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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에 대하여

이영철



“…화가와 시인들은 언제나 감히 모든 것을 한다는 당연한 힘을 가지나… 동물들을 온순하게 하고 금수를 사납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뱀들을 새들과 한쌍이 되게 하기까지(Pictoribus atque poetis Quidlibet audendi simper fuit aequa potestas…
Sed non ut placidis coeant immitia ; non ut Serpentes avibus geminentur…)”(호라티우스의 [시론] 행 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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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인용문은 18세기의 문인 디드로가 호라티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화가의 상상력 안에 깃들어 있는 혼성의 힘에 대해 언급한 글이다. ‘뱀들을 새들과 한쌍이 되게 하기 까지’라는 극단적인 표현이 화가의 창조적 재능을 위한 비유로서 사용되었다. 우리는 한 꽃에서 다른 꽃으로, 뱀에게서 새로 시선을 이동할 수 있지만, 뱀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그것의 잠재적 대응의 쌍인 새를 통해 변형시켜 버릴 수도 있다. 모든 이미지를 애초부터 실재라고 간주한 베르그송의 우주적인 지각에 이르게 되면, 뱀이라는 이미지는 자신의 위치(locus)에서 다른 이미지와 합생(合生)될 수 있다. 이미지는 명료한 이념이 현상계에 투사된 플라톤의 그림자가 아니라 현행적-잠재적인 것인 한, 그것은 현실의 일부이자 곧 혼성적인 것이다. 우리가 어떤 예술을 혼성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혈통(계보)에서 벗어나는 시뮬라크라의 힘, 자신만의 생성 외에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근거지워질 수 없는 외관들, 이미지들, 그리고 비인칭적 스타일들을 만들어내는 경우를 지칭한다. 예술은 그 속성상 방법이라는 고정된 틀에서 자주 벗어나고, 논증들의 정합성을 실추시키면서 불일치, 오인, 비일관성, 그리고 어리석음을 과장하는 일이 흔하다. 시뮬라크라는 우습고 기초가 없는, 그리고 기묘한, 어떤 종말이나 목적도 가지지 않은 ‘컨넥션들’을 창조할 수 있는 힘에 기반해 있다. 한국의 고대 문헌인 [산해경]에 나오는 다양체로서의 혼성화된 동물 이미지들은 기괴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리고 보르헤스가 푸코를 흥분시켰던 중국의 동물 분류는 언어의 공통된 의미나 논리로서 사용된 것이 아니다. 동물을 정의함에 있어 황제에게 속한 것, 향료처리를 한 것, 길들여진 것, 먹을 수 있는 것, 물병을 깬 것, 인어 등으로 분류하는 방식은 유동적이고 수정할 수 있고 소급적이고, 한계가 없다. 그리고 그것들의 기준은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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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은 포스트모던 시각 예술을 특징짓는 대표적인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혈통 상황을 지칭하지 않고, 종의 변동이나 과정을 지칭하는 말이다. 고정된 가치와 문화를 내부로부터 변질시키는 혼성의 힘은 닫혀진 시스템를 내파시키는 정치적 의미를 갖는다. 임계적인(critical) 상황에서의 예기치 않은 변화를 가르킨다는 점에서 혼성은 낡은 패턴을 깨고 새로운 성질을 탐색해 가는 창조와 발명의 특성을 지칭하는 말로 폭넓게 사용되기도 한다. 이 단어가 한국 미술계에서 명시적으로 사용된 것은 1997년 5개의 테마들로 직조된 광주비엔날레의 본 전시에서 였다. 동아시아의 ‘오행론’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 조차 이런 의외의 테마 설정(예컨데 속도와 물, 공간과 불, 혼성과 목 등)에 에 대해 ‘자의적’이라는 비판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의미화가 아니라 주체성의 생산에 초점을 두었으므로 자의적이라는 평가는 비판이 될 수 없다. 