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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현대 미술의 상황과 전망 (초록)-1

이영철

동아시아 현대 미술의 상황과 전망




연구 개요


미국이나 유럽 대학들에서의 ‘아시아 연구’ 학과들은 거의 예외 없이 ‘유럽’과 구별되는 ‘아시아’의 문화적 유산을 대상화하여 아시아의 오늘(서구의 지배 이후) 보다는 그 이전 과거를 연구 대상으로 설정한다. 동아시아 또는 아시아의 정체성을 찾는 일은 전통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전통을 통해서 자신을 정의하려고 하는, 또한 자본주의 자체를 문제삼지 않으면서도 자본주의 경제의 성공에 따르는 파괴적 결과를 억제하는 수단으로 전통을 이용하려 하는 국가와 자본도 이러한 아시아의 정체성을 찾는 일을 앞세운다. 이러한 국가와 자본의 선호는 사실상 인구의 다수가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것과 일치한다. 즉 (예를 들어 중국의 경우), 지구적인 소비 문화가 지역 문화로 침투하고 있는 세계와 앞에서 민족적 정체성에 대한 사람들의 요구는 더욱 절박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지구적인 소비 문화는 전지구적인 시장 정책의 한 부분으로 지방의 문화와 전통을 선전한다.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지칠 줄 모르고 흘러가는 시장 문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모든 사회를 끌어넣으면서 인종적․민족적 문화를 양산해내고 있는 것이다. 비판적 성향을 가지고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민족 문화라는 것이 유럽과 미주 역사가 낳은 근대성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민족 문화를 만들어낸다는 것 그 자체가 국내적 억압과 국외적 침략의 기회를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때문에 이들은, 이에 대한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할지라도, 민족적․지역적 또는 세계사적 수준의 문화를 구체적으로 만들어나갈 때 생기는 피해를 피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문화 만들기가 가진 양면성과 모호성을 지적하고 있다. 그 양면성이라는 것은 새로운 제국의 부상에 맞서 저항하는 필요성이(저항의 주체로서 민족 공동체의 결집이 필요할 수도 있다) 오늘날에도 전혀 감소되지 않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공동체의 동질화가 종종 문화적․언어적으로 동일하지 않은 사람들을 엄청나게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양날을 품고 살아야 하는 것에 대해 스스로 비판적 의식을 유지할 때 비로소 지식과 예술은 현실에서 벗어나 공허한 관념 세계에 머물지 않게 된다. 여기서 진보적 변화의 가능성을 계속해서 믿고 있는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에 있어 가장 매력적인 대안적 선택은 밑으로부터의 대화이다. 즉, 아시아 내의 다양한 지역에서 온 지식인들이 그들끼리 대화를 추진하면서도 민족적․지역적․대륙적 문화를 사물화하는 것에는 계속해서 반대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러한 선택은 “밑으로부터의 세계화”라고 불리는 현상을 아시아 지역에 이전시킴을 의미한다. ‘동양’과 ‘서양’을 분리시키는 데 반대하고, 또 아시아 지역의 많은 사람들과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유럽, 북미에 이르는 타지역 사람들을 통일하는 공통의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선택은 배타적이 아니다. 대만에서 발간되는 [궤적 Trajectories]이란 무크지의 편집자와 기고가들은 시간의 변화와 함께 새로운 문제들이 등장함을 인식하면서도 이전의 급진주의의 유산을 받아들이는 위치에 의식적으로 선다. 이러한 시도가 갖는 중요한 점은 근대성의 역사 속에서 서로 뗄 수 없이 되어버린 두 개의 병리현상 - 유럽 중심적인 세계 지배와 아시아 사회 내부 자체에서 나오는 병리현상 - 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제는 어떻게, 이젠 더 이상 관련되지 않는, 대립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이러한 병리 현상을 극복하는가이다. 세계화가 가져오는 파괴적인 영향과 근대성이 안겨준 식민지적 유산을 모두 극복하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매일의 삶 속에는 여러 종류의 전통과 서구의 문화들이 얽혀서 다양한 지방 문화를 만들어내는데 이러한 면들은 대륙․지역․민족을 가로질러가는 문화 인식 속에서만 나타날 수 있다.
본 연구는 모더니티 과정 속에서의 아시아 여러 나라의 미술이 현재 처해 있는 상황과 바로 지금의 변화상을 주목하며, 또한 아시아와 연결되어 있는 태평양이라는 지역 개념의 문제, 근대를 탈구시키는 방식으로서의 태평양 문화의 해석의 문제 등을 다루었다. 연구 범위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걸렸고, 연구가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지역이 많고 자료도 구하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여기에는 아시아 본국에서 활동하거나 밖에서 작업해온 미술가들, 그리고 태평양 지역을 배경으로 활동하는 주요 작가들의 작업과 문제 의식들을 살펴볼 것이다. 논문을 위해 참고가 된 자료들은 국내에서 최근까지 발간된 (동)아시아 관련 서적들, 동아시아 관계 국내외 심포지엄 논문들, 아시아, 태평양 지역에서 개최되었던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관련 도록들, 그리고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전문가들과의 인터뷰 등이다.



