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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안중식의 <백악춘효도 1915>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 (6)

광화문, 찢겨진 역사의 상처
-안중식의 백악춘효도(1915)―

이석우 | 경희대 명예교수, 역사문화연구소장

화사한 가을의 햇살 아래 광화문 중건을 위한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2006. 10. 30 ~ 2009. 12 완공 예정) 그 공사장 중건을 위한 칸막이 울타리에 확대되어 부착되어 있는 광화문 사진들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본래의 온전한 모습의 광화문 사진은 해태를 전면에 세운 사진 하나뿐. 나머지는 해체되거나 이전된 몰골, 폭격 맞아 받침대(육축)만 남은 앙상한 형태들의 것이었다. 옛 사진의 고졸한 맛과 함께 예술성까지 느끼게 했지만, 광화문의 수난은 바로 우리 근현대사의 상처 그대로 이었다.
그 지나온 날들을 잠시 되살리자. 1395년(태조 4년)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시 전소하였다. 1865년(고종 2년) 중건되었으나 1925~27년 해체되어 지금의 민속 박물관 입구로 이전하였다. 조선총독부 건물이 경복궁을 가로막고 지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조차 1951년 무렵 한국 전쟁 중 폭격에 의해 문루는 불타고 밑의 화강석 받침대(육축)만 남았다. 그러다 1968(박정희) 2월 지금 발굴지역에 지어졌으나 그것은 본래의 목조 아닌 철근 콘크리트 시멘트 건물이었다. 그마저 원래의 자리에서 북측으로 14.5m 동쪽으로 10.9m나 옮겨졌다. 지금은 다시 해체되어 뿌리부터 되찾고 있는 중이다.


그 광화문의 모습을 그나마 전해주고 있는 것이 안중식(1861-1919)의 ‘백악춘효도(白岳春曉圖)’이다. 백악은 지금의 청와대 뒷산에 해당하는 북악이며, 춘효란 봄날의 아침이란 뜻이다. 안중식은 어떤 경력의 인물인가. 왕의 어진을 그린 공로로 통진, 양천 군수를 지냈으니 왕실의 성은을 깊게 입은 셈이다. 군수직을 물러난 후(1907)에는 타계할 때까지(1919) 전업 작가로 활동하였다. 1881년 약관 20세에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이 이끄는 영선사 일행에 천거되어 청나라 근대 시설들을 탐방하는 중 기계 제작품들을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 그 뒤에도 상해 등 중국에 두 번, 일본에 체류하면서 그곳에서 서양의 미술과 접하고 미술인들과 교류하였다. 그의 화풍에 서양식 투시, 음영법 등이 도입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조선 최초의 근대 미술학교라 할 수 있는 서화 미술회(1912.6)를 만드는데 함께 하였다. 구성인사는 이완용 데라우치 총독, 순종 등이 포함되었으나 실제 미술교육은 안중식과 조석진의 몫이었다. 재정지원은 황실로부터 받았다는 점에서 이미 기능이 정지된 도화서의 업무를 대행하는 성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식은 이어 오세창 등과 함께 서화협회를 창립(1918.5.19)하고 회장의 일을 맡았다. 그곳에서 이후 근대 한국화의 길을 열어 갈 김은호, 이상범, 이용우, 노수현 등을 배출하여 근대미술 교육의 터를 닦은 공로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이념적 성향은 특이하다. 그가 비록 친일 귀족의 그림 주문이나 교류를 마다하지 않았으나 내심은 조선 왕실의 복원을 갈구하고 있었던 듯하다. 이미 김옥균 등 개화파와 가까웠고 3.1 운동의 민족 대표로 참여했던 오세창과 서화협회 및 문화 활동에서 같은 길을 걸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을사늑약에 분격하여 자결한 민영환 충정공의 혈죽을 현장에서 실사하여 ‘대한자강회월보’(1907. 제 8호)에 대담하게 실었던 일은 그의 내심을 드러낸다.
심전(心田) 안중식은 ‘백악춘효(白岳春曉)’라는 동일한 이름의 그림을 두 폭 그렸다. 하나는 1915년 여름에 다른 하나는 가을에 같은 그림 제목으로 다시 그린 연유이다. 가을의 것은 총독부 쪽의 주문이 아니었는가 싶다.
동년 일제는 자신들의 식민통치(1905) 10년의 공직을 드러내려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1915.9.11~10.31)하였다. 그 장소를 오만하게도 경복궁으로 잡았고, 그를 이유로 궁궐의 전각을 무참히 허물어 내고 있었다. 일설에는 이렇게 훼손되어가는 경복궁의 모습을 보존하기 위해 안중식에게 이를 그리도록 요청했을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본인은 한발 더 나가 왕실은 광화문이 곧 헐릴 것이라는 것을 예견하고 그에게 그림을 그리도록 작품을 주문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 배경은 총독부 건축 신축논의 시기와 그 부지 선정에 대한 과정을 살펴보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김정동 교수는 그의 저서 ‘남아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대원사)에서 그 과정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1902년 6월에 국수주의 건축학자 세키노 다다수(關野 貞, 1867-1935)를 중심으로 한 ‘조선건축 조사단’이 한국에 파견되었다. 62일 동안 서울의 궁궐과 남산 한국의 고도 개성, 강화, 부여 등을 조사케 하였는데, 조선 신궁과 총독부지를 찾아 고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조선은 외부대신의 훈령 ‘제15호(광무 6년 7.16)와 제 35호(護照, 여권, 7.17)로 이들 조사단을 연도의 각 군수와 관리들이 잘 보호해 주도록 하는 특혜까지 주었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돌아간 지 3년 후 조사 보고서를 냈는데, 그것이 조선건축조사보고’(1904.2)였다.
1910년 한일합방이 이루어지고 1912년 경복궁의 소관 관리처가 총독부로 넘어 갔는데, 이는 관할권이 일본에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이때부터 새 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고 이 일을 위해 토목국이 신설되고 이를 영선과가 맡았다. 그때 총독부 설계 건축은 독일인 건축가인 데 라란데의 도쿄 설계사무소에 맡겨졌다.
앞서 말한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함으로 해서 일반인들이 경복궁에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여러 전시관 중 제 1호관이 섰던 자리가 가장 넓었는데 그 자리에 총독부 청사가 들어선 것이 뒤에 밝혀졌다. 뿐만 아니라 이미 1912년에 경복궁이 조선총독부 청사 신축지로 결정돼 있었다. 경복궁 전체를 해체하려는 계획은 1916년에 세워졌다. 안중식이 이 그림을 그린 지 1년 뒤이다. 1995년 12월 27일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는 그때의 전체 계획도인 ‘경복궁 내 부지 및 관저 배치도’를 공개하였다. 거기에 따르면 마치 그 자리에 경복궁이 전혀 없는 것으로 상정하고 총독부 청사와 관저 관사, 그리고 공원 부지를 책정하는 등의 가공할 계획까지 세웠던 것이다. 일본 도쿄의 히비야 공원을 모형으로 한 것이었다.
총독부 청사를 그렇게 저돌적으로 경복궁 터에 지으려고 하는데 대한 일부 지식인 학자들의 반대도 있었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도쿄대학 건축과 세키노 다다수, 곤와지로(今和次郞 1888-1973)등이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의 논의가 경복궁 전체라기보다 광화문 보전에 논의가 집중되어 있었다.



