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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이상원의 <안중근의사 영정>(1970)

이석우

역사를 일깨우는 그림(21)
안중근, 생명 던져 의(義)를 이룬 평화주의자


안중근은 행동하는 사상가이자 민족의 등불이다. 그가 주창한‘동양평화론’은 오늘의 국제질서가 가야할 길을 환하게 밝혔다. 안의사가 사형집행 되던 1910년 3월 26일 아침, 하늘은 짙은 비구름을 머금고 봄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다. 11회에 걸친 심문과 공판 과정에서 그는 당당하였고 일제 법정에서 일본법으로 재판 받는 것이 부당함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등박문을 죽인 것은 한국독립전쟁의 한 부분이요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은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된 때문이다. 나는 개인 자격으로 이 일을 행한 것이 아니요 대한국 의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위해서 행한 것이니 만국공법에 의하여 처리하도록 하라”
사형이 구형 되었을 때 중근의 어머님은 더 이상 공소하지 말 것을 당부하면서 이런 말을 아들에게 전했다.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는 것을 불효라고 생각한다면 이 어머니는 웃음거리가 된다. 너의 죽음은 한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공소를 한다면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안의사는 이등을 죽일 수 밖에(1909.10.26) 없었던 이유 15개조를 명쾌히 지적하였다. 민비시해, 고종폐위, 동양평화파괴, 5조약과 7조약 강제체결, 무고한 국민학살, 대한군대해산 등은 역사적 사실로 하나도 다름이 없다. 안중근은 그 점에서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의로운 행동자이며 더구나 그는 평화주이자이다. 그가 사형집행 되기 전 집필한‘동양평화론’은 서양의 제국주의에 대항해서 동양의 한·중·일 삼국이 자존의 독립을 지키며 서로 협력하여 평화를 유지하고 경제적 번영을 이루어가자는 주장이었다. 구체적인 방안으로‘동양평화회’를 조직하고 여순을 영세 중립지로 하여 거기에 각국 대표들을 파견하며 공동은행 설립, 공동화폐를 발행하며 평화군도 편성하자고 하였다.
<이상원이 그린‘안중근 영정’(120호 : 가로 130.3cm x 세로 193.9cm)이 남산에 있는 안중근 기념관에 봉안되어 있다는 기록이 있어 찾아갔으나 영정 대신 사진이 걸려 있었다. 관계자에 따르면 2001년 기념관 개수 후 전시위원들이 영정대신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1970년 개관에 맞추어야하는 그림은 1년여나 걸렸다. 철저한 고증을 위해 안의사의 며느리 등 직계가족 뿐 아니라 당시 독립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이 참여 했으나 의견 일치가 쉽지 않았다. 이목구비의 선, 끊어진 손가락 부분 등 이십여 차례나 다시 손을 보아야했다. 작가가 가장 고심했던 부분은 안의사의 영웅적 강렬한 이미지를 어떻게 살리느냐 하는 것이었다. 우선 저격대상을 응시하듯이 약간 옆으로 얼굴을 돌리고 그 보는 쪽의 방향과 같게 단지 손을 앞으로 내세워 권총을 겨냥 하는 듯한 자세를 취했다. 눈망울을 또렷이 하고 눈썹을 짙게 한 것도 결의 강한 표정을 드러내려는데 있는 것 같다. 안의사가 목 주변에 하얗게 세운 목 칼라와 검은 신부복 차림을 하고 있음이 눈에 띈다. 이는 유족들의 주문에 따른 것 이라고 작가가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기념관 개관일에 박대통령이 이 영정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고 그 옆에 노산 이은상, 저 뒤에 작가 이상원의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있다. 역사란 이 순간에도 이루어지고 있구나. 박대통령도 노산도 세상을 떠나고 삼십대 중반에 이 그림을 그린 이상원도 70대를 훨씬 넘어 섰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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