서론
일본의 잘 알려진 국제 전시 기획자 후미오 난조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의 한 부분으로서 [초문화](TransCulture) 라는 제목의 전시를 만들었다. 그 전시는 이질적인 문화들 간의 연결과 대화의 기회를 마련하기 위해 이 주제와 연관된 작업을 해온 미술가들을 세계 여러 지역에서 초청했다. 서로 다른 문화들 간의 차이점을 이해하고 인정하며 서로 대화를 통해 ‘제3의 길’(호미 바바의 표현)을 발견해 간다는 차원에서 난조는 단순히 작가들을 초청하기 보다는 아시아, 아프리카 그리고 남미 미술의 현재의 발전 상황을 최대한 넓게 조사하고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을 초청했다. 초청된 미술가들은 최소한 두개의 문화 간의 가교 역할을 하려는 의도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중국 작가인 카이 구오 창(Cai Guo Qiang)은 중국 대륙에서 낡은 물건들을 잔뜩 배에 싣고 와서는 <마르코 폴로가 잊었던 물건을 베니스에 가져오다(Bringing to Venice what Marco Polo forgot)>라는 제목의 특이한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는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서 유럽으로 돌아온 지 500년이 되었고, 이 작품은 그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기념하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카이는 말하기를,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부터 다양한 이야기를 가져왔지만 한가지 잊은 것은 ‘동양적 사고’라고 했다. 그는 전시 개막식 날에 그 물건들을 베니스의 대운하(Grand Canal)로 싣고 와서 산 마르코 광장에 펼쳐 놓았다. 중국과 유럽을 잇는 먼 바닷길 여행과 스펙터클한 규모의 이 작업은 아시아의 ‘위치’에 대해 서구의 관중들이 생각을 새롭게 하고, 이국적인(exotic) 문화를 즐기고,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사건을 다루었기 때문에 매스컴과 관중들의 큰 주목을 끌었다. 카이 쿠어 창이 강조했던 ‘동양적 사고’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단 작가에게 있어 (동)아시아가 문화적 영역으로 설정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카이 쿠어 창 뿐 아니라 많은 아시아 작가들, 아시아인들이 기정 사실 처럼 받아들여온 점이기도 한데, 공통성을 지닌 단위로서의 특정한 아시아를 설정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라는 물음이 뒤따르게 된다. 동아시아는 사용, 유교의 신봉 등 공통된 고전에 해당하는 기반의 전통 뿐 아니라 오랜 기간에 걸친 역사적 교역에 의하면, 상업과 지적 교환을 통해 아시아의 다른 지역들과 연결을 맺어왔던, 동-동남아시아 모두를 포괄하는 하나의 지역을 설정할 수 있다. 결국, 중국․베트남․한국․일본의 엘리트들은 공통의 신성한 고전들과 그것들이 내포하는 사회 체제에 의존하였다. 비록 이러한 고전들이 각기 지역적 상황에 맞추어 구체화되면서 서로 다른 역사적 궤도를 만들어 나갔지만 말이다.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고전들은 마치 그리스․로마의 고전들이나 성경이 유럽인들에게 인식되었던 것과 아주 비슷하게 한 민족 국가의 산물이 아니라 범우주적인 관련성이 있는 신성한 고전으로 받아 들여졌다는 것이다. 또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하나의 문화 영역으로서 뿐만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세계 체제로서의 아시아를 형성하는데 공헌했던 경제적 교역 관계, 특히 인구의 이동이다. 이러한 관계들 안에서 전략상 중요한 역할을 해온 부류는 현재 우리가 중국으로 알고 있는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될 때까지 이들은 자신들을 ‘중국인’이라고 생각했지 보편적인 정치적 세계에 속한 어느 한 지방에서 온 후손들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중국에서 온 이민자들은 스스로 지역적 환경에 적응해나갔으나 그 과정에서 이들은 또한 전체 속에 자신들의 사상뿐만이 아니라 사회․경제 행위를 전파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기억해두어야 할 것은 이러한 교역과 인구 이동이 확장되는 유럽 세계 체제의 배경 속에서 점증적으로 일어나 아시아 내의 지역 경계를 가로 질러 동아시아를 멀리 아프리카, 오스트리아, 태평양과 연결시키고 있었다는 점이다. 도로(道路)라는 것은 어원상 단선적인 하나의 길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두 개의 길(道)이 연결, 교차하면서 생겨나는 로(路)를 포함하는 말이다. 인간 활동이 의미를 발생시키는 지점은 길 위에 있으면서 동시에 교차점으로서의 로를 포함할 때이다.4)
주) 도로는 중국에서 발명한 바둑판의 생김새와 깊은 유사성이 있다. 바둑은 반드시 수평과 수직의 두 선이 교차하는 지점, 즉 갈라지는 틈 자리에 돌이 놓여져야 게임이 성립한다. 틈은 최소한 두 개의 다른 선이 만나는 경우에 성립하는 점에서 그것은 분열 지점, 급변 지점이며, 돌이 놓여지는 순간 전체 국면에 변화를 유발시키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바둑판에는 1년 360일과 그것들을 통합하는 하나의 점으로 구성된 361개의 틈(교차점)으로 이뤄져 있고, 각각의 틈은 다른 모든 틈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게임하는 사람은 틈에서 틈으로 이동하며 영토화/탈영토화의 전쟁을 수행한다. 바둑판은 토지의 분할, 도로의 설계, 그와 연관된 별자리의 움직임(농경 사회의 경작의 바로미터)을 관찰함에서 기원한다.

카이 쿠어 창이 지칭하는 바는 닫혀진 특정 지역의 문화적 단위로서의 동양이 아니라 문화의 ‘교차로’로서의 동양적인 것을 의미했다. 문제는 그것을 억압해온 ‘근대’를 괄호치는 것, 다시 말해 마르코폴로가 근대 세계를 여는 지점(교차로)에 의해 닫혀지고 침묵되고 전복되었던 그것을 재정위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는 서구에 의해 ‘사물화된’ 동양정신의 회복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괄호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현재 아시아의 본국에서 활동하거나 이주해간 많은 아시아 작가들의 현재적 관심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문제 의식의 근원을 성찰해온 문학평론가 고진 가라타니는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1980) 후기에서 간략하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쉽게 야기될 수 있는 오해를 막기 위해서 몇 마디 하겠다.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이라는 책의 제목에서 ‘일본’ ‘근대’ ‘문학’ ‘기원’이라는 낱말들은 사실상 괄호로 묶여야만 한다.1)

고진 가라타니의 말 처럼, 지난 19세기 이래 아시아가 걸어온 길 위에 정해진 이름들, 그 개념들, 그것들에 속박되온 우리의 사고와 행동에 대해 숙고하는 일은, 근거있는 ‘의심의 위치’를 잡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17세기에 철학자 데카르트가 자신의 고국 프랑스를 떠나 당시 유럽의 교차로였던 암스테르담을 ‘의심’을 위한 장소로 정한 것은 일체의 견해들(doxa)을 괄호치기 위한 일이었다. 가라타니는 모더니티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용어들이 포함하는 견해들(doxa)을 뒤집는다. 책을 구성하는 6개 에세이의 제목들- 풍경의 발견, 내재성의 발견, 고백의 구성, 의미로서의 병, 어린 아이의 발견, 구조의 힘에 대해- 은 체계적으로 일본 근대문학의 발전에 대한 정전적 설명들에서 선험적인 것이라고 간주되는 범주들을 전도시키는 것들이다. 여기서 근대문학의 기원은 자명한 본질들이나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의미심장하게 일련의 ‘발견들’이며 사실상 ‘전도(顚倒)’를 말한다. 전도는 근본적인 단절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혹은 가라타니 자신이 때때로 ‘기호학적 성위(星位)의 전복’이라 규정한 것들이다. 한 단계의 시작과 끝을 시대순으로 열거하는 대신에 가라타니는 일본의 모더니티를 담론적 공간으로, 즉 특정하게 제한적이며 전체적으로 싸여져 있어서 그 너머가 ‘보이지 않는’ 그런 장소로서 묘사한다. 담론의 장소를 일단 확보하기 위해 우리는 늘 자명하게 불러온 그 ‘아시아’가 대체 무엇인가부터 살피지 않을 수 없다. 고진 가라타니는 역사적 시기로서의 모던 이후 포스트 모던으로 이행하는 관점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모더니티 내부의 차이들, 교차하고 소용돌이치는 지점들, 파국과 변이점들을 관찰하고 그 안에서 부딪히는 사고들의 위치를 포착하려고 시도한다. 아시아는 19세기 서구 열강과 일본의 침략과 오랜 지배로 인해 현대사에서 커다란 정치적 굴곡과 사회적 변화를 체험했고, 지금은 전지구화의 소용돌이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 ‘아시아’라는 술어는 어떻게 해서 만들어졌는가? 아시아적 정체성은 허구가 아닌가? 아시아적 가치와 국가주의의 관계는 무엇인가? 아시아의 작가들은 ‘서구’와 ‘전통’에 대해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작업하는가?