우리가 비엔날레 전시를 하나의 결속된(conjugated) 메커니즘이 아니라 ‘접합’과 ‘앗상블라주’로 이뤄진 거대한 혼성체로 받아들인다면, 오행의 사용은 미술의 화용론에 있어 유력한 작동 인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혼성은 수목적 모델, 수목적 사유, 즉 나무(Tree)라고 하는 수직적, 위계적, 중심적 구조에 기초하기 보다는 비선형적, 아나키적, 수평적, 유목적 리좀의 운동과 유사하다. 들뢰즈의 말을 인용하자면, 수목적 모델은 식물학에서 생물학, 해부학에 이르기까지, 나아가 인지학, 신학, 존재론은 물론, 모든 철학, 모든 예술에 이르기까지 서양적 사유와 문화 속에 깊숙히 침투되어 있다. 광주비엔날레에서 리차드 코살렉이 큐레이팅했던 “혼성과 목”이라는 테마의 전시는 목의 성질, 즉 고대 동아시아의 오행론에서 씨앗(물)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목(乙)이라 한다. 목은 DNA 운동, 아이의 출산, 나무의 나이테, 버섯의 증식, 총알의 전진 등 나선형을 그리며 이동하거나 전진하는 생명 운동의 특성을 이룬다. 그것은 비정형적, 비실체적인 불이나 물의 특성과 달리 스스로 변이하며 다양하게 실체를 변용해가는 점에서 인간의 뇌신경에 가깝다. 리좀은 줄기가 변태되어 생긴 땅속 줄기로 제멋대로 뻗치고 이동해가는 망상 조직을 이룬다. 그것은 다양한 거미집 처럼 중심을 갖지 않은 이질적인 선들이 상호교차하고 다양한 흐름과 다양한 방향들로 복수의 선을 만들며 사방팔방으로 뻗쳐나간다. 단적으로 리좀은 구성되는 복수성(n)으로부터 유일자(1)를 뺀 것, 즉 n-1이라는 복수성의 체계이다. 대상 안에서 주축의 역할을 하는 통일성이 없으며, 안에서 분할되는 통일성도 없다. 하지만 혼성에 대해 우리는 여전히 이분법적 사고를 전제하는 습성에 젖어 있다. 예컨데, 오늘의 세계를 ‘포스트모던’이라고 칭하는 한가지 이유로서 인공의 세계가 현실과의 관계를 상실한 채, 복사물과 이미지들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스트모던 세계는 TV, 광고, 디자이너의 상품들의 복사물, 복제 생물, 브랜드 상표들의 무의미한 반복들, 그리고 일상의 모든 것이 컴퓨터 시뮬레이션 따위에 지배되어 가고 있다는 과장법이다. 또한 기술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가상 현실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적에도, 우리는 마치 현실적이거나 실재적인 세계가 존재하고, 그 다음에 그것에 대한 가상적이거나 비실재적인 복사물이 있는 것 처럼 여기며, 비실재적 복사물이 자체 증식을 통해 혼성화한다는 식으로 생각하곤 한다. 미술 작품에서 착상은 중요하지만 그것이 이미지들을 형성하는 과정과 별개로 존재할 수 없다. 한편으로 이미지의 과정을 다루고, 다른 한편으로 사유의 과정을 다룬다는 것은 애당초 빗나간 사고의 습관이다. 그러나 교육 과정에서 우리는 양자를 조절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정부로부터 돈을 받기 위해 작가와 큐레이터들은 여전히 주제를 요구받는다. 창작이 우선 이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거나 그와 반대로 사유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식의 전제는, 신이 자신의 모습을 닮게 빚은 흙에다 영혼을 불어 넣었다거나, 예술은 이념에 감각의 살을 붙히는 것이라는 식의 이분법에 집착하는 방식이다. 혼성은 이런 생각 자체를 그 시작점에서 무너뜨리는 일이다. 뒤샹의 대작인 <큰 유리>에 대해 “그것은 지적으로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라고 피에르 샤반느가 묻자, 뒤샹은 “난 그것을 모른다. 그것은 기술적인 일들이었다. 그림의 바탕으로서 그 투명성 때문에 흥미가 있었을 뿐이다. 그것으로 이미 충분했다.”라고 간명하게 말했다. 혼성은 지식의 기원이나 의미 생성의 문제가 아니라 진행 과정에서의 기술적인 부분들의 관계들이다. 이런 예는 임충섭의 작업 <화석-풍경>에서 뚜렷하다. 자연, 테크닉, 문화의 복잡한 관련들을 시각화함에 있어 임충섭은 칠판, 영사기, 청중, 학생들로 이뤄진 일종의 학교를 보여준다. 해럴드 제만(Harald Szeemann)은 그의 작품에 대해 “기술과 자연의 갈등은 칠판으로부터는 정적인 강당-화석들과 발견물들로 채워진 여러 상자들과 장방형의 유리가 달린 철로 만든 감옥과 같은 공간 속에서 앉아 있는 학생들-을 향해 투사된다. … 속도, 시간, 비례는 물, 시간의 경과, 종이, 뒤범벅된 소음을 동반하면서 전도된 거울상을 비춰준다.”고 기술한다. 