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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호안 미로, 자연의 동화(童畵)와 세계의 환영(幻影)

김상채

호안 미로, 자연의 동화(童畵)와 세계의 환영(幻影)
2004. 3. 3 - 6. 20 파리 뽕피두센터


'호안 미로,<1917-1934>,세계의 탄생'전이 지난 3월 3일부터 6월 20일까지 파리의 뽕피두 센터에서 열리고 있다. 피카소와 더불어 20세기 최고의 반열에 오른 예술가, 조각과 도예, 그리고 시적 감성까지도 뛰어났던 스페인 까탈로니아 출신의 이방인. 그가 이 봄에 프랑스 관객들을 위한 화려한 나들이를 시작했다.

호안 미로(Joan Miro:1893-1983)1974년 파리 그랑빨레에서의 대규모 회고전과 1978년에 파리 시립 근대 미술관과 뽕피두 센터에서 조각과 뎃생 전시회가 있었지만 이번 전시회는 미로의 핵심적 실험정신의 전개과정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시회라는 점에서 그 이전 전시와 차별성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1917년과 1934년, 이 두 해의 의미는 이번 전시의 기획의도를 엿볼 수 있는 키워드이기도 하다. 1917년은 미로가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으로 개인전을 열기로 했던 해로서(실제로는 다음해에 열리긴 했지만), 초기 인상주의와 입체파적 요소, 그리고 미래주의 경향을 보였던 미로의 작품들이 1917년을 기점으로 미술사조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움직임과 더불어 새로운 미로의 예술적 기운이 싹트기 시작한 해이다. 1934년은 그 동안 그가 보여준 다양한 실험 속에서 특히 28년부터 32년까지 그가 시도한 '회화의 학살'을 접고 33년에 제작한 18점의 대작 시리즈로 '회화로의 귀환'을 통해서 초기 예술실험의 결실을 맺은 해이기도 하다. 미로에게 있어서 1917-1934년, 이 시기는 자신의 회화적 조형방식을 창조해 내고 다양한 도전과 실험을 시도했던 왕성한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일반 프랑스 관객들에게는 별반 소개되지 않았었다. 1974년에 보여준 파리에서의 총체적인 대규모 회고전은 이 시기(17-34년) 작품의 전체 5분의 1정도만 선보였고 그 동안 미국에 있던 초기 작품들은 이후 오랫동안 프랑스 관객들과 만남의 기회를 갖지 못했었다. 이 때문에 이번 전시는 더더욱 프랑스 관객들을 흥분시키고 있으며 벌써 연일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인해 전시회장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전시장은 관객들의 편안한 관람과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연대기적으로 작품을 배치하고 같은 양식의 연작물과 드로잉, 그리고 미로의 예술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주요 어록들을 보여줌으로서 미로 예술의 전개방식과 변화, 그리고 각 시기적 특성을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전시장 초입의 1917-1918년 전시실에는 대체적으로 인상파와 후기 인상파, 그리고 야수파의 요소를 담아내는 작품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마티스의 강렬한 색채와 장식성이 드러나는 풍경화, 세잔느의 화면구성이 두드러진 정물화, 피카소의 입체파적 요소를 담고 있는 인물화, 당대의 다양한 미술운동의 종합선물 셋트를 보는 듯하지만 이미 그의 화면에는 새로운 격정이 흘러 넘치고 있다. 1920년 처음으로 방문한 파리, 이곳 미술계에서 주목 받기 시작한 피카소와의 교류, 그리고 야수파와 입체파, 미래파의 회오리가 몰아치고 난 이후 여전히 전위적 미술운동이 전개되는 상황을 접하면서 강한 에너지를 느낀 미로는 21년 파리에서 첫 전시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파리 시대로 입성한다

1923년 파리 체류는 미로의 작품 변화에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형식의 절제와 기호의 등장, 이와 함께 선과 점으로 환치해 버리는 이미지 등은 이미 그가 기존의 미학적 시각을 탈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형상의 해체와 기호화, 마법적 환영과 같은 방식을 통해서 화면을 환상의 영역으로 몰고 가고 있다. 이후 1925년 브르통과 아라공, 엘뤼아르 등과 초현실주의 그룹에 참여함으로서 초현실주의 화가로서 뿐만이 아니라 주목 받는 예술가로서 데뷔하게 된다. '우리들 중에서 가장 초현실주의적인 작가'라고 했던 브르통의 말처럼 미로는 당대 예술의 최전방에까지 다다르고 있었다 1928-1932년, 소위 <회화의 학살>이라고 하는 이 시기에 1924년 이래로 계속된 시적 감성이나 회화적 유혹을 포기하고 화면에서 회화의 형식과 내용을 철저하게 말살시켜 버린다. 미로는 더 이상 그리지 않고 작업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나의 유일한 확신은 회화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내 스스로 파괴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나는 회화에 대해서 심오한 경멸을 느낀다.' 이 시기에는 꼴라주와 앗상블라주(조합,조립의 뜻으로 여러가지 물질을 이용해 평면적인 타블로 회화에 삼차원성을 부여하는 기법) 등을 주로 제작했다.




1934년에 전시되었던 33년에 제작한 18점의 회화 시리즈(6점의 <회화를 위한 콜라주> 포함)는 그 동안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회화의 학살에서 다시 회화로의 귀환을 시도하면서 이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수많은 실험과 도전속에서 그가 다시 찾은 회화는 최종 목표가 아니라 또 다른 도전을 위한 하나의 과정 속에서 숨 고르기를 하고 있을 뿐이다. 이번 전시는 오랜 기간 동안 퐁피두에서 진행되었던 전시 프로그램중의 일환으로서, 전임 뽕피두 센터 총 책임자였던 장자크 아야공(Jean-Jacques Aillagon)에 의해서 추진되었던 <달리> <탕귀> <마그리트> <브르통> 그리고 최근의 <초현실주의자들의 혁명>등의 초현실주의에 관련된 프로젝트 중의 하나로서 진행된 전시이다. 전시회에는 약 120여점의 회화와 드로잉, 콜라쥬, 앗상블라주 그리고 그의 작업노트가 선보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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