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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철문 -쇠부텨鐵佛전에

강순형

물구나무 서라!-쇠부텨鐵佛전에


진철문 철불전 10.21 - 11.5 용인 장욱진화실 전시실


불상조각가
진철문은 조각가다. 그것도 불교의 불상佛像조각가다. 나아가 그는 선종禪宗의 불상조각가다.

일찌기 반산선사가 열반에 즈음해, 제자들에게 스승의 진영眞影=참그림자-초상화를 그려내게 했것다. 그러자 진주수좌首座, 스승 앞서 느닷없이 물구나무를 서서 돌자, 손뼉 치며 「너야말로 제대로 그렸다!」 바로, 반산의 참그림자盤山眞影다.
불보살의 모습이란, 참모습이 어떤 겐지 드러내 보이라는 것이다. 바로, 앉은 자와 거꾸로 선 자, 그게 바로 참모습-진영眞影이단 답이다. 이게 기존 앉은 모습의 전통, 고정관념과 질서 나아가 권위를 타파-깨부수려는 몸부림이다.

묻는다?-명화가 승유가, 어명을 내린 지공국사 진영을 왜 못 그렸나요?
답한다!-붓끝이 종이에 닿지 않았기 때문!

설봉선사 말이야 맞다. 붓이 닿지 않았으니 그려지지 못함이-

조주선사, 제자가 그려준 초상보고- 「이게 날 닮았다면 나를 때려 죽여라! 안 닮으면 불태워 버려!」

이처럼 선(종)의 가르침은, 모방을 절대 금기시한다. 화석화됨을 몸서리치며, 파괴와 독창성을 혹독하게 요구한다. 혁신!을.
깨달음-깨침=성불成佛이라는 절대절명의 명제 앞이라면! 당연히 (이미, 기존이 낡았다 여겨) 틀의 관행, 관습, 획일과 얽매임 거부하고, 말썽꾸러기로 호기심 많고 창조적ㆍ이상주의적이라야. 다시말해, 무섭게 자기 개성 내세우고, 개방적이고 나아가 낙관적으로-일반이 보면 너무 어리석을지도 모를.
하면서도, 일척안小兒一隻眼! 젖비린내 가시지도 않은 애꾸눈 어린애 같은 짓거리는 참으로 증오ㆍ거부한다. 그러기에 그 심안法眼의 눈은, 이승이 힘들다.

아이-백지 그림 내보이며, 아저씨 어때요 내 그림!
피카소-엥!? 뭐야, 그림이라니-
아이-이건 흰토끼 그림이예요 눈 속에 졸고 있는, 안보여요?
피카소-얘야 그렇구나! 니 그림이 내 그림보다 훨씬 더 어려운 추상화야





그렇다. 어둠 속에서는 갖은 빛깔의 비단도 한빛일 뿐이다-검은,
참부처眞如란 무엇인가? 무언가? 무엇일까?-끊임없이 해답 찾아내 보이는 게 진철문이다. 누가 뭐래도 그다. 그의 작품이 그렇다-이제까지. 앞으로도,

그가 그런 작품을, 또 그러한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삶을 살았던 선배 장욱진화백의 용인화실집(1985~1990, 사진1, 2)에 미망인이 처음으로 한켠을 내어 꾸민 작은(곳간+헛간+외양간=3칸 5평짜리! 사진3) 전시실에서 처음 연다. 이 참에, 눈 돌리지 않은 장욱진화백의 불교적 예술성도 한번 짚어줘야 한다. 참고로 그의 부인 (보살)법명이, 진진묘眞眞妙이다.




쇠부텨鐵佛

이번 그의 7번째 불상작품 재료는 쇠-철鐵이다. 철불鐵佛(사진4)이다. 그것도 버려진 아니, 제 몫을 다하고 쉬고 있는 기계器械 조각片들을 다시 불보살로 살려낸, 승화시킨 것이다.
결국은 제 몫을 다하고 이젠 버려져, 싹고 쓸모없이 된 것. 퇴역한 역전의 용사들이 재탄생ㆍ재창조를 통하여 환생ㆍ환원된 이들은, 참으로 얼마나 많은 (우리에게) 봉사를 했던가!
티베트에는 이런 말이 있다한다-「얼마나 봉사을 했나!? 그 닳은만큼 일, 역할 한 것이다!」라고. 곧, 목숨을 다한 그 아름다운 봉사ㆍ보시布施를 말하는 뜻이다.

작가는 말한다. 「이리 봉사를 다한 그 닳아진, 그 닳아 빛나는 아름다운 몸을 다시 불상으로 나투어, 이제 기나긴 영겁의 선정禪定에 들어있음을 보여줌이, 또 그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묵고 닳은 그만큼의 모습을 보여줌은, 그만큼 선禪을 닦아온 수선修禪ㆍ參禪의 모습이 아닌가?!」 반문한다.
나아가, 이는 결국 작가의 모습이기도 하단다. 살아온, 닳아온, 구둥살 딴딴 백혀온 작가의 손발이자, 지나온 모습과 삶의 자취이자 종내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런 뜻과 맘에서 다 닳은 재료로 작품-불상을 한 까닭이라고 한다.

