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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지마 다츠오와 윤동구

이영철


80년대 중반 이후 국제무대에서 널리 알려진 일본 작가 다츠오 미야지마의 전시와 50대의 나이에 스타일이나 브랜드에 얽매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는 작업을 왕성하게 해온 윤동구의 전시가 거의 동시에 서울에서 열렸다. 이들은 다루는 매체, 표현 방법, 기질에 있어 극단적으로 대비가 된다. 이들의 작업은 하이 테크와 로우 테크를 다루는 방법의 이면, 공간의 일반기호학, 시간, 공간과 실존, 삶과 죽음, 시간과 세계화의 문제 등 흥미로운 토론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 우리가 사는 현대의 신화는 노동을 시간으로 측정하는 인간의 잔인한 발명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현실은 계측이나 모듈을 벗어나 생각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러나 시간에 대해 현실을 넘어 초월적, 선천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모든 사고는, 관례에 의하건 계산에 의하건, 노동은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가장 결정적으로 파괴된다. 살아있는 창조적 노동은 개별화될 수 없고 측정할 수 없다는 사실이 현대 세계에서 가장 명확히 증명되는 유일한 장소가 예술이다. 이것은 예술이 현대 세계에서 위대한 영웅적 기념비가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예술가의 행위는 자의적으로 정치적 내용을 표방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 불복종과 반란의 의미를 이미 획득한다.


일상적 삶의 변형에 힘차게 개입해 들어가는 미야지마와 윤동구의 작업은 생체 정치bio-politic에 속한 모든 물질적, 비물질적, 지적, 육체적 노동의 부분을 구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들 내부에는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경제적인 것, 그리고 생명적인 것 모두가 공존한다.

80년대 중반 부터 야나기 무네요시와 함께 국제 무대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다츠오 미야지마는 통제 사회로의 이행 국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작업을 해왔다. 그 배경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일본 지식계에 불어닥친 새로운 사상적 움직임, 즉 삶에 철두철미 스며드는 생체 권력에 맞서 어떻게 저항할 것이냐의 사회 의식과 결합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저항은 주변적이지 않으며 네트워크 속에서 열리는 사회의 중심으로 개입하여 실천하는 것을 의미했다. 미야지마의 지난 10년의 작업은 일본 현대미술 안에서 반서구주의 운동의 전선에 걸쳐진 일본 모노화의 전통에 연결되면서 90년대 이후 극한적으로 개별적인 지점들을 특이화하는 탈모던 경향의 개념주의 작업들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시간의 바다](1988)에서 [메가 데스](1999)에 이르기까지 그가 사용한 디지털 계측기(LED, light Emitting Diode)와 수행적performative 표현 방식은 최대한의 복수성(複數性)과 구속할 수 없는 특이화라는 새로운 환경-사건 환경-을 무대화staging하는 일이었다. 세계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프로세스의 방식으로, 말과 사물의 언어가 컴퓨팅으로 대체되면서 수number라는 도구가 아날로곤analogon, 즉 존재와 사물 사이의 유사 관계를 나타내는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판단을 갖게 한다. 여기서 미야지마는 대중들의 관심 속으로 접근하기 용이한 숫자 세기numbering의 수단을 통해 오늘날 테크노 과학- 도구조작과 조사연구- 으로 치닫는 현대 과학이 자체의 철학적 근거에서 벗어나 길을 잃고 있는 것에 대해 생태적, 종교적 물음을 던지면서 예견할 수 없는 시간의 문제는 우리의 구체적 실존과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사유의 경험이 실험 과학의 근원이라면, 오늘날 지식을 자극할 수 있다고들 하는 도구적 디지털 방식 때문에 정신적 아날로그 방식이 쇠퇴하고 있는 현상에 몰두해온 것이다. 그의 작업에서 새롭게 중요해보이는 측면은 숫자 세기가 아니라 속도-빛으로 깜박이는 디지털 기호의 비물질적 정보적 입체화이다. 그것은 어떤 관념적 형태와도 무관하며 시간에 대한 사람들의 일상적인 미혹의 장 안을 횡단하며 새로운 언어 소통, 지각 방식의 개발이라고 하는 밀도있는 경험 복합체를 드러내려는 과감한 시도에 연결된다. 이질적인 시간을 초월적인 척도 표준으로 계속 환원시키는 것이 아니며 대중 속에서 체현되며 살아있는 하나의 집합적 경험의 창출을 위한 시간 연구이다.

오늘의 미술은 공간에서 시간의 문제로 관심이 이동했다. 원격통신의 전지구화 현상과 더불어 정작 문제가 되는 새로운 시간이란 행위의 동시성이 행위의 연속성을 압도하는 실시간의 보편화, 즉 세계 시간이다. 지구-표면이 인공의 전기 빛으로 뒤덮혀가는 오늘의 세계는 원거리 통신의 제한된 가속화에 빠져드는 '속도권의 온실 효과'를 보여준다. 더 이상 여기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지금 부터가 된다. 과거-현재-미래라는 연대기의 장기지속의 시간이 아니라 인공의 빛의 노출과 속도에 의존하는 시간, 인간의 역사를 조건지을 수 있는 우주론이 개입한다. 질량과 에너지 다음으로 정보의 차원이 현실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환경 통제와 원격 감시에 힘입어 사물과 장소의 실제 존재가 역사로부터 분리된다. 이는 당장에 그리고 본래의 위치에서 프로그램화된 종말을 나타낸다.