우리가 혼성을 진행 과정에서의 기술적인 일들, 즉 화행론의 차원에서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것의 고정된 의미를 구하려 들것이고, 그것에 살을 입히는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미술에 있어 혼성을 미술가들의 표현 방식에 있어 단순히 혼합 매체의 뒤섞임으로 단순화하는 경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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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성은 포스트모던 시각 문화, 즉 문화의 교차 현상(criss-cross phenomena)과 관련해서 리좀의 특성을 갖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패션, 광고, 클럽 서큐트, 그리고 연극이 시각 예술의 특별한 분야인 것 처럼 등장했고, 미술은 시각 문화의 영역으로 보다 넓게 확장되었다. 예술가나 이론가들은 여러 다른 장르, 매체, 분야들 간의 시각적인 교차 그리고 그것의 이론적 가능성에 대해 흥분하기도 한다. 포스트 모던 시각예술은 이질적인 것들을 섞어 대중들의 관심을 유발하기만 한다면 무어라도 해방적이라는 식으로 찬양된 것은 아닌가? 시각 문화라는 것은 단지 서로 다른 문화의 뒤섞임 정도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던가? 시각 예술 전시와 패션쇼와 문학적 에세이가 한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날 때, 관건이 되는 것은 무엇인가?
문화의 교차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테크놀로지의 확장으로 인해 시각문화의 현상은 보다 스펙터클해져 가며 관객들은 이미지들의 홍수에서 판단력을 잃어간다. 어떤 이론가들은 소비자들이 시각적 이벤트에서 정보, 의미, 쾌를 추구한다고 주장한다. 오늘날 시각 문화가 생산자 보다는 소비자의 입장에서 포스트모던 일상 생활의 계보학과 정의와 기능을 연구하는 방법 또는 전략임을 강조하면서, 또한 그와 동시에 오늘의 시각예술을 개인과 집단 모두가 보여주는 시각 매체에 대한 반응을 이해하는 데 집중된 유동적인 해석과 연관짓는다. 예술은 관객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만 깊이를 희생해 가며 치뤄야 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관객들의 반응과 광고 효과를 위해 예술의 그와 같은 특성을 근저에서 잘라내는 행위를 누군가 했다면 그는 전시 전체를 광고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이런 사건은 실제로 5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일어났다. 광고가 충격을 주고, 또한 주려고 하는 이유는 그것이 요구받는 기대에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것과는 반대되는 것이 예기치 못한 것, 재인되지 않는 것, 재인 불가능한 것 등으로부터 생산된 예술이다. 대중예술은 존재한다. 예술을 다루는 상업은 있지만 상업 예술은 없는 것이다. 그것은 난센스다. 오늘날 사람들은 상업적인 것과 창조적인 것의 구별을 부인함으로써 스스로가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버릇이 생겨나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는 편이 이익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우리의 관심거리인 문제와 질문을 제시하는 것이지 대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창조적 작품에는 정서의 증식, 정서의 해방, 심지어는 새로운 정서의 창안까지도 존재한다. 이것이 창조적 작품을 상업의 미리 제작된 정서와 구별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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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가에게 있어 ‘방법’은 자신의 언어를 한계까지 밀고 가게 하는 것이지만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는 조건이다.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때 비로서 새로운 이미지를 획득하게 된다. 오늘날 시각 예술이 개념적으로 큰 혼란을 보이는 주된 이유는 컴퓨터에 의존하는 우리들의 생활, 그리고 시각예술 안에서 스크린에 기반한 작업들의 확산에 있다. 이는 미술에 단순히 새로운 표현 영역이 첨가된 것이 아니라 지각, 미적 경험, 시공간, 주체와 대상 따위의 개념적 도구들 전체가 재고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혼성적 지각은 열려진 시스템에서의 부단한 유동성을 전제하는 것으로, 지각을 형성하는 요소들의 기원을 식별하기 불가능하고, 설사 가능하다고 해도 결과적으로 불가능해 보이도록 만들며, 그 기원을 굳이 구별하거나 알아야 할 의미도 필요도 없게 한다. 