1장: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의문

(1) ‘지리’(geography)의 뜻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용어로서 아시아는 지리적으로 유럽과 러시아를 제외한 유라시아 대륙을 의미한다. 이는 서아시아(소위 중동 지역에 자리잡은 터키, 아랍국가, 이스라엘, 이란, 아프가니스탄) 중앙아시아(구소련의 아시아 공화국과 몽고), 남아시아(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 네팔, 티벳, 부탄) 동남아시아(미얀마, 인도네시아, 필리핀, 싱가포르, 말레이시자, 브룬디, 태국,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동아시아(중국, 남북한, 일본)를 포함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1000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마을로 축소하여 생각한다면 그 가운데 거의 600명에 달하는 인구가 아시아 지역에 분포되어 있고 유럽은 고작해야 80명에 불과하다. 유럽이나 다른 어떤 대륙에 비해 가장 복잡한 인종 구성, 언어, 문화, 종교의 다양함, 국가 체제의 상이성, 자본주의 근대화의 불균등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금세기 초 이래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환상이 있어 왔다. 이러한 환상은 그것이 환상임에도 불구하고 근대 세계에 들어와 아시아 국가들에 강한 물리적, 정서적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대동아 공영권 같은 아시아니즘의 환상을 주조해낸 것은 일본이다. 이러한 환상은 근대 서구와 똑같은 헤게모니의 길을 따라가려고 했던 일본의 지배욕과 정신분열적 기대의 표현이다. 아시아가 하나라는 생각은 두말할 필요 없이 모순된 것이다. 아시아는 셀 수 없이 많다.
진보가 늦었던 아시아는 일본만 유일하게 먼저 문명 세계의 길을 따라왔고 일본은 불운한 아시아의 동지들과 덩달아 퇴보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의 사상가 후쿠자와 유기치까지 거슬러 올라가 시작되는, “아시아를 떠나 서구와 결합하기 Leaving Asia and joining the West”라는 기치는 아시아 국가들 안에서 일본을 고립시켜왔고, 일본을 서구 중심의 헤게모니 구도 안에서 헤게모니를 따라 잡기 보다는 헤게모니에 끌려 다니는 사회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20세기 초 “아시아는 하나”라는 일국적 차원의 아시아 협동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아시아를 하나의 단위로서 고려해볼 수 있는 시각이 가능한가 라는 문제의식이 최근 제기되고 있다. 대개 많은 저자들은 아시아라는 단어를 아시아의 일부를 지칭하는 데 사용해 왔다. 불필요한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 그리고 아시아 내부에 어떠한 집중성을 피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 체제의 형성 과정과 아시아 지역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경우 흔히 ‘아시아’는 일본을 포함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근대 이후 거의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지역은 영토적으로 닫힌 영역이라는 의미를 갖는 반면에 지대zone는 정치, 경제, 행정적 경계에 의해 울타리처 지지 않는 항구 도시, 섬, 바다, 육지의 일부를 연결하는 연결 지대를 의미한다. 아시아 지역이라 말하는 경우에도 그것을 연결 지대로서의 아시아를 고려한다면 지역에 속에 있으면서 지역을 넘어서는 관계 위에서 검토하는 일이 된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지리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을 되새기게 한다.
하늘과 대지(땅) 사이에 살고 있는 인간은 자신의 활동성을 통해 대지에 무언가를 새겨넣는 행위를 한다. 그러므로 지리(geograghy)를 정태적, 물리적 양상이 아니라 인간 활동을 중심으로 파악해보면 지리란 인간 활동의 출발점이 아니라 산물로 드러나며, 이는 지리라는 말의 본래 어원학적 의미인, ‘대지 위에 쓰기(earth inscription)’를 되살리는 일이기도 한다. 2) 예술은 대지(geo)에 무언가를 새기는(graphy) 행위이다. 근대화 이전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대지(땅)은 평평하고 하늘은 지붕 처럼 둥글다고 여겼으며, 그것을 거북이의 형태에 비교하곤 했다. 한자의 기원인 갑골 문자는 대지를 상징하는 거북이의 단단하고 납작한 배에 글자를 새겨넣은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모든 예술은, 질 들뢰즈의 사유를 근거로 해서 존 라이크먼이 표현한 ‘지리 예술’(geo-art)이 된다.3) 아시아는 이 지역의 물리적 윤곽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구체적인 듯이 보이지만 그것을 인간 활동의 측면에서 볼 때는 추상적 개념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의 용어는 추상적 개념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것으로서 아시아의 주민들은 근대에 들어와 서양 사람들이 위치를 정하고 명명하기 전에 자신이 아시아에 산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이들은 유럽에서 온 지도를 통해 스스로를 보기 전까지 아시아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아시아’라는 단어는 17세기 예수회 수사들에 의해 중국인에게 소개되지만 중국과 동아시아 전체를 냉혹하게 편입시키고 있었던 새로운 세계 체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절박하게 요구되던 시기인 19세기가 될 때까지는 이 용어가 중국인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는 표시가 거의 없다. 마찬가지로 유럽이라는 개념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유럽과 북미, 또는 미 대륙 전반을 모두 포함하는 ‘서구’라 불리는 통일적인 존재는 말할 것도 없다. 지리학은 근대의 출현 이후 제국주의적 이해를 대변하는 영토 개념으로서 대항 세력 간의 거리와 경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국가 건설과 민족 해방을 위한 이념과 자금 등을 찾아 아시아를 돌아다녔던 급진적인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이 만난 사람들을 통해 그들 사회의 공통된 곤경 - 그리고 자신들의 ‘아시아성’ - 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시아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급진적인 논쟁을 만들어내게 된다. 유럽의 급진적인 지식인들에게 19세기 말 런던이라는 도시가 수행했던 역할과 비교될만하게 세기말 아시아 지식인들에게 일정한 역할을 수행했던 동경은 인도에서 베트남․중국․한국․필리핀에 이르기까지 근대성을 추구하는 아시아의 지식인들을 끌어당기는 자석과 같았다. 1920년대 광주는 아시아에서 급진주의의 수도(1920년대 “아시아의 파리 코뮌”으로 알려짐)로서의 역할을 했다. 그리고 1927년에 일어난 광주 의거에서는 베트남․한국․일본의 급진주의자들이 아시아의 혁명적 변혁을 위해서 나란히 싸웠다. 1920년대와 1930년대 터키의 케멀 아타투르크와 인도의 모한다스 간디의 사상과 행동은 중국과 일본의 보수주의자들에게 만큼이나 급진주의자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1930년대 일본의 제국주의는 ‘서구’ 제국주의 - 부르조아라든지 공산주의든지 간에 - 에 대항하여 아시아를 수호한다는 주장으로 많은 아시아인들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추구는 오늘날 미 유럽의 지배에 대항하여 ‘아시아적’ 또는 ‘동아시아적’ 가치를 호소하는 모습에서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 명백한 사례로서 1995년 1980년 광주 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창설된 광주비엔날레는 아시아에서 가장 최대의 국제적 비엔날레로서 이후 타이페이 비엔날레, 샹하이 비엔날레, 요코하마 트리엔날레 등이 생겨나게 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아시아의 여러 도시에서 생겨나고 있는 많은 비엔날레들은 공통적으로 ‘아시아성’을 강조하는 보편화된 요구들에 노출되어 있다. ‘아시아적인 것’의 강조는, 문화적 동일성을 전제하는 아시아의 국제비엔날레가 ‘아시아다움Asia-ness’을 본질적으로 드러냄으로써 혹은 가져야만 서구와 동등한 수준에서 만난다는 식의 타자성(여기서는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지칭)의 자기 내면화를 서구에 대한 대항 혹은 대안 담론이라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아시아가 문화적으로 동질성을 갖는다고 여기는 상상은 동아시아를 어떠한 방식으로든 연대해 낼 수 있다는 탈역사적인 규범성과 상관이 없다. 동아시아가 정치적․경제적․문화적인 실제적인 단위가 되어본 적이 없고, 또한 동아시아의 문화는 정치 권력을 뛰어넘는 보편적인 종교 문화나 자본주의 경제의 세계성을 확보한 적도 없다. 동아시아는 단지 민족 단위의 국가 형태로 각기 다른 경로로 발전되어 왔지만, 문명의 기원으로서 공통된 기원을 갖는다는 믿음에 기반을 둔 상상적 공동체를 형성할 따름이다. 20세기 후반 들어와서 경제 발전을 토대로 상호 의존성과 세계 질서의 변동으로 인해 통합에의 전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그 통합이 무엇에 기반을 둔 어떠한 통합인가 설명되어야 상상적 공동체에 기반하여 형성되는 문화의 ‘작용’이 설명된다. 즉, 20세기 후반의 무한 경쟁을 요구하는 자본주의 시장이 만들어내는 상호 의존성과 경제의 블록화로 인한 지역간 통합이 동아시아에 동질적인 문화가 있다는 신념 체계와 어떠한 성격의 통합을 “누가 이루어낸다는 것인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문화가 무엇인지 설명되고, 문화에 대한 신비화가 벗겨진다. 즉 문화의 동질성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어떠한 과거 혹은 전통을 복원하는 것이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는 삶의 양식이고 일상의 실천 양식이다. 따라서 어떠한 문화적 전통을 갖고 있다고 하는 것과 문화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이다. 아시아의 공통된 문화가 ‘유교 문화’ 혹은 ‘도교 문화’라고 보면서 마치 그러한 문화가 아시아의 일상에서 실천되는 양 말하는 것은 사실 무근이며 오류가 된다. 초월적 기의로서 (동)아시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상적인 공동체로 존재하는 동양․아시아의 담론이 어떤 의미를 생산․구성해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의 필요성을 주장한다.

