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2004년 한국미술계의 현장에서

이영철

1. 90년대의 질문과 박이소의 존재

2004년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박이소가 세상을 떠난 일이다. 한 작가의 때이른 죽음을 통해 “90년대 한국 미술이 무엇일 수 있었는가?” 라는 문제를 돌이켜 생각하게 하는 점에서 박이소는 우리가 그의 생애 기간 보다 더 오래 그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미술계는 아직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의 고민이 무엇이었고 특히 그것이 한국 미술계에서 어떠한 의미 위상을 갖는 것인가에 대해 모호하기만 하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의 미술 가운데 가장 독특한 양상, 그러나 너무 주목되지 않은 것은 미술이 자신 속에 간직된 지식, 감정이나 경험을 열렬히 드러내면서 자신에게로 접근해가는 언어가 되기 보다는 점점 더 자신으로부터 ‘가장 먼 곳’으로 투신하는 유동체가 되어 간다는 사실이다. 이미 세상에서 무수히 보게 되는 것들을 새롭게 읽고 변주하는 방식으로 경쟁하기 보다는 각자 누구에게나 속해 있으면서 ‘볼 수 없는’ 것, 지금 이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것의 상태와 위치 변화에 대해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관통하여 누가 얼마나 더 민감한가의 문제가 되었다. 90년대 이후가 과거와 다른 새로운 가능성의 차원 속에 있다고 전제할 때, 그것은 각자가 ‘나’를 주장하건 말건, 주관화의 가장 먼 경계까지 수직 강하해 들어가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있어본 적이 없는 자신과 외부 세계 사이에 새로운 연결점을 만들어 내고, 주어진 목표를 향한 정면 돌파나 반복된 강화 훈련이 아니라 각자의 조건 속에서 계열을 찾아 분산과 연결을 만드는 창조적 실천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여럿이 하나의 계(系) 안에서 이뤄지는 공간 배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가 여럿이 되는 복수태(複數態)의 관계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공간, 새로운 판(板)을 느끼고 사유할 줄 아는가 그렇지 못한가의 문제가 중요할 따름이다. 그 외의 것들은 지나치게 사소하다. 현실적인 이유와 변명을 들어 현행 제도를 고수하건, 비판적 입장에서 제도를 개선하건 그것은 오히려 사소하다. 반면에, 예술의 문제는 사소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이점에 대해 너무도 배고프지만 너무도 충분히 이야기하지 않은 채 연대기적인 90년대를 흘려보냈다. 가장 먼 곳으로 스스로 투신해 갈 줄 아는 언어의 분열적 생산을 새로운 주관화라는 말로 지칭할 때, ‘상대적 객관성’ 이란 위험스런 단어는 90년대 중반 이후 예술의 일상 언어 속에서 지워져야 한다. 객관성이란 명령어이자 작은 사형선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과 삶의 구조 안에서 강력하게 작동하는 위계적인 사고 구조(모든 것은 두개의 항으로 묶여질 만한 공통점이 존재하고 그 공통점은 피할 수 없이 반대항을 낳고 또다시 이 둘 사이의 대립을 조종, 중재하여 정신이든 현실이든 진화하게 된다는 틀에 박힌 체계적 사고 방식)를 창작적 실천과 글쓰기 과정 안에서 분리하지 않으며 그것들을 끈질기게 심어놓고 반성을 강요하며, 상대를 조종하려는 성향을 갖고 있다. 그로인해 90년대 미술의 경과를 통해 사고 속에 잠복해 있는 이분법의 바이러스는 잠시 활동성이 둔화된 적은 있으나 한국 사회 전체 안에 급속히 빠르게 퍼져나갔고 이제 미술계는 어떤 공론도 형성하지 못하고 어떤 근거있는 의심 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철저한 무관심이나 사적인 이해 관계의 수준으로 모든 것이 전락했다. 비평의 역할이 더러 강조되는 경우에 조차 지향해야할 가치 기준은 인맥과 경쟁의 구도 안에서 자주 표변했고, 개인의 의식과 사회적 시스템 안에 내면화된 이분법의 사회적 장치들은 사태 자체를 바로 볼 수 있는 눈을 멀게 했다. 자신의 위치를 흔드는 다른 생각을 물리치기 위해 스스로 정신을 잠재우는 편이 나은 것이 된 것이다.