99년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미야지마의 [메가 데스]는 히로시마 원폭 투하의 짧은 순간을 극적으로 표현해낸 것으로, 종말은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일 수 있다는 느낌을 각인시켰다. 반면에 같은 작품이 선재 미술관 전시에서는 언젠가 붕괴할지 모르는 세계주식 시장의 곡예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LED 장치의 원천이 되는 숫자는 8이다. 8을 분절하여 모든 아라비아 숫자가 만들어진다. 불교에서 8이라는 수는 열반에 이르는 구체적인 방법(八正道)의 수이다. 불교가 생활화된 일본에서 불교도이기도 한 미야지마는 자신의 작업에 0을 표상하거나 세지 않는데, 0은 불교의 공(空) 사상과 연관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 의미는 불(유, 육체, 욕망)이 꺼진 상태, 즉 죽음=열반을 암시한다. LED 개체들이 제각기 다른 속도로 작동하며 계속 변하고 모든 것과 연결되고 영원히 계속된다는 사고, 풀처럼 돋아나는 개인의 다른 시간이 제국 기계의 세계 시간에 저항한다. 그러나 그의 개념적 틀은 너무 순수하여 거의 천사 같다. 이제 세계는 원거리 통신의 현대적 수단인 전자 에테르가 지구를 덮어가는 상황으로 전개되며 결국 시간 간격의 실제적 상실, 끝없는 피드백을 통한 공간의 종말, 지리의 종말을 야기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야지마의 정교한 디지털 프로세스 작업과 달리 동아일보 구(舊)윤전실 공장 안에서 펼쳐진 윤동구의 총체 설치작업은 아날로그 방식으로 우주적 힘과 에너지 정보의 운동 양상을 드러내는 것으로 보인다.

두 작가를 머릿 속에 연결하며 우리는 메트로폴리탄 서울에서의 리들리 스콧 영화 [블레이드 러너]의 상황을 떠올리게 된다. 안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금방 뭔가 아주 다른 기미를 느끼게 된다. 습기와 먼지, 가동을 중단한 공장 냄새, 계단, 난간들, 산업현장에 남아있을 보이지 않는 에너지 파동과 환영illusion이 만들어내는 이상한 기운이 총체 설치작품과 하나가 되어 완벽하게 별개 장소가 탄생한 것이다. 이 장소는 기억할 순 없지만 어디선가 보았거나, 언젠가 보게될 것만 같은 생경하고도 기이한 풍경이다. 우리는 마술에 걸린 듯 시선이 아주 먼 곳으로 끌어당겨지는 힘을 느낀다. 이 장소에서 시간을 기록하는 타임 리코더의 존재는 무의미하다. 윤동구는 내부 공간을 투명 스크린으로 에워싸 두개의 사각형 방으로 나누었다. 넓게 둘러처진 스크린은 공간 전체를 부드럽게 하면서 공장의 실재감을 차원을 달리하는 장소로 끌어가거나 기억 공간으로 변형시켰다. 이층에 있는 중간 통로는 나누어진 두개의 다른 공간, 다른 계(系), 다른 차원을 잇는 다리 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소중하다. 우리는 새로운 의미를 띄게된 이 다리(경계)에 선다. 다리에서 보게되는 것은 두 부분으로 동강난 큰 날개 그리고 다른 한편에는 직사각형의 육중한 케이블카가 육중한 강철 추에 의해 균형을 유지한 채 반복적으로 상승, 하강하는 움직임이다. 날개처럼 보이는 구조물은 대나무와 철근으로 만들어졌는데, 하나는 내부가 비어 있고 낡은 헝겊들로 씌어진 커다란 기구(氣球)들로 끌어올려져 공간에 깊이를 부여했고 날개가 물에 잠겨있다는 정적의 느낌을 준다. 이 장면은 지구에 속한 폐허의 고고학적 이미지, 노동이 정지한 죽은 공간, 인간이 부재한 포스트휴먼의 장소를 떠올린다. '세월이 흘러 오래되면 광대한 우주도 무너지고 수미산과 큰 바다도 없어져 남을 것이 없는데...'(불교의 무상계 한구절) 생명은 갖가지 인(因)이 쌓여 끊임없이 돌고 돌아 끊일 날이 없다. 엄숙한 고요, 그러나 인간 부재 상황에서의 부단한 반복 운동, 경사를 따라서 부단히 생성운동을 반복하는 케이블카 내부에서는 비물질적 유전 정보가 조합되는 것 같은 분위기, 부단한 생산을 암시하는 거친 기계음으로 채워진 장소. 이것은 영자(靈子)들이 속한 세계인가? 우주 공장의 특수한 기획인가? 문화적 단위를 전달하는 사물과 공간 시스템, 상승과 하강은 물리적 힘의 객관적 특성 뿐 아니라 상징성을 갖는다.

서울의 지리를 동(탄생)과 서(죽음)로 가르는 긴 강에 위치한 섬의 밀폐 공간에서 황폐하지만 숭고한 예식(禮式)이 벌어지는 순간에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야지마의 관심이 죽음을 향해 있는 시간 문제에 있다면 여기서 윤동구의 관심은 죽음 이후 시간과 공간이 부재한 어떤 예감에 몰두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놀라운 것은 그가 사용한 재료들은 모두가 흔히 구할 수 있는 산업 제품들이고, 로우 테크의 조합 방식으로 모든 것을 제작했다는 사실이다. 특히 그가 사물의 기호화, 기호의 네트워크로서의 많은 분절들을 만들어낸 것은 건축가에게 하나의 제안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건축기호론을 보다 일반적인 공간기호론의 일부로 생각해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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