(2) 국가주의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은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집합적 정체성이 부인되면서 개인성, 합리적 사고, 국가의 경계를 뛰어넘는 초국가적 자본과 개인들의 유목적 흐름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를 매개하지 않은 개인의 정체성 구성은 여전히 쉽지 않다. 아시아와의 만남에서 국가를 매개하지 않은 관계지음은 생각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국가를 매개로 하는 아시아 정체성이 당연하다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매개하는 아시아 정체성이라는 것이 국민 국가 내의 다양한 집단들의 이해와 어떠한 관계를 맺는가가 질문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민 국가는 근대화의 주체이고, 국가에 의해서 설정된 보편적 개인, 즉 전체주의적 주체인 국민을 만들었던 권력이다. 이슈는 글로벌 해지는데 아직도 국민 국가의 영역 내에 있고 현재의 상태는 국제 간의 모든 타협의 대상과 주체가 국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아시아는 국가와 어떤 관계를 갖고 있고, 동아시아가 우리의 일상적 담론 속으로 들어오는 맥락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시 되어야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정체성을 논하기 위해 먼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차라리 국민 국가에 대한 질문을 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문제 제기 방식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들을 방기했을 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동아시아 담론은 우리 내부의 ‘차이들의 정치학’과는 전혀 연결되지 않는 규범적이고 추상적이며 관념적이고 탈역사적이라는 혐의를 벗기 어렵다. 왜냐하면 구체적이고 맥락적인 질문이 없이 탈식민화․냉전, 동아시아가 민족주의․반공, 유교 문화라는 식으로 대응되는 거대 논리화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는 새로운 문화 지형도의 구성, 지역의 재편, 지역 내 연대의 경험 등 동아시아 지역 내에서 새로운 역사를 만들며 살아가고 있는 개인들의 삶을 비가시화시키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동아시아인들이 있다”는 담론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현실과 유리된 지식 만들기 그리고 그 위에 현실 쌓기라는 동아시아의 근대적․서구 중심적 인식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서구에 의한 동아시아․동양이라는 개념이 우리에게 어떻게 내면화되어 있는지가 질문되어야 한다. 동아시아 담론의 전개와 본질은 동아시아가 문제가 아니라, 동아시아 담론을 말하고 있는 ‘우리’라든가, 우리 사회 내의 집단에 대한 분석이 더욱더 중요해야 하는데 왜 동아시아 담론은 내부의 문제는 건드리지 않는가? 동아시아 담론의 논자들은 아시아성 혹은 ‘우리 고유성’이라는 것을 전제하면서 ‘우리의 고유성’이라는 것을 분석의 대상에서 유배시켜 많은 문제들을 규범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지점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서구인들에게 자신의 것이 아닌 ‘동양’의 사상, 즉 타자의 사상이 그들로 하여금 현재를 다르게 보고 현재에서 탈출케 하는 하나의 대안이라는 역사성과, 타자인 동양이라는 혹은 동아시아성이라는 타자성이 갖는 역사적 의미는 동일하지 않다. 서구가 가고자 하는 방향에 ‘동양적’인 것이 있다고, ‘동양인 우리가 먼저 서양이 가고자 하는 그 미래의 고지에 가 있었다고 말하는 것은 역사와 정치학의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자민족 중심주의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아니라 서구를 관객으로 하는 무대를 꾸미는 일이 라고 해야 한다. 서구는 ‘아시아’라는 개념을 구성하는 불가분의 요소다. 서구는 더 이상 아시아와 아시아인에게 외부적인 존재가 아니며 아시아인이 자신을 의식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내면화되어 있다.

