 형식화에 대한 과잉물이었다. 수준 높은 미술(회화)에서 수준이 낮은 미술(만화)의 평준화를 통한 다른 형태와 매제를 유쾌하게 조합한 그들의 좀더 복잡한 작품들은 포스트 모던한 양상을 띤다. 아직 어떤 의미에서는 동양적인 유행은 이런 생산물의 작업에서 필리핀의 주관성에 대한 신화를 헤아릴 수 없고, 자기중심적이며, 불분명하게 그려내었기 때문에 매우 이국적인 상태에 이르게 되었다.

토착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최근 경향은 의심할 여지없이 매우 명백하고 긍정적인 건전한 측면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들의 작업이 미술관이나 기존의 예술 상황에 연계된 아카데믹한 재료를 사용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예술 경험은 보통 관람객이 가지고 있는 이질감을 타파하도록 일상에서 쓰는 흔한 소재로 작업을 해서 작품과 관객의 유동적인 교감을 이루어내어 예술이 접근 가능한 것임을 보여주었다. 더 나아가 토착적인 소재의 사용은 예술의 창작에 있어 수입품이나 비싼 재료를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예술의 독창성의 문제에 있어서도 토착적인 재료의 사용은 작가가 처한 자연스런 상황에서 더욱 가깝게 작가의 감각을 보여줄 수 있다는데 고무적인 것이다.

토착적인 재료를 사용하는 미술은 타피스트리와 같은 다른 오브제를 사용하는데 파즈 아바드 산토스(Paz Abad Santos)가 토착적인 소스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이멜다 카지페-엔다야(Imelda Cajipe-Endaya)는 토속 요소 기호 상징을 사용해서 작업한다. 어떤 작품에서는 옷감, 나무 열매 등 다른 기관 요소들을 사용해 준이(Junyee)의 작품에서처럼 모방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조합하거나 제작하였다. 하지만 토속적인 재료의 사용은 사회적 콘택스트를 포함한 인스톨레이션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기도 하다. 인스톨레이션은 샤만, 고급 사제, 치유자의 역할을 취하는 작가의 주관성을 반영할 수 있는데 문제는 바로 여기서 시작된다. 이들 작가들은 보통 도시의 프티부르주아 출신인데 산맥 그룹과 같이 토착적인 사회주의 단체 사이에서 모순과 긴장감이 인스톨레이션 작가에게 일어날 수 있다. 일반적으 수동적인 원천에서 기인한 문화적 요소에 대한 활발한 사용은 그 자신안에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것이 다른 사회 집단의 이방인들에게 스펙타클하고 연극적인 헤프닝으로 소개되는 흥미거리로 민감한 문화적인 영역에 위반되거나 침해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이것이 오랜 세월 동안 기독교에 의해 고통을 받은 토착 필리핀 사람들을 착취하는 것은 아닌가? 여기에는 항상 존재해왔던 전통을 파괴하거나 평범화시키는 것에 대한 위험이 존재한다. 나쁜 믿음을 제거하기 위해 예술가가 토착민 사회와 자신의 예술적인 관계의 성질에 대한 상태를 심각해고 재고해 보아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며, 따라서 작가의 작품이 토착민들의 감수성에 폭력을 가하거나 그것을 이용하려고 하거나 부담을 주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문제와의 대립을 피하면서 일을 그냥 진행 할 수 없듯이 이를 통해 예술에 있어 잠재성의 문제로 돌아갈 수 있다.

물론 토착적인 소재를 사용하는 경향이 중립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이것에는 보통 반식민주의 성격을 띤 국수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는데 이것은 지역의 자연과 사회적 환경에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히려 주관성을 열광적으로 수호하는 토착 문화 부흥이라는 극단적인 이념으로 흐를 수도 있는데 이는 과거 식민지 시대를 낭만적으로 미화시키는 경향을 보이며 필리핀 사람들을 과거에 가둬두게 할 수 있으며, 신화적인 신과 여신을 진정한 종교로서 부활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문화적 정체성은 다양한 기여에 의해 합쳐져야하는 확실치 않은 개념이다. 한번에 모든 것을 완성할 수는 없으며 역사적인 과정을 통해 지속적으로 그 모양을 잡아나갈 것이다. 따라서 자국의 아방가르드 운동은 서구의 세계적인 중심지에서 보이지 않는 것이며 자국에서 개발된 것이기에 진보적이고 혁신적이며 변화를 위한 뛰어난 프로젝트로서 급진적인 예술 언어에 대한 지속적인 추구를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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