90년대 이후 미술은 70년대와 80년대 한국 미술을 지배했던 보편주의 미학이나 변증법의 본질론적 사고에서 벗어나 일상성에 기초한 새로운 관계의 미학, 각 개인들의 다원주의적 가치관과 욕구가 일상의 생활 공간 안으로 넓게 흘러들어간 시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것들이 흘러들어가는 양상의 다양함과 비가시적 성격(의미 코드의 붕괴, 테크놀로지의 확산, 심리주의의 증가 등)으로 인해 이 시기를 형성하는 일에 관여했던 작가와 활동가들을 명쾌하게 분석해내는 일은 과거 어느 시기 보다도 쉽지 않아 보인다. 객관적 논증과 다수를 향한 합의, 강요된 신념을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과거와 달리 건강한 회의의 자세와 긍정적 사고가 피어난 시기였다. 모더니즘 미학의 붕괴, 미술 외 타분야들과의 접촉 증가, 도시주의 맥락의 개입, 대안적 유형의 미술 운동의 일상화와 대중 참여 방식의 증가, 미디어 테크놀로지 아트의 확산은 시각예술 현상을 과거의 닫혀진 미술에서 예측할 수 없이 열려진 ‘관계’의 영역으로 옮겨놓았다. 여기서 관계라는 것은 현상학적 자기 인식이라는 탈세속적 차원의 ‘관계’가 아니라 말하는 주체의 상황적 위치를 힘들의 장 안에서 숨김없이 드러내는 관계를 말한다. 뉴욕, 파리의 비평은 더 이상 타자를 대변하는 보편적 위치가 아님이 드러났고, 엘리트 전문가 집단의 전문술어(jargon)는 로컬의 특수한 방언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 상식이 되고 합리적이 되는 답을 제안하거나 제시하는 객관적, 과학적 지식의 두뇌(그것은 늘 상대적 객관성이라는 단어 속에 자신으로 숨긴다) 보다는 그리기 혹은 쓰기 자체에 대한 몸적인 자기 성찰이라고 하는, 전근대기에 오히려 유효했던 태도가 사람들에게 감동과 위안을 주는 시대, 시스템의 개혁보다는 개념의 리사이클링이나 재료나 구조의 리모델링 수법이 주어진 상황에 적절히 활용되는 시대로 들어온 것이다. 이 지점에서 비평은 담론의 장소를 닫는 명령어법의 견해들이나 의미 중심보다는 권위적 위치를 포기하고 새로운 유형의 예술을 독려하는 상상적/실제적 사유 공간의 원천으로 접근될 필요가 생긴다.

지금부터 35년 전인 1965년에 프랑스에서 미셀 푸코는 “아무에게도 향하지 않는 언어를 생각할 수 있다는 것, 과학적 담론들을 구성적인 활동에 관련시키지 않고 분석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이성의 발전의 매듭을 풀고 모든 주체성의 색인에서 사고의 역사를 해방할 수 있다”고 발언했다. 프랑스 보다 30년 이상 늦게 한국에 찾아온 후기구조주의 사고 모델은 한번도 뚜렷이 개화하지는 못했지만 개인적 취향과 스타일에서의 변화 만큼은 한국의 천박한 유행 속도에 맞춰 참으로 빠르게 진행되어 왔다는 느낌이다. 모든 각자가 자신의 주체성의 색인 안에서 사고의 역사를 해방시키는 꿈을 꾸며 사는 사회라는 것이 결코 한국에서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예술의 특권은 그것을 꿈꾸는 권리에 있고 자신을 앓게 하는 사회를 거부할 수 있는 스스로의 선택에 있다. 꿈을 꾸고 사회를 거부한다는 것은 모더니즘적 뉘앙스를 풍기지만 우리의 사고와 시각에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태도이다. 90년대 후반 이후 미술 활동을 보는 시각에 있어 그런 관점은 이 시기의 미술을 단순히 취향과 스타일의 측면에서 보는 것을 경계하도록 한다. 여기서 취향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말았지만 90년대는 다분히 개인적 스타일과 취향의 시대 처럼 보여지는 측면을 배제할 수 없다. 90년대를 단지 196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들의 의식과 감각만으로 조망하는 근시안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2. 공공성의 문제

주체화 과정은 예술의 사회성, 공적인 차원과 어떤 연관을 맺는가? 흔히 주관성의 문제는 개인적인 일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미술은 공적인 영역에서 고작해야 미관 장식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개인과 사회를 매개하는 장으로서의 제도가 주체성의 새로운 개념과 결부될 때 공적인 개념의 변화를 겪게 마련이다. 사유 재산과 공적 필요의 갈등 사이에 공공예술 프로젝트가 항해할 운명이라면 이것을 단순히 기존의 미술제도 안에서의 문제로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2003년 6월 초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가 미술장식품 제도를 혁파하여 공공미술 제도로 전환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한 이후 공공미술위원회의 신설이 많은 토론과 공청회를 통해 그 필요성이 거론되었지만 불신과 경쟁이 미술계를 깊숙이 잠식하고 있어 그것의 성사가 어렵기도 하지만 개념 설정 자체가 폭이 너무 좁다는 점을 간단히 넘겨서는 안될 일이다.