아시아는 지리적이지 문화적인 개념이 아니다. 비록 지난 150년 간 많은 아시아인들이 자신들의 대륙을 문화적으로 규정하려 하였지만 이러한 규정들은 서구의 식민주의에 대한 아시아인들의 반응이 낳은 인위적인 것이지 더 큰 규모의 문화적 유사성을 추구한 결과가 아니었다…… 아시아에 대한 문화적 정의는 한때 위대했으나 지금은 부패하고 노쇠해버린 고대 문명 등이 존재하던 곳으로서의 아시아 대륙이라는 내면화된 제국의 환상에 대한 심리적 방어였다.(인도의 사상가 아싯 난다)

이제 문제가 명확해지는 지점은 아시아와 동아시아에 공통의 문화적 영역들이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여부 이전에, 이들 지역들이 지역간 상호 작용과 문화 형성에 내재한 역사 논리에서가 아니라 유럽과 미국의 현실적 이해 관계와 그들의 인식에 의해 규정되었다는 데에 있다. 동, 북동, 남동 아시아들간의 차이점, 이들 지역들간의 명확한 구별, 그리고 이들과 아시아의 다른 지역과의 관계는 무엇보다도 적어도 근대 이후 미국과 유럽의 힘과 사상이라는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

(3) 오리엔탈리즘
이 경우, ‘아시아’는 가장 고질적인 미 유럽의 오리엔탈리스트의 편견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해석된다. 즉 유럽의 ‘타자’로서의 위치인 것이다. ‘타자성’은 역사적 상황에 따라 다른 종류의 어휘에 의존하지만 아시아성을 향한 대부분의 호소력이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은 아시아의 물화다. 이러한 현상은 오리엔탈리즘과 거의 구별될 수 없는 옥시덴탈리즘이 종종 수반하는 현상이기도 하다. 20 세기의 전반부에서 이러한 입장을 대변했던 사람이 인도의 시인이며 사상가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다. 그는 물질적 서구에 대한 정신적 아시아라는 이념을 증진시키기 위해서 유럽 오리엔탈리즘에서 상정해온 차별화에 의존하고 있었다. 타고르의 사상은 1920년대 중국에서 서양의 ‘물질적’ 문화와 동양의 ‘정신적’ 문화를 대조하려는 사람들에 의해서 다시 살아난다. 이러한 구별은 오늘날 ‘유교적’ 또는 ‘이슬람적’ 아시아 문명이 자본주의 경제에서 성공을 보이면서도 자신들의 정신성은 명백히 유지하고 있다는 주장 속에 계속 존재한다. 자신들의 ‘정신적’ 유산을 가진 아시아인들은 ‘서양’의 학살에 대항하여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러한 입장은 상당히 오리엔탈리스트적인 양식으로 아시아에 역사를 부여하지 않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근대성의 인종적․성적․계급적 경험 속에 있는 거대한 차이점을 가릴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상상의 ‘서구’에 대비되는 아시아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아시아’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들과 마주쳤을 때 그것은 자신만의 억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민족적 열망과 대륙에의 구속이 혼합된 결과 나온 범아시아주의 속에는 풀기 어려운 문제들이 있다. 즉, 대륙적 특성을 민족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는 동시에 민족적 특성을 대륙에 투사하는 문제점이다. 이 개념이 불안정하다는 것은 20세기를 통해서 이들이 정반대로 사용되어져 왔다는 사실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논의 속에서 발견되는 흥미로운 사실은 유럽 중심주의를 거부하는 주장에서조차 영리한 방식으로 지속되는 유럽 중심주의다. 지난 이십 년 동안 계속된 유교의 부활에 있어서, 또한 유럽 중심주의의 헤게모니에 대항하여 자율적 가치를 만들어 가려 했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동아시아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추구는 세계를 유럽 중심적으로 개념화하는데 수반되었던 시간성과 공간성에 그대로 의존하고 있다. 이 현상은 발전주의를 전제로 하는 자본주의적 요구와 일치하도록 유교적 또는 아시아적 가치를 재해석하는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문제점은 아시아적 가치를 둘러싼 대부분의 논의에서 제기되어 있지 조차 않다. 사실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유럽과 미국의 비판가들은 최근 자본주의를 유럽과 미국의 근대성으로부터 분리시키려 해왔다. 그리고 자본주의를 아시아 사회의 천부적인 자질로 설명함으로써 유럽과 미국이 근대성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함과 동시에, 최근 아시아 사회가 근대 유럽과 같은 발전의 잠재력을 갖고 있음을 성공적으로 증명한 것에 대해 찬사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수정주의는, 사람들에게 덜 인식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 유럽과 미국 자본주의의 근대성을 모델로 하여 세계사를 재기록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다시말해 자본주의를 지구적인 인류의 문명으로 만듦으로써 다른 역사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는 유럽과 미국 자본주의의 근대성에 대한 대안을 소멸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러 가지 면에서 이는 문자 그대로 유럽 중심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유럽 중심주의의 유산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서 조차도 유럽 중심주의는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지 않은가 의심해 보아야 한다. 유럽 중심주의는 출구가 없는 역사적 감옥인가? 유럽 중심주의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럽과 미국 사회가 수행한 역사적 역할을 거부해야 하는 것일까? 사실상 이전의 유럽 중심주의는 타자가 유럽의 발전에서 한 역할을 부인함으로써 번성하였다. ‘아시아적 가치’의 역할을 중요시하는 아시아적 발전 모델을 주장하려는 노력에도 비슷한 문제가 따라다닌다. 그러한 견해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목적론을 당연시할 뿐만 아니라 이전의 유럽 중심주의가 역사를 거부한 것을 똑같이 반복한다. 이번에는 ‘서구’를 역사의 그림에서 빼버림으로써 말이다.

