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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명의 네덜란드인과 1990년대 한국 현대 미술

이영철

(이것은 2003년 암스테르담의 여러 미술기관에서 개최된 FACING KOREA의 카탈로그 서문을 위해 쓰여진 글입니다.)



나는 지금 이글을 물의 도시 베니스에서 마무리하고 있다. 결혼기념일을 온 국민과 나누기 위해 19세기 말 경에 만들어졌다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세계 미술과 문화의 활발한 교통의 생생한 현장이다. 세계의 역사는 현실 세계가 교통(交通, Verkehr)의 그물망으로 짜여져 있을 때 비로소 성립한다. 발명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끼리의 이종교배로 탄생하고 새로운 작업은 낡은 작업의 새로운 결합에서 나온다. 그점에서 교통이 없어서는 안되며, 교통에서 격리되면 그 사회는 응고해버린다. 그것은 분업의 고정화이고 변화를 물리치는 닫힌 시스템의 형성이다. 거기에서는 지식(science)이 형이상학이 된다. 세계사의 사실은 반드시 어디에선가 활발한 이종교배가 생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르크스, 엥겔스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 빈번히 사용되다 사라진 교통이라는 개념은 교역, 소통, 생산 관계를 뜻하지만 문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영어로 intercourse로 번역되기도 한다.

17세기 동인도 회사에 속한 선박의 서기(book keeper)였던 네덜란드인 하멜이 조선에서 경험한 것은 문호의 개방과 inter-course가 얼마나 중요한 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실제로 조선은 하멜의 우연한 난파, 13년간의 억류, 조선 사회에 대한 관찰, 극적인 탈출, 그리고 꼼꼼한 기록을 통해 유럽 세계에 처음으로 알려졌으나 그것은 하나의 course가 열린 것일 뿐 inter-course는 아니었다. 한국을 세계에 처음으로 알린 하멜의 표류기는 원래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같은 모험의 기록이 아니라 13년간 낯선 땅에 억류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밀린 임금을 청구하기 위해 쓰여진 일지였다. 난파로 인해 조선에 당도한 하멜 일행은 이미 25년 전에 똑같이 제주도에 표류하여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살고 있던 얀 얀스 벨테브레(J. J. Weltevree), (한국 역사책에서 박연(朴燕)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의 도움을 받아 소통할 수 있었고, 배를 구해 간신히 나가사키로 탈출했다. 당시에 일본은 쇄국 정책을 고집했어도 나가사키에 도착한 하멜 일행에게서 조선의 국토, 인문지리, 군사, 마을, 행정, 관료, 경제, 종교 등에 관한 정보를 매우 상세하게 심문하는 놀라움을 보여주었고, 그들을 본국으로 송환시켜 주었다. 그는 조선인들에게는 영원한 이방인이었고 교통의 대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당시 한국과 일본이 쇄국 정책을 표방하고 있었으나 소위 외국에 대한 관심의 정도가 크게 달랐음을 보여준다. 교통에 대한 호기심, 그것의 밀도와 피상성의 차이는 근대사의 무대에서 한국와 일본의 역사적 운명을 바꾸어놓았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350년이 지난 현재, 과거에 하멜이 보았을 '진정한' 조선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하멜이 자신의 경험을 기록한 일지의 내용 역시 13년간 억류로 밀린 임금의 보상을 지나치게 의식했던 탓으로 조선에 대한 균형있는 기술이 아니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 암스테르담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발달한 상업적 시민사회라는 점에서 중세적인 파리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17세기에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황야로서의 암스테르담에서 사고의 방법을 탐구했던 데카르트에 대해 발레리는 이렇게 적고 있다. '어느 별에선가 뚝 떨어져야 하며 영원한 이방인 되어야 했던 사람. 그는 사람들이 가장 평범한 일에 놀라도록 해야 했다.' 데카르트에게는 지리적, 역사적 장소로서의 암스테르담이 중요했던 것일까? 그러나 당시 암스테르담에 살던 모든 사람이 데카르트 처럼 생각했을 거라고 우리는 상상할 수 없다. 새로운 사고와 창작을 위해 요구되는 장소는 역사적 공간으로서의 네덜란드, 혹은 서울이 아니라 그것이 어느 곳이건 의심의 장소(topos)이다. 이 장소는 근대 과학의 공간과 다르며 오히려 그것이 은폐시킨 숨겨진 차원이나 상징적인 것으로 재발견된다. 바꾸어 말해 우리가 자명한 공간을 괄호에 넣음으로써 장소를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는 말이다.