2004년 정부에서 발표한 새 예술정책이 공공성 부문에 많은 역점을 두고 있는 것은 적절하고 시급한 조치이며, 그 가운데 예술과 디자인의 공공성을 우선시하는 정책은 예술과 디자인의 문화적 가치와 접근 방식에 새롭게 접근하는 일이다. 공공예술위원회와 디자인 지원 센터의 설립안은 필요한 것이다. 이는 도시 공간, 간판, 각종 사인물 등 우리의 일상 환경을 이루는 공적 영역의 디자인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국가와 지자체를 대상으로 연구 및 지원 활동을 펼칠 수 있는 기구를 만드는 일이 된다.

공공예술은 그간 미술계 내부에서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진행되어왔으나 이제 시각을 좀 더 외부로 돌릴 필요를 제안해 본다. 도시개발, 마을 가꾸기와 지역경제 살리기 등이 새로운 예술의 개념과 결합하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고 심지어 필요에 따라 그들이 주문자가 되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고려하는 공공예술로의 전환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시와 자연에 대한 개발 수준을 신중하게 조절하고 자연과 인간, 공학과 예술의 조화, 그리고 전 지구적 표준화의 새로운 움직임 속에서 지역의 풍토성(고유성)을 살리면서 참여자들 간의 대화, 정보와 경험을 공유하고 교환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실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앙집권체제를 오래 유지해온 국가로서 1995년 지방자치제도를 처음 도입한 이래 각 지방도시들이 공공사업 부문에서 재개발 프로젝트들을 활발히 추진해오고 있으나 법적, 제도적, 인식적, 기술적 제약 등에 묶여 자연-인간-사회의 공생태적 균형 발전을 고려하는 단계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2005년 10월에 개최될 제1회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는 이러한 제반 한계를 넘어서는 국내 첫 시도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는 건축물 미술장식 관련법, 조각공원 조성, 비엔날레 등 국제행사에 포함되는 공공예술을 표방한 프로젝트 등이 안고 있는 제반 문제들에 대해 적극적인 개선안을 제안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예술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새롭게 의문을 제기해보는 일이기도 하다.

모더니즘의 소진 이후의 삶을 보는 관점은 현실과 이상의 갭이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현실의 공존과 교차, 경우에 따라 협상의 조건과 가능성을 찾는 일이 되고 있다. 헤테로토피아 공간은 매우 다양하게 지구상에 존재한다. 아마도 세계에서 헤테로토피아를 구성하지 않는 단일한 문화는 없을 것이다. 이는 모든 인간의 집단에 해당하며, 인간의 생태계가 가진 본성이기도 하다. 헤테로토피아는 확실히 매우 다양한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절대로 보편적인 단일한 형태는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 속에서 (재)발견된 것으로 산업화, 국제화, 그리고 식민화와 같은 일련의 과정들이 끊임없이 파괴해온 것이 헤테로토피아 공간이었다. 그 결과로, 표준화된 유행적인 새것이 과거의 것들을 급속하게 대체하고, 자생적이지 못하고 역사적 진화를 경험치 못한 이식된 문화는 정체성의 혼란과 위기 의식을 가중시키게 된다. 한순간에 거대한 기술문명으로 밀어버리고 새로 고층으로 올리는 정형 외과적 수술이 아니라, 작고 미묘하고 여성적 섬세함을 가진 동양적 침술, 치유로서의 접근법이 공적 영역에서 중요하게 여겨져야 하며 오늘날 공공예술과 부드러운 도시성을 위해 리사이클링과 리모델링의 수법이 다양한 방식으로 응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공공예술은 기획과 제작에 있어 광범위한 연구조사를 통해 새로운 주문자(Les nouveaux commanditaires)의 의견을 반영하고 기획자와 행정가들은 매개자의 입장이 되어 예술가, 건축가, 조경가, 디자이너 들과 주문자들을 연결시켜야 한다.