(4) ‘지적인 실험’으로서의 아시아
연세대 백영서 교수는 최근의 한 논문에서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를 ‘지적 실험’이라고 표현했다. 우리는 아시아에 대해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당연히 거기에 있는 ‘장소’로 간주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시아를 생산을 위한 출발점으로 여길 때조차도 아시아는 우리가 생산해낸 존재로서, 진실로 우리가 상상해낸 산물이다.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를 자신들의 대상을 생산하는 담론으로서 말한다면 수긍이 갈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담론은 아무 근거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또는 ‘동아시아’에 기존과 다른 역사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시아나 동아시아는 우리에게 연구와 정치를 위한 안전한 대상을 제공하는 단순한 지리적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 유럽의 근대성에 대한 대안을 제공할 수 있는, 실현되어야 할 계획이다. 유산으로서와 계획으로서의 동아시아를 혼동하는 것은 “아시아적 가치”에 대한 오늘날의 논의 - 과거의 유산을 대부분 문화적 변혁에 대한 보수적인 반응으로 해석하는 논의 - 에 있어서 많은 잘못된 해석을 낳는 원인이 되고 있다. 아시아와 동아시아에 대한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을 재생산하려는 문화적 주장들과 매일 일어나는 문화적 변혁들의 증거 사이에는 명백한 모순이 자리잡고 있다. 이는 1995년 광주비엔날레가 창립된 이래 지속적으로 논란이 되온 이슈이기도 하다. 유산으로서의 동아시아는 그 지역의 주민들을 상상된 문화 속에 가두어 버린다. 동아시아를 계획(또는 ‘지적 실험’이나 담론)으로 인식하는 것은 아시아를 다른 각도에서 설명하려는 정치적 안건을 구별할 수 있게 할 뿐만 아니라 그 지역을 변하지 않는 문화적 통일체가 아니라 역사적 존재로서 규정할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이러한 계획이 의미를 가지려면 그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의 문제 일반을 이야기해야만 한다. 이 점에서 특별히 기억해두어야 하는 것은 지역적 또는 민족적 분류의 임의성 뿐만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라는 이름 뒤에 가려진 사회적 분열과 복잡성이다. 동아시아라는 개념은 세계성이라는 오늘의 문제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 때, 그리고 ‘과거’와 ‘서구’ 모두의 산물인 오늘의 현실을 출발점으로 하는 경제적․정치적 정의의 문제에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경우에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계획으로서의 동아시아는 과거를 다시 쓸 것을 요구한다. 민족주의 역사학에 의해 다시 씌어진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민족적이고 국제적인 조직의 현재적 기준에 대한 대안을 통하여 동아시아인의 문화와 정치에 대한 역사적 경험이 드러내야 했던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하면서 써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에 대해서 단순히 문화적 정체성을 주장하는 것은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 이는 ‘서양’이 이미 뗄 수 없는 동아시아의 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러한 주장들이 새로운 문화적 가면 아래에서 사회적 불의와 억압을 계속 연장하는 데 도움을 줄지 모르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은 초월되어야 할 근대성이 더 이상 ‘서양적’인 것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근대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야만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각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권력의 이해에 맞추어 위로부터 정의된 지역을 거부하는 것이다. 단순히 미 유럽의 세력만이 아니라 그 지역 내부의 민족적․사회적 세력의 구조에서 오는 권력을 의미한다. 변화를 가져다주는 힘으로서 동아시아라는 개념이 의미가 있기 위해서는 지역 형성이라는 의미를 다시 재개념화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때의 지역 형성은 오리엔탈리즘적이고 민족주의적 시각하에서 만든 세계 지도 속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다양한 역사적 경험과 궤도를 보여주고 있는 매일의 필요와 상호 작용에 맞추어서 아래로부터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근대성의 역사학은 과거를 조직하는 데 있어 상상의 문화 영역이나 문명 또는 민족국가를 그 중심으로 하였다(이러한 요소들은 자세한 검토에 의해서 사실상 일정한 권력의 특권적 산물임이 판명되었다). 생존과 의미를 위한 매일의 투쟁을 목적으로 이루어진 초지방적․초국가적인 동맹 속에서 지역이 만들어졌던 것 같이 우리는 이제 이들 지역들을 그들의 역사성 안에서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이러한 지역 형성이 비록 식민주의 지리학이나 그것의 지방화된 표현인 강압적인 민족주의와 일치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지역 문화를 주장(아시아건 동아시아건 상관없이)하는 것은 종종 이미 가정된 민족적 특성을 아시아의 여러 지역과 대륙에 투사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에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역주의와 민족주의 사이에 모순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흥미롭게도 그 반대의 주장 역시 성립이 가능하다. 이것은 유럽의 경우를 예로 들어볼 수 있다. 유럽 연합(EU)이 형성되었을 때, 민족 국가에 대비되는 지방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주장이 급증하였다. 카탈로니아의 정체성 요구, 또는 코르시카가 프랑스에게 언어 독립을 요구하자 이에 대해 프랑스 문화부 장관은 인터뷰에서 이를 프랑스의 ‘발칸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다시 말해, 지역적 시각은 민족주의의 동질화에 대비되는 지방의 문화적 차이점을 표현하는 데 힘을 줄 수 있다. 마치 전지적 규모로 진행되는 세계화가 ‘잊어버린’전통이 ‘회귀’하는 데 힘을 실어주고 있듯이 말이다. 민족 국가가 아닌 다른 형태의 신원 증명(그리고 정당성)을 제공할 “동-동남아시아 연합”이 생긴다면 비슷한 결과가 일어날 것이다.


2장 도약하는 아시아의 도시들

아시아는 오늘 불꽃 없이 타는 빛이다.
아시아는 자동 파괴되고, 건설하고 변화한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현대성을 조각하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찾는다. 이들의 경제는 성장하고 활기를 띄고 수축하였다. 정치는 혼란스럽고 그들의 민주주의는 특이한 형태를 갖추기 시작한다. 이러한 국면들이 모두 아시아의 다이너미즘을 상징한다. 전통은 재연구되고 부활되며 창조적으로 전달된다. 서구의 근대화로부터 배우고, 연구하고 따라하고 거부된다. (후미오 난조)

