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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이동훈 탄생 100주년에 생각나는 일들

최종태

서양화가 고 이동훈선생의 탄생 100주년을 맞는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소장품을 가지고 특별전을 열고 있고 그의 고향과도 같은 대전에서는 이동훈미술상을 제정하고 이동훈탄생100주년회고전이 대전시립미술관에서 준비되고 있다. 올해 10월 22일을 기해서 이동훈미술상 제 1회 시상이 회고전 개막과 함께 이루어질 예정이다.

장발선생이 1901년생이고 도상봉선생이 1902년생이고 이어서 이동훈선생이 1903년생이니 우리나라 서양화단을 빛내는 초기 제 1세대들인 셈이다. 고희동ㆍ이종우로부터 시작하여 이병규ㆍ오지호ㆍ김주경ㆍ김인승ㆍ박상옥ㆍ김원ㆍ박득순 등으로 이어지는 한국근대미술의 초창기 역사를 되돌아 보게하는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이동훈선생은 신의주 출신으로 와세다대학 출신이며 훗날 고흥군수를 지낸 이봉구의 장남으로 태어나 본관은 단양 이라한다. 의주농업학교를 졸업하고 평북사범강습과를 마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1928년 25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을 계기로 화업에 입문하였다. 1935년 32세에 서울로 이주 도요다라는 일본인 화가에게 4년간 사사받고 선전을 통해서 계속 발표를 하였다. 또 일제 말기 서화협회전에 두차례 발표한 기록을 볼 수 있다. 해방 직전에 대전으로 이주하였는데 그 확실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당시 아버지가 수운교(水雲敎) 두령으로 대전에 (당시는 대덕군) 사셨는데 그런 연유가 원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해방이 되면서 다음해에 대전사범미술교사로 봉직하면서 운명적으로 대전미술의 초석이 되었다.



<1948년 이동훈선생은 미국문화원 주최 충청남북도학생미술전람회를 주관하였고 그 뒤 충청남도학생미술전람회를 개최토록 주도하였다. 그런 와중에서 충남미술협회를 창립하여 충남 각처에 흐터져있는 미술교사들을 규합하여 대전미술 풍토 조성에 앞장섰다. 아래로는 청소년학생들의 미술적 재능을 개발 발굴하고 위로는 기성화가들의 창작의욕을 북돋는 일에 열심하였다. 그러면서 본인 스스로는 제 1회 국전특선 제2회 국전 문교부장관상을 받는등 훗날에는 초대작가상을 받고 심사위원을 역임하면서 중앙화단에서 역할하고 목우회 창립멤버로서도 활동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동훈이란 인물은 대전미술의 텃밭을 일구고 가꾸고 그것을 발전시킨 미술교육자요 화가요 미술운동가였다. 철저하게 한국적 도덕규범을 준수하고 학생들 한테는 별칭이 “호랑이”었다가 나중에는 그 성품의 인자함에 감복하여 “아버지”로 되었다. 교감하라 하여도 마다하였고 교장 나가라하여도 사양하였고 모 대학에서 교수로 초빙하였으나 역시 고사하여 끝내 평교사로서 정년을 맞았다. 왜 그러시냐 내가 물었더니 하시는 말씀이 “그림 못 그린다” 하는 것이 이유였다.

이동훈선생은 명실공히 대전충남미술의 대부였다. 뒷날 많은 미술인들이 대전에서 배출되었다. 누구던지 미술하는 사람이라면 그분의 손길을 거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정직하고 고지식하고 근면하고 자상하고 인정깊고 그가 많이도 그린 누런 소의 이미지와도 부합된다고 할 수 있겠다. 의지가 굳고 소박하고 잔재주 부리는 것을 모르는 분이었다. 그의 그림은 성품 그대로였다. 오랜만에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에서 선생의 그림을 만나게 되었다. 15년만이 아닌가 싶었다. 참으로 감동적이었다. 대개 좋은 화가는 시간이 갈수록 생기가있고 빛나는 것인데 이동훈선생의 경우가 그러했다. 서울과 대전에서 두차례의 유작전을 하였다. 그 뒤 오랜만에 다시보는 선생의 그림은 맑고 건강하고 밝고 따뜻하였다. 구조가 튼튼하였다. 소박하고 사랑이 넘치는 그림이었다. 어쩌면 그렇게도 그림이 신선할 수가 있는가. 그의 삶 전체가 그림으로 투영된 듯 싶었다. 이동훈선생은 충청도의 풍경을 특히 사랑하였다. 점박이 젖소, 누런 황소, 까만 염소등 촌스럽다 할만한 시골의 짐승들을 사랑하였다. 장욱진이 돼지 강아지 참새 등을 사랑한 것과 일맥 상통한다 할 수 있겠고 박수근의 소박한 정취와도 일맥 통하는 바가 있다. 그러면서도 이동훈의 그림은 누구하고도 유사하지 않은 누구의 영향도 묻어있지 않는 이동훈만의 독특한 세계....... . 하나의 이동훈양식을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이동훈선생은 일반적으로 풍경화가로 알려져있다. 나는 그것을 인간 이동훈의 자연사랑이라고 보고싶다. 충청도 이곳저곳의 자연이 화가 이동훈의 손에 의해서 영원토록 살아남게 된 것이다. 이동훈이 아니었으면 없었던 것으로 될번하였던 정겨운 풍경이 그의 손으로 영원히 살아 남게된 것이다. 성남동의 젖소목장, 동학사의 계곡, 유성의 봄, 고란사, 백마강 등이 이동훈의 손으로하여 아름다운 모습으로 화신하였다. 이동훈선생은 그 대상 즉 산을 사랑하고 나무를 사랑하고 풀밭과 짐승들을 사랑하였다. 회화의 주제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를 사랑하였다는 말이다. 물감을 바르고 또 바르고하여 손주 다루듯이 사랑하였다. 소박하고 정직하고 향토색 짙은 정겨운 그의 그림앞에서 새삼 마음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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