지역민들에게는 프로젝트에 대한 새로운 개념 설명을 하고, 학교를 찾아다니며 강연을 하고, 젊은 작가들은 워크숍을 통해 새로운 창조적인 작업을 행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진행 과정 속에서 예술적 차원의 문제, 주문자들을 이해시키는 문제, 교류와 협동을 이끌어내는 문제들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해서 교육과 홍보에 활용해야 한다. 또한 사회 속에서 예술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는, 문화 예술 향유에서 소외된 이들을 위해 기능하는 예술을 제안함으로써 보다 넓게 확장된 예술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3. 국제비엔날레

2004년에는 국제비엔날레 행사가 3개 열렸다. 매 2년마다 하는 행사이므로 짝수 해에는 늘 이 3개의 비엔날레 행사들이 논의 거리가 된다.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현대미술이 제도적으로 매우 강한 나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는 한국은 적지 않은 국제미술교류전이 있으나 전시 기획이 높은 수준에 도달하기까지에는 아직 어려움이 많아 보인다. 기획자의 철학과 비전, 감각적 취향, 가치 지향을 뚜렷히 보기 어렵고 잘 되는 경우 깔끔하게 잘 정리 되었고 주제 분명하고 볼 만한 작품이 많다는 것이 고작이다. 거기에 잊지 않고 한가지 더 붙는 단서 조항은 우리 식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흔한 상투어다. 전시를 오픈하기 전에 모든 것은 시민 참여, 지역 정서 반영 등 이미 많은 것들이 하나의 운명적 굴레처럼 작용하므로 새로운 발견도 재미도 감동도 기대할 수가 없다.

광주비엔날레는 지난해에 130억 원을 사용한 점에서 베니스 비엔날레 본 전시보다 훨씬 돈을 많이 들였지만 정작 그 내용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참담한 지경이고, 아시아 수준의 특정 도시 비엔날레라는 지적을 면키 어렵지만 집중적인 미디어 플레이로 지역민과 언론의 기자들을 이용한다. 재단이사회는 지난 10년 동안 단 한 번도 국제현대미술과 비엔날레에 정통한 미술전문가를 이사로서 초청한 적이 없다. 지방색이 농후한 광주비엔날레가 97년에 어렵게 획득한 국제경쟁력을 스스로 포기한 채 철저히 인맥 정치에 희생된 가장 촌스런 국제비엔날레가 되고 만 것이다. 국제무대에서 한국현대미술의 맨파워는 이 정도가 고작이므로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후쿠오카 트리엔날레 수준 정도로 줄여 아시아 비엔날레로 재출발하는 편이 낫겠지만 후쿠오카는 이미 10년의 노하우와 상당한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있으므로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광주비엔날레의 책임자들은 이제는 눈과 귀가 멀어버렸기 때문에 전시 자체의 감각적 시나리오보다는 모두가 홍보용 주제에 집중하고 저급한 수준에서 대중 참여를 유인하는 전략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비엔날레는 적은 예산, 거친 시스템에 주제를 학술 지휘부가 정해서 하달하는 식으로 해왔다. 마치 선생과 학생의 관계로 보인다. 2006년부터 달라진다고 하니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에서 비엔날레에 대한 일반적 요구와 시각은 주제의 입장을 관철하려 들고(그렇게 종용당하고), 작가, 작품만 잘 정하면 70퍼센트는 해결된 것으로 여긴다. 이제 남은 것은 공간 안에 작품들을 잘 보일 수 있게 설치하는 일이고, 나머지 과제는 대중 홍보가 된다. 대중 홍보가 비엔날레 내용(의 형식)으로 된 최악의 사태가 2004년 한국에서 일어났다. 5회 광주비엔날레의 ‘참여관객제’이다. 터보 엔진-이벤트 자본주의의 속성에 완벽하게 야합한 이번 광주비엔날레에 대해 한국의 대부분의 언론들은 찬사 일변도였다. 섬의 원주민들처럼 미술가들이 드디어 한국형 비엔날레를 만들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정체성을 이뤄냈다고 떠들어댔다. 외국의 아무리 좋은 작가, 작품을 갖고 와도 그것을 배우고 음미할 마음이 없고, 사람 간에 인간적 유대와 터치가 없고, 서로 간에 행복감과 기쁨을 나누는 배려심이 없는 한, 그것은 정신이 병든 것이다. 4회 부산비엔날레는 예산 수준이 훨씬 나아졌고, 5회 광주비엔날레의 ‘궤도 이탈’로 인해 상대적 우위에 있었다. 2인 예술감독 사이에 어떤 시너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절충식 모자이크는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포맷을 정상적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시스템은 여전히 아마추어적이며, 미술 행사가 이런 식으로 되어야 하는 이유는 대체 무엇을 위해서인가? 우리는 행복한가? 큐레이터들, 작가들, 스태프들은 기쁨을 함께 나누었는가? 등의 질문에 대해 솔직하게 답할 수 있어야 한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 ‘틈’ ‘네트워크’는 전시의 공간, 조명, 동선, 시선들의 교차, 관객들의 발걸음, 세미나의 분위기, 오프닝 파티, 비엔날레 말들의 문화, 그것들을 생각하거나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우리의 모든 비엔날레 전시들은 아직 진정으로 말이 되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토론이 아니라 늘 간결한 리뷰에 그쳤고, 문제점들은 쉽게 무시되고 망각되어버렸다.