물론 각각의 이질적 요소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그 요소 중 가치가 있거나 발전가능성이 있는 요소의 선택 단계에서 예술가의 지적 능력이 요구되며, 이들의 혼성화 기술로서 예술가의 미적 안목과 예술의 기술적 이해가 요구된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새로운 종으로 재탄생한 예술은 그 자체로 완전히 새로운 의미와 개별적 정체성을 가지며, 각각의 구성 요소들은 더 이상 개별적 식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이웃한 다른 요소들과 일체성을 이룬다. 이렇게 탄생한 예술은 또다른 종과의 교배를 위한 하나의 단위 요소가 된다. 혼성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삶의 공간인 도시의 이상적 변형과 연관이 깊다. 그것은 대지에 뿌리 박은 거대한 식물과 같은 것이며 거주를 위해 스스로 자라나는 최소 단위의 숲이다. 이태리 건축가 파올로 솔레리(Paolo Soleri)는 1970년부터 애리조나 사막의 한 부지에 ‘아르코산티’라고 하는 생태주의적 인공 마을을 만들어 오고 있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이 이상적인 공동체 프로젝트는 6,000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건물이 자연 환경과 공존하도록 조성된다. 마을 구성원 모두가 같이 노동하고, 물적 자원과 인적 자원이 효율적으로 교류되고, 다용도 공간을 활용하고, 태양열을 이용하여 조명 및 냉,난방을 자연에너지로 순환시키는 등의 다양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도시를 축소화하고 집약시켜 도시 내부에서는 주로 걸어서 이동하고 자동차를 위한 길을 줄여 대지와 에너지, 자원의 소비를 근본적으로 줄이는 것을 실천한다. 그는 존재하는 것을 파괴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들에 무엇인가를 결합하며, 변형되어 가는 방식을 중요히 여긴다. 그것은 결국 사회와 환경이 필요로 하는 것들에 제대로 반응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를 창안하는 일이다. 소형화와 복잡화의 범주 사이에 총체적 연관이 있으며, 두가지는 기술을 통해 혁명에 이를 수 있는 올바른 지침들이다. 생태학적 차원에서 공동작업을 해온 일본의 <아트 캠프>는 자연과 마을을 배경으로 지역의 주민들과 공동으로 복합예술을 만들어가는 예술가 그룹이다. 하쿠슈라는 시골 마을에서 일정 기간 체류하여 농사를 지으며, 워크숍을 갖고, 환경, 건축, 음악, 무용, 미술이 함께 복합된 활동을 함으로써 구성원들은 새로운 체험을 하게 되고, 지역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발시킨다. 시간 속에서 모든 것들이 상호 결합하고 변하며 사라져 간다는 것을 생동감있게 보여준다. 미 서부에서 결성된 갈라(Gala) 그룹은 교육, 지식의 세대간 전수, 다층적인 내러티브, 시적 구성을 위한 가능성들을 개발할 수 있는 하나의 적절한 지점으로의 TV 방송에 적극적으로 접근해 들어가 공동작업을 수행했다. 멜친이 처음 기획하여 미술가, 사회학자, 도시계획가, 비평가, 방송 관계자 등 60명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작업한 결과물 전체를 전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지역의 중산층들이 즐겨보았던 <장소의 이름으로>라는 TV 드라마 세트를 그대로 모방하여 장소특정적 작품을 만들고, 그 안에 자료, 오브제, 이미지, 설치물들을 전시한다. 그들은 프로젝트의 성격과 그 과정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그리고 관객들의 반응과 견해들을 청취하고 기록들로 제시한다. 일본의 건축가 시게루 반(Shigeru Ban)은 윤리적 실험자이다. 그는 고베 지진 당시에 피난민을 위해 통종이 집(paper log house)을 만들었다. 지진에서 피해를 보는 많은 사람 일반을 위한 것이 아니라 비록 많은 사람들이 보조에 참여하더라도 제외되는 케이스, 즉 주변화된 이민자들, 불법 체류자들, 베트남 보트 피플들 그리고 인구 2퍼센트 이하에만 봉사를 하는 열악한 일본 교회 집단을 돕는 것이었다. 미국의 젊은 작가 릭 로위(Rick Rowe)는 97년 캘리포니아 한 마을에서 <와츠 하우스 프로젝트>라는 작업을 했는데, 이것은 홈리스 피플을 위해 버려진 낡은 집을 개조하는 프로젝트였다. 