(1) 아시아 도시들의 사회적, 경제적 차원
아시아의 도시들은 발전의 급성장의 중심축이었다. 도시에서 예술의 성장도 중간 계층의 사회경제적인 발전, 여가 시간의 증가와 소비재 그리고 관객의 증가와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특히 동아시아의 국가들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10년 동안에 전례없는 경제적 사회적 변화를 만들어냈다. 그 변화는 아시아의 거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마이클 시아오(H. H. Michael Hsiao)는 4가지 지역으로 요약해 준다.5)
첫째의 변화는 일본에서 일어났다.
둘째는 대만, 한국, 홍콩과 싱가폴이라는 ‘4개의 작은 용“으로부터 일어났다.
셋째는 중국 본토의 남동 연안과 ASEAN을 구성하는 6개의 동남 아시아 국가들(태국,필리핀,말레이시아,싱가포르,인도네시아,브루네이)로부터 생겨났다.
넷째는 중국 남부(주장강 삼각주와 양자강 삼각주)와 동남아시아의 특정한 ”중심지“에서 국제적인 방식으로 발전했다.
이들 지역에 퍼부어진 자본은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곳에서 온 것이다. 예를 들어 대만과 홍콩의 투자가 집중된 중국 남부를 보면 일본, 미국, 유럽의 경제 단체, 한국 외에 다른 나라들의 자본도 포함된다. 그리고 동남 아시아에는 1) 필리핀의 수빅만(Subic Bay)의 개발,
2) 메콩 강 중부와 남부의 하위 유역 3) 싱가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의 ”발전의 삼각관계“ 그리고 4) ASEAN의 동, 서 그리고 중부의 ”발전 삼각 관계“들은 모두 국경을 넘어서는 경제 발전과 자본의 국제적 투자에 의해 촉발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4개의 축은 아시아가 더 이상 1950년대에 서양에서 바라보던 눈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을 명백하게 시사하는 것이다. 당시에는 2차대전 후 서양이 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희망이 없는 곳으로 혹 조금이라도 있다면 아주 작은 가능성이나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간주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박지향이 저술한 [일그러진 근대](2003년)를 참조하길 바란다.) 그러나 지난 40년 동안 아시아는 소위 ’아시아의 기적‘과 ’아시아의 도전‘이라 불리는 잠재력을 크게 표출시켜 서구를 놀라게 하였다. ”무적의 일본“, ”중국의 위협“ 그리고 ”대만의 기적“과 같은 표현들은 아시아가 서양의 시선을 얼마나 끌었는가 보여주며 경쟁 관계로서의 경계심을 일으켰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동북에서 동남아로의 발전의 확장이 ”무적의 일본“, ” 4마리 작은 용들의 도전“, ”젓가락 문화의 부흥“, ”유교 문화의 부활“ 그리고 심지어 ”동양적인 가치“라는 표현을 낳음으로써 아시아를 바라보는 서양의 관점을 바꿔놓았다.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표현들이 아시아의 부러운 성공을 반영하지만 다른 면에서는 아시아를 다룸에 있어 서양의 갈등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 결과로서 1997년 후반부터 시작하여 아시아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심각한 경제적 곤경을 겪었다. 이는 발전과 성장에 대한 속도 조절과 내부에의 성찰이라는 의식을 되새기는 기회가 되었고 전후 아시아의 경제, 사회, 문화적 국면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온 발전의 4개의 변화를 좀더 깊이 주시하도록 해 주었다.
아시아의 도시들은 지난 80년대 이후 아시아의 발전에 주요 역할을 했지만 보다 거대한 세계적 현상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비록 “지방 분할”이 “세계화”와 “국제화”와는 다르게 보이지만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 가깝게 연결된다. 예를 들어 세계화는 발전의 공통된 목표를 추구하고 어떤 공통된 힘에 의해 추진되는 세계의 여러 지역에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이것은 세계화를 뜻하는 외관상 “동질화”되는 경향의 결과를 가져오지만 또한 “이질성”을 반영하는 “현지 우선” 형식의 역반응을 자극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서 세계적인 문화의 창조는 “공통 기반을 찾는 것”으로 결론이 나지만 “성공하는 개성”의 형태로 발동을 조장한다. 다른 시각으로 이 현상을 바라보면 금융기관의 전세계적인 네트워크에서 가장 명백한 세계화는 자본과 기술에 의해 격려된다. 전세계적인 재정과 대화의 복잡한 네트워크의 창조는 이미 즉각적인 경제상의 전기 통신 상호작용 체계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이 현상은 단순히 돈과 기술이 아니라 문화와 사회의 영역까지 영향을 준다. 예를 들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매일매일 보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인터넷 검색”을 한다. 한국과 대만은 세계에서 인터넷 접속이 가장 많은 곳으로 네트워크의 정보가 우리들의 생각하는 방법과 행동을 바꿔놓았다. 정보와 전기 통신의 맥락에서 새로운 기술은 세계화의 현상에서 또 하나의 국면이다. 아시아의 모든 주요 도시의 세계화는 “공통 기반의 추구”라는 것과 “성공하는 개성”이라는 어떤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예를 들어 동경과 대만은 그들의 명백한 비슷함과 개성적인 차이점을 모두 가지고 있고 대만과 자카르타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물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세계화의 영향은 경제, 자본 또는 기술에만 국한되어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깊은 면에서 문화와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슷함과 차이점들 그리고 공유하고 갈등하는 관심사들의 특징을 그려내는 세계 공동체는 기술과 자본의 모든 시스템의 운영 결과이기 때문에 누가 이러한 세계화의 유행을 선도하고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세계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동아시아의 도시들이 지역적 조건으로 대응하는 양상은 이제 도시 문화, 법인 경영과 경제의 모든 면에 나타난다. 세계 문화 혹은 “전지구적 문화global culture” 라 불리는 1990년대 이후의 문화 변동의 양상은 크게 네가지 특성을 보이고 있다.

첫째, 그로벌화한 조직 문화이다. 예를 들어 조직의 생각, 복장 규정과 언어의 형태를 보면 세계는 상당히 똑같고 상호간에 이해될 수 있다. 사실상 이미 조직 세계는 세계적인 문화를 위한 근대적인 구조, 문화와 경영의 형태를 가진 경영 모델을 만들어 놓았다.

둘째, 일상 생활의 세계화된 문화이다. 예를 들어 빠른 속도로 도시 생활과 소비의 일부분이 되어버린 패스트푸드와 탄산 음료의 형태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러한 제품들을 생산하는 회사들은 아시아 도시인들의 생활 감각과 삶의 스타일을 바꾸었다. 그것들은 이제 대만, 도쿄, 서울, 홍콩과 싱가폴과 같은 도시들의 일상에 없어서는 안되는(특히 젊은 층에게는) 부분을 형성한다. 서구의 패스트푸드 식당은 아시아인들의 음식과 음료수의 종류 안에 포함되어 우리들의 일상의 음식물을 “풍부하게” 하지만 현지의 지역적 특이성 안에 자리잡은 역사적인 식 습관과 취향을 “대체”하지는 않았다. 도시의 젊은이들에게 서구의 패스트푸드 식당은 단지 햄버거나 후라이드 치킨을 먹는 곳이 아니라 “한입 먹기 위한” 것보다 더 중요한 사회 활동이 이루어지는 중요한 공적인 실내장소가 된다. 비록 이것이 일상의 세계화의 한 면만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계적인 대중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소비가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세째, 세계화된 지식 문화이다. 아시아의 교육을 받은 도시 거주자의 증가하는 숫자와 새로운 중간층은 외국으로 나가서 서양의 생각하는 방식, 훈련과 행동에 참여하고 배운다. 그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면 자연스럽게 그들의 공통된 경험을 나눌 수 있는 단체나(여러 동창회와 같은) 클럽을 구성한다. 그들은 본질적으로 아시아의 도시들에 “국제적인 능력 단체”라고 불리는 문화와 태도를 가져와 서구의 지식 문화를 이식한다.

네째는 새로운 사회 운동의 글로벌 문화이다. 환경 보호, 인권, 여성의 권리, 페미니즘, 소수의 권리와 종교 부활과 같은 공통된 세계화 활동들은 전 세계에서 공유하는 대중적인 문제들을 반영한다. 이러한 문화적 세계화의 네 가지 국면들을 거론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대중적 열망의 새로운 장소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것은 보다 많은 시간과 돈을 축적하고자 하는 욕망과 물품을 소비하고싶은 욕구, 공통된 인식과 가치 체계를 만들고 싶어하는 요구와 현세긍정적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싶은 소망을 포함한다.

