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도색공장들이 세계적 화랑으로 변신한 미술촌

공장처럼 크고 밋밋한, 간판 하나 없는 건물의 무거운 문을 밀고 들어서니 미국 미니멀리즘 미술의 대가 리차드 세라(Richard Serra)의 대형 조각 ‘블라인드 스폿(Blind Spot)’과 ‘오픈 엔디드(Open Ended)’가 나온다. 세계 최고 화랑인 가고시언 갤러리다. 사람 몇이 작품 안으로 들어왔다 나갔다 할 정도의 큰 규모 때문에 웬만한 전시장에는 설치할 수 없는 리차드 세라의 작품이 이 갤러리 전시장에 두 점이나 들어올 수 있는 것은 이 지역 건물들이 원래 자동차에 페인트를 칠하던 도색공장들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내부가 넓고 기둥이 별로 없이 뻥 뚫린 자동차 도색 공장은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었다.

상업적 소호에서 90년대부터 이동
첼시(Chelsea)는 뉴욕 맨해튼의 대표적인 예술거리다. 아직도 갤러리촌 하면 소호(Soho)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 뉴욕의 주요 화랑들은 이미 1990년대부터 소호에서 첼시 지역으로 옮겨 와 지금은 대부분 첼시에 모여 있다. 재미 있는 것은 갤러리 첼시 시대를 연 선구자가 바로 갤러리 소호 시대를 열었던 폴라 쿠퍼 갤러리(Paula Copper Gallery)라는 점이다. 딜러 폴라 쿠퍼는 1968년에 소호 지역으로 제일 먼저 진입했는데, 1980년대부터 소호 지역이 상업적인 관광지로 바뀌자 1994년에 소호 보다 조금 북쪽에 있는 첼시 지역인 21번가로 옮겨 왔다. 뒤를 이어 다른 갤러리들도 이 지역으로 따라 이사 왔다.

일반적으로 ‘첼시’ 하면 동서로는 맨해튼의 5번가(5th Avenue)보다 서쪽이면서 남북으로는 중심에서 약간 남쪽인 14~34번가에 걸친 지역을 가리킨다. 대략 맨해튼 남서쪽 정도로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미술계에서 ‘첼시’라 하면 이 중에서도 중심인 16~27번가 사이, 동서로는 완전 서쪽으로 치우친 허드슨 강변, 즉 10번가(10th Avenue)와 11번가(11th Avenue) 사이를 말한다. 이 구역에 갤러리가 빽빽하게 350개나 들어 서 있다. 가고시언, 페이스 윌덴스타인, 메리 분느, 폴라 쿠퍼, 제임스 코헌 등 세계적 갤러리들과 우리나라의 가나아트 갤러리, 아라리오 갤러리, 티나김 갤러리, 두산 갤러리도 여기 들어 서 있다.

갤러리들이 미술촌을 꾸리기 전부터 첼시는 원래 역사적인 문화 중심 거리였다. 19세기말에는 파이크 오페라 하우스(Pike’s Opera House)를 중심으로 하는 극장들이 모여 있던 극장문화의 중심지였다. 이 동네 자체가 각종 상이한 것들이 다 섞여 있는 ‘혼합문화’의 본거지다. 저소득층 임대아파트가 대규모로 들어 서 있고 유색인종과 동성애자가 많이 살아 주민들부터 뉴욕적인 다양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 콤므 데 가송, 발렌시아가 등 패션 브랜드 매장과 뉴욕의 유명한 레스토랑, 카페들을 구석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상업화랑들뿐 아니라, 첼시 아트 뮤지엄, 그래피티 리서치랩, 댄스 시어터 워크샵 등이 있고 예술가들의 작업실이 많다.

고가철도 공원 등 랜드마크 많아
첼시에는 뉴욕의 문화적 랜드마크도 당연히 많이 있다. 23번가에 있는 ‘호텔 첼시(Hotel Chelsea)’는 작가 오 헨리, 마크 트웨인, 가수 밥 딜런, 재니스 조플린, 배우 제인 폰다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술가들이 장기 거주했던 역사적인 호텔이다. 허드슨 강변을 따라 있는 고가화물철도는 1980년대부터 열차가 다니지 않아 이 지역의 흉물로 낙인 찍혀있었는데, 철도 옆에 자란 야생 동식물을 그대로 살린 자연공원 ‘하이라인(The High Line)’으로 작년 여름 개장해 첼시의 대표적 랜드마크가 됐다. 고층빌딩 사이에 지상 9m 높이로 솟아 있는 덕에 주변 첼시 지역은 물론 허드슨 강이 시원하게 내려다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