자신을 포함해 다른 여러 작가들, 이웃, 주민들, 공동체 집단들, 사업계 지도자들, 그리고 시공무원들을 모아서 대화와 토의를 해 가며 공공미술을 실천하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지역의 역사, 개인의 다양한 이야기, 경제적 문제들, 차이와 차별들, 공동체 의식들에 대해 논의하며, 주어진 조건을 개선해 가며 목적을 달성하는 여러가지 계획들을 실천했다. 태국 작가 라빈 라완차이쿨(Navin Rawanchaikul)은 세계 도처에서 집단적인 공공적 참여를 고취시키는 한편, 전시장 안으로 사회적 사건들을 끌어 들여, 미술을 일상 현실의 영역으로 넓히는 작업을 한다. 아틀란다의 피난민 어린이들에게 소지품이나 드로잉, 회화, 콜라주 재료들, 소품들을 포함하여 그들 자신의 개인적 기억들을 표현하는 물건들을 기증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는 마분지 상자로 만든 집 안에서 며칠간 생활을 하며 아이들이 보내온 이미지와 소품들을 전시하며 관객도 이 과정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 개인이란 조작적인 술어이다. 개인이란 것은 인간 개체들을 통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반(反)사회적인 침입자’이다. 폴 맥카시는 인간들 사이에, 혹은 인간과 동물들 사이에 성관계 혹은 오럴 섹스를 하게 만들어 현대의 민속 문화와 고대적인 반향의 영향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처럼 혼성은 인간 존재의 이질성을 전제로 그러한 개인의 순종성, 인간의 우월성을 문제 삼는다. 그것은 이탈로 칼비노가 ‘세계의 미친듯한 스펙터클’이라 부른 것 속으로 진입해 들어가는 거부할 수 없는 본성에 감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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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주권 형태에서 위계는 반드시 이분법적 분할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혼성은 위계를 무너뜨릴 수 있는 위협적인 힘이 된다. 근대 국가의 주권론과 군사 정권이 결합된 형태로 일관해온 한국 근현대사 안에서 정체성의 본질주의 및 동일화 경향은 아무리 비판해도 지나치지 않다. 문화들은 항상 이미 부분적이고 잡종적인 구성체들이다. 다양한 소수 민족적 구성 때문에, ‘민족 국가’라는 이름은 전지구적 체계 구성원 중 오직 1/4에만 들어맞는다. 이러한 사실은 전지구화의 분리적 귀결이 매우 비옥한 토양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민족은 두 문화적 혼성체이다. 서유럽에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나 종족성으로 규성된 민족(국가)은 없다, 유럽을 선도하는 한국은 역사적으로 무수한 침략을 받으면서 끈질기게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해왔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민족적 근본주의 성향을 지속해온 나라에 속한다. 문화적으로 반서구주의 혹은 비서구주의는 유럽-미국 헤게모니의 무기인 근대성에 대한 자각을 담고 있으며, 한국 뿐 아니라 많은 비서구권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 속에 내재해 있다. 다양한 소수 민족적 구성 때문에, ‘민족 국가’라는 이름은 전지구적 체계 구성원 중 오직 1/4에만 들어맞는다. 이러한 사실은 전지구화의 분리적 귀결이 매우 비옥한 토양에서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현대 민족은 두 문화적 혼성체이다. 서유럽에는 하나의 민족, 하나의 문화나 종족성으로 규성된 민족(국가)은 없다, 유럽을 선도하는 한국은 역사적으로 무수한 침략을 받으면서 끈질기게 민족적 단일성을 유지해왔다. 그로 인해 오늘날 한국은 근대화 과정 속에서 민족적 근본주의 성향을 지속해온 나라에 속한다. 문화적으로 반서구주의 혹은 비서구주의는 유럽-미국 헤게모니의 무기인 근대성에 대한 자각을 담고 있으며, 한국 뿐 아니라 많은 비서구권 국가들의 근대화 과정 속에 내재해 있다. 1980년대 민중 미술의 경우 민족적, 문화적 근본주의의 요소가 강했고, 이는 서구의 모더니즘에 대항하는 탈모던적 근본주의라는 역설적 형태를 갖고 있다. 탈근대주의와 근본주의의 이런 결합은 여러가지 점에서 대극점들, 즉 잡종성 대 순종성, 차이 대 동일시. 유목성 대 정지성에 서있는 기묘한 결합태이다. 또한 우리는 모더니즘 미술을 획일적이고 동질적으로 보아온 관점들에서 벗어나 그 내부에 두개의 다른 흐름이 존재하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의 현대 미술 안에도 근대화 일반에 내재한 두개의 다른 흐름이 있다.