하멜이 조선을 코레아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최초로 알린 뒤 350년이 지나 또다른 네덜란드인 거스 히딩크가 나타나서 한국 축구의 인식 공간을 괄호에 넣음으로써 새로운 장소를 발견해냈다. 그는 선수들과 대중들의 자발적인 정서(affect)를 유발해내는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고 그 에너지의 물결이 대선 과정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작년 대선에서 대중들의 능동적 참여에 의해서 인터넷 정치가 한국 사회에 새로운 정권을 창출해냈다는 것은 괄목할만한 사실이다. 정치적 네티즌들은 여기 저기 정치적 사이트를 만들고 게릴라 처럼 활동하였고 자유분방하고 새로운 변화에 민감하면서 기성 질서에 대한 문화적 안티의 성향들을 활달하게 펼쳤다. 응원을 위해 거리를 온통 붉게 물들였던 대중적 퍼포먼스와 함성들은 대중들 자신에서 표출되는 자발적 역동성이 얼마나 한국 사회의 발전에서 중요한가를 정치가들에게 확인시켜 준 것이다. 한국의 지식인들은 이처럼 달라진 사회적 정황 속에서 17세기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철학자 스피노자의 정치 철학과 윤리학에 대해 높은 관심을 보여준다. 마르크스와 알튀세를 넘는 포스트모던 맑시즘의 정치적 기획을 스피노자 불러내기에서 찾는 시도는 1990년대 후반 한국 지식인들 사이에서 새로운 관심의 방향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대중이 자기 자신의 사회를 형성하는 기능을 갖고 있다는 주장을 최초로 명확히 한 인물이다. 그의 정치적 유물론에서 대중의 자발적인 정치적 능력은 존재론적으로 권력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갖는다. 개인들 상호간의 소통과 교류(이성적 교류를 넘어서는 감성적 감응) 속에서 집합적 욕구와 행동이 분출할 수 있는 계기들이 만들어지고, 이런 욕구와 행동이 지배 권력의 내용과 형식을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20세기의 모든 것, 근본주의 시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민족주의, 냉전, 내란과 혁명이 퍼레이드 처럼 아시아의 도시들, 그리고 한국의 서울을 훑고 지나간다. 이 역사적 상처(trauma)는 오늘날까지 낙담과 탄식을 가져오면서도, 정상을 향한 에너지는 서구 모더니티를 변형시키며 맹렬한 기세로 풍족함에 대한 다양한 갈망의 형태를 내뿜는다. 시장이라는 교환 시스템 주위를 가득 채운 소망이 서울의 혼란스런 간판을 지나가는 빛의 흐름처럼 사람들을 활기 띄게 한다. 50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아르세날레관에서 <긴급성의 지대The Zone of Urgency>를 큐레이팅한 후한루는 <움직이는 도시 Cities on the Move>와 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를 통해서 아시아 도시들이 뿜어대는 욕망을 연극 무대 처럼 펼쳐 보이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개별적인 아시아의 도시들이 자본주의 시장이라는 거대한 기계에 의해 단 하나의 아시아로 단단하게 압축된 후 사방으로 흩어진 것 같다. 그 모든 조각적 부분들에 한국이 그리고 아시아가 새겨져 있을지 모르나 그것들을 하나로 연결시키는 아시아는 결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아시아의 도시 가운데 그 어떤 단 하나의 도시라도 서구로부터 침탈당하지 않은 것은 없다. 또 그 가운데 단 하나라도 일본 식민지의 그늘에서 벗어난 도시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중 어느 도시도 자신들의 의식을 잃거나 처참히 붕괴한 것도 없다. 한국민들 혹은 아시아인들에게는 어딘가에 낙관적 의식이 강하게 있는 것 같다. 모든 것이 무너져도 끝내 해결될 방도가 있다는 듯이 그들은 어려운 상황에서 참여하고, 결집하고, 그 과정에서 생성적 힘을 만들어낸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존재하는 것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내지는 지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는가? 그러나 참여는 NGO가 대신해주는 것도 아니고 인터넷에 글을 올리는 것으로 충족되는 것도 아니다. 참여의 진정한 의미는 참여자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고, 자신의 삶과 연결되어 있는 타자의 삶을 동시에 돌아보게 하며, 나아가 이 삶들을 둘러싼 세계와 구조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데 있다. 이를 통해 대안적 삶의 양식에 대한 실천들이 창조적으로 분출되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참여는 이런 과정을 활성화시킬 수 있는 방식으로 기획되기를 기다린다.