우리 농부의 삶-논밭 일로 다 닳은 삽! 그 빛나는 노동의 힘이 되어 몽땅 닳은 삽이 부처의 광배로 나퉜음은, 참으로 자격있음! 아닌가(사진5) 하는 게 작가의 창작이고 정신이다. 버너틀의 광배(사진6)도 그렇고, (불꽃)빛 그리 내었던 가스렌지틀이 대일大日여래로, 짐 다는 ?고리가 부처머리 되어 「이뭣꼬?」 화두話頭로 선정삼매禪定三昧에 든다(사진7). 마른 몸매 뼈대는 암수나사가, 다 닳은 마치나 레일못頭釘, 버린 아령은 가부좌跏趺坐, 암수 톱니바퀴들은 연화좌蓮花座!가 되고, 땅 가는-로터리 치는 날과 포크레인 이빨, 시계추와 저울추들은 팔과 손, 몸이 되어 좌우, 상하, 혹은 회전하는 움직임 넣어 살아있는 부처까지 나툰다.
그밖에, 철사고리와 못과 촉, 고드래, 저울추, 자동차 축, 난로 뚜껑과 재받이, 버너 노즐틀과 톱들이 적재적소로 다시 제 목숨을 얻는다.
여기에다, 『석가와 만난 예수ㆍ예수와 만난 석가』, 『예수, 선을 말하다』같은 책 내용도, 80년대에 이미 그는 교감하여 「서울 예수ㆍ서울 부처」(사진 8, 베트남 스님 틱 나한의 프랑스 절 소장)을 비롯한, 곡괭이 팔다리에 가시관은 쇠스랑, 후광은 수레바퀴나 5병 2어인가-붕어빵틀의 예수로 함께 자리한다.
명(질)이 다하고 색(몸)이 다했다 여겼는데 아니다, 비로소 더 깊이 있고 부드러운-온화한 승화된 명색으로 나타난다. 작가가 퇴출ㆍ퇴역품을 다시 조형화로 재(탄)생, 승화시켰다. 이 자체가 불교적이고, 불교 선禪=사유 정신을, 재활용(품)을 통해 되살려 그려낸 그다.
그리 외강外强한 몸이, 내유內柔로 이제 나타나고, 금속의 윤-강한 윤 곧, 쇠鐵라는 색과 광에 의한 광택光澤 다시말해, 그 반사와 비춤(照)을 내보이기에, 지난번 돌에서 쇠로 넘어간 것은 이 까닭이다.
이리 생각이 미칠 때, 그는 참으로 불교정신을 가장 잘 물질로 표현하는 에술ㆍ미술가의 선두주자다.
삽, 고리나 버너, 바퀴같은 그들 그 역할은, 엄청난 힘이었다-에너지다. 모두 고철이나, 그 과정은 자기의 삶을 혼신을 다해 뿜어냈고 바쳤다. 다시, 퇴물이지만 치유된, 작가의 손으로 고쳐진, 비로소 그 결과로 작가의 손에 의해 이제사 제 보상을 받는 것이다. 이에, 삽이 광배가 되어 빛나듯, 모두들 와서 그동안의 삶을 인정해주고, 구경ㆍ감상해 아껴주고 나아가, 버리지 않은 소장해주는 작품-소장품이 된다!
인간 자신도, 구도자도 이래야 한다. 이리 되어간다. 결국, 이런 모습, 내보이려 한다. 그것은 육체이다. 그러나 그 그릇 속은 결국 그 정신. 그것이 곧, 예술가 자신이고 창작자이다. 앞서 간다. 부처가 뭔가!? 「깨달은 이=눈 밝은 이=앞서 가는 이」 아닌가?! 이를 그는 이번 작품으로,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내보여 준다. 오히려 더 구상적이다!
그럼에, 인간도 자신도 치유된다. 종교-부처를 통한 작품에 의해. 더 업up되어 이제 예술품으로 태어나 편안히 휴식하며 영원히 존재한다. 휴식 곧 적정寂靜 바로, 니르바나 아닌가. 열반涅槃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저기 나투고 있는- 목불, 지불紙佛, (청)동불을 거쳐 이번에 내보이는 그의 철불까지 과연, 다 살아 있는 존재하는가? 살아있는 사람에 보여지는, 살아있는-육화肉化된 부처인가? 우리 중생과 함께 숨쉬고 활동하는 육체의 부처인가?
불성佛性의 육화, 불상의 육화, 육화의 불상이다. 핏줄이 펄떡이며 도는 모두에게 살폿 웃음(미소) 짓고있는, 모두가 살아 웃는一切衆生 皆有成佛.

임제선사 말한다!-여기 빠알간 고깃덩이의 한 참사람無位眞人이 여러분 앞에 있다. 아직 못 본 사람은 똑똑하니 보아라!
참부처란 무엇인가? 무엇일까? 끊임없이 해답 찾아내 보이는 게, 보여야 하는 게 진철문 그다. 마음이 곧 부처心卽是佛라고 하는, 보이지도 않는 마음부처를 내놓아야하는 그에게 다시, 살아 움직이는 참사람眞人 보여달라는 정진精進 요청이다-

묻는다?-너 이름이 뭐냐?
답한다!-철문!
되묻는다?-그 문은 하루 몇 번이나 열리나?
-한번도…
-앞문이 열렸네
-(고개 숙여 그만 후닥! 내려보자)
-안 열린다더니, 꼴 좋다 꼬락서니하곤, 갈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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