1912년에 총독부 청사 신축 부지는 경복궁의 근정전과 광화문의 중간 위치에 선정되었음을 왕실에서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1915년 물산공진회 준비가 진행되고 실제 궁궐의 전각이 허물어져 갈 때 위기감이 더욱 고조되어 가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된다.
이런 차제에 왕실이 안중식에게 궁궐 그림을 그리도록 주목했다는 사실은 여러 점에서 시사 하는 바가 많다. 왕실의 의도는 그 궁궐의 옛 모습을 그려 남기고자 하는 의도와 그것의 권위, 조선왕조의 상징인 경복궁을 그림에서 되살림으로 그것을 보존하고자 하는 간절한 주술적 의도도 없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 이런 주문을 받은 안중식의 심사는 매우 처절하고 한편 복잡하였을 듯하다. 기실 그는 왕조가 쇠망하고 있는 것을 눈으로 감지하고 있었던 터이다. 그림에 백악은 뚜렷이 서 있으나 근정전 경회루, 근정문 등 궁궐 전체는 깊숙이 잠겨있다. 아침이긴 하지만 궁궐 앞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가 이 작품 직전에 그린 ‘영광풍경’에 여럿이 등장하는 인물배치와는 여실히 대조적이다. 여름에 그린 그림에 굳이 봄날 아침을 그린 것은 분명 당나라 두보의 시 ‘춘망(春望)’을 마음에 두고 그렸으리라.

나라가 망했어도 산하는 남아 도성에 봄이 와서 초목만 우가 졌네.(부분)

그러나 나의 주목을 끄는 부분은 여름과 가을에 그린 두 그림에서 광화문만이 유별나게 그림의 중심축에 있고 모두 정면을 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내부 궁궐들은 좌측에서 본 시각 우측에서 본 시점에서 그렸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본인은 이 그림이 궁궐 전체 풍경을 그리고 있지만 광화문에 집중된 초점을 맞춘 그림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싶다. 바꿔 말하면 광화문이 해체될 것을 예상하고 그것이 복원될 때를 상정해서 아주 치밀하고 정확하게 외형적 설계도처럼 그리고 있는 점을 상기시키려는 것이다.
무엇보다 안중식은 3개의 홍예문 크기 비율을 비례에 맞추어 그리고, 14층 화강암 육축의 층수도 실제 14개 층을 자상히 그렸다. 그 육축도 밑의 3계층 돌이 매우 크고 나머지 동일한 사이즈의 돌로 11층을 같게 그렸다. 13번째 층에 박은 6개의 이수형 돌 물흐름통 또한 실제 숫자에 맞추었다.
경복궁 안의 수목들이 봄의 생기를 드러내고 있지만 어쩐지 힘없이 무성한 잡초처럼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 화가의 고뇌가 함께 서린 작품이라 하겠다.


참고자료

이구열, ‘한국근대회화선집, 한국화 1, 안중식’, 금성출판, 1990
우리 근대미술 뒷이야기, 돌베개, 2005
박동수, ‘왕실을 위해 그린 안중식의 그림들’, 이성미 외, 조선왕실의 미술문화, 대원사, 2005
김정동, 남아 있는 역사, 사라지는 건축물, 대원사, 2000
신영훈, 김대벽, 조선의 정궁 경복궁, 조선일보, 2003
김은호 서화 100년, 중앙일보, 1981
야나기 무네요시(심우성 역),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제, 2002
문화재청, 사진으로 보는 경복궁, 문화재청, 2006
경복궁 광화문 연역, 참고자료 (2007.4)

자료에 협조해 주신 문화재청 하선웅, 김영철 사무관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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