한국은 1987년 군부 정권의 오랜 지배로 벗어나 민주화를 달성한 이후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민사회를 민주화의 중요한 진지이자 원천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시민사회가 권력에서 벗어난 사회적 공간이 아니라 온갖 권력들이 나름의 구조와 권력 기술의 효과로 장악하고자 하는 복합적 공간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고 토론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부터이다. 그리고 이 기간은 지방 도시들이 분권화하며 자신들의 담론을 형성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각 지방 분권은 한국 사회에서 시장의 활력 증대와 국가 능력의 고도화, 그리고 시민 사회의 활성화라는 과제를 충족시키기 위해 몰두했고, 그 일환으로 지방이 중앙(서울)을 통하지 않고 바깥 세계와 연결되는 루트를 개척하는 일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 현대 미술이 사실상 국제화되는 기반을 조성하는 것도 이 시기부터라고 할 수 있다. 광주비엔날레는 95년에 부산비엔날레는 98년에, 멀티미디어 비엔날레 형식인 미디어 시티 서울이 98년에 창립되었다. 베를린 장벽의 붕괴 이후 세계화의 강풍이 한국 미술계의 문을 스스로 열게 했고 미술인 누구라도 교통의 불가피성과 그 밀도를 의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990년대 초두까지 적어도 한국의 반(反)아카데미즘 경향의 대세는 민중미술을 위시하여 포스트 팝적 경향이 제도 비판, 이른바 문맥 미술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좀더 자전적이고 직접적이고 솔직한 제도 비판에 대해 미술인 대중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부터는 혼종적 정체성을 보여주는 보다 낙관적이고 긍정적이고 유토피아적 성향을 지닌 젊은 세대들이 등장했다. 이번 암스테르담에서 소개되는 젊은 작가들은 '누가 너의 친구이고 누가 너의 적인가'라는 의식이 내면화된 냉전 사고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으며, 이들은 부조리한 세속을 직접 비난하지 않고 마치 반중력적 힘으로 움직이는 자들 처럼 보인다. 비평적 입장 대신에 담론의 자발성에 이끌리는 이들에 대해 유목적 방임주의 혹은 신자유주의 질서에 물든 너무도 닮은 잡종들이라는 비판들이 있지만 그 내부를 보면 한갖 잡종들의 획일적 유희가 아님이 분명하다. 잡종적 혼란은 정보 혁명을 야기시킨 인터넷과 관련된 것 뿐 아니라 사회주의 구조 붕괴와 온갖 모더니티가 야기한 경계들의 붕괴와 연관이 있다. 문화의 지정학은 변했고 이제 우리는 사회적, 개인적 그리고 정치적 변화에 각자 대면하도록 조건지워져 있다. 냉전 체제 하의 대립, 영웅이 사라졌을 적에 남는 것은 잡종들의 자유방임적 유희가 아니다. 미술이 사회와 맺는 관계 방식, 주체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는가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해졌다. 오늘날 강조되는 네트워크나 커넥션은 실용성이나 비즈니스 측면에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보다 본질적으로 태도와 가치의 문제와 연관된다. 자기지시성이라는 닫힌 미술 개념과 예술가의 에고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며, 오브제의 제작과 표현 효과 보다는 관계를 어떻게 만들고 자발적인 감응을 유발해낼 것이냐가 중요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미술은 비사회적, 무비판적, 몰개성적이 아니라 이러한 과제들을 수행하기 위해 미술가들이 각자 방식으로 반교육적, 반제도적 에너지를 키워온 소중한 시기라고 여겨진다. 대안공간들의 최초의 형성, 공장미술제를 위시하여 반미술관, 반이데올로기 전시들의 급증, 온 라인 게시판의 창설과 활성화, 그리고 새로운 결사체로서의 미술인 기구의 창립 등을 향해 움직이고 있다. 최근의 예술적 실천들 가운데 의미있는 일은 아직 프로토콜이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사회 내부에서의 민주적이고 반(反)시장적인 자유주의를 향하여 자유로운 토론이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한국 사회에서 번지고 있는 전지구화 반대 운동은 대안 형성을 위한 하나의 시사 또는 가능성의 징후를 보여주는 것이지만, 예술적 실천의 구체적 행위에 대한 상호 이해의 과도한 불일치는 상상적인 예술 공동체의 사회적 역할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 그로인해 전지구적 민주제라는 정치적 이상에 대한 인식, 자본제의 역할, 그리고 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의 관계에 대한 토론은 계속 지연되고 있다. 하멜이 만들어낸 역사적 우연, 그후 근대를 지나와서 히딩크의 전략, 그리고 스피노자식 대중의 정치학이 350년 동안의 한국 사회를 잇는, 길고 느슨한 다리를 형성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의 진행 속도는 매우 빨라졌고, 데카르트가 설정했던 의심의 장소는 인공위성이 전송하는 정보와 스크린으로 대체되고 있다. 이방인의 관점을 취하기 위해 정보를 얻고 여행을 많이 하기 보다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이 유목적이라는 표현은 그럴듯하다. 아마도 우리는 '모국어 속에서 스스로 외국인이 되라'는 마르셀 프르스트의 가르침을 새길 필요가 있을런지 모른다. 역사적으로 공통성이 적어보이는 도시들, 지역들 간에 어떤 교류의 형태이건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교통(intercourse)이며 교차 대화이다. 그러나 이 경우 대화는 이상적인 소통과는 무관하며, 미술가가 이질적인 문화 사이에서 작품을 어떻게 구성해냈는가의 비평적 의식과도 거리가 있다. 오히려 새로운 관심거리는 이방인으로서의 미술가와 지역 관객들 사이에 어떤 누화(crosstalk), 어떤 잡담(babble noise)이 이뤄지는지, 그것들이 어떤 조건 하에서 자국의, 혹은 글로벌 미술계에 순환되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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