이러한 4가지 전지구적 문화의 양상들은 대만, 일본, 한국, 중국, 홍콩과 싱가폴에 지역 특유의 적응 방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대만에서는 근대적이고 국제적인 조직 구조에서 찾을 수 있는 서양 방식의 경영이 아마도 사람들을 하나로 단합시켜온 오래되고 정착된 형태의 관리 문화를 완전히 대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는 새로운 방식의 관리 형태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대만에서는 개인 중심적인 모델의 미국 기업과 단체 중심적인 일본 모델이 모두 소개되었지만 그다지 적당하지 못하다는 평가들이 있다. 세계화의 영향 아래 모든 기업은 자기들만의 모델, 구조와 훈련 방법을 찾는다. 이들은 모두 현지의 기업들이 지역 문화와 습관에 어울리는 방법과 스타일을 찾으면서 그와 동시에 세계화에 발맞추어 나가는 여러 형태의 반응을 보인다. 예를 들어 대만의 현대적 생활은 전통적인 건축양식과 고가구에 대한 관심의 부활, 찻집, 현지 음식, 전통적인 점치기와 우주론 그리고 흙 점과 같은 여러 가지의 지역 기반적 반응들을 포함시킨다. 1970년대의 대만의 생활 문화 운동은 공통적인 기반을 조성해냈고 80년대의 사회 운동은 사회 조직들의 개혁을, 90년대의 정치적인 운동은 국가 정체성을 재건하는데 큰 관심을 기울였다. 이들은 대만 사회의 지식인들이 추구한 문화적 인식, 사회적 개혁과 국가적인 정체성의 목표들에 대한 지역적 반응들이다. 대만은 대중 소비 문화에 대한 세계적 유행에 능동적으로 반응하였다. 라틴 아메리카 카톨릭의 복음 전통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종교활동이었지만 대만에서는 그와 다르게 생활 속에서 불교의 새로운 적용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대만에서 불교의 부활은 개종이나 불교적인 관념적 요소들을 퍼뜨리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생활 방식으로 “속화”하는 것으로 구성된 대중적인 운동이다. 대만의 불교는 섬의 남부, 중부, 북부 드리고 동부의 네 명의 위대한 종교적 지도자가 있고 비록 그들의 스타일이나 관객들이 다를 지라도 그들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대만의 환경 보호, 소비자, 소수 그리고 여성의 권위를 포함한 지역 우선의 문제들을 해결해가는 생활 방식을 유지하면서 다른 사회 운동들과 깊이 연관된다는 점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모든 동아시아 도시들에서 글로벌 컬처의 트랜드를 가장 뛰어나게 흡수하고 퍼뜨리는 능력으로 지역적 반응을 만들어 내는 사회 계층은 중간 계층이라는 점이다. 동아시아의 지난 20년간의 경제 발전의 바탕은 도시 중간층의 “집단적인 소망”을 반영하는 표현이다. 그러한 소망들은 물질적인 부를 소유하는 것, 현대적인 소비 방식의 추구, 사회적 지위의 성취, 정치 참여와 국가적 정체성을 활성화시키는 것 등을 포함한다. 따라서 동아시아 도시 문화의 그 무엇도 중간층의 소망을 외면할 수 없다. 이러한 전지구적 문화의 네 변화와 그것들에서 발생하는 지역 고유의 반응 속에는 명백히 지역의 내부 메커니즘과 연관이 있다. 상호 자극과 영향 관계, 외부적이고 내부적 요소들의 영향을 통해 지적이고 사회적인 운동들이 세계 자본주의 문화에 대응하고 그것을 내부로부터 재구축할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동아시아의 도시들은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네가지 변화를 따라 “문화적 변화”의 대안적 타입을 형성해가는 다섯 번째 길 위에 있다.

(2) 아시아 도시들의 문화적 잡종성
아시아는 전세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무엇이 그들을 끄는 매력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혼자서 생겨난 경제적 자급 자족의 닫힌 세상이라는 사실보다는 인간의 이해를 넘어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잡종성’을 가졌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동아시아의 도시들의 매력은 묘하다. 사실상 어떤 문명도 아직까지 평화를 가지고 있는 조각 그림 맞추기의 조합을 알아내지 못했다. 이 변화무쌍한 지역을 만화경같이 끊임없이 변형되는 거대한 변화가 지나왔다. 아시아 도시들은 다음과 같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준다.

․높은 밀도 density
밀도가 높다. 인구 밀도, 공간 밀도, 이용 밀도에서.
․빠른 변화 속도 speed of change
변화 속도가 빠르다. 변화 주기가 짧다. 경제 격변과 밀접하다.
․큰 변화 규모 size of intervention
개입의 규모가크다. 재개발/신개발 등. 대기업화/정부의 공룡적 개발 프로세스
․극적인 화려함과 극적인 한계성의 공존 parallel formality & marginality
소위 잘사는 곳과 못사는 곳이 바로 이웃한다.
․극과 극의 스케일의 병존 extreme contrast of scale
대형 초고층과 미세한 작은 건물들이 한 장면에 얽힌다.
․수많은 요소들의 한 장면화 limitless elements in one scene
특히 정보 커뮤니케이션 요소들. 간판․사인․문자․색깔 들.
․무질서/혼돈? disorder/chaos?

아시아의 도시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동경대학 문화정치과의 강상중 교수의 말을 인용해보자.

가난과 절망이 들끓는 한복판에 초고층 빌딩들이 우후죽순 처럼 세워지고 열대성의 후기-모던한 리조트들이 홍수림의 더럽고 질퍽한 물가에 인접하게 건설된다. 삶과 죽음이 혼란스럽게 모아지는 가축과 사람들의 무리가 길에 떼지어 모여든다. 야외 노점들의 잡음은 모닥불을 회상시키는 노출 전구들에 의해서 밝혀진다. 초원 위의 텐트들은 시간이 먼 옛날의 것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 잘 알려져 있듯이 이러한 이미지들은 전자 매체를 통하여 동양식의 새로운 상상적인 지도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우리가 아시아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매체의 홍수에 빠져있다. “사실적인” 아시아, “진정한” 아시아는 어디에 있는가?, 그러한 종류의 확실한 “아시아”를 찾는 것은 부질없다. 사실 그러한 이미지들을 열망하는 것은 동양적 양식에 대한 욕구일 뿐이다.아시아는 스스로 그러한 것들은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이해하고 이들은 일종의 감정적인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실 그러한 면에서는 아시아가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그러한 종류의 정체성을 자지고 있다는 소설을 즐길지도 모른다. 따라서 아시아 사람들은 “아시아의 단순한 행위 또는 순수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한다. 탐욕스러운 욕구 형태와는 반대된다. 위의 모든 사실들을 고려해보면 그들에게는 아시아 말고 다른 이름을 찾아 줄 기회가 왔다.

시장이라는 교환 시스템 주위를 가득 채운 소망이 아시아 도시들의 혼란스런 간판을 지나가는 빛의 흐름처럼 사람들을 활기 띄게 한다. 이는 마치 개별적인 아시아들이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의해 단 하나의 아시아로 단단하게 압축된 후 사방으로 흩어진 것과 같다. 그 모든 조각적 부분들에 아시아가 새겨져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아시아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에 대한 많은 환상이 존재하는 동시에 하나인 것처럼 과장된 다수의 ‘가짜 아시아’가 소생한다. 도쿄는 아시아인가? 홍콩, 상해, 서울, 대만 아니면 싱가폴이 그러한가? 그것들은 모두가 분명히 아시아의 도시들이다. 대영 제국식의 지배가 성급하게 꾸며놓은 자리의 흔적을 보유한 고층 빌딩, 식민지의 대로를 채운 밀집된 빌딩들; 국적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발산하는 아시아 금융 센터, 왕조 시대의 유적이 남아있는 도심에 유럽의 세기말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다양한 이종 문화가 융합되어 있는 장소들, 모든 것이 혼성된 채 시간이 흘러가는 아름다운 섬인 타이완, 뉴욕을 독창성이 없는 미니어처로 모방한 도시 국가들. 이 가운데 어떤 단 하나의 도시라도 서구로부터 침탈당하지 않은 것은 없다. 또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일본 식민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도시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중 어느 도시도 자신들의 의식을 잃거나 처참히 붕괴한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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