첫째, 내재성의 장소를 발견하고 특이성과 차이를 찬양하는 흐름이 있다.
둘째, 이원론의 구축과 매개를 통해 앞의 이상주의적 사고와 행위들을 통제하면서 결국 근대적 권력 개념에 도달한 흐름이 있다.

80년대 이후 한국 미술은 첫째의 흐름을 외면하거나 무시했다. 90년대 ‘포스트’ 담론의 환산은 계몽주의와 근대성에 대한 단순한 거부 현상을 가져와 차이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심지어 혼종성은 무엇이든 좋다는 식의 자유방임적인 다원주의 같은 부정적인 양상이 나타난다. 진정한 실천은 생산의 수준과 관련된다. 혼성과 다양성에 맞서 순수한 정체성을 재구성하고 응집성, 폐쇄성, 그리고 전통을 재건하려는 시도들이 끊임없이 방해를 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활동과 유산 안에서 그리고 현재 안에서 내재성의 장소를 발견하고 특이성과 차이를 찬양하는 것들을 살려내면서, 급진적인 탈근대주의적 실천, 즉 난민, 주변자, 피착취자, 그리고 피억압자들의 가치와 목소리를 체현할 수 있어야 한다. 탈식민과 탈근대를 양자택일하는 것이 아니라 교차하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 필요하다. 차이의 복수성을 이항적 대립으로 훤원하고 차이들을 통일적인 질서에 포섭하기 위한 근대적 형태의 지배, 배제, 그리고 명령의 중심 논리인 변증법에서 벗어나는 언술적, 비언술적 실천들이 활성화되어야 할 것이다. 90년대 말에 와서야 젊은 세대들의 새로운 작업을 통해 어느 정도 진전이 있었지만, 그것이 해방적인 전망을 제시한 것은 없다. 이분법적, 총체화하려 드는 권력 구조 이후에 오는 세계는 무엇인가? 그것은 고립되고 파편화된 존재가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 형태, 가정적이지 않은(unhomely) 것의 공동체, 새로운 국제주의, 다이아스포라에서의 사람들의 결집일 것이다. 또한 사회적 연대를 향한 심오한 욕망을 긍정할 것이다. 대안 공동체의 종자는 문화의 국지성, 문화의 잡종성, 그리고 이분법적인 사회적 위계 구조화에 대항한 문화의 저항에 관한 세심한 관심에서 생겨난다. 이민 작가는 교차되어 있는 세계에서 태어나거나 그곳에서 오래 살면서 변환된 사람이다. 그들은 식민지 이후 시대의 이민에 의해 만들어진 새로운 이산(diaspora)의 산물이다. 그들은 적어도 두가지 정체성 속에서 살고, 두 문화의 언어를 말하고 그들 사이에서 번역하고 협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르셀 푸르스트의 말 대로 모국어 안에서 외국인이 될 것”을 요청하는 것이다. 인류 문화의 역사는 감염의 역사이고 그 문화를 실어나르는 언어의 역사도 감염의 역사이다. 언어는 다른 세계와 만나면서 풍부해지고 생명력을 얻는다. 모든 언어는 혼혈이며, 순수한 언어란 없다. 갇혀 있는 언어는 이미 죽은 언어이다.

- 출처 : 2004 대구텍스타일 아트 도큐멘타 전시 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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