전시 큐레이팅은 참으로 허무한 일이다. 작품들의 관계와 분위기를 허공에 잠시 머물게 하는 것. 그 잠시를 만들어내는 큐레이터와 작가들, 그리고 그 잠시를 포착해서 말을 건넬 줄 아는 이론가들, 그리고 그것에 흥미를 느끼며 생각하는 관객들이 없는 한, 그 자리에 행복이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행을 생산하는 노동 속에서 우왕좌왕한다. 남는 것은 관료주의 전시 행정의 딱딱함과 어설픈 수치와 지표들이다. 정신은 빠져나가 있고, 미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엔날레를 보면서 언제 우리는 진정으로 우리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게 될 것인가? 기본을 행하는 연습부터 하자. 거기서부터 좋은 정신적 자세와 리듬과 선이 나올 테니까. 미디어 시티 서울 전시는 게임이라는 주제로 현대 미디어 전시의 다양한 작품을 보여주었으나 개념이 취약하고 오늘날 현대미술에서 미디어 테크놀로지의 새로운 이슈들이 연결되는 지점들을 효과적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플래시 아트의 객원 기자인 아이리스 문은 “1995년에 광주비엔날레가 시작된 이래, 한국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날레들은, 외부의 지나치게 많은 그리고 종종 빗나간 기대와 영향에 대한 과도한 걱정과 정치적 결탁으로 스스로 위축된 채, 자신들의 부실한 결과물로부터 보복을 당하는 고통을 받아왔다. 이는 1997년을 정점으로 하여 이제는 세계 여러 도시들에서 넘쳐나고 있는 국제비엔날레라는 것이 더 이상 참신하지 못하다는 사실과 통한다. 보다 좁게 보자면, 비엔날레는, 균형잡힌 지역발전을 위해 다툼을 벌이는 거의 모든 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 행사’를 벌임으로써 중앙 정부로부터 막대한 자금지원을 받아내기 위해 마련한, 지역사회의 ‘홍보상품’(예를 들어, 이천 세계도자비엔날레, 청주 국제공예비엔날레, 대구 섬유비엔날레 등)으로 전락하고 만 듯이 보인다.”고 비평한다.

우리 사회의 최대 화두는 언제든 ‘기본’이다. 사이비가 판을 치는 세상에서 차별화를 말하기 전에 기본부터 세워야 한다. 경쟁을 하려면 기본부터 지킬 줄 알아야 한다. 정체성이 아니라 기본이다. 사람들로 하여금 기본을 고민하게 만드는 예술이 가장 어려운 법이다. 공공미술위원회의 필요성은 필요한 제도적 기구를 새롭게 신설해야 하는 이유들에서 출발했지만 기본의 출발점을 어디에 설정하고 그 과정에서 누가 감독을 할 것이냐의 문제를 남겼다. 결국 어떤 제도라 해도 사람의 문제이며 사람이 사람에 대해 방해와 구속이 되는 불신 위에서는 어떤 예술이라도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 ‘마음의 장소’(Heartpia)를 찾는 일과 제도 개선은 늘 함께 갈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비엔날레는 대중들의 불평에 겁부터 집어먹지만 사실은 능력이 안 되는 것을 정직하게 인정하고 ‘기본’에서 출발하려 들지 않기 때문에 차별화도 경쟁력도 정체성도 이뤄낼 수 없다. 영화에서는 감독이 대중들 앞에서 주제의 ‘타당성’ 이나 배우들의 연기의 특징에 대해 해설하지 않는다. 그런데 국내에서 비엔날레의 감독들은 의당 그런 것을 하는 사람처럼 되어 있다. 한국 미술계에서는 그것이 거의 전부일 정도로 ‘상투적인 말들’로 미리 조율되는 비엔날레이다. 관객의 심리적 시간을 측정하고 리듬으로 감동을 끌어내는 일을 고민하는 비엔날레가 되어야 한다.


※ 출처 : 문예연감 2005 | 한국문화예술진흥원 발행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